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의 기적>이 이 감독의 첫 연출작이라고 들었다. 어떻게 게이를 소재로 한 영화를 하게 됐나 ‘연분홍치마’에서 맨 처음에 만들었던 영화가 성매매, 기지촌 여성들에 대한 다큐멘터리 <마마상>이었다. 그 다음 트렌스젠더 이야기를 다룬 <3×FTM>과 레즈비언 국회의원 후보 최현숙 씨가 나오는 <레즈비언 정치도전기>가 차례로 만들어졌다. 그러고 나니 ‘이제는 게이다큐를 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가 내부에서 나왔다. 연분홍치마 내에서 게이가 나밖에 없었고, 자연스럽게 나한테 프로젝트가 오게 됐다. 나는 개인적으로 게이 역사다큐를 만들고 싶었다. 근대화시기의 어르신 게이들이 어떻게 살았었는지, 종로가 어떻게 형성됐는지를 찍고 싶었는데 공부를 하다보니까 너무 이야기가 방대하더라. 그래서 이 다큐는 길게 가야겠다 싶은 때에 ‘친구사이’에서 제안이 들어왔다. 2003년도부터 홈페이지를 통해 커밍아웃 인터뷰를 했었는데 이 인터뷰를 영상으로 만드는 기획을 했다고, 같이해보지 않겠느냐고. 나도 마침 기존의 아이템이 막막해서 걱정하던 차에 그럼 먼저 동시대 이야기를 해보자는 생각에서 시작했다. 친구사이에서도 기획할 때 ‘게이가 만든 게이 다큐멘터리’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게이가 만든 게이다큐멘터리’라는 게 왜 중요했던 건가 기존의 주류 미디어 속에서 재현된 게이는 사람들의 기본적 편견을 바탕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다수자의 시선에 의해 재현된 게이의 모습은 대부분 굉장히 여성적으로 희화화된 모습이거나 굉장히 잘생긴 전문직의 멋있는 모습인데, 우리 시선으로 그런 왜곡의 틀을 벗겨내 보자는 게 가장 큰 목적이었다. 남성적인 시선으로 여성을 대상화하는 기존의 틀을 벗어나 여성이 바라본 시각으로 여성이 바라본 세상, 여성의 역사를 영화에 담는 여성주의 영화운동과 비슷한 거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게이가 연출함으로써 게이들의 삶을 편견 없이 드러낼 수 있는 게 장점일 수도 있었겠지만 감독으로서는 거리두기에 대한 고민도 있었을 거 같다 물론이다. 맨 처음에는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고 나를 가급 안 드러내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되게 겉멋이었던 거 같다. 다큐멘터리는 객관적인 사실을 기록한다는 전통적인 통념이 있잖나. 근데 다큐라는 장르는 어떤 의미에서 사회적 이슈나 다양한 사회 문제들에 대해 감독이 어떤 입장을 대변하고 주장하는, 말하자면 논설 같은 거다. 근데 거기서 어떤 객관이나 사실이라는 다큐멘터리의 환상, 신화에 꼭 얽매일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이것은 이성애 중심 사회를 향한 성소수자들의 일종의 메시지이자 우리들의 입장인 거고, 그렇다면 나와 주인공들의 관계가 영화 속에 좀 더 드러남으로써 다큐가 오히려 힘을 갖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맨 처음엔 화면이나 목소리 등으로 개입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영화 찍는 과정에서 주인공들과 나와 상호작용이 굉장히 활발해지면서 이런 것들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보자는 쪽으로 입장이 변했다.
감독 개입의 절정은 커밍아웃이었던 거 같다. 언제 그런 결단을 한 건가 처음부터 ‘게이가 만든 게이 다큐멘터리’를 가보자는 거 자체가 커밍아웃을 염두에 두었던 거지만 사실 말은 그렇게 해놓고도 고민이 많았다. 나 스스로도 언젠가는 사회적 커밍아웃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커밍아웃이라는 게 한 사람의 인생에 굉장한 변화를 가지고 오는 것인 만큼 두려움이 앞서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객관적 거리두기를 처음 시도하려 했던 것도 감독의 정체성을 숨기려는 꼼수였을 수 있다. 근데 주인공들의 모습이나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내가 용기를 얻고 커밍아웃을 한다는 것에 확신을 가지게 된 거 같다.
영화를 보다 보면 정말 어느 순간 카메라와 대상 사이에 경계가 없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만큼 서로 교감이 이루어졌다는 방증이기도 할 텐데, 감독 역시 주인공들의 삶을 보면서 영향 받고 변화한 부분이 있을 것 같다 그렇다. 내가 가장 극명하게 변화한 건 이 다큐의 마지막 부분이 HIV로 귀결됐다는 거다. 맨 처음 욜의 컨셉은 대기업 다니는 직장인 게이였다. 회사 속에서 벌어지는 갈등이나 커밍아웃의 두려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근데 HIV인권운동을 하는 욜의 모습이나 욜과 석주(욜의 애인)의 관계들을 보면서 나 역시도 이 문제가 남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나도 예전부터 그런 연대활동을 했었지만 HIV이슈에 대해 피상적으로 접근했던 부분이 있다. HIV는 동성애자가 퍼뜨린 병이라는 낙인 때문에 오히려 더 얘기하기 꺼려하는 분위기도 있다. 그런데 누군가는 얘기를 해야 하고, 그렇다면 이 다큐를 통해서 지금이라도 이야기를 하는 게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더라. HIV를 바라보는 내 시각 자체가 변화한 거다. 그렇게 HIV에 대한 비중이 커지면서 욜의 에피소드가 바뀌게 되고 맨 마지막 에피소드로 자리를 하게 됐다. 그게 이 다큐를 만들면서 커밍아웃에 대한 결심과 더불어 가장 크게 변화한 부분이다. 관객들도 HIV에 대한 문제를 가슴에 담고 극장을 나섰으면 좋겠다.
HIV에 대해 직접적으로 얘기하게 된 건 게이로서 자기정체성에 대한 확신과도 관계있나 내 정체성에 대한 확신 보다는 내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확신이 든 거다. 욜과 나와의 관계, 그리고 욜과 애인의 관계, 성소수자 커뮤니티에 대한 나의 애정이나 확신이 없었다면 에이즈 문제는 지르지 못했을 거다.
영화 주인공인 4명은 원래 알았나 종로 바닥이 워낙 좁아서 준문, 욜, 병권 3명은 알고 있었다. 친하지는 않고 오며가며 인사만 하던 사이였는데 다큐를 찍으면서 정말 친해졌다. 영수는 당시에 친구사이에 나온 지 얼마 안 된 친구였어서 영화 찍으며 처음 만났다.
그 4명은 어떻게 선정했나 4명 다 친구사이 인터뷰를 했던, 또는 할 사람들이었다. 일차적으로 커밍아웃 인터뷰 했던 사람들 중에서 선정을 했다. 몇몇 분들한테 의뢰가 들어갔는데 가장 먼저 퀴어영화를 만들면서 커밍아웃 했던 준문이 오케이를 했다. 병권하고 욜은 동성애자인권연대(동인련)에서 활동하면서 스스로 커밍아웃에 대한 여러 고민이나 경험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통해 더 큰 커밍아웃 해보자 했고 마지막으로 영수가 캐스팅이 됐다. 영수가 마침 친구사이에서 열심히 활동을 하고 있었고 캐릭터 자체가 매력적이기도 했다. 원래 5명 정도의 이야기를 담으려고 했는데, 4명에서 더 이상 안 구해지더라.
주인공들을 설득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일단 준문이는 워낙 타고난 여배우고 노출증이 있는 애라서 큰 무리 없었다.(웃음) 욜하고 병권은 각각 커밍아웃의 정도가 다르다. 욜은 부모님이 알고 계시긴 하지만 부모님은 얘가 나아졌을 거라 생각하고 계시고, 병권은 부모님께 말씀을 안 드렸다. 그런 부분이 계속 걸리는 게 있었는데, 이 영화가 일종의 성소수자 인권운동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다큐이고 이 친구들이 또 타고난 활동가들이어서 그런 대의에 결의를 하고 자신의 두려움을 대화를 통해 풀어나가는 과정들이 있었다.
사실 영화 보면서 4명 각각의 캐릭터가 너무 개성 있고 다양해서 저런 것까지 다 고려했을까, 굉장히 세심하다 생각했다 성소수자 재현은 사실 가장 중요한 전제가 커밍아웃이다. 성소수자로서 출연한다는 건 곧 커밍아웃이기 때문에 커밍아웃이라는 선결조건도 있어야 하는 거고, 또 자신의 삶이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진다는 두려움도 극복을 해야 한다. 이 두 가지 조건들을 함께 뛰어넘어야 하다 보니 사실 성격이나 캐릭터의 개성, 이런 것들을 고려하기 힘든 부분이다. 근데 결과적으로 정말 모든 사람들의 삶은 기록될 가치가 있고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거라는 걸 느꼈다. 주인공들 모두에게 그런 의미와 개성이 있더라.
주인공들이 포스터에 얼굴도 올리고 각종 홍보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트랜스젠더가 나오는 전작 <3×FTM>에 비하면 대대적인 커밍아웃이다 소수자인권활동에 대한 결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거다. 그리고 성소수자 내부에 트렌스젠더, 레즈비언, 게이가 각각 처한 상황이나 조건의 차이도 하나의 이유가 되지 않을까. 성소수자 내부의 위계를 따진다기보다 드라마나 각종 미디어에서 게이문화에 대한 재현이 이전보다 LGBT(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렌스젠더. 성소수자들을 의미함)그룹 내에서 가장 많이 돼왔으니까.
그런 게 영화 분위기에도 영향을 미쳤을까. 영화가 전반적으로 밝고 경쾌하다 영향을 끼쳤을 거 같기도 한데, 연출의 특성이지 않을까. 글쎄. 전략이었던 거 같다. 개봉을 염두에 두고 있으니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게끔 하는 전략. 사실 나도 요즘 고민하고 있다. 게이들이 칠렐레팔렐레 해서 그런가. 게이들이 역시 남자여서 성소수자 내부에서도 사회적 주도권을 갖고 있는 느낌 때문에 이렇게 나왔을까. 뭐 주인공들 캐릭터도 있었을 거 같고 복합적인 거 같다.
개봉되면서 대사회적으로 커밍아웃 되는 건 감독으로서도 고민됐을 거 같은데 개봉을 전제로 하긴 했지만 이 정도로 일이 커질 줄은 몰랐다. 사실 기획 초기에는 개봉도 아니고 홈페이지에 영상 인터뷰를 올리자는 수준이었다. 근데 이렇게 막 커져서 부산영화제에서도 월드프리미어로 소개되고 상 받고 영화제에서 상영되고 개봉까지 하게 되니까 이게 정말 영화가 가지는 힘인가 싶다.
상영 이후 체감하는 변화들이 있나 단순하게 알아보는 사람이 많이 생겼다. ‘어우, 쟤 게이래’ 이런 식으로. 그전에는 연분홍치마 활동가라고 했지만 많은 분들이 감독님이라고 호명해서 아직 되게 낯설다. 그게 좀 달라진 거 같고. 무엇보다 의미있다고 생각 드는 건 나와 주인공들로부터 성소수자 커뮤니티 내에서 좋은 기운을 얻으시는 거 같다. 많지는 않지만 ‘먼저 용기있게 나서주셔서 감사하다, 저도 감독님이나 주인공들 같은 길을 걷고 싶다’ 이런 반응들이 올 때, 나한테도 굉장히 큰 자극이 되고 힘이 되는 거 같다.
주인공들이 용기있게 결단해 영화가 만들어졌지만, 개봉하면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 생길 수도 있는데 사실 다큐를 통해서 이미 커밍아웃을 했지만 워낙 이성애 중심 사회라 지금도 어떤 식으로 반응이 올지 고민되고 신경 쓰는 거 같다. 개봉이 되면 정말 세상의 호모포비아(homophobia, 동성애에 대한 무조건적 혐오와 그로 인한 차별을 이름)와 맞서게 되는 상황이니까. 오늘도 욜 페이스북에 들어갔더니 신문에 내 얼굴 실리는 거 무섭다고 써놨더라. 안 그래도 영등위가 우리 예고편을 심의 반려하고 또 등급이 안 나온 걸 핑계삼아 시사회를 못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호모포비아를 보면서 (개봉이) 굉장히 큰 상황으로 불거질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이상하게 겁이 안 난다. 되게 재미있을 거 같다. 미쳤나봐.(웃음) 나를 손가락질 하든 말든 내 갈 길을 가야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굉장히 자유롭고 스스로 거침이 없어지는 거 같아서 좋다. 근데 혹시나 모를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한 준비나 이런 것들은 해야겠지. 맞서 싸워야 하면 싸우고. 전의를 불태우고 있기도 하다.
영화제를 통해서 몇 차례 관객들을 만났는데 반응들은 어떤가 놀라웠던 게 게이들이 저렇게 살지 몰랐다는 반응이다. 영상을 통해서 게이를 처음 봤다, 내가 인사를 가면 나를 보면서도 실제 게이 처음 봤다, 생각보다 평범하네요, 사람 같네요, 그런 반응들이 있다. 이 땅에 발붙이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놓은 이미지대로 생각해온 분들이 너무 평범한 게이 모습을 보면서 그런 반응들을 하신다. 그런 거 볼 때마다 만들기를 잘했다는 생각도 들고 아직 멀었다는 생각도 들고. 나도 많이 움직여야겠다. 실제 게이 보고 싶어하는 분들을 위해.(웃음) 당신들 생각처럼 ‘꽃게이’도 아니고, 이렇게 아저씨처럼 생긴 뚱뚱한 돼지 게이도 있다. 정말 다르지 않다. 아니, 다르긴 하지. 어쨌든 이렇게 생겼다. 동성애자들을 못 보았단 사람들에게 내 존재를 관객과의 대화라는 형식을 통해서든 드러내는 거 자체가 사명이자 하나의 운동이 됐다. 존재를 가시화해 각인시키는 거니까.
먼저 커밍아웃한 감독들도 있잖나 근데 그들은 유명인의 느낌이 있으니까. 유명인이고 예술가들이니까 저렇게 살겠지 하는데 나는 아직 덜 유명해졌고 덜 이쁘니까. 가서 내 모습을 보여드리고 얘기 나눠서 그런 편견을 깨고 영화에서 다 못한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고 한다. 극장 로비 입구에 서 있어야지. ‘저 감독이에요, 궁금한 거 있으면 나오면서 질문해주세요’ 이렇게.
감독으로서는 이번 영화에 얼마나 만족하나 일단 나는 끝낸 것만으로 좋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생에 있어서 연출을 한다는 게 개인적으로 나한테 중요한 시도였고 그래서 힘들었던 부분도 있었고, 주인공 영수의 죽음도 있었고… 나의 부족함 때문에 2년 동안 굉장히 고생을 많이 했다. 연분홍치마 활동가들에게 민폐도 끼치고. 약간 우울증도 오고 그랬던 거 같다. 그래서 방에 컴퓨터 앞에 앉아서 움직이지도 않고 있고. 주변 애들이 걱정을 많이 했다. 조금만 더 저러면 병원 데려가야 겠다고. 그래서 작업 끝내고 개봉까지 이어진 거 자체가 그냥 마음이 놓인다. 작품 자체는 부족한 게 많다. 그건 앞으로 갚아가야죠. 다음 작품을 또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웃음)
벌써 언론 인터뷰 하면서 다음 작품 계획을 다 말했던데 역사다큐를 찍으려다 이걸 먼저 했다니 그런 식으로 쓴 거다. 사실 뭔가 내 속내를 터내도 될 만한 매체에는 ‘다음 작품, 할 수 있을까요. 생각하기 싫어요.’ 이런다.(웃음)
작업하면서 제일 힘들었던 건 뭔가 커밍아웃에 대한 결심, 그리고 그걸 다져가는 과정이 힘들었다. 주인공들도 다 마찬가지로 느꼈을 거다. 그리고 이 영화가 성소수자들한테 힘이 될 수 있을까라는 가장 원론적인 고민들이 있었다. 우리가 생각했던 의도, 성소수자 인권 신장, 게이들의 커뮤니티를 알리는 역할을 달성할 수 있을까, 그런 걸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내가 이 다큐를 하면서 굉장히 고민이 깊어졌던 적이 있는데, 종로에서 내 카메라를 향한 거부반응들이 왔을 때다. 지나가는 어르신들이 왜 이런 걸 찍느냐고 막 혼냈을 때, ‘이 다큐가 성소수자들을 위해 만든 건데 게이들이 지지하지 않는다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에 며칠 잠을 못 잤다. 사실 그런 친구들이 아직도 있다. 우리 숨어서 잘 살고 있는데 너는 왜 굳이 종로까지 까발리면서 다큐를 찍었느냐.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굳이 알리고 싶지 않고 커밍아웃 하지 않아도 자기들은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니까. 근데 좀 지나면서 뭐 어때, 될대로 되라, 그런 생각이 들더라. 내가 생각하기에 게이들이 지금처럼 주말이 되면 종로에 와서 그간의 시름을 내려놓고 친구들과 어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이 모든 게 가능해진 건 예전부터 커밍아웃하고 열심히 투쟁해 온 ‘언니’들 덕분이다. 성소수자 운동을 해왔던 레즈비언들, 트렌스젠더들, 게이들 말이다. 그 혜택을 지금 종로가 누리고 있는 건데 사람들은 사실 그걸 잘 모르고 있는 거다.
커밍아웃에 대한 생각이 다른 거 아니냐. 그들은 당장 자신의 삶에 방해가 되니까 커밍아웃을 웬만하면 피하고 싶은 건데, 감독은 장기적으로 봤을 때 커밍아웃이 필요하다는 거냐 모든 운동은 ‘우리 여기 있어요’에서 시작한다. ‘나 같은 존재가 여기 있어요. 우린 당신들과 달라요. 하지만 우리도 당신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같이 함께 잘살아 봅시다’가 운동의 시작이다. LGBT 성소수자들에게 있어서도 그게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 될 수 있는 거다. 물론 커밍아웃 할 권리와 자유만큼 또한 커밍아웃하지 않을 권리와 자유도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면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리가 대신 할게. 우리가 먼저 앞서서 싸우겠다. 후원이나 열심히 해줘.(웃음)
나는 종로에 다녀봐도 게이커뮤니티가 잘 안 보이더라 대놓고 뭘 걸어놓을 수는 없으니까. 요즘은 레인보우 깃발이나 레인보우 삼각형을 걸어놓기도 한다. 2008년 내가 처음 카메라 들고 나갔을 땐 깃발 걸린 데가 하나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몇 군데가 있다. 전엔 지하나 구석에 꽁꽁 숨어있으면서 간판도 작게 해놓던 게이바들이 요즘은 레인보우도 만들어 걸고 1층으로 올라오고, 이런 게 감지돼서 종로라는 공간도 조금씩 변화를 하고 있구나, 조금씩 오픈되고 있구나 하는 걸 느낀다. 전에는 사람들도 뭣하러 찍냐는 그런 반응이 많았는데 요즘은 카메라 들고 거리를 찍고 있으면 ‘어머 언니, 저도 좀 찍어주세요’ 이러면서 카메라에 알아서 반응하는 친구들도 생겼다. 젊은 친구들이긴 하지만 2년이 짧은 시간이지만 그런 변화가 감지된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이 감독에게 영화는 투쟁의 도구인 것 같다 그런 거 같다. 결국 투쟁이라는 게 누구의 마음을 움직여서 타인에 공감하고 타인의 감정에 귀 기울이고 함께하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거잖나. 누군가의 고통과 기쁨과 행복을 함께 공감하는 데 다큐가 좋은 매개가 되는 것 같다.
다큐라서 어려운 점은 없나 네 명의 주인공들, 그리고 다큐에 출연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결국 빚을 졌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성소수자 인권운동을 위해 만들었고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완성을 했지만 완성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주인공들한테 농담처럼 ‘내가 너네 잘못되면 평생 지켜줄게. 내 뒤에 숨어!’라고 이야기했다. 정말 그렇게 될 거 같다. 이 친구들이 평생 가지고 가는 성소수자로서의 삶, 삶의 지향, 그들이 얘기하고자 하는 이슈들, 이런 것들을 내가 끝까지 함께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보면 이 다큐라는 게 나를 많이 변화시켜서 좋고 사랑스러운 부분이 있지만 굉장한 숙제를 던져주는 거 같다. 그런 책임감에 어깨가 무거워지기도 한다.
관객은 얼마나 들었으면 좋겠나 그런 생각은 안 해봤는데, 1만 명만 들면 좋겠다. 독립영화에서 만 명이라는 수치가 한 단계로 차원 이동하는 거라고 하더라. 만 명이 넘어가면 사람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퍼지기 시작해서 독립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 영화는 꼭 봐야 하는 영화라는 공감대 같은 것들이 생기는 단계라고. 사실 흥행이 된다는 건 소수자에 대한 이슈가 퍼져나간다는 거고, 커밍아웃이라는 거대한 캠페인이 잘된다는 의미니까. ‘종로의 기적이라는 다큐가 있대, 근데 게이 커밍아웃 다큐라며 성소수자들이 떼거리로 나오는 다큐라며’라고 사람들 입에 회자되는 순간 누군가에게 우리 존재는 알려지는 거고, 그게 아직도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고민하는 성소수자가 ‘아, 그 다큐를 보면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들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종로든 극장이든 저든 친구사이든 동인련이든 연분홍치마든, 올 수 있는 단서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종로의 기적이 아닐까.
결국 영화의 목적은 성소수자들에게 게이 커뮤니티를 알리는 것이었나 물론 많은 사람이 봐서 비성소수자 관객들이 성소수자들의 현실을 공감하고 존중하고 응원하는 다큐가 되면 좋겠지만 아직도 자기 성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굉장히 많은 성소수자들이 있다. 내가 아무래도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바이섹슈얼인 거 같은데 누구한테 말은 못하겠고, 누군가는 그 고통에 너무 힘이 든 나머지 정말 해서는 안 될 선택을 할 수도 있다. 그런, 내가 어디 가서 이 고민을 풀어야 하지 머리 싸매고 있을 많은 성소수자들에게 이 영화가 다가갔으면 좋겠다. ‘당신의 친구들이 종로에 있어요, 그러니까 오세요. 같이 고민을 풀고 같이 행복해져요’라고 얘기하는 그런 다큐가 됐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