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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동행한 에녹
창세기 5:3-5, 18-24
3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4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
18 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19 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0 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21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3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우리는 지난 번에, 가인의 후예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맡기신 문화 사명을 이루면서도 그들은 하나님을 대항하기 위해 그 일을 하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가인의 후예인 불신자들은 마귀처럼 반역 정신에 물들어 하나님을 대항하고자 과학을 발전시키고 부를 쌓고 문학을 하며 문화를 만들어갑니다. 그들은 그러면서 하나님에게 도전해 보려는 바벨탑을 쌓지만 결국 그들의 모든 수고는 언제나 변함없이 실패로 끝납니다. 이것이 죄 많은 인류의 역사였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불신자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반역하며 바벨탑을 쌓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가인의 6대손 라멕은 에녹성에서 하나님을 노골적으로 대항하는 사회를 형성하고 하나님을 조롱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언약 결혼 제도를 무너뜨리고 인간의 색욕과 권력과 교만을 세우는 일부다처제를 도입했습니다. 그 후 그의 후손들 역시 하나님과 완전하게 무관한 불신 사회를 형성하였습니다. 그러나 노아의 홍수와 더불어 가인이 세운 에녹성과 불신 사회는 완전하게 멸망하여 지옥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5장에 나오는 셋의 혈통은 전 인류를 멸망시킨 노아의 홍수를 통과하고 지금까지 여러분에게 이어졌고 또한 여러분을 통해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며 마침내 영원한 새하늘과 새땅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창세기 5장 기사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셋의 족보는 문화를 발전시켰다는 기사는 없고 단 한 가지를 향해 각 세대가 그 다음 세대로 무엇인가를 넘기며 보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한 가지는 바로 뱀의 머리를 깨뜨릴 여자의 그 후손이 오실 길을 계속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셋의 족보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드러납니다. 즉, 여자의 그 후손을 준비하는 가장 중요한 일로 인해 성경은 그들의 다른 활동에 관해서는 침묵합니다.
이로 보건대, 가인 족속의 정신이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과 자율성이라면, 셋 족속의 정신은 그의 아들 에노스로 이어져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4:26)는 구절로 요약됩니다. 이는 그들이 주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을 가장 소중히 여기며 주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며 여자의 그 후손, 즉 메시야를 믿고 기다렸음을 의미합니다.
신기한 것은 하나님을 떠난 불신자인 가인의 족보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셋의 족보에 각각 한 명씩 두 명의 라멕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두 라멕 모두 각 족보에 등장하는 유일한 인물로서 우리 눈에 띕니다. 가인의 6대손 라멕은 오만과 교만 가운데 하나님을 조롱하고 주께 도전하는 노래를 부릅니다. 하지만 셋의 8대손 라멕은 슬픔 가운데 소망을 바라봅니다.
이미 우리가 다룬 것처럼 가인의 6대손 라멕은 창세기 4장 23-24절에서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창 4:23-24).
그러나 셋의 8대손 라멕은 그가 낳은 아들을 노아라고 이름을 지으며 이렇게 노래합니다.
"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창 5:28-29).
셋의 8대손 라멕의 말에서 우리는 경건한 라멕이 에덴 동산의 영광을 아담으로부터 듣고 죄로 인해 저주 받은 당시 시대를 반성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라멕은 아담과 56년을 함께 지냈는데 이는 그가 아담과 셋과 에노스와 게난과 마할랄렐과 야렛과 에녹과 므두셀라와 함께 살아가는 특권을 누린 것을 말합니다. 그는 그의 첫 조상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경험했던 영광스런 행복을 그들에게서 직접 들으며 인류에게 내려진 저주의 고통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면서 그 저주에서 구원을 가져올 약속의 그 씨를 더욱 갈망하며 위로를 고대했습니다. 이때 등장한 그의 씨가 바로 노아였던 것입니다. 사실 라멕에게 있어서 노아의 등장은 여자의 그 후손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물론 노아는 여자의 그 씨, 즉 메시야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셋의 후손이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 언약의 주인공을 고대했을지는 라멕의 애가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편, 가인의 6대손 라멕에 대한 진정한 대응 인물은 셋의 6대손 에녹입니다. 흥미롭게도 가인의 후손 라멕과 셋의 후손 에녹은 모두 아담의 7대손입니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이 천년 가까이 살았던 사실을 염두할 때 그 둘은 동시대에 살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둘은 극과 극을 보여줍니다. 가인의 후손 라멕은 하나님을 노골적으로 대적하는 가장 반항적인 정신을 보여주는 반면, 셋의 후손 에녹은 하나님을 향해 가장 경건한 정신을 보여줍니다. 또한 하나님을 거역하는 라멕의 공허한 자랑은 하나님과 조용히 동행하는 에녹의 겸손과 대조를 이룹니다.
그리고 이 둘의 결과는 가인의 후손 라멕은 노아의 홍수로 영원히 멸망 당한 것이고, 셋의 후손 에녹은 부활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즉,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다가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로 옮겨졌습니다.
“에녹은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3-24).
즉,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의 삶을 살던 에녹은 죽음을 맛보지 않고 계속 하나님과 영원히 동행하는 상태에 있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 얼마나 엄청난 축복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간 존재의 최고의 목표와 최상의 상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담이 에덴에서 누리던 행복의 골자였습니다. 장차 새하늘과 새땅의 본질 역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실제로 성령 안에서 영원히 동행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안에는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와 계십니다. 이는 부활 생명이 우리에게 있다는 뜻이요, 에녹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도 우리의 가장 깊은 영역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사실을 믿음으로 의식하고 살아간다면 우리 역시 에녹과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가장 복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에녹 역시 우리와 똑같은 죄인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기 시작한 것은 그가 예순 다섯 살에 므두셀라를 낳은 후부터였습니다.
"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였더라"(창 5:21-22).
자,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려고 합니다. 창세기 5장에 들어오면 그 장의 기록은 마치 부고란과 같은 사망 기사처럼 느껴집니다. 5절, 8절, 11절, 14절, 27절, 31절 등, 죽고, 죽고, 죽었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살다가 호흡이 끊어져 죽음으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5장에서 단 한 사람, 특이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마치 죽음이라는 사막에 핀 희귀한 장미처럼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23절을 보세요. “그가 살았더라.” 바로 에녹입니다.
에녹에 대해 히브리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히브리서 11장 5절입니다.
“믿음으로에녹은죽음을보지않고옮겨졌으니하나님이그를옮기심으로다시보이지아니하였느니라그는옮겨지기전에하나님을기쁘시게하는자라하는증거를받았느니라.”
에녹은 죽음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하늘로 옮겨졌습니다. 에녹은 마치 계시록 14장 4절에 기록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와도 같이, 또는 대추수 때의 휴거처럼 순식간에 영광의 부활체로 변화하는 것같이, 하나님 나라의 이미와 아직을 다 누리는 새 언약 시대의 복된 성도들과 매우 유사합니다. 즉, 그는 죽음을 거치지 않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지금 우리는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영 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습니다. 에녹도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이제 장차 어느 날 하늘이 열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 가운데 이 땅에 오실 것입니다. 그 날에 우리 성도들의 몸이 변화하여 공중에서 주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 위대한 사건을 오늘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로 승천한 에녹이 예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위대한 에녹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은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이 땅에 살 때도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그는 죽음을 보지 않고 곧바로 하늘로 올라감으로써 주와의 동행은 단 한 순간도 끊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미가 6장 8절을 보니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과의 동행인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이 아니겠느냐”(미 6:8).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얼마나 큰 영예이며 얼마나 큰 기쁨입니까? 특히 하나님의 아들이며 우리 인류의 구주이신 주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은 얼마나 큰 영광이며 기쁨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신앙 생활은 다름 아닌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동행입니다. 만일 예수님과의 동행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 생활은 위선이며 허상입니다. 여러분은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실제로 만나며 그분과 동행하십니까?
주 예수님과의 동행은 주일에 예배하러 교회 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예배하러 올 때는 삶의 열매를 가지고 오셔야 합니다. 즉, 일주일 내내 주 예수님과 동행하다가 그 한 주간의 열매를 주일에 교회에 와서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예배입니다. 이때 예배는 그리스도 안에서 주의 백성이 다함께 하나님과 하나가 되며 연합하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과의 동행은 주일 날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평상 시에 세상에서도 진행되어야 합니다. 예배하는 시간의 삶의 모습과 예배 후 가정과 세상에서의 삶의 모습이 달라서는 안 됩니다. 만일 다르다면 그 삶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아닙니다. 우리는 날마다 매 순간마다 주 예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일년 365일, 주님과 동행해야 하며, 하루 24시간 언제 어디서든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어떤 것입니까? 즉,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은 어떤 삶이어야 합니까?
첫째,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삶입니다. 창세기 5장 24절을 보면,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1장 6절을 보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라고 선언합니다. 즉,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이는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은 어떻게 생겨납니까? 에녹은 어디서 믿음을 얻었습니까?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 믿음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믿음이 어디서 오는지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믿음이 어디서 어떻게 생겨나는 것입니까?
다같이 로마서 10장 17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 구절은 여러분이 암기하셔야 합니다. 로마서 10장 17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즉, 그리스도의 말씀이 없이는 그 누구도 믿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때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대단히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원어로 보면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말씀’이라는 원어가 로고스가 아니라 레이마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정보입니다.
즉, 믿음은 그리스도의 레이마에서 생겨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여러분 개인에게 성령으로 따로 주시는 복음의 말씀으로부터 믿음이 생겨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 가운데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개인적으로 주시는 레이마, 즉 살아있는 말씀에 의해 믿음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즉, 여러분 각 개인의 삶에 하나님의 로고스가 적용될 때 각 개인의 심령 가운데 체험을 통해 믿음이 생겨난다는 뜻입니다. 특히 공예배 때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설교자의 설교를 겸손히 듣는 자에게는 반드시 믿음이 생겨납니다. 그것이 (디아 흐레이마토스 크리스투), 즉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인하여 믿음이 생겨난다는 뜻입니다. 요약하면, 로고스인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하나님의 음성이 각 개인에게 들릴 때, 이는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닫게 하심으로 우리 각 개인에게 믿음이 생겨나게 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의 레이마, 곧 그리스도의 말씀이 없으면 믿음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생겨나기 위해서는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성령 안에서 읽고 기도하며 깨달아야 할 것이요, 이처럼 예배 시간에 주의 종을 통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에녹의 믿음 역시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왔습니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사실 에녹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였습니다. 유다서 14절을 보기 바랍니다.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유 14-15).
에녹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만의 천사들과 함께 재림하는 장면을 미리 내다보았습니다. 에녹이 예언하며 선포합니다.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도다.” 이처럼 에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한편, 오늘 본문을 보면, 에녹은 아담과 동시대를 살았던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에녹이 살아있을 때 아담 역시 여전히 생존하고 있었습니다. 아담은 에녹이 태어날 때 622 살이었습니다. 즉, 에녹이 태어날 때 아담은 한창 젊은 시절이었습니다. 아담은 930세에 사망했으니 그는 에녹이 태어난 후 308년을 더 살았습니다. 즉, 아담과 에녹은 약 308년을 함께 지냈습니다.
에녹이 어릴 때 어느날 아담을 만나 이런 대화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아담 할아버지.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에덴에서 쫓겨나기 전, 에덴에서의 삶은 어떠했나요? 하나님과 함께 에덴 동산에서 거닐 때 그 기분은 어떤 것이었나요?”
아담은 그 질문을 듣고 약 6백년전의 기억을 더듬었을 것입니다. 그는 한때 하나님과 에덴 동산에서 거닐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늘 아담을 찾던 때가 있었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창세기 3장 8절을 보면,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평소에 아담과 늘 에덴 동산을 다니셨다는 뜻입니다.
아담은 과거를 기억하면서 그 눈에 눈물이 보이며 흐느끼며 대답했을 것입니다.
“에녹아! 우리는함께걸었단다. 하나님은내곁에서함께걸었단다. 우리는함께높은산에올랐고, 함께최초의맑은공기를마시며동물들을바라보면서함께웃고대화를나누었지. 우리는참으로아무런막힘이없는깊은교제를나누었단다. 나는우리인간들을향한하나님의원대한계획을들으며온우주가에덴처럼될그날을바라보았어. 물론그날이이르기위해서는내가선악과를먹는죄를짓지말고부지런히주께서맡기신사명을감당했어야했건만…이못난할아버지가그렇지못했단다. 아, 죄와저주가들어오기전에에덴동산에서하나님과동행하던그아름다운순간들은영원히잊지못할꿈만같은시절이구나. 바로낙원이지. 바로그곳이천국이었단다. 다행히도하나님께서나를용서하셔서지금은오실메시아를믿음으로바라보며하나님을영적으로만날수있지. 그러나그분의영광을직접보며그분과동행할날이올것이다. 그날은나를속였던그마귀가영원히멸망하는날이되겠지. 너는결코마귀에게속지말거라.”
이처럼 에녹은 어릴 때부터 아담으로부터 하나님에 대해 들었으며 어린양의 피로 제사를 지내면서 복음을 알아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후 그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즉, 에녹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자이며, 그 말씀을 개인적으로 듣고 믿었으며, 이에 그는 하나님을 아는 하나님의 선지가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에녹은 장차 오실 메시야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 말씀 전부를 통해 에녹처럼 말씀으로 차고 넘치게 되더니 그 말씀으로부터 믿음이 장성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깊게 알고 그분과 대화를 나누고 그분과 함께 느끼며 함께 울고 함께 생각하면서 주와 동행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둘째로, 하나님과의 동행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입니다. 동행은 단지 함께 걷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걸으며 대화를 나누며 사랑의 교제를 나눔이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사실 함께 걷는 동행은 두 인격 사이의 가장 친밀한 교제를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까?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그 귀한 보혈을 흘리시며 여러분을 위해 죽으셨습니까? 왜 여러분이 속량함을 받아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었습니까? 오늘 왜 이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구원 받은 이유에 대해 답변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라고 구원 하셨다고 대답합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없더라도 수만의 천사들로부터 섬김을 받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의 섬김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지적으로 뛰어나라고 구원하셨습니까? 그럴 수 있어요. 하지만 신학적으로 뛰어난 자들 중에 하나님을 대적하며 배도한 자들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수많은 이단의 괴수 중에는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바울처럼 지적으로 뛰어난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의 피로 구원하신 가장 중요한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 목적은 바로 하나님과의 교제, 즉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입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분과 함께 진정한 대화와 교제를 나누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과 동행한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주님과 전혀 무관한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이들은 좁은 길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단 한번도 진실한 인격적인 교제를 가진 적이 없이 단지 종교를 사용하여 돈벌이를 하고 종교 놀이를 하던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어떻게 해야 주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를 나눌 수 있는지 그 길을 알려주지 못합니다. 즉, 십자가의 길을 깨닫지 못하였으니 남들에게도 십자가의 도를 알려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수많은 유사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의 도를 모른채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착각하지만 그들은 실제로 단 한번도 주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으로 친분을 나눈 적이 없습니다. 즉, 그들은 실제로 하나님과 동행한 적이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악한 영 마귀와 동행하였을 것입니다.
아무튼 하나님과의 동행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깊은 교제에 이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구원 받은 목적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마르다와 마리아 사건이 알리려는 메시지가 바로 이것이 아니겠습니까? 누가복음 10장을 보면 마르다는 예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마리아는 예수님 발 앞에서 그분과 교제를 나누고 있습니다. 이때 마르다가 일은 안 하고 서로 교제만 하는 예수님과 마리아를 꾸짖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 한 가지만으로 족하니라 마리아는 오직 이 한 가지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참조, 눅 10:41-42)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하나님 아버지께 드린 간절한 기도입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1-22).
이는 주께서 구원 받은 백성들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은 깊은 사랑의 교제인 것을 분명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 1:3).
여러분은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와 실제로 인격적으로 친밀한 교제를 하십니까?
세째, 하나님과의 동행은 성실하고 신실하게 변함 없이 꾸준하게 함께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믿음의 삶이며, 교제하는 삶이며, 또한 신실한 삶입니다. 무엇에 신실합니까? 주님과 동행하는데 신실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1-2년씩 주님으로부터 멀어졌다가 다시 돌아옵니다. 어떤 사람은 1-2개월 자기 멋대로 살다가 가슴이 답답하면 주께로 돌아옵니다. 어떤 사람은 6일 동안 세상에서 살다가 주일이 되면 그때야 예배 드리러 돌아옵니다. 그러나 주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꾸준하게 동행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5장 22절을 보니 에녹은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여기서 300년을 동행했다는 것은 날마다 동행했다는 뜻입니다.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기 전에는 하나님과 동행한 적이 없었다가 이제 가끔씩 동행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는 므두셀라를 낳기 이전에도 하나님을 믿으며 순종했지만, 므두셀라를 낳은 이후에는 단 하루도 빠짐없이 언제나 순간마다 하나님과 철저하게 동행하였다는 뜻입니다.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은 이후 어려운 때나 힘든 때나 형통할 때나 어둠의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든 때나 한결같이 주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꾸준하고 신실하게 동행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과의 동행을 위해 300년 동안 수도원에 들어간 것도 아닙니다. 그에게는 가족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그는 직업도 있었으며 자녀들과 손주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일상 생활에서 에녹은 믿음으로 철저하게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 기간은 사회적으로 지독하게 어두운 때였습니다. 죄악이 난무하고 악인들이 점점 많아지는 때였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며 배도하는 세력이 기승을 떨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인간들이 극도로 타락하여 마침내 하나님께서 심판할 수 밖에 없었던 그러한 시대에 살았습니다.
에녹은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보다 훨씬 더 열악한 시대에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시대의 상황을 핑계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어렵다고 말하지 않기 바랍니다. 그 이유는 에녹은 지금 우리 시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그러한 부패한 시대를 살면서 하나님과 동행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앞으로 이 시대는 노아의 때처럼 더욱 부패하며 더욱 배도할 것입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마 24:37-39)
즉, 지금보다 더욱 부패한 시대가 찾아올텐데, 그때가서 여러분은 “아, 사회가 썩었으니 나는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힘들어서 관두겠습니다”라고 말하겠습니까? 오늘이라는 날에 주님과 동행하지 못한 것에 대해 세상의 부패를 핑계대지 않기 바랍니다. 결코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 어떤 상황에서도 오직 주님과 동행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오는 생수의 강입니다. 즉, 성령의 능력입니다. 성령의 은혜와 평강과 생명력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구하며 이 세상을 이기면서 주님과 동행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받으십시오. 그러면 모든 상황을 이기고도 남는, 심지어 그 상황이 적그리스도가 온 세계를 다스린다고 해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이러한 복음의 능력에 의해 언제나 신실하게 주님과 동행하기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가 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믿음의 삶인 것입니다.
넷쩨, 하나님과 동행하면 반드시 상이 따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우리 하나님은 믿음으로 행하는 자에게 언제나 상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자에게 주님은 선물을 주십니다.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 때문에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겨졌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에녹에게 주신 상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을 믿고 그분을 찾는 자들에게 반드시 상을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므두셀라의 출생은 에녹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철저하게 동행하게 된 계기를 주었습니다. 그 계기는 무엇일까요?
어느날 에녹이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작은 옷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왜옷을만드는거야?”
“이리 와 보세요.”
배를 만져보니 아기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며칠 후 에녹은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 말씀은 엄중한 말씀이었습니다. 그 후 에녹은 아이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에녹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에 따라 그 이름을 므두셀라라고 하였습니다.
므두셀라가 누구입니까? 성경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입니다. 그는 969세를 산 자로서 인류 가운데 가장 오래 산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이름의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므두셀라! “그가 죽을 때 그 일을 보게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그 일이 무엇입니까? 대홍수입니다.
에녹은 선지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시기 전에 선지자에게 미리 알리십니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암 3:7).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심판하시기 전에 선지자 에녹을 통해 그 심판을 알려주셨습니다. 에녹은 그 메시지를 받은 후 아기를 낳고 그 아이의 이름을 므두셀라라고 지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메시지는 “네가 낳은 장자가 죽을 때 온 세상에 심판이 임할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에녹은 그 아이를 므두셀라라고 하였습니다.
에녹은 므두셀라가 살아가면서 감기라도 걸리면 아마도 크게 긴장했을 것입니다. 그는 ‘이 아이가 죽게 되면 온 세상에 심판이 임할 것이다. 따라서 이 땅에 거하는 인간들 가운데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 받을 수 있으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다. 그렇다면 므두셀라가 더 오래 살도록 기도하자’라고 생각하며 므두셀라가 더 살기를 기도했을 것입니다.
왜 므두셀라가 인류 가운데 가장 오래 살게 된 사람이 되었을까요? 이에 대한 답변을 베드로가 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 사랑으로 인한 오래참음을 보이신 것입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에녹의 시대는 악한 시대였습니다. 배교의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을 조롱하던 시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 구원의 길을 배척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장 오래 참으셨습니다. 그래서 므두셀라는 인류 가운데 가장 오래 살았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므두셀라가 죽자, 주의 경고대로 곧바로 대홍수가 임하였습니다.
본문 25절을 보면 므두셀라가 187살에 라멕을 낳습니다. 28절과 29절을 보면 라멕은 182세에 노아를 낳습니다. 187과 182를 더하면 369 입니다. 즉, 므드셀라가 장손 노아를 보게 된 것은 그가 369세가 되던 때입니다.
이제 창세기 7장 11절을 보기 바랍니다.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창 7:11-12).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므두셀라는 몇 살이 됩니까? 969세입니다. 즉, 므두셀라가 죽은 그 해에 대홍수가 온 세상에 임한 것입니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성경 예언의 정확성, 하나님의 오래참으심과 사랑,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의 확실성과 그분의 거룩한 진노의 엄위가 오늘 기사에 다 담겨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를 향해서도 하나님의 자비는 댐처럼 견디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부패과 교회의 배도가 극에 이르면 하나님의 자비의 댐은 제거되면서 거룩한 진노의 물결이 온 세상을 휩쓸 것입니다. 바로 자비의 댐이 제거되는 그 날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입니다.
저는 그 날이 언제인지 모르지만 아마도 속히 이를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 이유는 사도 요한이 2000년 전에 속히 이르겠다고 한 그 날이 아직까지 지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까지 그 날이 지연된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곧, 므두셀라가 가장 오래 산 것처럼, 하나님은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 얻기를 원하시며 오래참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에녹이 왜 므두셀라를 낳은 후에 하나님과 동행을 시작했습니까? 네,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정확하게 보았기 때문입니다. 에녹은 이제 곧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언제라도 임할 수 있다고 믿으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과의 철저한 동행을 다짐하고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간이 300년이 되자 하나님께서는 에녹을 너무나 기뻐한 나머지 그가 죽음을 맛보지 않고 곧바로 하늘로 들어가도록 최고의 영광을 누리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 시대의 인본주의는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며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을 제거합니다. 따라서 지옥과 불못에 대해 농담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하고 진실한 말씀인 성경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를 가장 중요하게 둡니다. 그 이유는 그분의 예언은 농담이거나 사상이거나 철학이거나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반드시 그분께서 경고하신대로 행하실 것입니다.
지옥이 없다고요? 아무리 인간이 믿지 않는다고 해도 지옥에 떨어지는 날은 곧 옵니다. 바로 그들이 죽음을 지나는 날입니다. 불못이 없다고요? 온 인류가 믿지 않아도 불못은 있습니다. 불신자들은 예수님 재림하실 때 흉측하고 수치스러운 몸을 입고 부활하여 영원한 불못에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우리가 주님과 철저하게 동행하게 되는 동기가 될 것입니다. 영원한 심판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우리의 말 한마디, 우리의 동기 하나 하나, 우리의 행동 하나 하나가 전부 우리 주 그리스도의 평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후 합당한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지 아니한 자들은 그들의 죗값에 따라 영원한 저주를 받게 될 것입니다. 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주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함께 체험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주를 경외함과 함께 큰 감사와 사랑으로 주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에녹은 첫아들 므두셀라를 얻고 그의 인생이 크게 변화하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첫아이가 태어날 때 크게 변화합니다. 방탕하던 아버지도 아기를 얻은 후에 철이 들게 되면서 삶이 변화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에녹은 일상적인 신앙 생활을 하였지만 하나님의 레이마와 함께 므두셀라를 낳게 되면서 그는 하나님과 철저한 동행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주께서는 특이한 사건들을 여러분에게 허락하십니다. 자녀를 주시기도 하며 새로운 만남을 허락하시기도 합니다. 병에 걸리게도 하고 사업이 망하게도 합니다. 아무튼 특별한 사건과 함께 그리스도의 레이마를 주십니다. 즉, 성령께서 복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이때 주님이 가장 원하시는 것은 주님과의 동행입니다.
“얘야, 이제나와동행하자. 나를믿으렴, 나와교제하자. 내게충실하기바란다. 이제나만바라보면안되겠니.”
이처럼 에녹이 므두셀라를 얻게 된 것이 그가 새로운 삶을 시작한 계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께서는 동생 나사로의 죽음 때문에 울고 있는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즉, 새언약 시대에 신자는 부활 생명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영생을 얻었습니다. 영생은 죽음의 효력이 전혀 임할 수 없는 생명을 말합니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신약 성경에 기록된 동일한 족보는 창세기 5장의 족보와 다르게 죽음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그 위는 노아요 그 위는 레멕이요 그 위는 므두셀라요 그 위는 에녹이요 그 위는 야렛이요 그 위는 마할랄렐이요 그 위는 가이난이요 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눅 3:36-38).
왜 그렇습니까? 그의 백성을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신구약의 모든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이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속량하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을 부으심으로 부활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죽음은 모든 신자들에게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히 2:14-16).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 15:55-56).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태어남과 삶이 죽음으로 마치지 않으려면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당장 동행하기 바랍니다. 셋의 6대손 에녹이 가인의 6대손 라멕 시대에 철저하게 주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면 이미 십자가 속량을 이루시고 성령을 보내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더욱 쉽고 더욱 분명하고 더욱 풍성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미 부활 생명을 얻은 자들로서 죽음은 다만 우리에게 하나님 보좌 앞으로 들어가는 입구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부활 생명으로 살 뿐더러 우리의 육체적 죽음 이후에도 주의 재림과 함께 실제 육체의 부활을 누리게 될 날을 소망하며 살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한 상태이지만 여전히 어둠의 세력은 발악하는 시대입니다. 아직은 뱀의 씨와 여자의 씨가 공존하고, 멸망으로 마칠 이 시대와 성령의 영원한 시대가 겹쳐 있고, 죄로 가득한 이 땅과 죄가 전혀 없는 하늘이 대립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에녹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철저하게 동행할 수 있습니다. 더 늦기 전에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우리 주 창조주 하나님과 동행하기 바랍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통해 죄 사함을 확신하고 지금 영원히 살아계신 중보자 우리 주 부활 승리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면서 언제나 주 하나님과 동행하는 축복된 에녹들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pyright@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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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지혜가 깊은 사람은 자기에게 무슨 이익이 있음으로 해서 누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군요,
누구를 사랑한다는 그 자체 속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 이랍니다.
어머니에 조건 없는 사랑, 우리 그런 마음으로 오늘도 조건 없이 누구를 사랑하는 하루 되시길 기원합니다.💖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
에녹을 통하여 주 예수의 신실성을 그리스도와 함께 이스라엘 민족 야곱이 본토땅 벧엘을
통하여 성전의 촛대를 완성하심이라 요한계시록3:1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