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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코로나19 전염병 확산이후 침체되었던 경기가 다시 살아나면서 영화제작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영화관도 관객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며칠 전 관객수 천만명을 넘는 영화가 탄생했습니다. 코로나 이후 그의 첫 번째 천만 영화가 아닐까 합니다. ‘서울의 봄’이라는 영화인데 전두환의 12.12쿠데타가 모티브가 된 영화입니다. 12.12 당일 쿠데타 상황을 픽션으로 재구성한 영화이죠. 여기에 육군참모총장으로 등장하는 장상호 캐릭터의 실제 인물은 최규하대통령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정승화장군입니다. 12.12쿠데타로 실권을 잡은 전두환은 쿠데타다음 날인 12월 13일 재판과정도 없이 강제 해임됩니다. 그리고 곧바로 국군보안사령부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면서 모욕적 수사를 받게 됩니다. 몇 개월뒤 1980년 3월 국방부 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 징역 10년을 판결받음과 동시에 육군대장에서 이등병으로 자그마치 17계급이나 강등당하는 굴욕적인 처분을 받으면서 불명예 전역, 강제 예편하게 되었습니다. 한평생 뼛속까지 군인으로 살아온 그에게는 최악의 처분이자 수치였으며 그간 받은 장교 급여분도 이등병으로 동일 기간을 복무할 시 받을 돈을 제외하고 전부 몰수당하고 군인연금 수혜 권리도 박탈되어 경제적인 위기까지 겪었고 1988년 제 6공화국이 출범하며 노태우가 정권을 잡게 되면서 이전에 이등병으로 강등된 예비역 장군들의 계급 복권 이 이뤄졌고 그 때 정승화 육군 대장도 대장계급 복원, 몰수되었던 급여과 군인연금 수급권이 원상복귀되었습니다. 어떻게 세상에서 이렇게 한 순간에 대장에서 이등병으로 강등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지 12.12쿠데타는 정말 황당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부하였던 하급자가 상급자를 몰아내며 쿠데타를 일으키며 상급자에게 큰 치욕을 저질렀습니다. 육군대장이었던 사람이 높은 지위의 대접을 받다가 낮은 지위의 생활을 하게 되는 것 자체가 엄청난 심적 고통을 동반할 것이고 정말 수치스럽고 사람들을 만나기 정말 싫을 정도가 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떻게 이런 비참한 일이 일어날 수 있으며 그 어디에 이런 일이 또 있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우리는 오늘 성탄절을 맞이합니다. 성탄절의 의미는 벌을 받지 않고 징계를 당하지 않아도 되시는 분이 낮아지신 사건입니다. 강등되지 않고 낮아지지 않아도 되시는 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징계도 받고 낮아지신 사건입니다.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숭고한 희생정신으로 살아가지만 진정한 희생의 본을 보이신 분은 바로 이 성탄절에 이 땅에 오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이실 것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심에도 인간으로 강등되셨습니다. 신이신 분이 인간이 되셨습니다.
구약성경 이사야 53장 4절과 5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53장 4,5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분이 이 땅에 오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한 번의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영원한 죽음으로 끝이 날 우리 인생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기회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 약 700여 년 전 선지자 이사야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것을 예언하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실 위대한 일을 미리 알렸습니다.
오늘 본문 이사야 11장 1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여기에 나오는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과 ‘그 뿌리에서 한 가지’이 두 가지 설명이 모두 예수님을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다윗의 가문, 혈통을 계기로 이 땅에 오실 예수님을 예언한 말입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1장 1절의 예수님의 족보에서 분명히 이루어집니다.
마태복음 1장 1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 불리시며 이 땅에서 사역하셨습니다. 더구나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 자체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이스라엘의 모든 영역에 위대한 영향력을 끼칠 분이라는 것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혈통속에서 육적인 이스라엘과 영적인 이스라엘 모두를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성탄절은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하시며 죽으시기 위해 오셨고 우리의 모든 삶을 책임지시며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분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오늘 성탄절 우리에게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존재를 돌이켜보며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분명히 깨닫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대로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 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에게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심판의 주인으로 오셨습니다.
오늘 본문 이사야 11장 3절과 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것을 예언한 주전 700년경의 이사야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심판의 주인으로 오실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 모든 사람들의 삶에 대한 책임자로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면서 살아야 합니다.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으면 그 잘못에 대한 댓가를 받아야 하고 자신이 참된 일을 많이 하였으면 선물을 받고 칭찬받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한 자에게 선한 선물을 악한 자에게 징벌을 내리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속에 담겨 있는 것이 바로 양심입니다. 요즘은 각종 OTT시청을 하기에 지상파방송국 프로그램으로 대박나기가 힘들어 약 20%만 넘어도 대박프로그램이라고 합니다. 이런 대박프로그램이 되면 광고가 많이 들어오고 광고수입이 엄청나게 되죠. 그래서 방송국마다 대박프로그램을 만들고 광고수입을 올리려는 노력을 참 많이 합니다. 특히 드라마같은 것을 보면 시청률 경쟁에 대단히 적극적입니다. 그런데 그런 대박드라마의 기본적 구조가 뭔지 아십니까? 바로 ‘권선징악’입니다. 착한 사람은 나중에 상을 받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 것을 보면서 좋은 결말이라고 말하고 그 결말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낍니다. 그런 경우가 거의 없지만 정말 악독한 사람이 그냥 잘먹고 잘사는 것으로 끝이나면 드라마를 보던 사람들은 방송국에 전화도 걸고 작가에게 온갖 비난을 쏟아붓습니다. 왜냐면 그것이 바로 인간이 가진 양심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기본 정서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인간이지만 완전하지는 못합니다. 왜냐면 처음 인간 아담과 하와때부터 가지게 된 원죄, 사탄 마귀의 꾐에 빠져 하나님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따먹어버린 선악과나무 열매로 인해 죽음이 찾아오고 완전한 죄인이 되어버린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인간은 이제 태어나면서도부터 모든 사람이 죄를 가지고 태어나서 죄를 가지고 살다가 죄로 인해 죽게 되었습니다.
시편 51편 5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야고보서 1장 14,15절입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로마서 3장 23절도 볼까요? 함께 읽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우리는 착한 사람이 선물을 받고 악한 사람이 벌을 받기 원하는 보편적인 사고와 양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말하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 모두 성경적 관점으로 따져볼 때 모두 다 죄인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아담의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세상 모든 인간은 죄의 습성이 본성적으로 있습니다. 그 죄의 본성으로 항상 욕심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어 있고 욕심으로 잉태된 많은 죄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결국 그 죄는 멸망의 길로 걸어갈 수밖에 없이 우리를 만듭니다. 이 일을 해결하시기 위해서는 이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어줄 분이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구약시대 인간이 지은 한 번의 죄를 대신해서 죽었던 대속제물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영원한 죄를 대신해서 죽어주실 하나님의 대속제물이 우리에게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은 죄인이기에 다른 어떤 사람을 위해서 대신 죽어줄 수 없기에 하나님의 해결책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죽어주실 분이 우리에게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 분이 바로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그 분이 죽으심으로 우리는 이제 “예수님을 믿냐? 믿지 않느냐?”,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느냐?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지 않느냐?”를 기준으로 심판받는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은 세상이 만들어진 이후 이 세상이 존재하는 한 이 세상과 천국에서 심판받을 존재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후 우리는 심판의 기준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느냐? 짓지 않았냐?”는 관점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느냐?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지 않느냐?”라는 관점으로 바뀐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심판하시는 심판의 주로 오셨습니다. 그 심판의 기준이 바로 “예수님을 믿느냐? 예수님을 믿지 않느냐?”라는 것입니다. 심판의 유일한 기준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에 나온 것처럼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이 심판의 기준이 아닙니다. 가난한 것, 부유한 것으로 심판의 결과가 바뀌지 않습니다. 겸손해 보이는 것, 교만해 보이는 것으로 심판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외형적인 모습과 우리의 가지고 있는 특성이 우리의 심판 결과를 바꿔 놓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 심판의 결과는 오로지 우리 예수님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4절 후반절에서 5절 말씀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우리가 기념하는 예수님의 탄생기념일, 성탄절은 바로 우리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일 뿐 아니라 우리 인생에 대해 심판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오신 날이라는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시면서 완전한 심판의 주인이신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원죄를 해결한 인간이 이제 예수님을 온전히 믿음으로 영원한 천국을 소유하게 될 때 심판에서 벗어나 영원한 안식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는 심판의 주인되신 예수님을 믿고 인생이 끝나고 예수님앞에서 천국으로 인도함을 받는 기쁨의 결과를 얻게 되는 믿음의 사람, 구원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에게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평화의 주인으로 오셨습니다.
이사야 11장 8,9절입니다.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의 오심을 기록하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면 이제 하나님의 위대한 일이 일어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하나님 심판의 기준이 새로워질 것이고 심판의 주인으로 예수님이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면 그 두 번째는 예수님께서 오심을 통해 이 땅에 완전한 평화가 선포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완전한 평화는 어떤 평화일까요?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평화를 살펴보기 이전에 우리는 먼저 사전적인 의미의 평화를 살펴보겠습니다. 사전에서 말하는 평화(平和)는 좁은 의미로는 ‘전쟁을 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학문적 의미에서 평화는 ‘분쟁과 다툼이 없이 서로 이해하고 우호적이며 조화를 이루는 상태’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류가 목표로 하는 가장 이상적인 상태입니다. 하지만, 이런 평화는 불가능한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압니다. 세상 사람들도 평화를 너무나 기대합니다.
최근 북한이 우리 대한민국에 대해 도발을 자행하고 핵무기개발, 장거리 미사일실험을 하면서 ‘평화협정’ 혹은 ‘종전협정’을 맺자고 합니다. 지금 대한민국과 북한은 일명 ‘정전협정’ 상태입니다.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라 전쟁을 멈추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북한은 우리에게 ‘평화협정’이나 ‘종전협정’을 맺자고 하는 것입니다. 평화협정이라는 말은 영어로 ‘peace agreement’인데 이것은 전쟁을 끝내기 위한 협정을 말합니다. 평화협정은 적대국을 상대로 전쟁을 멈춰있는 상태가 아닌 일명 불가침조약을 맺자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만 본다면 우리가 북한과 평화협정이나 종전협정을 맺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왜 안 할까요? 바로 상대가 북한이기 때문에 안 하는 겁니다. 북한은 이런 저런 협정을 맺고서도 지키지 않은 전례가 있습니다. 문서상의 협정을 종이처럼 취급하며 자기의 이익을 위해 전략전술로 각종 테러와 분쟁을 일으키고 심지어 전면전을 일으킬 수 있는 상대가 바로 북한입니다. 종전협정에 선뜻 나서지 않는 대한민국에 대해 북한은 “왜 전쟁을 완전히 끝내고 평화의 상태를 유지하자는데 협정을 맺지 않냐?”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종전협정을 맺을 때 전제조건을 말합니다. 그 종전협정의 조건은 한반도가 전쟁이 끝났으니 외국 군대가 있을 필요가 없으니 미군을 철수시키라고 말합니다. 자신들은 중국이나 러시아군대가 없는데 한국만 미군부대가 있다고 주장하며 말입니다. 이제 어느 외국 군대도 한반도에 두지 말고 국군과 인민군이 섞여서 한반도를 지키자라고 말합니다. 그 속내가 뭘까요? 빤하지 않습니까? 북한은 대한민국에 미군만 없으면 좌경화시키고 공산주의 혁명을 이루는 것이 용이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국군들과만 붙으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줄기차게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종전협정’이 평화체제 구축이 되는 것이라면 대한민국에서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건 평화체제구축이 아니라 미국을 내어쫓은 후 적화통일을 하려고 하는 망상을 가진 협정이기에 반대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는 완전한 ‘평화’를 말하기 힘든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보고 있습니다. 현재에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 등등 그리고 각국에 일어나는 내전을 보면서도 이 땅은 ‘평화’를 이룰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지배하고 사람의 야욕이 사로잡고 있는 곳에서는 ‘평화’는 요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세상의 어떤 사람이 줄 수 없는 완전한 평화가 예수님이 오셨을 때 가능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약육강식’의 자연속의 본능이 사라지는 ‘평화’가 있음을 오늘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동물의 세계나 인간의 세계에서 왜 전쟁이 일어나고 불안과 두려움의 감정이 일어날까요? 조금이라도 자기가 강하다고 생각할 때 어떻게든 약한 자를 침략하고 지배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6절부터 8절을 살펴보십시오. 이리 떼가 나타나면 양떼들은 살기 위해 도망쳐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신 새로운 세상은 어떻게 됩니까?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산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표범이 나타나면 염소는 도망을 가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신 새로운 세상에서는 표범과 어린 염소가 사이좋게 지내게 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자가 나타나면 송아지는 도망가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주인이신 새로운 세상은 사자와 송아지가 함께 지냅니다. 암소와 곰이 사이좋게 지내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뜯으며 사이좋게 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인이신 새로운 세상은 완전한 평화가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주인으로 임하시고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주인으로 찾아오실 때 이 땅은 완전한 평화의 땅, 완전한 평화의 사회가 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평화와 안전한 세상의 완결이 되는 구절이 오늘 본문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바로 8절입니다. 이사야 11장 8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우리가 살면서 자녀들을 주의해서 돌볼 나이대는 완전 애기였을 때입니다. 태어나서 얼마 안된 아이는 조금의 환경변화에도 큰 병이 생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애기들은 위험한 것과 위험하지 않는 것을 구별하지 못하고 위험한 것에 손을 대기도 하고 위험한 곳에 올라가기도 합니다. 칼을 그냥 만져 손이 베이기도 하고 뜨거운 물이 뜨거운 줄 모르고 손대었다 화상을 입기도 합니다. TV나 장식장에 올라탔다가 넘어져서 깔려 부상을 당하기도 합니다. 어린 애기가 있는 곳은 항상 위험이 도사리는 곳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젖먹이 애기 혹은 젖뗀 지 얼마 안 된 아이가 독사굴에 손을 넣어서 독사를 만지며 장난을 쳐도 괜찮은 곳이 바로 예수님이 오신 새로운 세상입니다. 오늘 본문 9절에는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땅에서는 ‘해되는 일도 없고 상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23년 우리는 이 세상이 얼마나 불안한 지 절실히 느끼며 살았습니다. 남북관계로 인해 불안했고 각종 사고로 인해 불안했고 경제적인 불안요소로 인해 불안한 생활을 했습니다. 이런 불안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길은 평화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우리 삶속에, 우리 세상속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평화의 주인되신 예수님으로 인해 완전한 평화의 삶을 경험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에게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구원의 주인으로 오셨습니다.
이사야 11장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가장 궁극적인 이유는 바로 예수님을 모르며 죽음의 세계속에서 살며 결국 지옥불에 던져질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의 정치적인 지도자로 오신 것이 아니라 온 인류의 구원자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위한 주님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모든 나라, 모든 인류의 근본적인 문제인 삶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앞에 이 세상의 어떤 능력도, 이 세상의 어떤 힘도 강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이 세상의 절대 권력이요, 예수님만이 절대 희망이십니다.
일본 홋카이도의 작은 도시에 있는 어느 병원 병원장 게이조와 아내인 나쓰에와 딸이 살고 있었습니다. 병원장 부인인 나쓰에가 병원의 한 젊은 의사의 유혹에 못 이겨 서로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을 때 자신의 딸은 유괴를 당해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남편인 병원장 게이조는 딸의 죽음을 아내의 배신 때문이라고 여기고 복수의 일념으로 자기 딸을 죽인 살인 자의 어린 딸을 양녀로 입양하여 키우게 됩니다. 나쓰에는 양녀로 들인 요코를 죽은 딸 대신에 애지중지 키웠는데 어느 날 요코가 자기 딸을 죽인 살인자의 딸인 것을 알게 됩니다. 나쓰에는 남편에 대한 배신감에 치를 떨게 되고 그 후부터 요코를 온갖 방법으로 구박합니다. 그러나 요코는 이에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자라 오빠의 친구인 한 대학생과 사랑하는 사이가 됩니다. 나쓰에는 살인자의 딸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는 일에 대해 질투심이 일어나서 결국 요코와 대학생 앞에서 요코의 정체를 폭로합니다. 요코는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되자 충격을 받고 자살을 결심합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일본 소설작가 미우라 아야코가 쓴 “빙점”의 내용입니다. 미우라 아야코는 병원장 게이조의 독백을 통해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두운 구멍은 자기나 나쓰에에게도, 그리고 누구의 가슴 속에도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절대적 절망을 헤어나갈 힘을 깊은 신앙적 사랑으로만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이 소설에서 자살을 선택한 비운의 딸, 요코는 죽기 전 남긴 유서에 “저의 핏속에 흐르고 있는 죄를 분명히 용서한다고 말해주는 권위 있는 존재가 필요합니다”라는 글귀를 남깁니다. 이 문구를 통해 작가가 담고 싶은 진정한 기독교적인 용서와 기독교적인 구원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 어느 누구나 죄에서의 구원이 필요합니다. 세상 어떤 사람이든지 죽음의 형벌에서 벗어나 천국 인생을 살 가치가 있는 사람입니다. 구원은 인종적인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구원은 민족적 구별이 없습니다. 구원은 지역적으로 다르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구원은 소유와 재산에 따라 나눠지지 않습니다. 구원은 외모를 통해 차별을 두지도 않습니다. 구원은 오로지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나를 살리시기 위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입으로 고백할 때 이뤄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받은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성취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우리가 이 세상의 어떤 많은 구별요소를 통해 차별받지 않고 예수님의 사람이 되어 천국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안에 있으면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안에 있으면 어떤 차별도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11장 11,12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그 날에 주께서 다시 그의 손을 펴사 그의 남은 백성을 앗수르와 애굽과 바드로스와 구스와 엘람과 시날과 하맛과 바다 섬들에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 / 여호와께서 열방을 향하여 기치를 세우시고 이스라엘의 쫓긴 자들을 모으시며 땅 사방에서 유다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리니”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언젠가 다 모으십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한 사람도 놓치지 않고 다 모으십니다. 어느 땅에 있든 어느 민족속에 있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성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계신 천국은 하나님의 백성이 거할 곳입니다. 이 곳에 거할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께서 모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주인으로 역사하신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할 주님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구원의 주님을 맞으며 우리를 구원하신 은혜에 감사를 표하는 오늘 이 시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을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을 기념하는 이 성탄절에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자로 오신 것을 감사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시고 그 하나님의 백성에게 평화와 안식과 영원한 구원을 허락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저와 여러분... 이 성탄절을 기뻐하는 하나님의 백성 여러분!! 2000년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처음 오심을 기뻐하는 것으로 끝내지 마시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우리에게는 이제 완전한 평화, 완전한 안식, 완전한 구원이 주어질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하며 주님 다시 오실 그 날까지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격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