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나요?
“죽음은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로 가는 것이기에 이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한번 죽게 되면 현재 세계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두려움을 안고 앞으로 1년, 5년, 10년, 20년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 저의 어려움입니다. 그래서 저는 언젠가부터 매일 아침에 죽음의 어려움을 두고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편안하게 대하기 위해서요. 이러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스님도 갖고 계실 텐데 스님은 생활 속에서 어떻게 지혜롭게 다루고 계신지 진심으로 알고 싶습니다.”
“저는 출가해서 승려가 되고 ‘수행은 살고 죽는 걸 뛰어넘는 세계로 가는 것’이라고 경전을 통해 많이 배웠습니다. 책을 보고 아는 수준에서 저 스스로도 ‘나는 죽음에 대해 큰 두려움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1979년 어느 날 갑자기 끌려가서 엄청난 고문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러다 죽는 게 아닌가?’ 하고 겁이 덜컥 났어요. ‘아무도 모르는 곳에 땅 파서 너를 묻어버리면, 네가 죽었는지 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몰라!’ 하며 협박을 당하기도 하고, 전기 고문대에 앉혀놓고 ‘이 스위치만 누르면 넌 죽는 거야!’ 하며 협박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물고문을 당하거나 두들겨 맞을 때는 악을 쓰고 버텨야 하니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낄 겨를이 없었어요. 그런데 고문하는 사람도 쉬어야 하니까 휴식 시간이 있습니다. 잠시 쉬었다가 다시 고문을 이어가는데, 그때 엄청난 공포심이 일어났습니다. 방금 겪었던 고통이 트라우마가 되어서 ‘다음 고문은 어떻게 견딜 것인가’ 하는 두려움이 생겼어요. 그래도 막상 다시 고문이 시작되면 악을 쓰다가 까무러쳐 버리게 되고, 물을 부어서 깨면 ‘아, 기절했나 보다’ 하고 정신을 차리게 되니까 두려움이 심하게 일어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휴식 시간에 다음 고문에 대해 상상을 할 때 두려움이 일어났어요.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내가 생사를 뛰어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못했구나! 내가 나를 잘 몰랐구나’ 하고 자각을 하게 되었죠.
그 이후에도 여러 과정을 겪어 오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씩 사라졌습니다. 물론 두려움이 하나도 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죠. 한 번은 제가 위험하다고 가지 말라고 하는 인도의 어느 오지 마을에 답사를 갔는데 갑자기 강도가 나타나서 총을 겨누며 ‘돈 내놔!’ 하고 협박을 했습니다. 그때 저는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심지어 입에서 웃음이 났어요. 일단 갖고 있는 걸 다 주자고 생각하고 주머니를 털었는데 짐을 숙소에 두고 나와서 가진 돈이 별로 없었어요. 그래서 있는 걸 다 주었는데도 강도가 만족을 안 했습니다. 강도 입장에서는 총까지 가져왔는데 별로 소득이 없었던 겁니다. 그때 제 일행 분이 몇백만 원짜리 고급 카메라를 갖고 있어서 강도가 그걸 뺏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저도 카메라는 뺏기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보니까 강도가 가지고 있는 총이 수제 총이었어요. 그 나라는 수제 총이 많습니다. 총기 사고가 빈번하니까 총을 소지한 사람들이 많거든요. 그 총은 한 발 쏘면 재장전해서 쏘아야 하는 단발 총입니다. 그래서 한 발만 맞을 각오를 하면 되겠더라고요. 연발이면 죽을 수가 있는데, 한 발 정도면 심장이나 머리만 안 맞으면 사는 데에 별 지장은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총을 가진 사람이 근접해 있으면 별로 위협이 안 됩니다. 멀리 떨어져서 총을 겨누어야 엄청난 위협이 되거든요. 그런데 그 강도는 총을 제 머리에 겨누고 근접해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제가 계단 위에 서 있었고, 그 강도는 계단 아래에 있었어요. 그러니 총을 쏘는 게 더 빠르겠어요? 제가 발길질을 하는 게 빠르겠어요? 그래서 위기를 모면한 적이 있거든요. 그때 제가 스스로를 살펴보니까 ‘죽음에 대해 크게 두렵지 않구나’ 하고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문을 당할 때보다 훨씬 더 개선이 된 것 같았어요.
이성적으로 잘 생각해 보면, 우리가 죽음에 대해서 두려워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물론 살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에 두려움이 일어나긴 합니다. 그러나 자연의 원리를 한번 보세요. 모든 풀이 났다가 죽지 않습니까? 모든 나뭇잎이 돋아났다가 떨어지고, 모든 동물이 태어나서 살다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잖아요. 이것은 순환이지 죽음이 아닙니다. 순환의 한 고리를 보고 태어났다 죽었다고 표현하는 것일 뿐 자연 생태계에는 삶도 없고 죽음도 없습니다. 그냥 순환을 할 뿐이에요. 만약 꽃을 땅에 심어서 자연 그대로 두면, 씨앗이 싹을 틔워 자라고 꽃이 핍니다. 그러면 또다시 씨앗이 떨어지고, 땅속에서 싹이 올라오고 꽃이 핍니다. 이 모습을 영상으로 찍어서 빠른 속도로 돌리면 어떻게 될까요? 다만 순환을 할 뿐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뻐할 일도 아니고, 슬퍼할 일도 아니고, 그냥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무언가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두려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첫째, 사물을 있는 그대로 봐야 합니다. 둘째, 오래도록 집착해 온 습관을 못 버리기 때문에 제가 고문을 당했을 때의 얘기처럼 실제로 부딪히면 무의식 세계에서 두려움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더 깊이 자각해 들어가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훨씬 옅어집니다. 더 깊이 자각하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붓다는 깨달음을 얻고 난 뒤에 많은 죽음의 위협이 있었을 때마다 ‘여래는 두려움이 없다’ 이런 말을 했어요. 저도 처음에 불교 공부를 할 때는 그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점점 나이가 들고 여러 경험을 하면서 조금씩 그 말을 이해하게 되었어요.
‘죽어서 천국에 간다’, ‘죽어서 다시 태어난다’ 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때 그 두려움을 완화하는 좋은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을 직시해서 두려워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걸 깨닫게 되면, 죽은 뒤의 얘기는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죽은 뒤의 얘기를 한마디도 하신 적이 없어요. 그런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으면, 나의 죽음도 두렵고, 죽는 사람을 봐도 두려워집니다.
이 두려움을 완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죽음은 피할 수 없는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있으니 ‘죽어서 좋은 데 간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죽어서 좋은 곳에 간다고 하면 두려움을 조금 완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있는 것보다 죽으면 상황이 더 좋아진다고 하니까 안심이 되잖아요. 헤어질 때는 아쉽지만, 승진해서 다른 곳으로 간다거나, 좋은 나라로 이사를 간다거나, 결혼해서 집을 나간다고 할 때는 모두 좋은 곳에 가는 것이니까 덜 슬프잖아요. 그래서 ‘죽으면 좋은 데 간다’ 하고 위로를 하게 된 겁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인간이 낸 가장 좋은 아이디어가 ‘죽으면 좋은 데 간다’ 하는 거예요.
그것이 사실인지 여부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면 면죄부를 파는 것처럼 많은 부작용이 생기고, 사실이 아니라고 하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의 수단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사실이 아니라고 하는 것도 아무 도움이 안 돼요.
그런데 인도 사람들은 이것보다 더 좋은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습니다. 죽고 난 뒤에 좋은 데 간다고 하면 아무리 좋은 곳에 가도 다시 만나지는 못하잖아요. 그런데 다시 태어난다고 하면 다시 만날 수가 있으니 엄청나게 좋잖아요. 그래서 나온 것이 ‘윤회’ 또는 ‘환생’입니다. 그래서 인도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서 많이 슬퍼하지 않습니다. 장례를 오래 치르는 것도 없습니다. 다시 태어난다고 믿었기 때문에 죽음을 헌 옷을 벗고 새 옷을 입는 과정이라고 생각했어요. 헌 옷에 대한 집착을 끊으려면 흔적을 없애버려야 해서 시신을 바로 태워버렸습니다. 그래서 인도에는 관에 시신을 넣는 문화가 없습니다. 숨이 끊어져 죽으면 바로 대나무 몇 개 걸치고 천으로 시신을 덮어서 그걸 몇 사람이 메고 강가에 가서 강물에 한 번 담급니다. 강물에 담그면 죄가 다 녹는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후 바로 화장을 해버려요.
물론 부처님처럼 아주 유명한 사람은 유골을 갖고 탑을 쌓기도 하지만, 대다수는 태워서 아무 흔적 없이 강물에 흘려보냅니다. 흔적을 남길수록 집착이 생겨서 다시 태어나는 데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장례 문화는 모두 믿음과 관계가 있습니다. 티베트 사람들은 하늘 위에 태어난다고 믿으니까 시체를 잘라서 산속 바위 위에 올려놓습니다. 그러면 독수리가 먹고 하늘 위로 높이 날아가는데, 그렇게 하면 영혼이 하늘에 빨리 올라간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죽으면 영혼이 머리 정수리로부터 빠져나온다고 믿는 나라에서는 화장을 하든 땅에 묻든 시신을 앉혀 둡니다. 그래야 영혼이 위로 나와서 싹 빠져나갈 수가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바다 아래 용궁이라고 하는 이상세계가 있다고 믿어서 시신에 돌을 달아서 수장을 합니다. 과거 아마존의 와리족은 부모가 죽으면 자식들이 둘러앉아서 그 시신을 먹었습니다. 그들은 ‘나를 낳고 키워준 부모를 어떻게 불로 태울 수 있으며, 어떻게 땅속에 묻어 썩힐 수 있는가? 부모를 내 몸속에 모시겠다’ 이렇게 믿기 때문입니다. 영원히 내가 부모와 함께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제일 효자라고 볼 수 있죠. 이런 것은 전부 믿음에 관계되는 하나의 장례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이 장례 방식에 대해 묻자 ‘세상 사람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라’ 하고 말씀하셨어요. 즉, 세상 사람들의 풍속대로 할 것이니 신경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돌아가시자 장례를 치르는 사람들은 그들의 풍습대로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것이 바로 화장이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화장을 불교식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불교식 장례 방식이란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이 만약 한국에 태어났으면 어쩌면 매장을 했을 것이고, 티베트에 태어났으면 조장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사람에게는, 만약 그가 기독교인이면 찬송 예배를 하면서 천국에 가도록 축원을 해주면 됩니다. 불교 신자라면 49재를 지내서 극락에 가도록 기도해 주면 됩니다. 두려움이 없다면 아무것도 안 해도 돼요. 집착이 없으니 시신을 태우든지, 땅에 묻든지, 갖다 버리든지, 아무렇게 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세상 사람들이 시신을 훼손했다고 비난하니까 가능하면 땅에 묻거나 불에 태우거나 해서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네, 잘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