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심해창공 원문보기 글쓴이: 이길용
군 생활의 회고(Ⅱ)
이 길 용
입소 전에 나는 많은 고민을 안고 사는 평범한 젊은이였다. 일차 대학에 떨어진 후에는 무척이나 방황하였고, 재수를 경험한 나는 재수에 대한 공포가 엄습한 상황인데도 후기대학은 응시조차 하지 않았다. 뚜렷한 목표가 없었던 나는 현실회피의 한 방편으로 장교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아마도 그 당시에 병사도 3년을 근무하던 시절이라 복무 후에 대학을 진학해도 늦지 않을거라는 형님(당시 직업군인)의 충고에 별 생각 없이 입대를 하였는데 당시 북한의 특수부대에 버금가는 제3사관학교를 창설하면서 제1기로 입교가 되었으니 오로지 퇴교만 생각할 정도로 그 충격은 무척 컸었다.
하지만 군은 나에게 많은 교훈과 삶의 지표를 알려준 고마운 집단이다. 왜냐하면 심신을 단련시켜 주었고, 집단생활에서 살아가는 지혜와 용기를 주었으며, 무엇보다도 건전한 삶의 방향을 터득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남자라면 거의 누구나 군 생활을 통하여 나름대로 많은 경험을 가졌으리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그들보다 특별한 경험을 하였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나의 작은 경험들이 혹시나 지금 군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나 아니면 군 생활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공통의 관심거리가 될 수도 있다는 작은 생각에 이 글을 띄운다.
훈련소에 입소하던 날!
빡빡 머리에 겁먹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용산에서 군용열차를 타고 논산훈련소로 향하였다. 밤중에 논산훈련소를 도착한 우리는 조교들의 안내를 받으면서 내무반으로 인솔되었다. 그런데 거기에는 몇 명의 대기병이 미리 와 있었는데 그들이 하루먼저 왔다고 고참병행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들은 꼼짝없이 그들에게 기합을 받으면서 겁내하였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웃음이 난다. 이튿날 일조점호를 취하는데 고향에 대한 묵념이란 구호가 나오자 처음으로 부모 곁을 떠난 나로서는 부모님의 고마움과 그리움에 복받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는 것이다. 물론 주위에 있는 다른 장병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이후로 훈련병 생활은 말 그대로 말단 생활로써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면서 생존하려는 본능과 자존심이 붕괴되는 허탈감 그리고 이를 극복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으로 4주간의 훈련을 무사히 마쳤다.
육군 제 3사관학교에서의 생활
우리는 장교과정을 이수하기 위하여 열차 편으로 영천에 있는 3사관학교로 향하였다. 영천에 도착하니까 수 십대의 군용트럭들이 열을 지어서 우리를 태우는 모습이 영화 속의 한 장면같이 壯觀(장관)이다!
이렇게 3사관학교에 도착한 우리는 엄청난 훈련과 강행군으로 몇 번이나 퇴교하고 싶은 충동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논산훈련소에 비하여 사람대접을 해주는 것은 그래도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학교 내의 모든 도로는 자갈을 깔아놓아서 일과시간이 끝나면 무조건 운동복 혹은 팬티바람에 맨발로 열을 지어 다녀야 된다. 식사 전에는 반드시 철봉을 해야 되는데 평소에 철봉을 못하였던 후보생들은 그 보다 더 큰 고역이 없었다.
처음으로 군인정신을 들게 하겠다는 목적으로 영천 벌의 쌀쌀한 3월 어느 날 밤에 느닷없이 한밤에 기상을 시키더니만 팬티바람으로 집합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영문도 모르고 나가보니까 중대장이 우리들에게 그 동안 잘못한 사항들을 열거하면서 기합(얼 차렷)을 받아야 된다고 훈시하면서 우리들을 어디론가 데리고 가는 것이다. 도착하여보니 처음 보는 수영장인데 이미 군용트럭들이 사방으로 배치되어 전조등을 켜 놓고 있었다.
그런데 중대장과 소대장들이 옷을 입은 채로 그 차가운 수영장으로 들어가더니만 우리들을 그 수영장으로 집합시키는 것이 아닌가? 우리들은 거의 겁에 질린 채 소대장이 시키는 대로 물속에서 제식훈련을 할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기합을 받은 후에 다시 수영장을 나와서 내무반으로 들어왔다. 젖은 팬티를 벗고 내의를 입으니까 얼마나 따듯한지 ‘이제야 살았구나!’라는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모포 속에 들어가니까 처음에는 무척 포근하여서 살 것 같더니만 시간이 지나자 몸이 떨리기 시작하는데 어떻게 할 수가 없을 정도로 몸이 뒤틀리고 추운 것이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동료들도 다 끙끙 앓으면서 밤을 지새운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구대장이 ‘식사시간 2분! 식사 개시’라는 구령과 함께 식사를 할 때에는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위장에다 밥을 집어넣는다는 것이 더 좋은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한참 젊은 나이였기 때문에 배탈도 나지 않고 오히려 규칙적인 생활로 살이 쪘다. 군에 들어가기 전에는 체중이 58kg이었으나 임관 후에는 63kg이나 되었으니 말이다.
또한 유격훈련은 그야말로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처럼 모든 훈련이 지독하였다. 외줄 타기, 두 줄타기, 절벽 오르기, 환자후송 등은 차라리 눈감고 시작하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천리 행군 중에 나침반과 지도를 주고 목표지점을 잘못 찾아가면 중대가 혼쭐이 난다. 밤새도록 걷다보면 가면서 자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언덕으로 굴러 떨어지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난다. 특히 침투 훈련 시에는 진흙바닥 위에 철조망이 쳐져 있거나 2미터 높이에서 총알이 날아가는 상황 하에서 목표지점에 돌진하는 것이다. 그런데 11월에 그것도 산 위에서 2인용 텐트를 치고 그 속에서 취침을 하였다. 침투복장이 물에 젖어 있으니까 잘 때에는 갈아입고 잔다. 모포6장으로 2명이 자려면 싫어도 서로 부둥켜안고 자지 않으면 추워서 잘 수가 없었다. 문제는 다음날 아침이다. 마른 옷이 없기 때문에 다시 그 젖은 옷을 입어야 되는데 그 추운 날에 다시 그 젖은 옷을 입으려니까 소름이 끼치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여도 몸서리가 쳐진다.
한번은 하도 배가 고파서 규정을 어기고 피엑스에 가서 빵을 몇 개를 사는 찰나에 ‘동작 그만, 이라는 소리가 들리는 거다. 쳐다보니 다른 중대의 소대장이 험상궂은 얼굴로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啞然失色하면서 순간 그 빵을 상의 속에 재빨리 넣은 다음에 줄 행낭을 쳤다. 그러나 그런 나의 행동을 보던 소대장은‘저 놈 잡아라!, 라고 고함을 치면서 나를 따라 오는 것이 아닌가? 나는 죽을힘을 다하여서 달렸으나 그 소대장이 워낙 빨라서 잡히고 말았다. 나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순순히 소대장을 따라가서 기합을 받고는 서면으로 진술서를 작성한 후에야 풀려 나왔다. 우리 중대로 온 후에는 퇴교된다는 생각에 그저 담담하게 모든 사항을 순순히 받아드린다는 각오로 대기하였다. 저녁이 되니까 일직사관이 전 중대원들을 집합시키더니만 일장 연설을 하는 것이다.
’소대장이 불렀는데도 도망가는 사관후보생이 있어? 도대체 군인이야 아니야? 응?‘ 하면서 전체를 교육을 시킨 후에 해산을 명하는 것이다.
그 이후에 나를 불러서 야단을 치고 퇴교 조치를 밟아야 되는데도 아무 말이 없는 거다. 나는 더욱 불안한 생활을 하면서 빨리 결말이 나기를 기다렸다. 그렇지만 아무 말이 없었다. 나중에 나름대로 파악을 해보니 장교로 임관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소대장의 판단에 따라 불문에 부친 모양이다. 하여튼 나는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소위로 임관을 하였다.
신임 소대장 시절의 추억
그러나 임관 후부터는 나의 군에 대한 수동적인 생각이 적극적인 사고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이제부터는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지적인 능력과 思考를 바탕으로 Leader ship을 발휘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소대장으로 부임한 곳이 수색에 있는 사단이었다. 그런데 그 당시의 나의 소대는 남한산성(군 교도소)에서 출소한 사고소대원만 모아 놓은 그야말로 사고뭉치 소대였다. 그러니까 교도소에 들어갔다가 나온 군인들이 25명중 15명이나 되었다. 소대원들이 새파란 소대장을 우습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나 역시 소대장 직책을 수행하려면 어떤 방법이던지 소대원들을 장악해야 하기 때문에 그 방법을 찾으려고 苦心을 하였다. 병사들의 내무반은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복도 양쪽으로 침상이 있었고 한 구석에 칸막이를 한 소대장 실을 만들어 놓았다. 그 당시에는 소대장도 6개월 동안은 병사들과 같이 침식을 해야만 하였다. 어느 날인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일석점호가 끝나고 취침시간이 되었을 즈음, 내가 소대내무반을 거쳐서 소대장 실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한 구석에서 최 병장이 술에 취해서 떠들고 있는 것이다. 물론 다른 병사들은 잠자리에 들었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내가 최 병장에게 그만 자라고 말하였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떠들어대는 것이 아닌가? 화가 난 내가 ‘야, 너 소대장 말이 말같이 안 들려?’라고 말하면서 군화발로 정강이를 걷어찼더니만 최 병장이 ’소대장님이 저를 치셨습니다. 야! 불침번 문 걸어 잠가!‘ 라고 말하니까 불침번이 슬슬 내 눈치를 보면서 고참의 말에 복종하는 거다. 그런 상황 하에서 최 병장은 야전삽 뒤에 달린 곡괭이를 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나는 중대한 결심을 빨리 해야 된다고 생각을 하였다. 잘못하다가는 소대원들 보는 앞에서 고참병에게 얻어맞는 일이 발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설혹 얻어맞더라도 어디에다 하소연을 할 수도 없게 된다. 그 창피스러움을 누구에게 이야기 할 것인가? 나는 이번 기회를 이용하여서 소대원을 장악하고 싶었다. 소대장 직책을 걸고 모험을 하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소대장실에 있는 몽둥이를 집어 들고 야전삽에 달린 곡괭이를 펴고 있는 최 병장의 등을 향하여 몽둥이를 힘껏 내리쳤다. 최 병장은 한마디 말도 못하고 그대로 쓸어졌다. 나는 즉시 전 소대원을 기상시키고 정렬시킨 상태에서 최 병장에게 혹독한 기합을 주었다.
나도 그 당시에는 피할 수 없는 상황이긴 하지만 병사에게 구타를 한 잘못을 저질렀다. 이튿날 나는 대대장을 찾아가서 어제 있었던 일을 보고하고 소대장인 나에게 처벌을 내려주길 자청하였다. 그러나 모든 상황을 다 들어본 대대장은 나를 훈방 조치하고 그 병사는 대대 의무대에서 치료를 받게 함으로써 모든 일이 일단락되었다.
그 이후로는 소대원들이 나를 무섭게 생각하고 나의 지휘에 복종은 물론 다른 소대장보다도 훌륭하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였다. 사고자 소대원들의 장점도 많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과 교감대가 형성만 되면 충성심이 대단하고 어떤 어려운 문제를 푸는 대는 도사(?)들이기 때문에 무척 재미도 있었다.
예를 들어서 환경미화를 한다면 그 상황에 맞추어서 가장 멋있게 꾸민다든지 모든 운동시합에는 적수가 없으며 소대원의 장비가 없어질 수가 없다 (그 당시에는 서로 상대방 중대나 대대에서 없어진 물건들을 보충하는 경향이 있었음) 그러니 소대장은 소대원만 장악하면 모든 것이 재미있고 배울 점도 많았다. 순간의 잘못으로 교도소에 간 똑똑한 병사들도 많았다. 한번은 지금의 일산 쪽으로 진지공사를 하러 나갔는데 산 정상이라 마을과는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그러나 자정이 넘어서 텐트에서 자고 있는데 민간인이 올라와서 소대장을 보자고 한다는 거다. 가보니 오늘이 제사라 제사음식을 준비하였는데 떡시루 채로 떡이 없어졌다는 거다. 그것을 가져갈 사람들은 이곳에 있는 병사 외에는 없다고 말하면서 떡을 다 먹었으면 떡시루라도 돌려달라는 거다. 나는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오지만 그 민간인들에게 만약 그 떡시루가 이곳에 있다면 우리가 다 물어주겠으니 주위를 돌면서 다 확인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민간인들은 흔적도 못 찾고 오히려 미안하다고 말하고서 내려갔다. 그러나 내가 우리 소대원 짓이라는 감을 받고 은밀히 내사를 하여보았더니 이미 이곳으로 이동을 할 때에 한 병사가 그곳에서 슬쩍하여 소대원끼리 나누어 먹고 그 시루떡은 멀찌감치 버렸다는 것을 알았으나 그 상황 하에서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모른 척 하였다. 그러나 앞으로 민간인들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를 하는 병사는 규정에 의하여 처리할 것이라는 사실을 강하게 주지시켰다.
이번에는 내가 소대장직을 수행하면서 또 다른 무모한 행동을 한 일에 관하여 이야기 하고자 한다. 김포비행장의 외곽 경비를 맡고 있을 때이다. 고천이란 마을과 우리 소대에는 전화가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 마을에서 긴급한 전화가 온 것이다. 해군중사와 병사 한 명이 행패를 부려서 마을사람들이 불안에 떨고 있다는 전화다. 나는 즉시 병사2명과 함께 현장으로 출동을 하였다.
그런데 술에 만취된 그들은 우리가 설득을 하니까 처음에는 순순히 돌아갈 뜻을 보였으나 나중에는 반항하면서 주위에 있는 돌을 모아다가 우리들 앞으로 던지는 것이다. 나는 순간 당황하였지만 피하면서 기회를 엿보다가 달려들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안 되겠다 싶었는지 도로를 향하여 도망가기 시작하였다. 나는 소대원들과 그들을 잡기 위하여 추격전을 벌였다. 물론 손에는 총을 들었다. 한참 추격전이 벌어지고 그들도 지쳤는지 도로 가에 있는 논으로 도망가기 시작하였다. 우리들도 악착같이 추격하여서 그 중 한 명에게 근접하여서 총대로 등을 내려치니까 그대로 쓸어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입가에 거품을 품으면서 움직임이 거의 없는 것이다. 나는 순간 겁이 났다. 이렇게 저 친구가 죽으면 나는 살인자가 되어서 교도소에 가야만 되는데 - 눈앞이 캄캄하였다. 즉시 훈련 중에 배운 응급처치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주위에서 떠온 물을 얼굴에 뿌렸더니 조금은 생기가 들기 시작한 것 같았다. 나머지 한 명도 우리소대원들이 잡아와서 앞에 세웠다. 나는 우선 2명을 소대에 데리고 와서 이유를 물어보니 월남에 차출되어 가게 되어서 우울한 마음에 한 잔하러 나왔다가 이렇게 되었노라고 이야기하는 거다. 그래서 훈계를 하고 돌려보냈다. 그런 후에 나는 나의 무모한 짓을 반성하였다. 바로 도망가는 해군중사에게 총대로 급소를 내리쳤으니 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가? 지금 생각하여도 소름이 끼친다. 아마도 더 정통으로 맞았다면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었다면 나의 인생은 엉망이 되었을 것이다. 바로 한 순간의 실수로 말이다. 이미 그들이 도망갈 때에는 더 이상 추적을 할 필요가 없었는데도 영웅심이 발동하여 그런 아슬아슬한 일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순간의 실수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나에게 알려준 사건이었다. 그 이후로는 나는 어떤 상황이 발생될 때마다 한 번 더 깊이 생각하고 그래도 옳으면 행동하는 버릇이 생겼다.
인생을 살 다 보면 순간 화가 치밀어 오르는 일이 무척 많다. 그 때마다 자기의 원초적인 행동으로 임한다면 불행해 질 수밖에 없다. 운명이란 나약한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문제이긴 하겠지만 자신의 노력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많은 위험을 피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한 사건이었다.
중대장 직책을 수행하면서
중대장 재직시절은 내가 군대생활의 모든 것을 걸고 최선을 다한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73년도에는 녹음기가 그렇게 많이 보급되기 전이다. 재산목록 제 1호인 월남에서 가져온 녹음기를 중대운영에 유용하게 사용하였다. 스피커와 연결하여서 음악을 내보내고 전달사항을 알려주고 ‘소인조 밴드’ 운영에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장비가 되었다. 우리 중대가 철책 선을 맡고 있을 때에 일이다. 약 4km가 넘는 철책 선을 경비하기 위하여서는 중대원 전체가 주야간 구분 없이 경계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그러나 그 임무가 너무나 단조롭기 때문에 무료하게 느낄 수도 있는 시기다. 그들에게 무언가 자극적인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던 차에 소인조 밴드를 생각하게 되었다. 즉 중대원 중에 음악을 할 수 있는 사람과 만담을 잘하는 사람을 선발하였다. 그들에게 필요한 악기가 아코디언, 하모니카. 기타, 탬버린 등이었으나 그 당시의 중대 사정으로는 구입할 능력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각 자가 휴가 시에 집에서 사용하던 것을 가져오게 하여서 소인조 밴드를 구성하였다. 또한 나의 녹음기가 마이크와 스피커의 역할을 함으로써 3명으로 이루어진 그럴싸한 밴드그룹이 탄생되었던 것이다. 각 소대별로 떨어져 있기 때문에 소대별 오락시간에 맞추어서 소인조 밴드를 투입하고 중대운영비를 아껴서 상품까지 걸었더니 중대원들이 무척 좋아하였다.
이 사실을 안 대대장께서도 무척 기뻐한 것은 물론이다. 중대장시절에 나는 병사들의 신상에 관하여 남달리 관심을 가졌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병사들은 학력도 낮아서 한글을 깨우치지 못한 병사가 있는가 하면 자신의 전력을 숨기면서 군 생활을 하는 병사도 있는 등 각양각색의 병사들이 어우러져 군 생활을 하기 때문에 그들의 신상에 대하여 바로 기재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탈영병이 생겼을 경우에는 그 병사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이를 예방하기 위하여 병사의 전입과 전출 및 제대 시에는 아무리 바빠도 그 병사와 다과를 같이하면서 필히 면담을 하였다. 또한 휴가 시에는 모든 병사에게 주민등록등본을 제출하게 하여서 가족현황과 거주지를 확실히 알 수 있도록 하였고 정확한 신상정보를 확인한 후에 첫 면담과 다른 점이 있을 시에는 2차면담을 하기 때문에 거의 병사들이 중대장을 속일수가 없었다. 전입병은 대부분 처음 군대생활을 하는 병사들이므로 많은 신경을 쓴다. 신병이 들어온 날이면 며칠 동안 구타, 악질신고 등을 뿌리 뽑기 위하여 밤에 수시로 순찰을 함으로써 그런 기회를 줄이려고 노력하였다.
그런데도 중대장을 마치고 나중에 중대원들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구타 및 신고 등 그 당시의 병사들이 당한 일들이 비록 빈도는 낮았지만 우리중대에서 일어났었다는 사실을 듣고 나쁜 관습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특히 제대하는 병사들에게는 자유로운 대화를 통하여 후배 병사들을 위한 유익한 조언을 해 달라고 부탁을 하면 지휘에 많은 참고가 될 수 있는 말을 해주어서 매우 유익하였다. 정말, 그 당시에는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내 한 목숨 바칠 각오로 중대장의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기 위하여 주야불문하고 전방의 산골짝을 내 집처럼 누비고 다녔다. 그런 정열이 어디서 나왔는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전방의 山野
우리 중대는 강원도 적근산 밑에 위치하고 있었다. 전방 고지 중에서도 무척 높은 고지에 속하기 때문에 여름에는 시원한 편이지만 겨울의 추위는 무척 매섭다. 봄이 되면 진달래꽃 한 부대를 따서 소주와 설탕으로 재서 항아리에 넣어 봉한 후에 뒤뜰에 3개월 동안 묻어 두었다가 다시 개봉하여 먹으면 그 술맛이 일품이다. 적포도주와 비슷하면서 달고 독하기 때문에 서서히 취한다. 하지만 그 맛은 최고 중에 최고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알아주는 적근산 칡을 캐서 큰 주전자에 넣어 하루 종일 끓이면서 숭늉처럼 먹으면 그 뒷맛이 아주 향기롭다. 산 더덕은 일반 시장에서 보는 것보다도 훨씬 굵고 실하면서 맛도 좋다. 식욕을 돋우고 가끔 산에서 발견한 토종꿀을 먹을 때에는 내가 원시림에 온 기분이다. 장정 2-3명이 손으로 둘러쌓아야 거의 잡을 수 있을 정도의 피나무가 있는 적근산! 또한 삼청봉 앞에서 보는 적 지형은 가관이다.
이른 아침에 전망대에서 앞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神仙이된 기분이다. 앞에 보이는 드넓은 평원에 운무가 흐르고 그 위로 작은 봉오리가 군데군데 솟아나 있다. 운무의 흐름에 따라 어느 한곳이 청명하게 뚫리면 내가 마치 천상에서 하계를 내려다보고 있는 신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적근산이 여성적이라면 대성산은 대륙의 기질이 돋보이는 남성적인 산이다. 웅대하고도 포용력이 있는 믿음직한 산이라 내가 중대를 지휘하면서 마음이 흔들릴 때에는 저 대성산을 바라보면서 다시금 굳은 다짐을 하곤 하였다. 이렇게 공기, 물 그리고 산세가 좋은 곳에서 24시간을 중대원들과 함께 同居同樂을 하면서 젊음을 불태웠다. 남들은 그 나이에 서울에서 막 직장생활을 하였거나 대학에 복학하여 열심히 공부하면서 인생을 설계할 시기에 나는 이렇게 전방에서 지축을 흔들면서 휘날리는 먼지를 자랑스럽게 뒤집어쓰고 미래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철책선 넘어 우리와 대치하고 있는 적의 방카와 병력을 주시하면서 대한민국의 전방 경계지역의 일부를 내가 책임지고 있다는 막중한 임무와 자부심을 느끼면서 이십대의 젊은이로서의 고독함을 극복하였다.
사실, 전방의 철책선(GOP)에는 민간인의 접근이 안 되기 때문에 군인 외에는 아무도 없다. 그곳에서 근무하는 6개월간은 반복적인 경계근무 이외에는 다른 임무를 수행할 수가 없다. 약간의 시간을 이용하여 경계근무와 연관된 작업이나 전술토의가 전부다. 이미 이곳으로 오기전인 후방부대에 있을 때에 각종 훈련을 받은 후 정예화 되어서 이곳으로 투입되기 때문에 별도의 교육과 훈련은 필요치 않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면 후방보다 편할 수가 있다. 편하다는 뜻은 잡생각이 들 시기이기도 하기 때문에 중대장으로서 중대원들의 신상에 더욱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 당시에 내가 고독감을 느낄 시간이 있었겠는가?
김상병 자살 사건
중대장으로 근무하면서 가장 섭섭하였던 일은 우리 중대원 중의 한 사람이었던 김상병이 철책선에서 근무 중에 자살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무척이나 당황스럽고 나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준 사건이기도 하다.
그 당시에 철책선은 소대별로 할당하여서 경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휴가를 마치고 귀대한 병사는 일단 중대본부에서 하루 밤을 재워서 이튼날 소대로 보내게 되어있었다. 김상병도 자살하기 이틀 전에 휴가 후 귀대하여서 중대장인 나에게 귀대신고를 하고 하룻밤을 중대본부에서 같이 보냈다. 신고 후에 같이 다과를 나누면서 자연스럽게 면담을 해 본 결과 이번에 고향인 제주도를 가보니 형이 재산을 말아먹어서 집안이 살길이 막막하다는 말을 하는 거다. 나는 은근히 걱정이 되어서 그에게 여러 가지 말로 위로를 해 주면서 굳건히 군 생활을 하도록 종용을 한 후에 같이 바둑을 한 판 두었다. 그리고 다음날 소대로 내려 보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소대장과 분대장도 별도로 그와 면담을 하면서 그의 어려운 처지를 이해하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 주었고 그 사실을 그가 죽기 하루전날 면담철에 기록하였을 정도로 그에 대한 관심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이미 죽음을 결심한지는 알지를 못하였다. 그는 야간 근무조가 아침에 철수하고 주간 근무조로 편성되어서 다른 병사와 함께 근무를 하였고 소대원들은 아침에 집합하여서 점호를 실시한 후에 구보를 하고 있을 때이다. 김상병과 같이 근무하였던 병사는 간 밤에 철책선의 이상 유무를 확인 차, 자기 구역을 순찰하러 나간 사이에 경계초소에서 수류탄을 자기 가슴에다 터트려서 자살을 하였다. 이런 상황을 보고 받은 소대장은 즉시 중대장인 나에게 아주 다급한 목소리로 ‘ 중대장님! 김상병이 수류탄으로 자살하였습니다. ’ 라고 말하는 거다. 나는 ‘ 무엇이? 김상병이 자살하였다고? 정말 목숨이 끊어졌는지 확인하고 보고하는 거야? 빨리 다시 가서 김상병 가슴에 손을 넣어보고 재확인 해봐! ’ 라고 소리를 쳤다. 그랬더니 소대장은 ‘ 아이고! 중대장님 아주 갔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맥이 쭉 빠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얼마나 최선을 다한 군 생활인데 이런 일이 나에게 온단 말인가? 그리고 절망적인 마음으로 대대장님에게 보고를 드렸는데 뜻밖에도 대대장님은 아주 침착한 어조로 나에게 너무 걱정을 하지 말라는 말과 내가 곧 중대장이 있는 곳으로 내려 갈 것이니 같이 현장에 가보자는 말을 하고 전화를 끊는 거다. 이렇게 대대장님의 위로는 나에게 이성적인 思考를 되찾게 해주었다. 현장에 가보니 너무나 처참하였다. 주위의 바위에 살점이 붙어 있었고 비린내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병사들은 겁에 질려서 다 들 그 주위에서 멀리 도망가 있었고 소대장조차 현장에 있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나는 위생병들과 함께 시신을 수습하였다. 시신을 들것으로 이동하려고 하니까 병사가 3명만 있는 것이 아닌가? 할 수없이 내가 한쪽을 맡아서 위생병 3명과 같이 구급차가 있는 곳까지 들것을 날랐다. 그런데 구급차가 있는 곳으로 가자면 소대막사 앞을 지나야만 되었다. 그곳을 지나려고 할 때에는 소대원 몇 명이 소대 앞마당을 청소하고 있었는데 우리를 보자 시선을 반대 방향으로 돌리더니 소대막사로 도망가는 것이 아닌가? 사실, 그 당시에 중대장이 들것을 들고 가는 것을 보았다면 응당 중대원들이 달려와서 자기가 들고 가겠다고 말하였을 것인데 워낙 놀란 상태이고 겁에 질려있었기 때문에 나에게 다가올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 행동을 이해는 하지만 한편으론 섭섭하였다. 병사가 자살을 하였으니 연대가 발칵 뒤집혔다. 헌병대, 감찰 등 많은 관계자들이 그 원인을 조사하러 들이 닥쳤고 중대의 사기는 땅에 떨어질 때로 떨어진 상태였다. 그러나 그런 중에서도 병사들을 철저히 관리한 흔적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지휘책임을 면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소대장이 경고를 받는 것으로 일단락을 지었다.
그 당시에 연대에 나와 있는 기무사의 장교는 나에게 ‘ 중대장의 지휘에 관한 모든 사항은 보고를 받고 있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여서 철책선을 경계하고 있는 중대장님을 존경합니다. 이번 문제에 관하여서는 너무 염려 마십시오 ’라고 말하면서 오히려 나를 위로하는 거다. 나는 무척이나 고마웠다. 저 친구가 더 큰소리를 치면서 나를 힐난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장교가 오히려 나를 위로한다는 것이 나는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중대장인 나에게 아무런 처벌이 내려오지 않은 것을 보면 평소에 내가 주어진 임무를 열심히 하였던 사실을 상부에서 인정을 해 준 결과라고 생각한다.
1소대장의 보고에 의하면 병사들이 김상병이 자살한 근처에서 근무를 서기를 무척 두려워한다는 거다. 그 소리를 듣는 즉시 나는 1소대로 내려가서 우선 그가 자살한 경계호를 허물게 하고 그 옆에 다른 초소를 세웠다. 또한 거의 일주일 동안 야간에는 자살한 초소 근처에서 소대장과 같이 나도 밤을 새운 것은 물론이다. 죽은 김상병의 얼굴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 당시에는 그를 원망을 많이 하기도 하였다. 중대장으로서 김상병에게 잘못한 일이 없는데도 왜 하필 중대의 철책선까지 와서 수류탄으로 자살을 하였는가? 그렇게 자살하면 나머지 중대원들이 얼마나 많은 피해를 당하고 그 후유증이 상당기간 지속된다는 것을 김상병은 몰랐는가? 정말 죽어야 한다면 귀대 시에 제주도에서 배를 타고 육지로 올 때에 실행에 옮겼다면 적어도 김상병과 원한관계가 전혀 없었던 사람들은 괴롭히지 않고 저승으로 갈 수 있었을 것이 아닌가? 등 수많은 생각을 하면서 그를 원망하였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도 우리 중대원이다. 내가 더 세밀하게 그를 관찰하고 면담을 하였다면 그가 죽지 않고도 용기를 갖고 새 삶을 살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드니 나의 지휘력의 한계를 보는 것 같아서 무척이나 괴로웠다. 김상병이 이미 죽었지만 한 동안 김상병은 나의 의식의 한 부분을 집요하게 잡고 있어서 나의 지휘력에 대한 자신감을 많이 위축시켰고 죽음에 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 그 당시에 소대장이었던 박중위나 분대장이었던 김하사도 김상병의 죽음에 관하여서는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도 많은 충격을 받았고 그로 인하여 많은 생각을 하였다고 나에게 실토한 바가 있었다. 하여튼 어떠한 난관에 처해 있다고 하더라도 자살은 별로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다.
중대원들과의 이모저모
그 당시에 우리중대의 분대장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이하사가 있었다. 이하사는 장기하사관(부사관)이었다. 다른 분대장들은 대부분 단기하사나 병장이 분대장의 임무를 수행하였기 때문에 병역의 의무를 마치면 곧 제대를 하였지만 장기하사는 직업군인으로서 군 생활을 계속하였다.
그때에는 하사관들이 부족하여서 일단 장기하사로 명령이 나면 나중에 본인이 싫어서 해임을 시켜달라고 하여도 잘 안 되기 때문에 장기하사들이 그 해임을 위하여 사고를 치는 등 장기하사들을 다루는 일이 무척 어려운 시기였다. 이하사도 어떤 이유에서 직업군인의 길을 택하였는지는 몰라도 우리중대에서 근무 시에는 군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고 다른 병사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나는 중대를 위하여서도 이하사가 군 생활에 적응하도록 방안을 찾기 시작하였다.
너무나 오래된 일이라 자세히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중대가 사격장에서 돌아오기 직전에 이하사의 돌출행동을 보고 모든 중대원들이 보는 앞에서 그에게 상상하기도 어려운 기합을 주기 시작하였다. 이하사가 무릎을 꿇고 잘못하였다고 말한 것을 들은 후에야 이하사를 풀어주었다.
그 이후로는 다른 분대장들과 동일하게 열심히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였다. 나중에 이하사는 군생활을 열심히 수행하면서 사단주임원사까지 지내고 정년퇴임하였는데, 그가 주임원사시절에 나를 보고 ‘중대장님이 그 당시에 나를 훈육시키지 않았다면 나는 전과자로 전락되었을 지도 모릅니다. 나에게 그런 관심을 갖고 지도하여 주신 중대장이 있었기에 제가 이렇게 지금 주임원사의 직책을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나 역시 뭉클함을 느꼈다.
중대본부 요원 중에 병기를 책임지고 있는 김병장이 있었다. 어느 날 무슨 일로 중대를 순찰한 후에 중대장실로 들어가기 위하여 문을 연 순간 희한한 일을 목격하게 되었다. 바로 김병장이 내 책상 위에 두 발을 턱 올려놓고 의자를 뒤로 젖힌 채 내 책상 위에 있었던 탁상일기에 적은 메모를 두 손으로 들고 ‘ 야, 이것을 글씨라고 써? 내가 발가락으로써도 이것보다는 나을 거다. 하하하 ’ 라고 독백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순간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즉시 마른기침을 하였더니 김병장이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그 자리에서 일어난다. 나는 아무소리 안하고 내 책상에 앉았고 그는 魂飛魄散하여서 중대장 실을 빠져나갔다. 사실, 그 당시까지만 하여도 나의 글씨는 악필 중에 악필이었다. 선천적으로 못쓴다는 생각으로 견디었는데 어떤 방식이던 간에 글씨체를 고치지 않으면 더 큰 망신을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때부터 글씨본을 사다가 연습을 하기 시작하였다. 몇 년에 걸쳐 연습을 한 결과 현재의 글씨체를 갖게 되었다. 지금도 그렇게 잘 쓰는 편은 못되지만 악필이란 소리는 안 들으니까 퍽이나 다행이다. 아마도 김병장이 나에게 자극을 주었기 때문에 극복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내가 처음 중대장으로 보직을 받았을 당시에는 3개월 후에 대위로 진급될 진급예정자이었기 때문에 중위계급을 달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중대의 부관도 중위다. 그는 4개월 후에는 제대할 ROTC 장교였다. 소위 일류대학을 나온 엘리트 장교로서 후배장교들에게 위엄을 갖추고 있었고 과묵한 성격에 자기 고집이 있는 장교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언젠가 진지점령훈련을 위하여 비상을 걸어서 완전군장을 하고 거의 4시간에 걸친 산악행군 뒤에 진지를 점령하는 훈련이 있었다. 이 훈련에서 소대장은 당연히 완전군장을 하고 집합해야 하는데 유독 김중위만은 단독군장에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 당시에는 중대장은 완전군장을 하지 않았지만 김중위의 행동을 보고는 다시 들어가서 완전군장을 하고 나왔다. 그 광경을 지켜본 김중위도 완전군장을 하고 다시 나오는 거다. 그런 사건 이후에 김중위가 제대하면서 나에게 말한 부분이 무척 와 닿는다.
‘ 중대장님과 같은 계급이기에 저도 무척이나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중대장님이 대위였다면 제가 더 떳떳하게 임하였을 텐데 혹시나 중대장님이나 주위에서 제가 중대장님과 같은 계급이라고 저렇게 군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 먼저 중대장님 계실 때보다 더 열심히 하였습니다. 또한 지난번에 완전군장을 안하고 단독군장으로 나온 이유는 등뒤에 땀띠가 너무 많이 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군장을 하지 않은 것인데 중대장님이 일부러 완전군장을 메고 나오시니까 저도 오기로 완전군장에 진지점령훈련을 한 것입니다.’ 라고 말하는 거다.
나는 김중위에게 무척이나 미안하였다고 말하면서 잘 참아주어서 고맙다는 말도 하였다. 이렇게 때론 오해로 인하여 서로 무언의 대결을 벌일 때도 간혹 있다.
제2소대장인 박중위는 애인이 자주 찾아오기로 유명하였다. 주말이면 어김없이 애인이 면회를 오기 때문에 어떤 때에는 중대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소대장이 외출을 나가기가 어려운 상황이 있었을 때에도 서울에서 이곳까지 면회 온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여서 외출을 승인해주었다. 나중에 박중위는 그런 나의 조치에 관하여 무척이나 고맙게 생각하였다. 더욱이 두 사람은 같은 대학의 couple로서 나보다도 먼저 결혼하여 잘 살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 당시의 생각이 나서 나 혼자 웃곤 한다.
중대장을 가장 많이 보좌하는 병사는 작전계(교육계)이다. 중대장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온갖 일을 다 한다. 그런 유병장은 털보다. 정말 믿음직스럽게 자기 일을 열심히 하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부친사망의 관보를 받고는 사색이 되어서 나에게 온 거다. 그런데 오래되어서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그 서류가 정상적이었던 것이 아닌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즉 관보란 동회에서 확인한 사항을 전보로 보내주게 되어 있었는데 일반 편지에 의하여 그 소식이 전해왔기 때문에 휴가를 내 주기가 쉽지가 않았다. 내가 이 사실을 갖고 대대장에게도 보고한 것을 보면 무척 고심을 하였던 것 같다. 나중에 휴가를 보내주긴 하였지만 그 사실을 갖고 유병장은 후일에 만났을 때에 나에게 무척이나 서운한 감정을 갖고 있었던 것을 감지하였다. 물론 서로 뒤늦게 이야기하면서 풀기는 하였지만 말이다. 유병장이 지금은 그 당시의 중대원들의 모임에 총무를 맡고 있다.
군 생활을 마치면서
중대장을 마치고 광주에서 고등군사반 교육을 이수 후에는 다시 서부전선에서 대대 및 연대 작전장교를 수행하다가 진급을 하였다. 이후에 학군단 근무, 장교 영어반 수료 후에 군단 정보처에 근무를 하다가 뜻한 바가 있어서 육군 소령을 마지막으로 명예로운 전역을 하였다. 어떻게 보면 나는 행운아다. 총각으로 부담 없이 군 생활을 마감하였으니 나쁜 추억보다는 좋은 추억을 더 많이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결혼 후에 다시 인연이 되어서 서울지구병원에서 원무실장으로 근무하게 될 줄은 나 역시도 전혀 예측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하여튼 나의 군 생활의 추억담이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유익한 시간이 되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