[제9회 제주4·3평화문학상 당선시]
천지 말간 얼굴에 동백꽃물 풀어
김형로
설문대할망 다리를 놔 줍서
너럭치마에 고래실 흙 덩실덩실 떠 담아
남해나 동해 숨텅숨텅 놓아 줍서
나 백두산 마슬 다녀올라네
관덕정에서 북청이나 단천 어디쯤
다리 좀 놔 줍서 설문대할망
거기서 갑산 삼수 거쳐
영등할망 부럽지만 나 걸어갈라네
산에 산에 핀 꽃들 다시 볼라네
엎드려 꽃과 함께, 산사름 함께 며칠 지내다가
백두산 전에 고하겠네
큰넓궤 지슬과 정방폭포 총성을
정뜨르 안경과 알뜨르 녹슨 전선을
얽은 손과 부르튼 발을
그 위로 떨어지던 핏빛 동백꽃을
한몸으로 왜 못사나
훠이 훠이 날려 주고 오겠네
그해 남쪽 섬
붉지 않은 바위 셔낫던가
돌아앉지 않은 꽃 이서낫던가
설문대할망 다리를 놔 줍서
한라에 봉화 오르면
웃밤애기 알밤애기 오름마다 불을 받고
벌겋게 섬이, 달마저 붉게
백두에도 불 오르는 통일의 그날
호랑이도 곰도 느영 나영 춤을 추고
사름이 사름으로 살아지도록 신명나게 놀아봅주
좋은 싀상 우리 같이 살아도 봅주
설문대할망 어서 다리부터 놔 줍서
울어도 울어도 못다 운 노래 한 자락
가심에 박힌 돌멩이 들어내듯
검은 땅 검은 숨 붉게 울어 볼 거네
천지 말간 얼굴에 동백꽃물 가만 풀어 볼 거네
[심사평]
예심 위원회가 본심에 올린 추천작은 모두 80편(8명)이었다. 본심 위원회가 최종적으로 논의하기 위해 원탁 위에 올려놓은 작품은 5편(5명)이었다. <도령마루 꽃무릇> <북받친밭> <목시물굴의 별> <천지 말간 얼굴에 동백꽃물 풀어> <백비>(이상 접수 순). 심사 기준에 대한 본심 위원들의 이견은 이내 좁혀졌다. 작품의 완성도를 외면하지 않되, 작품에 내재된 문제의식과 파급력에 주목하자는 것이었다. ‘제주4·3평화문학상’이 올해로 9회에 접어들었고 이제 새로운 10년을 바라보는 만큼 이번 수상작이 문학상의 위상을 새로 정립하는데 시사점을 제공할 수 있기를 기대해보자는 것이었다.
본심에 올라온 추천작 대부분이 70여 년 전 비극을 서정적 언어로 재현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추천작은 저마다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많은 작품이 소재(현장)주의, 선/악 이분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물론 약자의 편에 선 분노와 진혼은 정당한 것이다. 발굴과 폭로 또한 문학의 핵심 역할 중 하나다. 하지만 어느 한쪽으로 경도된다면 그것은 문학성으로부터 멀어질 수 밖에 없다는 지적을 받을 수 있다. “인류의 보편가치인 평화와 인권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수준 높은 문학작품의 출현을 기대”한다는 문학상 공모 취지를 떠올린다면 더더욱 그렇다. 4·3문학이 ‘애도의 시간’을 넘어, 제주와 한반도를 넘어,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창조적 시간’으로 성숙해야 할 때다. 수렴에서 확산으로, 특수에서 보편으로, 닫힌 세계에서 열린 세계로 전환해야 할 시점이다.
최종 후보작 중에 위와 같은 기준에 전적으로 부합하는 작품은 눈에 띄지 않았다. <도령마루 꽃 무릇>과 <북받친밭> <목시물굴의 별>은 당시 현장을 재현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않았고 <백비>는 70여 년 세월을 반추하지만 미래로 열린 상상력이 부족했다(이번 심사 기준을 들이대지 않는다면 최종심에 오른 이 작품들은 저마다 빼어난 작품이다. 일반 문예지나 시집에 발표되었다면 독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을 것이다).
결국 <천지 말간 얼굴에 동백꽃물 풀어>가 남았는데 앞에 거론한 후보작과 크게 달랐다. 제목이 환기하듯이 제주 4·3과 제주 설화를 다리(橋) 삼아 ‘한라’와 ‘백두’의 만남을 주선하는 ‘통일 서사’의 전개가 활달했다. 함께 보내온 다른 작품도 시야가 넓었다. 4·3의 야만성을 에둘러 표현하면서 위안부, 세월호 문제까지 관심사가 폭넓었다.
심사위원들은 <천지 말간 얼굴...>이 심사 기준을 온전하게 충족시키지는 않지만 여타 응모작과 견줄 때 주제 의식과 상상력에서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이와 같은 미덕이 향후 ‘제주4·3평화문학상’은 물론 4·3문학의 지평을 확대하는데 기여할 바가 적지 않으리란 판단에서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심사위원장 이하석, 심사위원 김광렬, 이문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