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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엘로 올라가라
(35:1-15)
임성락
본장내용
1-4 벧엘로 가라시는 명령과 출발전의 준비
5-8 도착과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의 죽음
9-15 벧엘에서 하나님이 다시 나타나시고 축복
16-20 에브랏 도상에서의 라헬의 난산과 죽음
21-26 르우벤의 죄와 12아들 이름
27-29 야곱의 헤브론귀향과 이삭의 죽음
서론
야곱은
1) 지팡이 하나만 가지고 출향했으나 거부로 귀향 (32:10)
2) 형과의 문제도 은혜롭게 해결
사람은 이런 때 과거를 잊어버리고 현실에만 만족하기 쉽다.
그래서 숙곳에 거하고(33: ) 세겜 사건이 일어났다. (34: )
그런데 하나님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고 명하셨다.
하나님은 벧엘 하나님이시다. (31:13)
본론
1.벧엘이란?
1) 하나님의 은혜받는 곳 28:12
2) 하나님께 서원한 곳 28:20-22
2. 왜 벧엘로 가라고 하셨는가?
1) 은혜 받은 것을 잊지 말도록
2) 서원한 것을 갚도록
3. 벧엘로 가려면
1) 우상을 버리라 - 탐심, 허식
2) 정결 - 가족 전부가
결론
하나님은 그를 도우신다.(34:30) 두려워했으나 하나님은 그에게 방패가 되셨다.(5- )
새로운 현현과 복을 얻었다.
소명에 응한 자에게는 계시와 복이 주어진다.
벧엘로 올라가자
(창세기 35:1-15)
디나의 사건으로 인하여 너무 많은 상처와 어둠을 안은 야곱에게 하나님은 그곳 세겜을 떠나 벧엘로 올라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오늘 말씀은 그 명령을 실행에 옮기는 이야기입니다. 세겜에서 일어난 일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일이 벧엘에서 일어납니다. 세겜의 환난은 끝났고 벧엘의 희망과 승리와 축복이 쉼 없이 베풀어집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벧엘로 올라가라"는 한 마디가 야곱 일행의 사정을 완전히 바꿔버립니다. 여러분도 이 말씀을 들으며 세겜을 떠나 벧엘로 안착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세겜은 어떤 곳입니까? 세겜 땅에서는 디나가 세겜에게 강간당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야곱 일행에게 마음의 상처와 아픔을 안겨준 곳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누이의 일로 인하여 인간적인 복수극을 벌였습니다. 이 복수극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적들이 침공해 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에 떨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때 나타나셔서 더 이상 하나님의 자녀들이 고통과 아픔의 자리에 있지 말고 떠나라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이방적 삶의 울타리에서 머물러 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오늘 성경이 주는 교훈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명령
(1절)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야곱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힘들 때마다 야곱을 찾아주셨습니다. 복중에서부터 야곱이 에서보다 더 클 것이라고 말씀하신 이래(25:23) 늘 하나님은 야곱과 동행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오며 형의 위협을 느낄 때 군대의 모습(마하나임)으로 나타나 주셨고(32:1), 밤새 하나님 앞에서 씨름할 때도 그랬습니다. 또 세겜에서 찬바람을 맞고 힘들어하니까 하나님은 나타나셨습니다.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나타나 주십니다. 마찬가지로 영적 이스라엘인 여러분과 늘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함께 있기만 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해야 할지를 가르쳐주십니다.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너무 심각한 어려움을 당하자 야곱은 그 문제(디나사건)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단을 쌓으라고 하십니다.
야곱은 이미 그렇게 했어야 하는데 너무 오래 세겜에 머물러있다 보니 그 생활에 익숙하고 만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은 약속(28:20-22)을 상기시킵니다. 세상사에는 열심인데 하나님께 약속한 일을 생각지 못하는 야곱과 우리가 무엇이 다를까요? 자, 바로 여기서 우리는 야곱이 그랬듯 벧엘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잘못 가고 있으면 어려운 사건을 주어서라도 돌이키십니다. 디나의 사건은 바로 그런 매입니다.
여러분, 매맞기 전에 여러분의 잘못된 길을 바로잡으십시오. 야곱은 세겜에서 그토록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왜 그런 어려움을 당하는지 몰랐습니다. 우리도 이럴 때가 많습니다.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괘도를 수정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걸 회복해야 합니다. 예배가 살면 우리 삶이 가치 있고 행복하게 됩니다.
야곱의 순종
야곱은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지자 즉각 순종합니다. 벧엘로 올라가기 위하여 준비를 합니다. 벧엘에서 할 일은 단을 쌓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를 제대로 드리기 위해서는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게 있습니다. (2절)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벧엘로 올라가는 것은 삶의 자리만 이동하는 게 아니고 잃었던 영적 삶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세 가지를 명령했고 모두가 순종했습니다.
먼저 우상을 제거하였습니다. 하나님 이외의 신을 섬기기 위하여 만들어진 우상 물품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야곱의 집에 우상이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게 야곱의 집안만의 문제입니까? 오늘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으면서 또 다른 것을 얼마나 많이들 믿습니까? 돈, 명예, 지식, 권세 등 수도 없이 많습니다. 빨리 이런 것을 버려야 예배가 살아납니다. 예배드리러 교회에 나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배가 성공하기 위하여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 게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하면 예배는 항상 실패합니다.
다음으로 정결케 했습니다. 이방신을 섬기던 더러운 육신의 때를 벗는 의미를 갖습니다. 회개의 진정한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 의복을 바꿔 입었습니다. 몸도 씻고 의복도 빨아 입는 것은 후에 모세의 율법에 의해 규정된 정결례였습니다. 신약도 마찬가지입니다. (마5: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몸과 맘과 영혼을 깨끗이 하고 예배를 드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 후에 야곱은 벧엘을 향해 갑니다. (5절) "그들이 발행하였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신고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방향을 바로 잡으니 아무도 그들을 쫓는 자가 없습니다. 오히려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무사히 벧엘에 도착하였고 도착하자마자 단을 쌓았습니다.(7절) 하나님께서 제시한 길을 가니 하나님과 함께 하셨으며 결국 약속한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지금 가는 길에 이상은 없습니까?
벧엘의 축복
하나님은 벧엘로 올라가서 단을 쌓은 야곱에게 나타나셨습니다.(7절) 단을 쌓아 영광 돌리는 야곱에게 복을 선언하십니다. 그 복을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름을 바꿔 부릅니다. 이미 야곱은 얍복나루에서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바꿔 부르진 않았습니다. 그것은 이름이 바뀌고 나서도 아직 우상숭배와 세상적 삶이 그를 재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아젠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벧엘로 와 바뀐 신앙인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의 바뀐 이름으로 부르시겠다는 것입니다. 성도라는 이름보다 더 귀한 게 성도의 삶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번성과 창대의 복을 주십니다. 야곱은 세겜에서 두려워 떨었습니다. 다 죽을 것을 염려했으나 벧엘로 돌이키고 나니 번성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11절)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이 약속은 이미 (27:29, 30:14)에서 하신 약속의 재확인입니다. 야곱의 후손이 번창할 것은 물론 육의 왕도 나고 더 나아가 메시야가 날 것이라는 복입니다.
땅을 주시겠다 하십니다. 야곱은 세겜에 땅을 사고 거기 거하려고 하다가 큰 환난을 당했습니다. (33:18,19). 그러나 돈주고 산 그 땅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벧엘로 돌아오니 가나안의 모든 땅을 그와 그 자손에게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 약속들은 이미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셨던 약속이고 다시 야곱에게 주셨습니다. 자기 맘대로 하던 야곱이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니 하나님의 백성으로 누려야 할 복을 다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 지금 세겜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까? 환난과 고통이 이어짐에도 불구하고 거기가 아직 떨쳐버릴 것을 떨쳐버리지 않은 세겜이란 걸 모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 벧엘을 바라보십시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십시오. 그러기 이해 먼저 잘못을 깨듣고 회개하여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잊고 살았음을 회개하고 예배생활을 회복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야곱에게 그러셨듯, 성도로서 마땅히 누려야할 복이 함께 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내 뜻대로 사는 삶은 그럴 듯해도 결국 환난과 고초뿐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대수롭지 않게 보여도 결국은 복된 사람입니다. 세겜을 떠나 벧엘에 살므로 행복한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다시 벧엘로
창 35: 1-15
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2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3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4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5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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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처럼 물러갈 것 같지 않았던 더위가 서서히 물러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한 주간이었습니다.
좀 이른 듯하지만 사람들의 입에서는 벌써 가을이라는 말이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이 맘 때가 되면 뜨거운 여름을 보내며 가을을 기다리는 마음을 더하게 해 주는 시가 있습니다.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실렸던 독일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가을날’이라는 시입니다.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십시오
들에다 많은 바람을 놓으십시오
마지막 과실을 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그들을 완성시켜,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하십시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이후로도 오래 고독하게 살아 잠자지 않고, 읽고, 그리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바람에 불려 나뭇잎이 날릴 때, 불안스러이 이리저리 가로수 길을 헤맬 것입니다
이 시를 읽고 있으면 여름날의 어수선한 분위기는 사라지고 갑자기 마음이 서늘해지고 경건해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더욱이 하나의 계절을 보내고 맞이하는 것이 단지 우연만이 아닌... 거기에는 깊고 오묘한 하나님의 섭리와 뜻이 있음을 느끼게 해줍니다.
우리가 보낸 여름이 뜨거운 열기와 비바람으로 충만한 시간이었다면 거기에는 그럴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제 시간이 지나면서 밝혀질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우리들에게 이렇듯 계절이 바뀌는 이면에 존재하시는 거룩하시고 영원하신 분 앞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는 우리가 감히 접근할 수 없는 거룩한 영역이 있으며, 그것을 인식함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더욱 감동적으로 생명으로 가득한 삶을 살 수가 있게 되는 것이지요.
아침 저녁으로 확연히 달라진 기온 속에서 우리 가운데서 이미 새로운 일을 시작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며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은 더욱 풍성하고, 여러 가지 가능성과 감동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야곱의 이야기를 함께 읽었습니다.
시기적으로 보면 야곱이 무엇인가 해보고자 하는 의욕으로 가득한 그의 인생 여정에 있어서 가장 안정되고 빛나는 시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빈손으로 외삼촌의 집으로 도피했던 그가 20년 만에 큰 부자가 되었고, 아들을 열한 명이나 두었으며, 많은 식솔들을 거느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형 에서와도 눈물겨운 화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의 앞에는 아무 것도 문제 될 것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성공적으로 고향에 돌아오게 된 그에게는 시급한 과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가족과 거느린 가축들이 정착할 곳을 찾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숙곳이라는 곳에 자기의 가축들이 살 수 있는 외양간을 짓고 자기가 살 집을 지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곧 세겜 땅으로 이주를 하였습니다. 아마 초막이라는 뜻을 지닌 숙곳보다는 세겜이라는 곳이 그가 살기에 더 좋은 곳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는 세겜 땅에서 땅을 사고 장막을 쳤습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위하여도 단을 쌓았습니다.
이제껏 몸 붙여 살 곳 없이 떠돌던 그가 비로소 사람이 살 만한 곳에 정착을 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야곱에게 또 다시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자녀들로 인해서 생긴 문제였습니다.
그 곳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러 나갔던 야곱의 딸 디나가 그만 그 곳에 살던 히위 족속의 추장 세겜에게 성 추행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세겜은 그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정식으로 청혼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야곱의 아들들은 그의 청혼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어떻게 해서라도 여동생 디나의 당한 일을 복수해야 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들은 꾀를 내었습니다.
‘우리의 집안과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고는 히위 족속의 남자들이 할례를 행해서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을 때에 그들을 기습적으로 공격해서 남자들을 다 죽이고는 모든 재물을 다 빼앗아 왔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야곱은 경악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디나가 그러한 수치를 당한 것은 잘못된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큰일을 벌인다면 이제 그들은 이곳 사람들의 복수가 두려워서 도저히 이곳에서는 발붙이고 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 위기를 벗어나야만 하는 것인지, 이곳을 떠나자니 갈 길이 막연하고. 이곳에 머물러 있자니 이렇게 잔혹한 일을 저지른 자기들을 사람들이 도저히 살려 줄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야곱은 다시금 어떻게 할 수 없는 위기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야곱을 찾아오신 분이 다름 아닌 하나님이셨습니다.
바로 이 대목이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찾아오셔서 그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그것을 일깨워 주십니다.
그것은 야곱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벧엘을 말씀하실 때에 그는 무척 미안하고 창피한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벧엘은 야곱에게 전혀 낯선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에는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과 자신만이 알고 있는 추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야곱에게 일깨워 주십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예전에 벧엘에서 내가 너를 찾아 간 적이 있지 않느냐? 그 때에 나는 몹시 어리고 불안에 떨고 있는 네게 장래에 대한 커다란 확신과 믿음을 불어 넣어준 적이 있지... 어쩌면 너는 그 날 벧엘에서 나를 만난 덕분에 여기까지 왔는지도 몰라...’
하나님은 벧엘을 말씀하시면서 더 이상 말을 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래도 야곱은 그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를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지요.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벧엘은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서 외삼촌의 집으로 도망을 가다가 하나님을 만난 곳입니다.
밤에 광야에 홀로 누워 돌베개를 베고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하늘이 열리고 사다리가 내려오더니 천사가 사다리를 타고 오르내립니다.
하나님께서 그 위에 서서 야곱에게 말씀하십니다.
자신은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으로서 야곱 너의 여정도 지켜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날 하나님은 야곱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28:15)
이 날의 경험이 야곱에는 얼마나 큰 힘과 위로가 되었을까요?
그가 간절히 하나님을 원한 것도 아닙니다. 정말 외롭고 힘들고 곤고할 때에... 아무도 자기의 곁에 없을 때 하나님이 친히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가는 길과 미래를 보장해 주셨습니다.
야곱은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침이 되었을 때에 그는 베고 자던 돌을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부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약속을 맺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저에게 약속하신 것처럼 나의 길을 지켜 주시고 무사히 돌아오게 하신다면... 저는 평생 여호와를 나의 하나님으로 섬기겠습니다. 오늘 아침 제가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에서 십분 일을 반드시 드리겠습니다...’
비록 시간이 무척 흘렀지만 오늘 다시 위기에 직면한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 그는 바로 하나님과 맺었던 그의 약속이 생각났던 것입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돌아 왔을 때 형과 무사히 화해를 하고 모든 일이 잘 해결되었을 때에 그는 진작 벧엘을 찾았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젊은 날에 그가 하나님과 맺었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숙곳에 집을 짓고 외양간을 만들기 전에, 세겜에서 땅을 사서 자신의 삶의 터전을 만들기 전에, 그가 먼저 찾아갔어야 하는 곳은 바로 벧엘입니다.
설혹 아직도 그곳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 광야와도 같은 곳이라고 하더라도,설혹 그가 벧엘을 찾는 일 때문에 세겜에 정착하는 일이 좀 더디게 진행이 되더라도, 그래도 그가 먼저 찾아 갔어야 하는 것은 벧엘인 것이지요.
그 곳에서 이제껏 자기를 보이지 않는 손길로 자신을 인도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고 그리고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이 발걸음은 안타깝게도 그만 세겜에서 머무르고 말았습니다.
물론 거기서도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는 세겜에서도 여호와 하나님께 단을 쌓았습니다.(창33장:29)
하지만 그것은 편법에 불과한 것이지요.
세겜에서 벧엘까지는 그다지 먼 거리가 아닙니다.
한 40-50km 정도 되는 거리이지요.
이제까지 외삼촌의 집에서 출발한 그의 여정을 생각하면 결코 멀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길이지요.
그렇다면 무엇이 야곱의 발목을 세겜에서 머물게 한 것일까요?
왜 그는 내친 김에 예전에 그가 하나님과 맺었던 약속을 생각하면서 벧엘까지 올라갈 수는 없었을까요?
물론 그의 마음속에 벧엘에 대한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겠지요
‘벧엘까지 가기는 해야 하는데 여기 세겜에 그냥 머무를 수는 없는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가 처한 현실이 그의 발목을 붙잡는 것입니다.
‘세겜에 익숙해지면... 세겜에서의 생활이 확고해지면... 좀 더 안정이 되면 그 다음에 벧엘을 찾아도 되겠지...’ 그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벧엘로 올라가는 일을 조금씩 뒤로 미루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오늘과 같은 위기를 만나게 된 것이지요.
이러한 면에서 야곱은 오늘 우리들의 모습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내면에서는 벧엘로 가야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경우가 우리에게는 얼마나 많은 것인가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번거롭게 벧엘로 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하나? 여기 세겜에서도 단을 쌓고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면 되지...” 이러한 생각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이럴 때에 세겜은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삶의 현장입니다.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이 있고 우리가 감당해야할 많은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비해서 벧엘은 마치 야곱이 젊은 날에 경험했던 것처럼 사람들이 별로 없는 외진 곳입니다. 하지만 그 곳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세겜에 몸 붙여 살면서 벧엘을 바라보는 우리에게는 그러한 마음이 들 때가 참 많습니다.
“이제는 좀 하던 일을 멈추고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데 이제는 여러 가지 잡다한 일로부터 벗어나서 진지한 모습을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돌이켜야 하는데... 그래야만 살 것 같은데... ”
이러한 마음이 들 때가 참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여기 세겜에서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아닌데 야곱처럼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하나님께 단을 쌓으며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합니다. 벧엘이 있고나서 세겜이 있는 것인데... 우리에게는 벧엘보다는 세겜이 더 중요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 거기서 네 하나님께 단을 쌓으라...’
하나님은 그제야 야곱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벧엘로 올라가서 그를 여기까지 인도하여 주신 하나님께 단을 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이것은 야곱의 삶이 새롭게 출발하는 결정적인 기회가 되었습니다.
야곱은 단단히 결심을 합니다.
‘그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하나님의 말씀대로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서부터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자...’
그는 자기의 모든 식솔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자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2b-3)
이렇게 말하는 야곱의 마음은 어떤 것입니까?
그는 정말 자신의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기는 일로부터. 이제껏 적당히 믿어왔던 습관을 벗어 버리고... 자신과 식솔들의 몸과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더 많이 의지하는 세상적인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가장 낮고 겸손한 모습으로...
자기의 모든 정성과 뜻을 다해서 하나님께 단을 쌓으며 다시금 자신의 운명과 미래를 오로지 하나님의 손에만 맡기고 싶은 마음이 그에게 생겼습니다.
바로 이것이 벧엘로 길을 떠나난 사람들의 마음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러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도 야곱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벧델을 향하여 길을 떠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 거기서 하나님께 단을 쌓으라..’
이것은 단지 야곱뿐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들의 삶이 새롭게 시작될 수 있는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벧엘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어떻게 하면 세겜을 벗어나서 벧엘로 향할 수가 있을까요?
야곱은 베델로 떠나기에 앞서서 식솔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방 신상을 제하여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어라...’
바로 이것이 우리가 벧엘로 올라가는 방법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동안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치 못하게 살던 모든 모습들... 버려야할 습관들... 우리가 자랑하던 세상적인 요소들... 이러한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여호와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자기를 꾸미지 말고 진정 가장 낮고 부끄러운 모습 그대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이런 놈입니다... 이렇게 밖에는 안 되는 사람입니다. 저를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 이것이 바로 벧엘로 올라가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 속에서 ‘단을 쌓으라’는 말이 세 번이나 반복해서 나옵니다.
어쩌면 이것은 그 당시의 풍습과 우리들 사이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이렇게 아름답고 거룩하게 만들어진 제단이 있지만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단을 쌓아야만 하는 것이지요.
물론 후대로 가면 정해진 성소가 있지만 아직은 그렇지 못하던 때였습니다.
아마 야곱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돌을 하나씩 하나씩 올려가면서 단을 쌓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동안 멀리했던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벧엘을 찾아 간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향하여 단을 쌓는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850명의 선지자들과 대결 하면서 여호와가 진정 우리의 운명을 책임지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드러내 보이려 할 때에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무너져버린 여호와의 단을 새롭게 쌓는 일이었습니다.
엘리야가 무너진 단을 다시 쌓았을 때 하나님은 그 단위에 불을 내리셨던 것이지요.
오늘 이러한 결단이 우리들 모두에게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우리의 제단이 무너진 것은 아닌가요?
너무 세상에 몰두에서 살다보니 여러 가지 일에 분주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단도 무너져 버린 것은 아닌가요?
피곤하다는 이유로 기도하기를 쉬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세상사는 일이 너무 힘이 들어서 기쁨과 감사를 잊고 사는 것은 아니던가요?
너무 이기적인 생각에 빠져서 사랑하고 섬기는 일은 아예 사라져버린 것은 아닙니까?
야곱은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 단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동안 게을리 했던 여러 가지 것들을 다시금 회복하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이지요.
우리가 다시 벧엘로 올라간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난 여름을 지나면서 바쁘게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너져버린 제단을 다시금 쌓아올리는 우리들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야곱이 베델로 올라갔을 때 거기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하나님께서 그를 벧엘로 부르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9절에는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야곱의 인생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대목입니다.
한 대목 한 대목 생각해 봅시다.
*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밧단아람이란 그가 20년 동안 몸담고 살던 외삼촌의 동네인 하란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야곱의 불안하고 고달픈 여정이 끝나는 곳은 바로 벧엘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대목입니다.
야곱의 생각에는 얍복강을 건너고 에서와 화해를 했을 때 비로소 길고 지루하기만 했던 나그네의 여정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지요.
그가 벧엘로 돌아왔을 때, 하나님께 단을쌓았을 때 비로소 그의 고단한 여정이 끝났음을 말해줍니다.
이렇듯 그의 나그네길이 끝났다는 것... 이것이 중요한 까닭은 무엇인가요?
나그네의 길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안식도 없는 것이지요.
불안하기만 합니다.
오늘은 누구를 만나고 내일은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아무 것도 알 수가 없는 것,. 이것이 바로 나그네들이 길에서 겪는 일입니다.
야곱의 여정이 이러했습니다.
그는 오늘 벧엘이 이르기까지 한 순간도 맘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벧엘에서 참된 평안함과 안식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품에 안길 때에만 비로소 평안함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벧엘을 찾아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는 다시금 하나님을 경험하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이렇게 자신을 소개하셨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11절)
우리는 하나님께서 99세가 된 아브라함을 찾아오셨을 때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 창17:1)
하나님께서 이렇게 자신의 전능함을 나타내실 때에는 특별한 까닭이 있습니다.
도무지 인간의 능력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을 이루어 가시려 하는 자신의 계획을 드러내실 때에 스스로를 우리들에게 이렇게 소개하셨던 것이지요.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각해보면 바로 여기에 우리의 삶의 모든 비결이 담겨 있는 것이지요.
나는 연약하고 부족하더라도 내가 믿는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분이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염려하거나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마침내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벧엘을 찾아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그에게 복을 주시고...
벧엘에서 야곱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복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더 이상 야곱으로 부르지 말도록 이스라엘이라는 존귀한 이름으로 부르도록 하셨습니다.
야곱은 남의 발뒤꿈치나 잡는 좀 치사한 사람이라면 이스라엘은 자신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 맡기고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을 뜻합니다.
이렇듯 야곱이 이스라엘 되듯 놀라운 삶의 변화가 오늘 우리들 가운데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은 야곱에게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후손들과 그들이 발붙여 살 수 있는 땅에 대한 복을 내려주셨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바라는 것이 아니던가요?
야곱이 선뜻 세겜을 떠나지 못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모든 식솔들과 가축들이 지낼 수 있는 넓은 땅이 필요했고 자녀들을 잘 키울 수 있는 좋은 조건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바라던 모든 것이 바로 벧엘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찾았을 때... 그가 바라는 모든 복을 내려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여기에 우리가 벧엘을 찾아야 하는 까닭이 있는 것입니다. 벧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려주시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출처: 성경 벌레들 원문보기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