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말씀드렸듯이 교회력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그리고 이날에 우리는 많은 교회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임금입니다 라고 선포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찬양을 했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영광의 주, 하늘과 땅의 주 라는 우리 것이 우리의 찬송만일 뿐만 아니라 세상에 선포하는 우리의 소리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이 날이 우리에게도 아주 중요하고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의 구주이신 것은 적어도 1년에 한 번은 우리가 되새겨 보아야 할 의미다 하는 것이죠.
제가 우리 교회에 부임하고 2021년부터 지금 네 번째 맞이하는 절기예요. 오늘 그리스도의 왕 주름 그리고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함께하고 싶은 부분은 이 세상에 그리고 심지어 교회에도 들어와 있는 잘못된 한 경향이 있는데 그것을 맞서서 오늘 이 절기를 지키고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그리스도를 길들이려 하는 경향이에요. 영어로 하면 테임일 수도 있고 도메스틱 케이지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리스도 하나님을 길들이려고 하는 텐던시 경향이 세상에 그리고 교회 안에도 있다 하는 겁니다.
성경이 전하는 대로의 하나님, 성경이 전하는 대로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기의 생각이나 필요나 취향에 맞춰진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이라는 것이에요.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중에도 자기에게 맞는 그리스도만 자기에게 맞는 하나님만 갖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고 그 하나님을 붙들고 사는 사람들이 또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을 필요할 때만 부르고 모든 것이 잘 되고 평안할 때는 찾지도 않고, 혹시라도 어려운 소리 듣 듣기 싫은 소리를 하면 문을 닫거나 아니면 단지 속에 가두어 버리는 사람들이죠.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주인인 것처럼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경향을 성향을 드러내는 날이 오늘이고 그리고 그것을 바로잡기 해 주는 말씀이 바늘 오늘 봉독한 말씀에 담겨 있습니다. 본문에는 예수님에 대해서 우리가 너무 편하고 쉽게 생각하지 않게 하는 두 가지 측면이 담겨 있어요.
첫 번째는 본문이 묘사하고 있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에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처음 오실 때 그때 보여주신 모습, 성경에 특별히 복음서들이 전하고 있는 그 모습과 여러 부분에서 다른 모습이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첫 번째 때를 우리가 돌아볼까요?
첫 번째 때에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는 연약한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어서 아기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와 같은 사람의 몸으로 사셨죠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에는 어린 아기를 타고 들어가셨어요. 그곳에서 사람들에게 조롱과 매맞음과 고난을 당하셨고,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 군인들이 만든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피를 흘리셨고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이 보여주는 주님 다시 오실 주님인데 그 모습이 어떻습니까?
백마를 타고 오세요. 그의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이 아니라 영광의 면류관이 여럿 있습니다. 그의 눈은 불꽃 같다고 하고 그의 입에서는 예리한 검이 나옵니다.
요한계시록이 묘사하는 것을 우리가 그림으로 그대로 그리면 이상한 형상이 나오는데 우리가 이해해야 될 거는 그런 것이 아니고 요한계시록에게 알려주려고 하는 이 상징의 의미들이죠. 이번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을 용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과 싸우고 공의로 심판하시고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시며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기 위해서 오시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셨다면 이제는 원수들이 피를 흘 차례이죠.
다시 오실 그리스도는 처음처럼 혼자 외롭게 싸움의 길을 가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제는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그와 같이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는 하늘의 군대가 그와 함께 할 것이죠.
그렇게 오는 자의 옷과 다리에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라는 이름이 새겨 있어요. 한번 같이 해볼까요?
만왕의 왕 만주의 주
네 바로 이 이름이 앞에서 언급한 한 첫 번째 측면에 이어지는 두 번째 측면이 돼요. 이 이름에 의미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 이름이 처음 소개되는 신명기를 통해서 우리가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함께 볼까요? 신명기 10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이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는 말입니다.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오.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고아와 가부를 위한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옥을 주시나니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신 가운데 신 주 가운데 주 이것은 오늘 요한계시록 본문에서 만난 만왕의 왕 만주의 주와 의미와 형식에서 거의 같은 말이에요. 영어로 하면 더 일치함을 볼 수 있을 겁니다. 거 거 킹 오브 킹즈 로드 오브 로스라고 이렇게 되어 있죠.
이것을 다신의 상황 신들이 많은 다신의 상황에서 보면 최고의 신 최고의 왕 최고의 주라고 이해를 할 수 있겠지만, 성경에서와 같이 유일신의 상황에서는 유일한 신 유일한 왕 유일한 주 진짜 신 진짜 왕 진짜 주 이렇게 이해를 할 수가 있어요.
신명기에서는 하나님의 크고 능하고 두려우신 그 측면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인 오늘 본문에서는 그것을 그리스도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크심을, 그의 능하심을, 그의 두려우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영어로 하면 그레이트 마이티 오썸이라고 하는데 모두 사람이 마음대로 길들일 수 없는 측면을 알려주는 말들이에요.
여기에서 끝에 오 썸이라고 하는 거는 두려움을 일으키는 경외감을 일으키는 그런 뜻으로 이해를 할 수가 있습니다. 보면 무서움이 경외감이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그러한 대상을 향해서 쓰는 말이에요.
이어지는 18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어떤 면에서 그렇게 크고 능하고 두려운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번 같이 읽어볼까요? 굵게 표시된 부분만 시작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고와 가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옥을 주셨나니
그런 면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크고 능하고 두려우신 분이다 하는 것인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신 모습을 보여주셨죠. 그의 힘과 능력과 위험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세상의 정의를 위해서만 사용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지나갈 수 있었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라고 질문을 할 수가 있어요. 어찌하여서 어떻게 이렇게 크고 능하시고 두려우신 하나님에게 사랑, 정의, 생명, 구원이 함께할 수 있을까요?
이 둘이 서로 대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항상 함께하기 때문에 그래요.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은 지극히 낮은 곳에 있는 사람과 함께하신다고 하세요.
마찬가지로 지극히 능하신 하나님께서 지극히 연약한 사람과 함께 하시는 것은 자연스러운 거죠. 성경적으로 보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라 하는 것인데, 세상적으로 보면 이것이 거의 불가능한 것이 되었어요. 하나님의 정의와 하나님의 사랑이 마치 함께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능하심과 하나님의 연약하심이 함께하실 수 없는 것인가 부드러우심이 함께하실 수 없는 것처럼 세상은 그러한 생각을 사람들 속에 심어놓고 있고 많은 교회에 다니는 분들도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고 있는데 우리는 여러분은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생각할 때 갖는 이미지들이 있어요. 상징들이 있습니다. 언어들이 있어요. 성탄절과 부활절을 지나면서 자주 만나게 되는 그림은 어린 양이죠. 어린 양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시고 죄를 가져가신 끌려가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잘 보여주는 이미지이고 상징이예요.
그런데 이게 전부가 아니잖아요. 사자도 있잖아요. 사자 우리를 위해서 싸우지만 또한 우리 안에 두려움을 일으킬 수 있는 존재 사자 그 이미지와 사자가 있습니다. 어린 양과 사자 이 둘은 서로 따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 항상 함께 있어야 해요.
어린 양 이미지에 치우치면 어떻게 됩니까?
악과 싸우시고 멸하시는 사자 같은 그리스도의 권세를 놓칠 수가 있어요. 사자에 치우치면 자신을 내어주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희생을 놓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믿듯이 우리에게는 그리스도는 세상 죄를 가져가신 어린 양이시지만 동시에 원수들을 멸하시는 사자와 같은 분입니다. 우리가 찬양하듯이 그가 다시 오실 왕이고 만왕의 왕이요. 또한 만주의 주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정말로 잘 배워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셨듯이 잘 배워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우리를 채워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이에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해서 원하는 것을 봤습니다. 위로를 받고, 치유를 받고, 힘을 받고, 능력을 받고, 심지어 프로모션까지 받는 그러한 일들을 겪죠.
예수님은 친구도 되어 주셨습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쳐다보지도 않을 사람들이라도 예수님은 기꺼이 가까이 다가오셔서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친구라면 내가 무엇을 하든 나에게 잘해주죠. 따뜻하게 대해주고 친절하게 말해줍니다.
예수님도 분명 그렇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강조하면 그것이 전부가 아니죠. 그리스도는 또한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우리만의 주님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경우처럼 세상의 창조자, 구원자 또한 심판자로서 그런 것입니다.
귀신들도 알아보고 도망가는 분이 없어요. 배를 뒤집는 폭풍조차 말씀으로 잠잠케 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엄하게 대하실 수가 있고, 우리를 두렵게 하실 수가 있고, 우리가 할 것과 하지 말 것에 대해서 명령을 하실 수가 있어요.
우리가 구하는 것을 주시지 않을 수가 있고, 원하는 것에 정반대를 주실 수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예수 그리스도가 그런 분이라는 걸 어떻게 생각을 하세요?
그런데 이 두 번째 측면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잃으면 안 됩니다. 첫 번째 측면만 따뜻하고 부드럽고 친근한 측면만 붙으면 예수님 반쪽만 갖는 게 아니라 예수님 전부를 읽고, 성경도 읽고, 하나님도 읽고, 교회를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불쌍하게 여길 수가 있어요.
여러분은 예수님의 어린 양 되신 측면과 사자 된 측면을 모두 다 항상 붙드실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것이 가정에서도 이끌어야 되고요. 교회 안에서도 그렇습니다. 교회 안에 아멘 목사님 가령 저 같은 목사님이 너무 친근하고 따뜻하기만 하면 성도가 약해질 수가 있어요. 때로는 엄하게 강하게 해야 될 필요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가 참으로 험악해서 그렇게 하면 삐치고 교회를 떠나고 하는 부분들이 있어서 힘들게 되는 것이죠. 우리 안에는 그런 일들이 없고 예수님의 어린 양 측면과 예수님의 사자의 측면이 공이 있듯이 우리 교회 안에도 이 두 측면이 건강하게 균형 잡혀 살아 있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혹시라도 제가 여러분에게 싫은 소리하면 삐치지 말고 화내지 말고 교회 떠나지 말고 저한테 우편하게 오셔서 대화할 수 있는 그러한 건강한 교회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