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쾌한 정치에 환호하지만
김 태 희 (역사연구자)
지방자치단체에서 임직원들에게 『목민심서』 특강을 했다. 취임한 지 약 한 달이 된 신임 구청장의 의욕이 느껴졌다. 신임 구청장과 구청직원이 얼른 서로 적응하고, 리더십이 잘 발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강의를 했다.
『목민심서』는 그보다 먼저 저술한 『경세유표』와 짝을 이룬다. 『경세유표』는 법제도 개혁으로 오래된 나라를 새롭게 하자는 취지로 썼지만, 언제 이뤄질지 모르는 개혁을 마냥 기다릴 수 없었다. 법제도는 그대로 두고라도 당장 행정의 현장에서 목민관이 잘한다면, 그 혜택이 백성들에게 돌아가지 않겠는가? 그래서 쓴 저서가 『목민심서』다. 제도가 중요하지만, 사람의 각성이 더 즉각적인 효과를 낼 수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시스템과 사람은 서로 의존
『경세유표』는 법과 제도, 즉 시스템에 관한 것이고, 『목민심서』는 시스템을 운용하는 사람의 각성을 촉구하고 기대한 것이다. 『맹자』에 이런 말이 있다. “선한 마음만으로 정치가 되지 않고, 법은 저절로 행해지지 않는다.”(徒善不足以爲政, 徒法不能以自行. 『맹자』 「이루 상」) 성호 이익도 “법이 없으면 다스릴 수 없고, 어진 사람이 없으면 법을 시행할 수 없다”(『성호사설』 「인사문」, ‘人法相維’)고 했다. 시스템과 사람은 서로 의존한다.
『경세유표』의 원래 이름은 『방례초본(邦禮草本)』이었다. ‘방례’란 국가의 법이란 뜻이다. ‘초본’이란 무엇인가? 자신이 제안한 제도 개혁안은 얼마든지 수정하고 윤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제도 입안에서뿐만 아니라 시행에 들어가서도 현실에 맞추어 끊임없이 손질할 수 있는 것이다. 한번 완성되었다 하여 끝이 아니다. 연주할 때마다 악기를 조율하듯 끊임없이 현실에 맞추어 조정하는 것이다.
역사 속에는 격심한 대립과 불화만 요란했던 개혁가가 있는가 하면, 겸손하고 유연한 자세로 차근차근 제도를 정착시킨 개혁가가 있다.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은 쉽지 않을뿐더러 제도가 정착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제도 시행에 따른 효과는 단기적인 효과와 장기적 효과가 다를 수 있다. 좋았던 제도도 악용되기도 하고, 시효를 다하기도 하고, 폐단이 드러나기도 한다. 제도 현실에는 초본 정신이 필요하다.
『맹자』에 이런 말이 있다. “가운데[中]를 잡되 저울질[權]이 없다면, 이는 하나를 고집하는 것과 같다. 하나를 고집하는 것을 미워하는 까닭은 도를 해치기 때문이요, 하나를 얻으려 백 가지를 버리기 때문이다.”(執中無權, 猶執一也. 所惡執一者, 爲其賊道也, 擧一而廢百也. 『맹자』 「진심 상」) 초본 정신이 아집을 버리고 이견과 현실 속에 수정 윤색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면, 하나를 고집하지 않고 여러 가치들 사이에 최상의 적정함을 찾는 것이 저울질이다. 10:0이나 5:5가 아니라 7:3과 6:4 사이에서 계속 고민하고 조정하는 것이다.
개헌만 하면, ○○기관만 설치하면, ○○기관만 폐지하면, 뭔가 단박에 이뤄질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10:0의 명쾌함은 고칠 여지를 닫고, 저울질을 멈추며, 견제를 없앤다. 그러나 완벽한 제도, 완벽한 정책, 완벽한 기관이라는 환상은 곧 배신을 맛볼 것이다. 독점적 권력을 허용하지 않고 견제와 균형, 상호보완이 작동하도록 설계하는 것이 제도사적 지혜다.
「형사소송법」이 개정되어 10월 2일 시행을 앞두고 있는데, 그때까지 손질해야 할 하위법령과 관계법률이 적지 않다고 한다. 법률 개정의 명쾌함이 사실은 하위법령에 부담을 전가한 것이 아닌가 싶다. 자칫 복잡한 하위법령 작업에서 개혁의 성패가 좌우될 수도 있겠다. 검찰 권한이 강화되어온 역사가 그러했듯, 검찰 권한의 약화로 인해 또 다른 견제받지 않은 권력 강화가 초래될 것이라는 우려도 높다.
초본 정신과 저울질의 노력을
사람들이 단순명쾌함에 환호하는 것은 세상사가 간단치 않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명쾌함에는 적잖은 비용이 따른다. 비록 단순명쾌한 구호로 유권자의 환심을 샀더라도, 막상 선출되어서 책임지는 지위를 맡게 되면 일에 임하는 입장이 달라져야 한다. 약속을 쉽게 뒤집어서는 신뢰를 잃으니 함부로 그래서야 안 되겠지만, 필요하면 현실에 맞춰 바꿔야 한다. 진정 필요한 것은 결과를 책임지려는 성실한 마음과 노력이다.
강의 시간이 짧아서 아쉬웠다. 『목민심서』 덕에 건넬 내용은 워낙 풍부한 데다, 요령이 부족한 강사에게는 부득이한 일이었다. 길든 짧든 정해진 시간은 어느새 온다. 이번에 취임한 단체장들도 임기 만료의 때가 올 것이다. 그때에 모든 사람이 만족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에 더 있기를 바라고 더 큰 요청을 하는 상황이 되길 바란다.
글쓴이 / 김 태 희
- 다산연구소 이사장
- (전) 실학박물관장
[저서]
『실학의 숲에서 오늘을 보다』(빈빈책방, 2021)
『실사구시 제창자 양득중』(공저)(경인문화사, 2021)
『정약용의 삶과 글』(실학박물관, 2019)
『반계 유형원과 동아시아 실학사상』(공저)(학자원, 2018)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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