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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축제 · 기념일 백과 - 아비뇽 페스티벌[ Avignon Festival ]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3. 3. 0:49
세계의 축제 · 기념일 백과 - 아비뇽 페스티벌[ Avignon Festival ]
2023.11.16. 10:47조회 4
아비뇽 페스티벌
[ Avignon Festival ]
요약 매년 7월 프랑스 아비뇽에서 열리는 종합 예술 축제
1. 축제 정의
아비뇽은 프랑스 남동부 보클뤼즈(Vaucluse) 주의 주도(主都)다. 인구 10만 명도 안 되는 이 작은 도시가 해마다 여름이면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수십만 명의 인파로 북적이는 예술 축제의 도시로 변한다. 3주간 열리는 아비뇽 페스티벌 때문이다.
아비뇽 페스티벌은 수준 높은 연극 작품을 지역 주민들에게 선보이자는 정책의 일환으로 시작된 축제다. 1947년 연출가이며 배우인 장 빌라르(Jean Vilar)가 아비뇽 교황청의 안뜰 쿠르 도뇌르(Cour d’Honeur, 명예의 뜰)의 야외 무대에서 연극 세 편을 공연했고, 이것이 큰 호응을 얻어 이후 계속 이어지게 됐다. 장 빌라르는 아비뇽 페스티벌의 기초를 다지며 단순히 오락적이고 소비적인 행사가 아닌, 새로운 젊은 관객을 위한 창조적인 문화 행사가 되도록 노력해나갔다. 연극이 중심을 이루던 축제는 1960년대 중반 이후 춤, 뮤지컬, 현대 음악 등으로 영역을 확대했고 최근에는 시, 미술, 영화, 비디오아트 등을 아우르는 종합 예술 축제로 발돋움했다.
오늘날 아비뇽 페스티벌은 주최 측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 선정된 작품들을 쿠르 도뇌르를 비롯한 유서 깊은 아비뇽 시내 공연장과 야외 무대에서 선보이는 공식(In) 페스티벌과 학교와 교회, 창고, 광장, 카페나 술집 등 일상 공간에서 자유롭게 펼쳐지는 비공식(Off) 페스티벌로 구성된다. 전체 공연 관람객은 약 10만 명, 이 기간에 아비뇽을 찾는 관광객은 약 50만 명에 달해, 조용한 도시 아비뇽은 축제가 시작됨과 동시에 예술 공연의 열기로 가득 차게 된다.
한국은 1998년 ‘아시아의 열망’(Désir d’Asie)이라는 주제로 일본, 대만과 함께 아비뇽 페스티벌에 초청됐다. 이로써 공연 예술 단체가 유럽에 진출하는 교두보를 마련했으며, 아비뇽 페스티벌의 명성이 국내에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2012년 제66회 아비뇽 페스티벌
아비뇽 페스티벌의 주 무대는 아비뇽 교황청의 안뜰인 쿠르 도뇌르다. 이 역사적인 의미를 간직한 무대에서는 주최 측의 엄격한 선정을 통해 선별된 작품들이 공연된다.
2. 축제 유래와 역사
14세기 초, 프랑스 황제의 위세에 굴복당한 교황 클레멘스 5세는 바티칸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프랑스 남부 아비뇽에 머무르며 황제의 간섭과 지배를 받았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에 의해 로마로 돌아간 1377년까지, 약 70년간 교황이 아비뇽에 머무른 사건을 흔히 ‘아비뇽 유수’라고 한다. 이 유명한 역사적 사건의 무대가 된 아비뇽에는 14세기에 지어진 견고한 고딕 석조 건물인 교황청(Palais des Papes d’Avignon)이 오늘날에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1947년, 미술 비평가 크리스티앙 제르보스(Christian Zervos)와 시인 르네 샤르(René Char)는 아비뇽 교황청에서 피카소, 마티스, 브라크 등의 작품을 선보이는 현대 미술 전시회를 기획하면서 젊은 연출가이자 배우인 장 빌라르에게 특별한 제안을 했다. 즉 빌라르가 1945년에 연출했던 T. S. 엘리엇의 <대성당의 살인>(Murder in the Cathedral)을 교황청의 안뜰 쿠르 도뇌르의 야외 무대에서 다시 공연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자신의 작품이 커다란 야외 무대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빌라르는 제안을 거절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빌라르는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2세>(Richard Ⅱ)와 모리스 클라벨(Maurice Clavel)의 <한낮의 테라스>(La Terrasse de midi), 폴 클로델(Paul Claudel)의 <토비트와 사라>(Tobie et Sara)의 공연을 제안했다. 이를 위해 재정적 지원이 필요했던 그는 당시 아비뇽 시장이던 조르주 퐁스(Georges Pons)를 설득했고, 1947년 9월 4~10일에 제1회 아비뇽 예술 주간(Semaine d’art en Avignon)을 개최할 수 있었다.
예술 주간 행사에는 제르보스가 기획한 현대 미술전, 작곡가이며 지휘자인 로제 데조르미에르(Roger Désormière)가 이끄는 현대 음악과 고전 음악 연주회 두 편, 빌라르가 기획한 세 편의 연극이 선보였다. 소규모 지방 예술제로 시작된 아비뇽 예술 주간 행사는 관람객의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프랑스 연극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고자 했던 빌라르는 훌륭한 극본을 바탕으로 배우들을 섭외하고, 야외 무대를 위한 장치를 마련하고 더 많은 관객을 끌어들이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이러한 열정이 뒷받침되어 ‘예술 주간’은 ‘연극 주간’(Semaine d’art dramatique)으로 바뀌며 매년 이어지게 됐다.
1) 1947~1963년
연극 주간 행사는 해가 거듭되는 동안 아비뇽 페스티벌(Festival d’Avignon)로 알려지게 됐고, 1951년 제5회 축제에서는 1만 명의 관람객 수를 기록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장 빌라르는 국립 민중 극단(Théâtre National Populaire, TNP)의 단장으로서 아비뇽 페스티벌의 예술감독으로 계속 활약했다. 페스티벌은 그가 단장을 사임하는 1963년까지 12년간 국립 민중 극단과 함께 성장했다. 빌라르는 아비뇽 페스티벌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운영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재임 기간 내내 투쟁했다. 빌라르가 지역 유지들로 구성한 후원회는 초기에 ‘아비뇽 예술 주간 위원회’(Comité de la semaine d’art d’Avignon)라고 불렸으나, ‘예술 주간’ 행사에서 빌라르의 연극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면서 1950년에 ‘연극 축제 위원회’(Comité de Festival d’art dramatique)로 바뀌었다.
1951년에는 당시 프랑스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영화배우 제라르 필리프(Gérard Philippe)가 무보수로 3년간 페스티벌에 동참하면서 전 국민적인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다.
1953년 빌라르는 아비뇽 시 행정당국과의 갈등으로 예술감독 자리에서 하차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페스티벌에서 좀 더 영향력을 행사하려던 아비뇽 시는 이듬해인 1954년에 빌라르의 뜻을 받아들여, 예술감독의 프로그램 구성과 작품 선정에 대한 자유를 보장해주고, 모든 관련 기관은 정치적 성향과 상관 없이 페스티벌의 독립성을 존중해주기로 했다.
2) 1964~1979년
1964년부터 아비뇽 페스티벌은 ‘창작, 초연 중심의 축제’로 거듭나며 상업성을 배제한 문화 예술 축제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1966년 ‘발레 혁명가’로 불리는 무용수 겸 안무가 모리스 베자르(Maurice Béjart)의 발레가 쿠르 도뇌르 무대에 선보이며 무용은 연극과 함께 아비뇽 페스티벌을 이끌게 됐다. 유명 안무가 피나 바우슈(Pina Bausch), 모리스 베자르 등의 무용 연출이 더해지면서 연극을 넘어선 창조적이며 실험적인 공연 예술의 장으로서 아비뇽 페스티벌의 면모가 더욱 확고해지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이듬해인1967년에는 시나리오 작가이자 영화감독인 장 뤽 고다르(Jean Luc Godard)의 영화 <중국 여인>(La Chinoise)이 상영되어 호평을 받기도 했다.
한편1966년은 아비뇽 페스티벌이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한 해이기도 하다. 연출가 앙드레 베네데토(André Benedetto)는 공식 프로그램에 선정되지 못한 연극 <조각상>(Les Statues)을 카르므 극장(Théâtre des Carmes) 무대에 올렸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이 공연이 ‘아비뇽 오프 페스티벌’(Le Off d’Avignon)의 계기가 됐는데, 엄격한 기준에 따라 선발된 프로그램들로 이루어지는 기존 페스티벌에 대한 작은 저항의 표현을 관객들이 신선하게 받아들이면서 큰 성공을 거둔 것이다. 이어 1967년에도 베네데토는 아비뇽 출신의 젊은 연극인이며 검은 떡갈나무 극장(Théâtre du Chêne Noir)의 소유주 제라르 즐라(Gérard Gélas)와 함께 공식 아비뇽 페스티벌에 대한 저항을 시도했다. 이는 더 많은 대중에게 공연 예술을 보급하려는 현재의 비공식적인 ‘아비뇽 오프 페스티벌’의 시발점이 됐으며, 이로 인해 페스티벌은 관객과 공연 예술가들의 만남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게 됐다.
1971년 심장마비로 사망한 빌라르의 뒤를 이어 폴 퓌오(Paul Puaux)가 제2대 예술감독으로 취임했다. 빌라르의 동료이던 퓌오는 빌라르가 세운 페스티벌의 본질을 이어나가며, 러시아 무용단, 미국 무용단을 아비뇽에 초청하는 등 무용의 비중을 좀 더 높여갔다.
1976년 아비뇽 페스티벌에 참가한 무용가 머스 커닝엄
1960년대 후반부터 모리스 베자르, 피나 바우슈 등 유명 안무가들의 무용 연출이 더해지며 아비뇽 페스티벌은 창조적이며 실험적인 공연 예술의 장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3) 1980~2003년
1980년 제3대 예술감독으로 취임한 베르나르 페브르 다르시에(Bernard Faivre d'Arcier)는 빌라르가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선보인 것과 마찬가지로 더욱 복합적이고 실험적인 공연을 무대에 올렸다. 또한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조직 운영을 위해 1984년까지 5년간 페스티벌 조직에 ‘경영’의 개념을 도입해 법적으로 안정된 비영리기구로 전환하고 포괄적으로 재정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조직을 정비했다.
1985년부터 1992년까지 제4대 예술감독은 알랭 크롱베크(Alain Crombecque)가 맡았다. 그는 ‘만남을 최우선으로 하는 축제’라는 주제로 전 세계 내로라하는 예술가들과의 만남, 관객과의 만남 등의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구성했다. 또한 해외 예술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더욱 폭넓게 수용, 아비뇽 페스티벌을 세계적인 공연 예술의 장으로 만들어나갔다.
1993년 이후 제5대 예술감독으로 재취임해 2003년까지 활동한 베르나르 페브르 다르시에는 이전에 계획했던 ‘해외 예술에 대한 호의, 예술 간의 교류와 공동 창작 등 다양하고 독창성 있는 축제 프로그램을 실현’시켰다. 1998년 ‘아시아의 열망’ 행사에는 한국의 전통 무용과 국악 공연이 초청받았으며, 김덕수 사물놀이패의 풍물굿은 매진 사례를 기록했다.
그러나 2002년에 문화 예술 분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문제에서 비롯된 전국적 파업으로 인해 그해 페스티벌이 개최되지 못한 사태가 벌어지며, 베르나르 페브르 다르시에는 예술감독직 사의를 표명했다. 2003년 9월부터 예술 기획자 오르탕스 아르샹보(Hortense Archambault)와 뱅상 보드리에(Vincent Baudriller)가 공동 예술감독으로 선임됐다.
4) 2004년 이후
아르샹보와 보드리에는 아비뇽 페스티벌의 연극이 중심을 이루는 영역을 과감하게 축소했다. 그들은 아비뇽 페스티벌이 ‘새로운 예술, 복합 장르 예술 창작과 실험의 본거지’로 나아가도록 유도했다. 또한 공연에 참여하는 예술가들과 이를 즐기려는 관객들에게 좀 더 가까운 무대를 제공하기 위해 ‘협력 아티스트’(Artiste Associé) 제도를 운영하고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는 복합 문화 축제로 자리매김 할 수 있게 이끌었다.
2013년 9월에 취임한 예술감독 올리비에 피(Olivier Py)는 배우, 감독, 작가, 음악가 등 다방면으로 활동하는 인물로, 1995년부터 아비뇽 페스티벌과 인연을 맺어왔다.
3. 축제 주요 행사
아비뇽 페스티벌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행정당국에서 행사를 지원하지만 공연에 결코 간섭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또한 예술감독에게 5년 임기를 보장하고 전권을 위임하며 예술감독의 행사 진행 능력을 신뢰해준다. 이는 지난 60여 년간 아비뇽 페스티벌이 독특한 공연 예술의 장으로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이유이기도 하다.
아비뇽 페스티벌은 인 페스티벌(In Festival)과 오프 페스티벌(Off Festival)로 나뉘어 운영된다.
1) 아비뇽 인 페스티벌
인 페스티벌은 축제 18개월 전부터 주최 측의 선정 작업을 거쳐 선별된 공식 작품들로 구성되는 축제다. 세계 최초이거나 프랑스에서 공연되지 않은 작품 40여 편이 선정되기 때문에 새로운 얼굴의 극작가나 감독, 배우들이 탄생하는 무대가 되기도 한다. 주요 작품들은 아비뇽 교황청의 안뜰 쿠르 도뇌르의 야외 무대에서 공연되며, 페스티벌이 끝난 후 대부분의 작품들은 프랑스 각지, 유럽 각국에서 재공연된다.
2) 아비뇽 오프 페스티벌
오늘날 아비뇽 페스티벌의 규모를 확장시키는 데 기여한 오프 페스티벌에는 프로와 아마추어 구분 없이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다. 공연 작품을 선정하는 예술감독은 없으며, 선택은 오로지 관객의 몫이다. 공간이 있는 곳이면 어느 곳이든 무대가 될 수 있기에 공연장의 선택과 이용이 폭넓은 오프 페스티벌에서는 7백여 편의 작품이 아비뇽 시내 곳곳에서 펼쳐진다. 오프 페스티벌에 참가하는 공연단은 공연 수입으로 자체 제작비를 부담해야 하기 때문에 치열한 홍보전을 치러야 한다.
2013년 제67회 아비뇽 페스티벌-오프 페스티벌
프로와 아마추어 구분 없이 누구나, 어디에서나 공연을 할 수 있는 오프 페스티벌은 관객과 예술가들의 만남을 더욱 풍성하게 하며 아비뇽 페스티벌의 규모를 확장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3) 다양한 이벤트
아비뇽 페스티벌 기간에는 매일 아침, 공연 작품에 대한 기자회견이 열리며, 오후에는 아비뇽 페스티벌의 메인 사무실이 위치한 문화센터 에스파스 생루이(l’espace Saint Louis)에서 배우와 감독, 평론가 등의 전문가들이 작품에 대한 토론을 벌인다. 또한 공연 종사자들이 참여하는 시연 공연, 교육 프로그램, 워크숍 등의 이벤트도 다양하게 마련된다.
공연 시설, 무대는 상대적으로 열악하지만, 작은 지방 도시 아비뇽에서 열리는 종합 예술 축제인 아비뇽 페스티벌은 전 세계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고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다양한 작품으로 관객들의 선택의 폭을 넓혀주는 역할을 해나가고 있다.
참고문헌
http://www.festival-avignon.com
http://www.france.fr/en/art-and-culture/festival-davignon
김미성, 「아비뇽 축제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미래」, 『한국프랑스학논집』 제59집, 한국프랑스학회, 2007년
최준호, 「축제를 통한 지역 활성화–아비뇽 축제를 중심으로 한 사례 연구」, 《2012년 한국프랑스학회 추계 학술대회》, 한국프랑스학회, 2012년
김춘식․남지호 지음, 『세계축제경영』, 김영사, 2002.
류정아, 「연극축제의 세계화 가능성과 문제점- 아비뇽 연극 페스티벌과 과천 한마당 축제」, 『축제로 이어지는 한국과 유럽』, 연세대학교출판부, 2004.
전광호, 「아비뇽 축제기행: 공연예술의 르네상스」, 『프랑스문화연구 제9집』, 2004.
[네이버 지식백과] 아비뇽 페스티벌 [Avignon Festival] (세계의 축제 · 기념일 백과, 류정아, 오애리, 김홍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