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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에서 희년을 보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1500년 희년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치세에 대해 교황 의전사제 요하네스 부르카르트(Johannes Burchard, 1450~1506년)는 자신의 『의전 일기(Liber notarum 또는 Diarium)』에 상세히 기록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1500년 희년에 관한 주요 사건들을 생생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1499년 12월 24일, 알렉산데르 6세 교황은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성문 개방식(Apertura della Porta Santa)’을 거행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옛 성 베드로 대성당에는 현관에서 본당으로 이어지는 다섯 개의 문이 있었습니다. 중앙에는 교황 레오 4세의 은장식에서 이름이 유래한 ‘아르젠테아(Argentea, 은문)’, 그 오른편에는 로마 여성들이 출입하던 ‘로마나(Romana)’, 왼편에는 외국사절을 인도하던 귀도네 가문의 이름을 딴 ‘귀도네아(Guidonea)’, 양쪽 끝에는 라벤나와 롬바르디아 출신 순례자들이 출입하던 ‘라벤니아나(Ravenniana)’, 그리고 성 베드로 대성당에 매장되는 시신이 들어오던 ‘심판의 문(Porta del Giudizio)’이 있었습니다.
알렉산데르 교황은 왼손에는 금으로 도금된 초를 들고 오른손으로는 교황 강복을 내리면서 아르젠테아 문 앞까지 행렬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성인호칭기도가 바쳐지는 가운데 석공장에게서 받은 의례용 망치로 벽돌을 세 번 두드리면, 석공들이 약 30분간 문을 완전히 개방했습니다. 이어 교황은 열린 문을 통과해 제대 앞으로 나아갔고, “Te Deum” 찬미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저녁기도가 시작되었습니다. 대성당의 나머지 세 성문 개방은 추기경들이 맡았습니다.
4월 13일에 교황은 자신도 희년의 전대사를 얻기 위해 네 개의 주요 대성당을 방문했습니다. 주님 부활 대축일 미사에는 무려 20만 명이 모였다고 전해질 정도로, 불안정한 시대에도 순례 열기는 뜨거웠습니다. 교황청 관료이자 역사기록가인 시지스몬도 데 콘티(Sigismondo de Conti, ?~1512년)는 “전 세계가 로마에 있다.”(orbis in urbe)고 기록했습니다. 다시 찾아온 흑사병과 해상에서의 해적의 위협으로 많은 이들이 오지 못했음에도, 헝가리,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에서 온 순례자들이 대거 로마에 도착했습니다.
희년의 끝무렵인 11월에는 대홍수로 테베레 강이 범람해 로마 시내가 침수되고 교통이 마비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희년은 주님 공현 대축일까지로 연장되었고, 이후 이탈리아 전역과 타 그리스도교 국가들로 확대되어, 로마에 오지 못한 신자들도 일정한 신심 행위와 기부를 통해 대사를 받을 수 있도록 허락되었습니다.
[교회의 언어] 아셔레이/마카리오스, 행복하여라
우리는 행복을 추구합니다. 과연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은 ‘행복하여라(μακάρɩος)’로 시작하는 참행복에 대해 말씀하십니다.(마태 5,3-12 참조) 본래 신들에게만 유보되었던 이 단어는 고통과 절망,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에게는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이후 의미가 확장되어 신들의 행복에 참여한 인간의 상태까지 포함하게 되는데, 행복은 ‘하느님께서 한계를 지닌 인간에게 베풀어 주시는 최고의 상태’를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μακάρɩος(마카리오스)와 같이 ‘행복하여라’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아셔레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단어는 어떤 사람이 참으로 행복한 상태에 있음을 선언하거나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이의 행복이 얼마나 크고 복된 것인지 칭송하는 감탄사처럼 사용되기 때문입니다.(시편 1,1; 32,2; 33,12 참조)
성경은 인간이 자신이 처한 상태와 환경에 대해 ‘스스로’ 복되다 또는 복되지 않다는 식의 행복을 말하지 않습니다. 참행복은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그분과 일치함으로써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참행복을 잃지 않을 수 있도록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그리스도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저 여인은 누구실까?”] “원죄 없이 잉태되신 분”
한국 교회의 주보 성인은 누구일까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이십니다. 박해가 한창이던 시절 조선 대목구장 앵베르 주교님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을 조선 가톨릭교회의 주보 성인으로 정해주도록 교황청에 요청했습니다. 기해박해가 끝난 1841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그 요청을 받아들여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을 한국 교회의 주보 성인으로 공표했습니다. 조선에서 선교하시고 순교하신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님들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 대한 신심이 대단히 깊었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까요?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 옆에는 기적의 메달로 널리 알려진 애덕 수녀회가 있습니다. 1830년 카타리나 라부레 수녀는 성모님의 발현을 보았고, “오, 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님, 당신께 의탁하는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O MARIE CONÇUE SANS PECHE PRIEZ POUR NOUS QUI AVONS RECOURS A VOUS)라는 기도문 메시지도 함께 보았습니다. 파리 대주교의 주선으로 성모님의 모습과 기도문이 새겨진 기적의 메달이 세계 곳곳에 보급되었습니다. 지금도 대부분 묵주는 기적의 메달이 부착되어 있어,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을 가까이 의식하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애덕 수녀회가 위치한 뤼 뒤박의 성모 발현지를 저도 자주 방문했습니다. 로마 유학 시절 방학을 이용해 불어 연수를 받기 위해 파리에 머물렀는데, 어학 수업을 마치면 그곳에 꼭 들러 묵주기도를 바쳤습니다. 푸른색이 감도는 평온한 성전에서 순례자들과 함께 경건한 침묵을 지키며 기도했던 기억이 마음속 깊이 남아있습니다.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는 걸어서 5분 거리, 전교회 신부님들도 뤼 뒤박의 성모 발현지를 방문하여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 기도했을 겁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선교를 준비하며 성모님께 의지하고, 먼저 파견된 이들의 순교 소식을 들으며 성모님께 더욱 절실히 의탁했을 것입니다. 조선 땅에 들어서면 순교를 각오해야 했던 시절, 아직 앳된 20대 젊은 신부님들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에게 영적 위안을 받으며, 복음 선포의 도구로 기꺼이 자신을 주님께 내어드렸습니다.
잉태 첫 순간에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과 특권으로” 원죄에서 보호받아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 대한 신심은 고대로부터 이어오지만, 교의, 곧 신앙 진리로 선포된 것은 1854년의 일입니다. “지극히 복되신 동정 마리아는 잉태 첫 순간에 전능하신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과 특권으로, 또 인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예견하여, 원죄의 모든 오점에 물들지 않고 보호되었다는 가르침은 하느님에 의해 계시 되었으며, 따라서 모든 신앙인에 의해 확실하고 분명하게 믿어져야 한다.”(DH 2803) 비오 9세 교황의 교서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Ineffabilis Deus)의 선언입니다.
여기서 아주 특별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요청됩니다. 그런데 동정 마리아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에 원죄 없이 잉태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셔야 그분을 믿는 신앙도 가능하고 구원도 가능한데, 어떻게 마리아는 “잉태 첫 순간에” 죄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을까요? 교서는 두 가지 사항을 말합니다. 먼저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과 특권으로” 가능했다고 밝힙니다. 하느님께서는 인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내어주시는 자비로운 아버지이시기에 당신만이 아시는 방식으로 은총을 베푸셨다는 겁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예견하여” 발생했다고 강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 신비를 통해 구원을 가져오셨고, 승천하시어 세상의 한계를 넘어 우리와 함께 계신 분입니다. 그분의 십자가 죽음은 시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어 모든 이를 위한 구원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성모님은 시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에 죄에서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원죄 없는 잉태 교의는 조선에 파견된 선교사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님들은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바라보며 창조주 하느님께 찬양을 드렸고,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들을 만나며 놀라워했습니다. 복음을 알지도 못하고 세례를 받지도 않은 이들이 어떻게 이토록 선하고 진실할 수 있는지, 자주 감탄했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접하지 못한 이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성사의 은총을 받지 못했으니 파멸되었을까, 선교사 신부님들은 이 문제를 깊이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의 모습을 바라보며 희망을 얻었습니다. 성모님 역시 잉태되는 순간 복음을 알지 못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고백할 수 없었지만,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과 특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예견하여” 구원받은 것입니다. 과연 그렇다면, 복음을 접하지 못하고 죽은 조선 땅의 선량한 이들에게도 하느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구원의 길이 활짝 열려있었겠구나, 확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원죄 없는 잉태는 모든 이의 구원을 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 보여줘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님들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 신심을 널리 전했습니다. 박해 시기 동안 묵주기도를 장려하며 기적의 메달을 보급했고, 명동대성당을 축성하면서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 봉헌했습니다. 대구대교구의 성모당도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을 기리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과 참으로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교회가 세워지기 전부터 한국의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셨고, 성모님은 신앙 선조들에게 하느님 사랑의 표징이 되어 주었습니다. 성모님께 희망과 위안을 얻은 한국 교회는 성모 신심이 가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1티모 2,4)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 교의는 모든 이의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알려줍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강생 이전에 죽음을 맞이한 이들, 여러 상황 때문에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이들을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은 이렇게 밝힙니다. “사실, 자기 탓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분의 교회를 모르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양심의 명령을 통하여 알게 된 하느님의 뜻을 은총의 영향 아래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16항)
원죄 없는 잉태는 모든 이의 구원을 원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을 보여줍니다. 성모님은 잉태 순간부터 하느님의 사랑을 온전히 받았고, 그 사랑을 이웃과 세상에 온전히 전하는 하느님의 탁월한 협력자로 살아갔습니다. 우리 또한 사랑의 봉사자가 되도록 겸손히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가톨릭 교리] 은총과 구원을 어떻게 받을 수 있을까요?
은총은 하느님의 선물
“은총은 본성을 전제하고, 이를 완성한다”(Gratia supponit naturam et perficit illam).
20세기 스위스의 저명한 가톨릭 신학자인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살(Hans Urs von Balthasar)은 2천 년 그리스도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3명의 신학자를 고대 서방교회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동방교회의 오리게네스(Origenes), 그리고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라고 언급했습니다. 위의 경구는 그중 한 명인 성 토마스의 유명한 말입니다.
이 경구는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은 마치 해와 비가 선인이나 악인에게 차별 없이 내리는 것처럼 누구에게나 전해지는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어떤 사람은 은총을 많이 받은 것처럼 보이고, 어떤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삶이 늘 어렵고 힘들게 보이는데, 위의 경구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적절한 대답 중 하나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넘치는 은총을 주시지만, 대부분 사람은 하느님이 은총을 주셔도 알아보지 못하고, 제대로 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다양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신앙 성숙도에 따른 것이기도 하고, 아니면 은총을 받을 준비 자세나 죄의 상태 여부, 혹은 은총을 이미 받았지만 아직 깨닫지 못하는 경우 등등 다양합니다. ‘은총은 인간의 본성을 전제하고, 이를 완성한다’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은총을 베푸실 때 우선적으로 우리 인간의 본성을 존중해 주시고, 우리에게 알맞은 방식으로 은총을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 말은 하느님이 주시는 은총을 알아보고 잘 받아들이기 위해 인간은 자기 본성의 능력을 깨닫고 항상 하느님께 응답하고 협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총이란 무엇인가요? 우선 ‘은총’ 내지 ‘은혜’라고 번역되는 구약성경의 단어는 히브리어로 헤세드(hesed), 라하밈(rahamim), 헨(hen) 등인데, 이는 하느님이 베푸시는 자비, 호의, 친절, 사랑 등의 뜻입니다. 이 단어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이 ‘카리스’(Charis)입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카리스마’라는 단어의 뜻은 하느님이 주신 특별한 선물, 즉 은총입니다. 따라서 은총이란 인간의 행복과 완성과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따뜻한 마음, 호의적 선물, 무상적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구원
인간은 창조될 때 하느님의 모상으로 만들어진 존재이기에, 하느님을 닮았고 비슷한 모습이 영혼 안에 새겨져 있습니다. 살아계신 성령의 궁전인 인간의 마음은 창조 당시에는 그 자체로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고 닮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지은 죄, 즉 원죄(原罪) 때문에 인간의 영혼은 망가지고 혼탁해져서 스스로 힘만으로는 하느님과 일치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창조 사건 이래 인간을 도와주시고자 다양하고 수많은 사건과 기적들을 보여주셨고, 여러 예언자를 통해 당신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당신의 외아들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구약과 신약의 이 모든 사건과 계시는 모두 인간에게 은총을 베푸시고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언제나 인간이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께 향하도록 도와주는 힘이고, 인간이 올바로 살기 위한 하느님의 도움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 인간 구원은 인간 스스로 힘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리스도교는 불교처럼 자력갱생의 종교가 아니라, 철저하게 하느님의 은총을 통한 구원입니다. 착하게만 살면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믿음, 더 정확히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을 알고 믿고 의지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을 구원하는 하느님의 은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인간은 자신 안에 있는 죄의 근본적인 속성을 세례를 통해서 벗어나고, 그리고 예수를 유일하신 그리스도, 메시아, 구세주라고 믿고 또 그분의 가르침대로 산다면 은총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 이르는 길이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길입니다.
은총 자체이신 분과 은총이 가득하신 분
은총에 대한 모든 답은 두 사람에게서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바로 예수님과 성모님입니다.
예수님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표현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말씀을 통해 세상을 창조하셨고, 이 세상은 말씀을 통해 시작했으며, 지금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인간을 살리는 힘이고, 하느님의 뜻과 의지, 구원 은총 자체입니다. 하느님의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해 실현되고,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은총 자체입니다.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은총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만난다는 것은 은총을 마주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은총 자체입니다.
그리고 성모님은 은총의 여인이십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이라고 우리가 매일 기도하는 것처럼 성모님은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 분입니다. 성모님이 은총을 가득하게 받으신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그 의미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 머리로 모든 것을 미처 이해하지 못하셨지만, 성모님은 “예!”(Fiat)라고 대답하셨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의 기본자세가 신앙과 순종, 즉 ‘신앙적 순종’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성모님이 하느님을 열심히 믿고 따랐지만, 결국 하느님은 사랑하는 외아들이 비참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하지만, 성모님은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고 더 열심히 하느님을 믿고 따랐습니다.
신앙이란 무엇인가, 은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예수님과 성모님이 정답을 알려주십니다. 예수님은 성부 하느님께 순종하셨습니다. 성모님 역시 그러하셨으며, 예수님 곁에서 너무 멀지도 않고 너무 가깝지도 않게 머물러 계셨으며, 언제나 예수님 말씀대로 사셨습니다. 그랬기에 성모님은 은총이 가득하신 분이 되었고, 모든 믿는 이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은총이란 무엇인가? 신앙을 통해 알아볼 수 있고, 온전히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은총을 통해 구원에 이르는 것이 신앙의 목적입니다. 따라서 구원이란 은총의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교회, 하느님 백성의 친교] (23) 하느님 백성의 보편성 ① 「교회헌장」 제13항 전반부
「교회헌장」 ‘제2장 하느님의 백성’ 9항~12항은 하느님 백성이 자기 사명을 실현하기 위해 수행하는 사제직과 예언자직에 대해서 설명하고, 은사를 통한 왕직의 수행도 암시적으로 담았습니다. 여기서 나타난 직분의 수행이 하느님 백성의 본질적 특징이라면, 이어지는 13항~17항은 하느님 백성의 구성원에 대한 것으로, 특별히 구성원과 관련된 하느님 백성의 ‘보편성’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교회 구성원의 다양한 단계들을 제시했던 공의회의 초안과 비교해 보면, 이 부분은 신학적으로 새로운 주제입니다. 초안에서는 세상과 투쟁하는 교회의 구성원과 그들의 구원을 위한 교회의 필요성이 중심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배타적으로 보이는 이 교회론에서 교회의 구성원은 가톨릭교회의 세례를 받은 사람으로 한정됩니다. 이러한 구성원들은 교회의 신앙과 성사들 그리고 교도권과의 일치를 통해서 교회 안에 머물고 있습니다. 또한 초안은 베드로와의 친교에서 갈라진 형제들과의 결합에 대해서 언급하고, 가톨릭교회를 모르더라도 함축적인 원의를 가지고 하느님의 은총에 열려있는 사람도 세례 지원자에 해당한다고 말합니다. 필립스가 작성한 새로운 초안도 가톨릭 신자, 그리스도인, 비그리스도인 등 가톨릭교회와 연관된 공동체들을 단계적으로 열거합니다.
「교회헌장」 13항은 이러한 단계들과 관련하여, 교회 공동체에 속하는 사람들과 교회의 보편성을 하나의 주제로 결합합니다. 이 항은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을 이루도록 불린다.”라고 시작합니다. 하나이고 유일한 하느님 백성은 모든 세대에 온 세상으로 나가, 흩어진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는 하느님의 계획을 성취하는 사명을 지닙니다. “모든 세대”에 “온 세상”의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불린다는 것은, 하느님 백성이 특정 시기와 특정 지역의 특정 집단에 국한되지 않고 전체에 열려있는 보편적 성격의 공동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이 보편성은 인류를 하나로 만드는 단일성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하느님 백성을 하나로 모으시고자,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들을 보내시어, 그분이 만물의 상속자요 모든 사람의 스승이요 왕이며 사제가 되고 하느님 백성의 머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당신 아들의 성령을 보내시어 당신 백성이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온 교회와 모든 신자에게 모임과 일치의 근원이 됩니다. 성령의 작용으로 인한 이러한 일치는 사도들의 가르침과 친교에서 그리고 빵의 나눔과 기도에서 드러납니다. 이렇게 하느님 백성의 보편성은 모든 사람의 일치를 향해 있습니다. 이 모임과 일치가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성자와 성령을 통해서 중개되어, 하느님 백성은 이 일치를 세상에서 역사적으로 실현합니다. [2025년 8월 3일(다해) 연중 제18주일 의정부주보 3면, 강한수 가롤로 신부(사목연구소장)]
[교회, 하느님 백성의 친교] (24) 하느님 백성의 보편성 ② 「교회헌장」 제13항 후반부
「교회헌장」 제13항의 후반부는, 전반부에서 언급한 하느님 백성의 보편성과 단일성의 개념에 근거하여, 하느님 백성이 다른 민족들과 갖는 관계를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지상의 모든 민족 가운데에 하나의 하느님 백성이 있습니다.” 하느님 백성은 천상 왕국의 시민을 모든 민족 가운데서 모아들입니다. 하느님 백성이 지상의 민족들에게서 백성을 모으기에 지상에 있지만, 그 백성은 지상 왕국에 속하지 않고 천상 왕국에 속합니다. 그래서 하느님 백성 전체는 성령 안에서 민족과 민족 사이의 경계를 초월하여 신자들 간의 친교를 이루는 ‘천상적 특성’을 갖습니다.
하지만 하느님 백성의 이러한 특성이 민족들의 “현세적 선”을 없애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민족들의 “역량과 자산과 관습”을 받아들여 그것을 “정화하고 강화하며 승화”합니다. 공의회의 이러한 가르침은 신앙과 문화의 관계를 뒤돌아보게 합니다. 과거에는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가 신앙의 이름으로 민족들의 고유한 문화와 그 능력을 침해한 적이 종종 있었습니다. 주님의 선물인 이 보편성으로 교회는 모든 민족이 그들의 좋은 것들과 함께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느님 백성의 보편성은 한 부분이 다른 부분들과 그 은혜를 나눔으로써 전체와 각 부분이 일치 안에서 충만함을 이루며 성장하게 합니다. 하느님 백성은 여러 민족 가운데에서 모였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 백성 안에도 여러 계층이 있어서, 그 지체들 사이에 다양성이 존재합니다. 먼저 거룩한 봉사 직무를 받은 사람은 형제들의 선익을 위해서 직무를 수행하고, 수도 생활을 하는 사람은 성덕을 추구하면서 자신의 모범을 통해 형제들을 격려합니다. 신분만이 아니라, 각 개별교회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전통으로 교회 간의 친교를 이루고, 베드로 좌의 수위권은 개별교회의 다양성을 보호하면서 개별적 요소들이 일치에 도움이 되도록 감독합니다.
이렇게 하느님 백성의 구성원 사이에는 “영적 부요”와 “사도직 인력”과 “현세적 자원”에 관한 친교가 존재합니다. 따라서 “저마다 받은 은사에 따라, 하느님의 다양한 은총의 훌륭한 관리자로서 서로를 위하여 봉사”(1베드 4,10)하라는 사도의 말씀에 따라, 개별교회를 포함한 하느님 백성의 구성원은 서로 좋은 것을 나누도록 불린 것입니다.
13항의 마지막 단락은 보편성에 대한 결론으로 하느님 백성의 “보편적 일치”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이 일치는 세계 평화를 증진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이 “보편적 일치”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가톨릭 신자나 다른 그리스도인들이나 예외 없이, 세상 모든 사람이 이 일치에 속하거나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으로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