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구 시인의 시집 『고함쳐서 당신으로 태어나리』
약력
임성구
1967년 경남 창원 출생.
1994년 『현대시조』 등단.
시조집 『복사꽃 먹는 오후』,
『혈색이 돌아왔다』, 『앵통하다 봄』,
『살구나무죽비』,
『오랜 시간 골목에 서 있었다』.
현대시조 100인 선집 『형아』가 있음.
가람시조문학상, 오늘의시조문학상,
성파시조문학상 등 수상.
시인의 말
고함칠 용기보다 열망만 가득하다.
오늘의 열망을 꾹꾹 다져 심는 내일은,
더 푸르게 고함쳐서 세상의 중심에 서리라.
2024. 7월
임성구
힘센 과장법의 밤
알 품은 아내 방은 꿈나라에 이미 가 있고
딸 방은 별나라에서 백마 탄 남잘 만나고
아들은 달빛 평야 한가운데, 돈키호테처럼 달리고
잠들지 못한 거실은 시인의 습작 바다
밤 2시 서로 다른 주제를 펼쳐 놓고
뜨겁게 토론하는 방, 그 열기가 가당찮다
평온하게 뜨거운, 셋은 매우 고요하고
들끓는 컴바다*에서 낚싯대 드리운 채
월척을 낚겠다는 남자, 못 주겠다는 저 달빛
헛입질 시어詩魚 떼들 밀당은 거세지고
융단폭격 맞은 듯이 심장은 공허하고
미완성 종장終章 일부만 밤바람에 나부낀다
*컴바다: '컴퓨터 바다'를 줄인 신조어.
해바라기
오직 당신 만나기 위해
어느 천변 홀로 서서
수 밤을 고개 숙여
간절히 기도합니다
뜨겁게 사랑이 온다면
고개 들어 웃겠습니다
공명동굴
한 방울의 물소리가 아주 큰 힘을 가졌네
귀청 찢어지도록 달팽이관에 닿는 여운
단단한 돌집 한 채가 무너져 내릴 것만 같네
오리나무 잎잎들이 뱉어 내는 푸른 바람
동굴로 쑥 들어와서 어둠을 밝혀 주네
포로롱 날아든 새 한 마리, 목 축이며 나를 보네
맑아진 행간 속에 '또옥똑 으응' 물소리 공명
징검돌 놓듯 시를 놓아 징 소리를 내고 있네
산과 산 도봉들이 일제히, 내 갈 길을 밝혀 주네
고통의 감동
짜릿한 아픔과 찌릿찌릿한 고통이 모여
꽃처럼 폭죽처럼 폭발하는 먼 밤하늘
큰곰별 무한정 반짝이네
몸 움츠린 겨울밤에
어슬렁 또 어슬렁 지상에 내려와서
아린 가슴 쓰다듬으며 잘 살라는 한마디에
뜨거운 눈물이 솟구쳐
살갗 터져도 환하네
봄. 청연암에서
자주 목단 나풀거리는 오월을 입은 청연암
검정 양복 한 사내가 스님 따라 법당에 든다
한 자루 향불 든 손이 바들바들 떨고 있다
부처님 염화미소에 떨린 손 풀어 합장하고
간절한 마음 바치는 저 심연의 연못에는
네다섯 비단잉어가 유영하며 읽는 경전
향불이 다 탈 때까지 목단과 대웅전 사이
극락왕생 소원하는 사내와 스님 사이
뎅그렁 풍경이 운다, 하늘 문이 열린다
추천사
임성구의 시조는 “따뜻이 안아 주지 못해/ 미안해지는 황혼 녘”에 건네는 연가戀歌이자 “아직도 끊을 수 없는 함성의 푸른 넋”으로 가득한 송가頌歌이다. 등단 이후 30년 세월을 지나오면서 어느덧 “세상의 중심”을 구축해 가고 있는 그의 시편들은 “장편소설을 함축한 저 갸륵한 시의 지문 속”에서 생성하여 “세상에 거름 되라는 백비白碑 같은 비단 말씀”을 지나 어느새 “광활한 영감靈感”의 세계로 번져 가고 있다. 비록 “바람결 무한정으로 뒹구는 문장들은 꿈속”에서 발원하지만, 그 언어들은 “아득한 경전 펼치는 일”이 되어 주고 궁극적으로는 “수억만 킬로미터에 닿은/ 천왕성의 내 사랑”으로 안착해 간다. 일견 경쾌하고 일견 진중한 그의 언어적 매무새는 그렇게 “살과 뼈, 온몸이 타 버려도// 온전하게 빛나기를” 바라는 명명名命처럼 “슬픔이 천둥 같아 두려움에 떠는 날이면/ 더 세게 고함쳐서 당신으로” 태어나고 있다.
이번 시조집에는 그러한 임성구 특유의 사랑과 슬픔, 함성과 영감, 빛과 그늘이 “풀뿌리 같은 노동자/ 굳은살로 뜨는 별”을 훔쳐 오고 “간절한 마음 바치는 저 심연의 연못”을 데려온다. 그것을 모두 가능케 해 준 “당신의 간절한 기도”를 통해 시인이 사랑했을 이은상도 이선관도 박권숙도 박서영도 등장하고 있다. 반갑고 그리운 얼굴들이다. “문득, 가고 없는 한 시인이 생각나” 노래를 시작하는 순결한 영혼의 시인이여! 앞으로도 “대금산조 이끌고 가는 우리 사랑”으로 영원하기를! “비 젖은 강물을 하염없이, 넋 놓고 바라보며”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슬픔의 힘으로 “내 영혼의 종착지는 울음이 없다는 듯” 노래해 가기를! 먼 훗날에도 “징검돌 놓듯 시詩를 놓아 징 소리를 내고” 있을 ‘시인 임성구’의 존재론적 고처高處가 이로써 눈물겹고 눈부시게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학교 인문대학장)
해 설
삶의 의지와 생동하는 시적 표상
구모룡(문학평론가)
임성구 시인은 1994년 등단한 이후에 제1 시조집 『오랜 시간 골목에 서 있었다』(2010), 제2 시조집 『살구나무죽비』 (2013), 제3 시조집 『앵통하다 봄』(2015), 제4 시조집 『혈색이 돌아왔다』(2019), 제5 시조집 『복사꽃 먹는 오후』(2021) 등을 발간하였다. 등단하고 16년 만에 낸 첫 시조집을 예외로 하면 대개 3. 4년의 시차를 두고 나왔고 제6 시조집 『고함쳐서 당신으로 태어나리』(2024)를 등단 30년에 이르러 내게 되었다. 앞선 책은 아직 나오지 않은 책의 서문이라는 아감벤의 말처럼 『고함쳐서 당신으로 태어나리』가 새로운 지평을 개진하리라 믿는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내 여자가 여기 있었네
흙 한 줌 닿지 않는
돌담 골목 작은 틈새
그늘을 물처럼 당겨 마시며
기형으로 핀 개민들레
ㅡ「절창」 전문
시인에게 '절창'은 “흙 한 줌 닿지 않는/ 돌담 골목 작은 틈새"에서 울려 나온다. 폐허의 푸른빛과도 같은 생명의 발현이다. 이를 찾아서 시인은 존재의 굴레를 짊어지고 오랜 뒤안길을 서성였던 것인데 마침내 “난생처음 당신에게 건네받은 고귀한 선물// 가는 곳곳 달고 다니며 빛나길 염원합니다// 살과 뼈, 온몸이 타 버려도// 온전하게 빛나기를"「명명」 부분) 바라는 명명名에 도달한다. 이제 임성구 시인의 개성은 우뚝한 자리를 얻었다. 그의 시편은 “고통의 감동”(「고통의 감동」 부분)이 있고 "경쾌한 감탄사 같은
꽃구름/ 추억 한 줄로"(함안에 오면」 부분) 물들며 "연초록 새의 혓바닥이 다 닳도록 사랑"설록에서 하룻밤」 부분)하려는 갈망으로 차 있다. 시와 삶을 하나의 연속체로 살아온 여정이 진정한 의미에서 '생성적 양심'으로 부상하였다. 오히려 그는 처음부터 모성을 상실함으로써 놀랍게도 배려로서의 사랑이라는 모성적 가치를 건져 올리는 시적 역설을 성취하였다. 이 점에서 임성구 시인의 현대시조가 지닌 현 단계가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