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막5:21-43)
갈등
1. 어느 교회에서 오늘 본문의 회당장 야이로 이야기를 스킷 드라마로 연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꽤 설득력 있는 드라마였어요. 부산에 있는 교회인데, 찬양과 문화 사역에서는 서울과 전국 어느 교회도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탁월합니다. 이 드라마의 첫 시작은 야이로와 그의 친구와의 대화로 시작되었습니다. 딸이 죽게 되었는데, 회당장인 야이로가 예수님에게 딸의 병을 고쳐달라고 요청해야 할지 고민합니다. 내 지위가 문제가 아니라, 딸을 살리는 아비가 되어야 한다는 갈등입니다. 야이로의 친구는 반대합니다.
자네가 어떻게 해서 이 자리에 올랐는데 딸의 건강도 중요하지만, 이 일로 하루아침에 너의 지위를 박탈당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이 드라마에서 연출한 심각한 상황을 이해한다면 오늘 본문을 읽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야이로는 어떻게 결단을 내렸습니까? 22-23절,“회당당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간고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은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야이로의 딸을 살려야 한다는 부성이 자기 지위에 대한 염려를 이겼습니다. 당시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이 엄청나게 몰려왔어요.
2. 24절,“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엄청난 인파가 밀려오며 에워싸 밀었습니다. 이 틈에 한 여인이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이 여인이 주님을 둘러싼 많은 인파 속을 뚫고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 여인은 12년 동안이나 의사의 치료를 받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몸만 축이 나고 재산만 다 허비하고 말았어요. 이때 이 여인에게 이런 확신이 들었습니다. 27-28절,“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이 여인은 성경에 나오는 몇 안 되는 귀한 믿음의 사람이었어요.
이런 믿음의 사람으로, 자기 하인-종의 병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며 주님이 직접 제집에 오실 필요가 없다고 말한 백부장이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말씀만 하시면 병이 나을 것이라고 했던 사람입니다. 이 여인은 주님의 능력에 대한 소문을 듣고 주님을 도무지 만날 수 없으니, 옷자락이라도 만지면 자기의 불치병이 나을 것이라는 확신하였습니다. 주님은 이 여인이 자기 옷을 만진 것을 아셨고, 바로 고쳐주셨어요. 주님은 누가 내 옷을 만졌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시간이 지체되었습니다. 야이로는 주님이 자신의 마음이 시급이 다투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보여서 야속했습니다. 주님은 죽어가는 야이로의 딸의 상황을 아시면서도, 혈루증 앓던 여인을 불러서 대화하시며 왜 지체하셨을까요?
갈등 심화
3. 야이로의 딸은 죽음이 다가와 시급을 다투었는데, 예수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혈루증 앓던 여인을 불러서 간증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시간이 지체되는 사이 야이로의 집에서 소식이 왔어요. 35절,“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릐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버스는 이미 지나갔다는 말입니다. 이제 사람이 죽었으니,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 없게 되었다고 낙심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예수님은 36절,“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특별하신 분이세요. 이 상황에서 여유를 보이시더니 야이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야이로의 집에 가니 초상집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울며 심히 통곡했습니다. 12살 아이가 죽었으니 어떠했겠습니까? 주님은 다시 한번 사람들에게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어요. 39절,“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4. 예수님은 생사를 넘나드는 초인의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주님은 죽은 야이로의 딸을 향하여, 이 아이는 죽지 않았다. 자고 있는 것이라고 선언하셨어요.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비웃었습니다. 진리는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 들으면 비웃음거리가 됩니다.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는 격입니다. 주님은 야이로의 딸이 누워 있는 곳으로 가셨습니다. 이곳에는 아이의 부모와 베드로와 야고보-요한 형제 세 제자만 들어오게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출입을 금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일을 행하는 곳에는 대개 이렇게 소수만 있게 하셨습니다.
이번만 그런 것이 아니고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특별히 선택받은 제자들이었습니다. 주님이 야이로의 딸 앞에서 어떻게 하셨는지 봅니다. 41-42절,“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예수님이 병을 고치거나 사람들을 살리실 때 보면, 구약의 선지자들이나 신약의 사도들이 하는 것과 다릅니다.(시신에 몸을 대고 비비거나 간절히 기도하는 등) 주님은 말씀만 선포하셨습니다. 소녀야 일어나라! 주님은 과연 어떤 분이셨기에 이렇게 신비한 일을 하시며 사람들을 놀라게 하셨을까요?
실마리
5. 오늘 본문에서 감정의 가장 큰 기복을 경험한 사람은 회당장 야이로였습니다. 그는 딸을 살리고자 하는 보통 아버지처럼 어렵게 결단을 하고, 예수님을 찾아가 겸손하게 발아래 엎드렸습니다. 두 가지 자세가 참 대단했어요. 회당장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주님을 찾은 것이나 주님을 만나고서는 그 발아래 엎드린 것입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귀한 자세였습니다. 주님은 이런 그의 마음을 다 아시고 야이로를 살리려고 그의 집으로 향하셨습니다. 야이로의 발걸음은 지금 딸을 살려야 하는 시급을 다투는 상황이었는데, 불청객이 등장했습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의 형편을 보지 않고도 잘 아셨어요. 주님도 야이로만큼 시급을 다투는 상황을 아시면서도 이 여인의 형편을 돌보셨습니다. 주님은 이 여인이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고 나은 것을 아셨고, 여기서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길에 잠시 미루셨습니다. 주님께는 야이로의 딸의 형편도 중요했지만. 이 순간도 꼭 필요한 시간이었습니다. 주님은 자기 옷자락을 만진 사람이 있었고, 자신의 능력이 나가서 그 사람이 고침받은 것도 아셨어요. 주님은 알지 못하시는 것이 전혀 없으십니다.
6. 예수님은 지금 내 옷자락을 만진 사람이 누구냐고 자기를 둘러싼 사람들을 향해서 물었습니다. 주님이 물으신 것은 몰라서가 아니라, 내 앞으로 나오라는 초청의 메시지였어요. 주님은 이 여인을 보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님의 옷자락을 만진 여인은 33-34절,“여자가 자기에게 이뤄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주님이 하신 일을 사람들 앞에서 증거하게 하셨어요. 이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드러내고 주의 이름을 높이며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이것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큰 잘못(죄)입니다. 이것을 가르치시고자 시급을 다투었던 야이로의 딸에게 가는 길을 지체하셨어요. 예수님이 지체하는 사이 야이로의 딸은 죽었고, 이 소식을 전하면서 주님이 오실 필요가 없다고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주님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 상황을 다 아십니다. 주님은 그 상황을 아시고 야이로에게 두려워 말고 나를 믿기만 하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런 말은 어떤 선지자나 사도도 할 수 없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하나님이신 주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7. 예수님은 하나님이셨기에 제한되는 어떤 일도 없으셨습니다. 주님은 울며 통곡하는 초상집 사람들을 향해서, 울지 말라 이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고 선포하셨어요. 사람들에게는 비웃음거리였지만 주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달리다굼을 선언하셨습니다. 소녀야 그만 자고 일어나라! 야이로의 딸은 자던 아이가 일어난 것처럼 실제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일어났어요.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처음 보았고, 그저 놀랐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상황을 본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주님은 혈루증을 앓던 여인을 신비하게 고치시고,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며 유대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고 전파하셨습니다.
복음 제시
8. 오늘 본문의 두 사건은 예수님이 불치병을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생명의 주이심을 분명하게 드러내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우리에게 주목되는 반복되는 단어가 보입니다. 23절, 야이로가 자기 딸을 주님께 살려달라고 하면서 그로 구원을 받아...라고 표현했어요. 주님은 혈루증을 앓는 여인에게 완전한 회복을 공개적으로 전하시며 자유를 선언해주셨습니다. 혈루증은 당시 부정한 질병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부정한 질병은 다른 사람과 접촉을 금하고 나은 뒤에 제사장에게 치료를 확인을 받아야 공동체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나병처럼요. 주님은 이 여인에게 자유를 선언해주시며,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하라고 말씀하셨어요.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주님은 구원이라는 말을 쓰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몸만 고침을 받고 산다면 아무 소용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몸만 고치고 살리시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열 명의 나병 환자를 고치시고, 한 명만 주님께 감사의 인사를 하러 왔을 때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라.”(눅17:19) 나병에서 고침을 받은 나머지 아홉 명은 몸은 나았지만 구원받지는 못했습니다. 주님은 몸만 아니라 영혼을 고치시는 완전한 구원자이십니다.
기대
9. 오늘 복음주의 시대를 천명하고 있지만, 올바른 복음을 누리지 못하고 있어요. 구원을 영혼 구원만으로 축소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벧전2:24,“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베드로가 사53:5, 12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힐링을 얻었습니다. 나음-힐링은 영혼 구원만이 아닙니다. 우리 병든 몸-상한 감정 등 전인적인 치유를 의미합니다.
우리 교회는 교회 성장을 도모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 운동을 지향합니다. 하나님의 나라 운동은 잘못된 복음-축소된 복음을 이해하고 있는 자들이 올바른 복음-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부터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죽어서나 가는 나라만 말하는 복음은 반쪽 복음입니다. 이 시간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가르쳐 주신 본을 따라서 우리 포항 빛내리교회와 한국교회가 올바른 복음을 전하게 하소서.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 운동이 전개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