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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 정진석] (58) 위대한 발자취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선종 6년 만에 시복… 2014년 시성
- 2014년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거행된 요한 바오로 2세ㆍ요한 23세 교황의 시성식 장면. 두 교황이 동시에 시성되는 것은 가톨릭 교회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CNS]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선종하기 전부터 수많은 인파가 바티칸 광장에 모여들었다. 밤이 되면 교황의 쾌유를 빌며 공동으로 묵주기도를 바치는 소리가 온 광장을 메아리쳤다. 안타깝게도 교황의 선종이 발표됐고, 이후 광장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교황을 위해 기도했다.
선종하기 전 유언처럼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세요”라며 행복의 메시지를 전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었지만 정작 그의 어린 시절은 행복하지 못했다. 질병과 전쟁으로 전 가족의 죽음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카롤 요제프 보이티야(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이름)는 1920년 5월 18일 폴란드에서 양복사 아버지와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파도바체가 그의 고향이다. 소년티를 벗기 전인 9세 때 어머니를 잃고, 12세 때는 의사였던 형마저 떠나보냈다. 그는 자연히 인간의 삶에 대해 철학적 질문을 가졌다. ‘인간은 왜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그에게는 삶 전체를 관통하는 의문이었다.
그는 학창 시절 어학과 연극에 뛰어난 실력을 보여 학생 극단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축구, 스키, 산악 등반, 수영 등 스포츠도 즐겼다. 폴란드어와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야기엘론스키대학교에 입학했는데, 이때 그는 이미 아마추어 연출가로서도 재능을 발휘했고 시를 쓰면서 실력을 인정받았다.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하면서 대학을 강제로 폐쇄했다. 그래도 그는 친구들과 지하 연극 동아리를 조직해 어떻게 해서든 연극 활동을 이어가려 했다. 하지만 1940년 겨울 그는 결국 크라쿠프 외곽에 있는 석회암 채석장에서 일하게 됐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엔 아버지마저 목숨을 잃었다.
전쟁으로 대학이 폐쇄되자 보이티야는 1942년 크라쿠프에 있는 지하 신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시작했다. 낮에는 노동자로 일하고 밤에는 몰래 신학을 공부했다. 드디어 그는 1946년 26세 나이로 사제품을 받았다.
이후 대학에서 강의하고, 윤리신학 논문도 발표했다. 그리고 1958년 주교로, 1964년 대주교로, 1967년 추기경으로 임명됐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폴란드 교회를 대변했고, 세계 주교 대의원회의(시노드) 상임위원을 지내면서 교황청 여러 부처의 일에 관여했다. 특히 그는 1978년 10월 16일 제264대 교황으로 선출될 때까지 폴란드의 비진스키 추기경과 함께 노동자의 추기경으로 명성이 높았다.
취임 34일 만에 심장마비로 타계한 요한 바오로 1세 교황의 뒤를 이은 보이티야의 발탁은 당시 파격적이었다. 바티칸 내부에서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던 데다, 비(非)이탈리아계 교황 선출은 사상 두 번째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선출 당시 58세로 최근 123년 동안 추대된 교황 중 가장 젊은 나이였다. 455년 만에 비이탈리아 출신으로 교황직에 오른 그는 인종, 종교, 민족을 초월해 코소보나 동티모르, 중동과 같이 분열과 대립이 있는 지역을 사목 방문하면서 화해와 평화를 촉구했다.
당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강론 때마다 당신이 ‘평화의 사도’로 사목 방문을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말년에는 고령에다 지병으로 거동조차 불편한 몸을 이끌며 계속 강행군을 했다. 특히 선종하기 몇 년 전 교황이 중동 성지를 방문했을 때는 세월의 무게에 눌려 구부정해진 어깨와 보기에도 안쓰러운 걸음을 온 세상에 보여 주면서도 증오의 땅 곳곳을 찾아가 어루만졌다.
-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유해가 안치된 나무관.
이스라엘 벤구리온 공항에 도착한 교황은 기독교와 이슬람, 유다교 신자의 자녀 3명이 들고 있는 3개의 그릇에 담긴 흙에 입을 맞췄다. 3개의 종교가 화합해 발전하길 기원하는 희망의 뜻이 담겨 있었다. 이어 교황은 예루살렘 통곡의 벽에서 랍비가 하는 양식대로 기도했다. 가톨릭은 어떤 종교여야 하는지를 잘 보여 준 장면이었다.
교황은 교회의 과거 잘못을 인정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1992년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대한 중세 교회 재판의 잘못을 시인하고, 대희년인 2000년 ‘용서의 날’ 참회 예식을 진행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유다인 학살에 저항하지 못한 점, 십자군 전쟁, 13세기 종교재판 등을 참회하고 용서를 구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렇게 사람들에게 사랑과 평화, 화해와 용서의 메시지를 남기고 마지막 여행을 떠났다.
장례식에는 무려 400만 명에 이르는 조문객이 성 베드로 대성전을 찾았다. 장례 미사에 모여든 수많은 인파는 교황을 즉시 시성해 달라는 뜻의 ‘산토 수비토’(Santo Subito)를 외쳤다. 이러한 염원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교회 역사상 가장 빠른 선종 6년 만에 시복됐고, 2014년 성인품에 올랐다. 요한 바오로 2세가 가톨릭 교회에 얼마나 위대한 발자취를 남겼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 사건이었다. 장례 기간 전 세계는 슬픔에 싸여 요한 바오로 2세의 선종을 애도했다. 한국 교회도 교구별로 추모 미사와 연도가 이어졌다.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에 마련된 분향소에는 일반 신자들을 비롯해 각 수도회의 조문 행렬이 이어졌고, 외국인 신자들의 모습도 자주 눈에 띄었다. 교황 선종 후 교계 기자들이 정 대주교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선종에 애통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가정에서 사랑하는 아버지를 잃은 것 같은 슬픔을 느낍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뒤를 이을 새 교황님을 위해서도 열심히 기도합시다.”
인터뷰를 마치고 길을 나서며 정 대주교는 교황 선출을 앞둔 상황에서 투표에 참여할 추기경단을 떠올렸다. 그리고 좋은 목자가 탄생하길 두 손 모아 하느님께 기도했다.
[추기경 정진석] (59) 새로운 목자의 탄생
사랑과 정의 실천하는 교황 되길 함께 기도
-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교황 선출 직후 2005년 4월21일 로마에 있는 숙소 앞에서 군중에게 답례하고 있다. [CNS]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뒤를 이을 새 인물을 고대하며 수많은 군중이 성 베드로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2005년 4월 18일 오후, 교황 선거인 콘클라베의 첫 번째 투표를 앞둔 때였다. 라틴어 ‘콘클라베(Conclave)’는 ‘자물쇠가 채워진 방’을 의미한다. 교황을 선출할 추기경단은 일제히 선거 회의장에 들어가 교황이 선출될 때까지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채 투표를 진행한다. 또 참석자들은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비밀로 한다.
이날 오후 4시 30분, 교황 선거를 위한 추기경단 115명의 행렬이 성령의 도움을 바라는 성가 ‘오소서, 성령님(Veni Creator)’을 부르며 선거 장소인 시스티나성당으로 이동하는 장면이 전 세계에 생중계됐다. 텔레비전을 통해 콘클라베의 시작을 생중계하는 것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우리나라 김수환 추기경은 교회법적으로 교황 선출 자격이 있는 80세를 넘긴 나이여서 아쉽게도 콘클라베에 참석하지 못했다.
시스티나성당에 도착한 추기경들은 선서를 한다. 서약은 먼저 추기경단 수석 추기경이 서약문을 읽는 것으로 시작한다. 1996년 발표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교황령 「주님의 양떼」의 규정들을 충실하고 철저하게 준수할 것을 맹세하는 것이다.
특히 「주님의 양떼」는 신문이나 텔레비전 등의 미디어와 절대 접촉하지 말 것을 주문하고 있다. 실제로 2005년의 콘클라베에서는 추기경단 숙소인 마르타의 집 전화와 인터넷 회선이 절단됐고, 숙소와 시스티나성당에는 휴대전화 사용이나 도청을 방지하기 위한 방해 전파를 내보내는 등 보안을 강화했다. 추기경들은 어떤 식으로든 교황 선출과 관련된 모든 비밀을 엄수하고 교황 선출에 관한 어떤 형태의 간섭이나 반대 또는 개입에 찬성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고 선서한다. 추기경들은 최후의 심판 장면이 그려져 있는 시스티나성당 벽화 앞에서 한 사람씩 앞으로 나가 성경에 손을 얹고 “나 아무개는 그와 같이 약속하고 맹세하고 선서합니다”라고 하면서 “하느님과 이 거룩한 복음은 저를 도와주소서”라고 기도한다. 추기경들의 선서 후에는 ‘외부인 전원 퇴장’을 선언하고 추기경단 이외의 사람을 모두 성당 밖으로 퇴장시킨다.
교황 선출은 비밀 서면 투표로 진행된다. 개표 직후 투표용지는 불에 태워 처리하는 것이 관례다. 선거 이후 발생할 수 있는 구설수를 완전히 차단하기 위함이다. 교황 선출을 위한 추기경단의 득표는 과거에는 만장일치제였지만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경우 과반수의 찬성으로,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3분의 2 이상 찬성으로 규정을 바꾸었다. 교황을 다수의 합의로 선출함으로써 교회의 확고한 일치와 원활한 운영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한 조치다.
투표 결과는 투표용지를 태울 때 연기를 통해 외부에 알려진다. 과거에는 교황이 선출되지 않았을 때는 투표용지와 젖은 짚단을 함께 태워 검은 연기가 나도록 했다. 선출됐을 경우엔 마른 짚을 함께 태워 흰 연기가 나도록 했다. 그런데 요한 23세 교황이 선출된 1958년 콘클라베에서는 짚이 제대로 타지 않는 바람에 연기의 색깔이 불명확해져 회색 연기가 나왔고, 양도 너무 적어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군중에게 혼란을 준 적이 있었다. 그래서 2005년부터는 화학 약품을 첨가해 색을 명확하게 했다. 그러나 연기의 색깔을 만드는 방법은 여전히 비밀이다. 또 흰색 연기에 성 베드로 대성전의 종소리를 추가해 혼란을 방지했다.
드디어 4월 19일 오후 5시 55분. 교황 선출을 알리는 흰 연기와 함께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성 베드로 광장에 모여 있던 군중은 일제히 환호했다. 차기 교황이 확정되면 수석 추기경이나 연배가 가장 높은 추기경이 선거인단을 대표해 선출된 사람의 동의를 구한다. 이때 선출된 교황은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자신의 세례명 또는 평소에 존경하던 전임 교황의 이름을 교황명으로 명명해 공표해야 한다. 이후 추기경들은 새 교황을 알현하고, 선임 부제 추기경은 외부 사람들에게 새 교황 탄생 소식과 이름을 공표한다.
30여 분이 지나자 호르헤 메디나 추기경과 전례 담당 마리니 몬시뇰이 등장해 전통에 따라 라틴어로 새 교황의 탄생을 공표했다. “하베무스 파팜(Habemus Papam, 교황이 선출되었습니다).”
새 교황은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이며, 교황 이름은 베네딕도 16세로 명명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곧이어 휘장 뒤에서 새 교황으로 선출된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 즉 베네딕토 16세가 모습을 드러냈다. 새 교황은 이탈리아어로 짤막하게 부족한 자신을 위해 기도를 청하는 인사를 한 후 군중과 세상을 향해 첫 축복을 했다.
언론은 새 교황이 교황명을 요한 바오로 3세로 정할 것으로 추측했지만, 교황명은 ‘베네딕토’로 정해졌다. 성 베네딕토(480∼546)는 유럽에 그리스도교 정신을 다시금 불러일으킨 인물로, 바오로 6세 교황이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반포할 만큼 위대한 성인이다.
교황이 선출된 시각이 우리나라 시간으로는 한밤중이었다. 그래서 한국의 언론사들은 밤중에 방송과 인터뷰를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정진석 대주교는 당일 새벽 교황 선출 소식을 접하고 바로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그즈음에도 정 대주교는 어렵고 힘든 세상에 새로운 시대를 책임질 교황님을 교회에 보내 달라고 기도하고 있었다.
동이 트자 정 대주교는 곧바로 명동대성당으로 가서 새 교황 선출을 축하하는 미사를 봉헌했다. 그리고 신자들에게 전했다.
“새 교황님께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강조하신 대로 이 세상을 인간다운 세상, 누구도 소외되는 일 없이 공존하는 평화롭고도 값진 세상으로 만들고,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며 진리에 충실하실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마음을 하나로 모아 기도와 희생을 봉헌해야 합니다.”
[추기경 정진석] (60) 생명 운동의 기수가 되다
생명 수호 위해 고난의 가시밭길 속으로
- 정진석 대주교와 황우석 교수의 만남은 세간의 관심 속에 6월 15일 명동 주교관 정진석 대주교 집무실에서 이뤄졌다. 주교관 앞 마당을 가득 메운 언론사 기자들. 가톨릭평화신문 DB.
2005년 전반기 대한민국의 봄은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연구 신드롬이 절정에 달한 시기였다. 당시 국내외에서 서울대 수의대 황우석 교수의 인기는 말로 형용하기 어려웠다. 이는 2004년 2월 미국 ‘사이언스(Science)’지가 황우석 교수와 서울대 의대 문신용 교수팀이 세계 최초로 사람 난자를 이용해 체세포를 복제하고 이로부터 배아 줄기세포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는 소식을 알리면서부터 시작됐다. 인간 복제 등 윤리적 문제에 대한 우려가 조심스럽게 제기되기도 했지만 난치병 치료의 길을 열게 됐다는 평가와 열화와 같은 호응에 묻혀 버렸다.
황 교수는 인간 배아 복제 논문을 ‘사이언스’에 게재했다. 곧이어 2004년 4월 19일 미국의 시사 주간지 ‘타임(TIME)’이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황 교수를 선정했다. 그는 정부를 비롯해 기업이나 대학으로부터 대대적인 지원을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우리나라의 영웅이었다.
2004년 12월 황우석 교수팀과 미국 섀튼 박사팀이 원숭이 체세포 복제 배아 생산에 성공했고, 이듬해 1월 대한민국 정부는 황 교수팀의 줄기세포 연구를 공식 승인했다. 같은 해 5월에는 복제 양 ‘돌리’를 탄생시킨 영국의 이언 월머트 박사와 황우석 교수가 루게릭병 치료 기술을 공동 개발하는 데 합의하기도 했다. 한국은 물론 전 세계가 황 교수를 주목했다.
그런 황우석 교수가 활동하고 있는 무대는 바로 한국의 수도, 서울이었다.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대주교는 황 교수 연구에 윤리 문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그는 “배아 줄기세포 연구는 인간 파괴를 전제로 하는 행위”라는 내용의 자료를 작성해 교구 사제들이 주일 미사 강론 자료로 활용할 수 있도록 공문으로 배포했다.
그런데 공문이 전달되는 과정에서 이것이 마치 ‘대국민 성명’인 양 외부에 알려졌다. 2005년 6월 11일 자 조간신문에는 일제히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대주교의 황우석 박사 연구 반대, 배아 줄기세포는 살인이다’라는 기사가 대서특필됐다.
이 사건은 일파만파 퍼져 나갔다. 포털 사이트와 교구 게시판에는 천주교와 정 대주교에 대해 읽기조차 불편한 독설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교구청 각 부서도 항의 전화에 시달려야 했다. 주 내용은 불치병 환자를 고치려는 좋은 의학 사업을 왜 천주교가 나서서 반대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당시 해외에 있던 황 교수가 나섰다. 정 대주교를 바로 만나겠다고 기자들에게 알린 것이다. 주일이던 6월 12일 언론에는 황 박사와 정 대주교의 만남을 예고하는 뉴스가 온종일 보도됐다. 언론으로서는 과학과 종교의 대치 국면만큼 흥미로운 기삿거리도 흔치 않았을 것이다.
다음날 날이 밝자 정 대주교는 오전부터 교구청 회의에 참석해 대책을 논의했고, 결국 황 박사를 만나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정 대주교는 홍보실장(필자)에게 회담 준비를 맡기고 자리를 떠났다. 마침 그날 오후 황 교수 측에서 홍보실에 먼저 연락을 해왔고, 양 진영은 그렇게 만남을 정식 논의하게 됐다.
- 정진석 대주교와 황우석 교수의 비공개 만남이 끝나기를 기다린 기자들로 인해 뜻하지 않은 기자회견이 열릴 수밖에 없었다. 기자들의 질문에 응답하는 정진석 대주교와 황우석 교수. 가톨릭평화신문 DB.
세간의 관심 속에 6월 15일 수요일 오후 3시 명동 주교관 정진석 대주교 집무실에서 정 대주교와 황우석 교수의 만남이 시작됐다. 명동 주교관을 언론사들이 그렇게 가득 메운 것은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었다. 회담은 비공개로 진행됐다. 40여 분간 진행된 이 날 만남에서 정 대주교는 가능한 말을 아끼며 황 교수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정 대주교가 전한 말은 단 몇 마디였다. 배아, 즉 수정란과 같은 생명을 복제해 치료에 활용하겠다는 인간 배아 줄기세포 연구를 반대하는 것이 가톨릭 교회의 공식 입장이며, 그 배경을 생명 윤리 차원에서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복제된 배아라 할지라도 배아는 분명한 ‘생명체’라는 것과 그 대안으로 윤리적인 문제가 없는 성체 줄기세포를 연구해 줄 것을 강조했다. 또 가톨릭도 난치병 환자의 치료에 절대로 무관심하지 않으며, 오히려 최우선적으로 가톨릭 의학계를 통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황 교수는 유려한 말솜씨로 가톨릭에서 연구하는 성체 줄기세포 연구에도 관심을 갖겠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큰 무리 없이 서로의 입장을 설명하는 상황에서 마무리됐다. 생명 윤리에 관한 문제를 논의했다는 자체에 큰 의미가 있었고, 앞으로 윤리와 의학과 과학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열린 마음으로 인간 존엄성의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과제를 남겼다.
회담이 다 끝날 때까지 주교관 마당에는 언론사 기자들이 한 명도 자리를 뜨지 않은 채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교구 홍보실장과 황 교수 측의 교수 한 사람이 함께 기자회견을 할 수밖에 없었다.
“주 내용은 정 대주교와 황 교수는 생명 존중에 대해 일치된 의견을 보였고, 천주교 측은 배아 줄기세포 대신 성체 줄기세포 연구를 해달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양 진영의 첨예한 논쟁을 기대했던 기자들은 허탈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사실 첫 만남부터 천주교는 배아 줄기세포 연구를 허락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언론은 ‘만남 자체에는 의미가 있었지만 결과는 없었다’고 보도했다. 그럼에도 이날 저녁 방송사 뉴스는 과학과 종교 지도자가 만나는 장면을 톱뉴스로 보도했고, 다음 날 조간신문도 두 사람의 만남을 사진과 함께 1면에 보도하며 중요하게 다뤘다.
두 사람의 만남은 외국에서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이날 만남 이후 이와 관련한 유럽 많은 매체의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정 대주교로서는 황 교수와 만남 후 성체 줄기세포를 세상에 알릴 수 있는 기회였지만, 국민들의 부정적인 반응은 더욱 악화됐다.
황 교수가 활동하고 있는 서울의 교구장인 그에게 이 모든 것은 숙명이었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시간이 지나 어떤 결과가 주어지더라도 모든 것이 하느님의 역사이지….’ 정 대주교는 전교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지만, 그것 역시 하느님의 섭리라 여겼다. 그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느새 모든 가톨릭을 대표하는 생명 운동의 기수가 돼 있었다. 이제 그가 할 일은 어려운 순간들을 함께해 주신 주님과 주변 사람들을 위해 감사의 기도를 올릴 일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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