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영화, 링컨 ]
<링컨>은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제16대 대통령 링컨의 생애 중 가장 드라마틱한 마지막 4개월을 감동적으로 담아낸 영화입니다. 이 영화가 미국에서 개봉할 당시 대통령 오바마와 양당 대표들이 모두 입을 모은 추천작으로 알려졌던 화제 작품이었습니다.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재임에 성공한 오바마는 분열 된 연방을 하나로 통일하고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노예제도 폐지’의 위업을 달성한 링컨에게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공화당 급진파(노예제도 폐지론자) 의원으로 나오는 토미 리 존스
실제 오바마 대통령은 재임 당시 민주당 내 최대의 라이벌이었던 힐러리 클린턴을 국무장관으로 임명하였는데 이는 정치 인생 최대의 라이벌이었던 슈어드를 국무장관으로 임명한 링컨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당시 백악관 시사회에서 노예제도라는 어두운 그늘과 남과 북으로 쪼개진 국가의 화합을 위해 고군분투했던 <링컨>의 모습에 “<링컨>은 대통령으로서 나에게 주어진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가르쳐 주었다!”라며 극찬했습니다. 백악관 시사회 이후 처음 11개 개봉 극장에서 2천개가 넘는 극장으로 순식간에 확대 개봉되며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간 영화 <링컨>의 뜨거운 열기는 곧 의회의 시사회로 이어졌습니다.
의회 시사회에는 민주당과 공화당의 의원들이 다수 참석했습니다. 의원들은 노예제도 폐지를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헌법 13조 개정안의 통과가 노예제도 폐지라는 문제 자체 보다는 각 당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극렬한 찬반논쟁으로 번져 쉽게 해결되지 못하는 영화 <링컨> 속 의회의 모습을 본 후 이렇게 소감을 피력했습니다.
“정치인들이 단기적인 정치적 이해관계들을 줄여나갈 때 나라가 더욱 발전할 수 있다는 점을 훌륭하게 묘사했다” - 美 공화당 원내대표 미치 맥코넬,
“정치가 가야 할 올바른 길에 대해 정확히 제시한다” - 美 민주당 원내대표 해리 레이드
이 영화는 그 밖에도 하버드 대학교 경영대학원 교수들은 물론 하워드 슐츠 스타벅스 회장 등 미국 내 최고경영자들 사이에서도 화제가 되었습니다. 또한 스페인, 이탈리아 등 전 세계 정상들로부터 기업과 국가를 이끌어갈 해법을 제시하는 필견무비로 극찬을 이끌어 냈습니다.
* 장남 로버트
<링컨>은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할리우드 최고의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와 그의 제작사단이 의기투합하여 만든 작품입니다. 이미 아카데미에서만 3회 수상을 거머쥔 바 있는 스티븐 스필버그, 퓰리처상과 토니상 수상 각본가 토니 커쉬너, <쥬라기 공원>, <인디아나 존스> 등을 함께 한 제작자 캐슬린 케네디,
<쉰들러 리스트>, <라이언 일병 구하기> 등을 함께 한 촬영감독 야누즈 카민스키, <우주 전쟁, ><뮌헨> 등을 함께 한 의상감독 조안나 존스톤, 아카데미 5회 수상에 빛나고 <쉰들러 리스트> 등을 함께한 음악감독 존 윌리엄스 등 자신과 오랜 기간 신뢰를 쌓아 온 최고의 제작진들과 함께 한 이 영화는 아카데미 12개 부문 최다 노미네이트라는 진기록을 세웠습니다.
또한 환상의 연기 앙상블을 선보인 할리우드 최고의 연기파 배우들의 공 또한 컸습니다. <갱스 오브 뉴욕>,<나의 왼발> 등에서 개성 뚜렷한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해내며 아카데미와 골든 글로브에서 각각 2회 수상한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링컨으로 신들린 연기를 보였습니다. ‘진짜 링컨이 환생하였다!'라는 극찬도 받았습니다.
그는 <링컨>으로 골든글로브와 영국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고 아카데미 역사상 최초로 남우주연상 3회 수상의 대기록을 달성했습니다. 연기파 배우 토미 리 존스가 공화당 급진파 새디어스 스티븐슨 의원 역으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아카데미와 골든 글로브 2회 수상 및 칸 1회 수상에 빛나는 샐리 필드가 링컨의 아내 메리 토드 링컨으로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으며 <다크나이트 라이즈>,<인셉션>으로 할리우드의 대세남으로 떠오른 조셉 고든 레빗이 링컨의 장남 로버트 토드 링컨으로 열연을 펼쳤습니다.
전기 영화의 방식은 두 가지입니다. 특별한 인물의 일대기를 방대하게 펼쳐놓거나 특정한 사건 혹은 시선으로 이면을 그리거나...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 링컨이 주인공이 되는 <링컨 >은 따지자면 후자에 속합니다.
영화는 1861년부터 1865년까지 재임한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이, 노예해방 선언을 한 2년 후 미 헌법에 노예제도 폐지 조항을 어떻게 추가했는지의 4개월 동안의 과정을 담았습니다. 그러니까 남북전쟁이 4년째 접어든 1865년, 재임에 성공했지만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종결과 수정헌법 13조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진 링컨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실패한 가장, 자상한 아버지 혹은 무신경한 아버지, 그리고 정치인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정치인으로서의 링컨의 얼굴은 다채롭습니다.
'부패로 통과되고 미국에서 가장 순수한 사람이 추진한 19세기의 위대한 입법'이라는 대사는 영화가 묘사하려 하는 링컨에게 가장 근접합니다. 지금 당장 젊은이들의 피를 멈출 수 있는 종전이냐 앞으로 태어날 수백만 명의 인권을 보장하는 헌법이냐, 누구라도 섣불리 손을 대지 못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링컨이, 아니 영화가 보여주는 행보는 흥미롭습니다.
링컨은 수정헌법 통과에 필요한 찬성표를 모으기 위해 정치 전문 브로커를 고용해 관직을 담보 하는 부정부패도 서슴지 않습니다. 전쟁 종결 협상을 위해 도착한 남부 정치 인사들의 발을 워싱턴 밖에 묶어두는 술수도 마다 않습니다.
*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고...다니엘 데이 루이스
스필버그는 이 영화를 10년 이상 가슴에 담고 준비를 해온 것으로 알려졌고 이 영화의 주인공 링컨 역을 다니엘 데이 루이스에게 맡기려고 삼고초려를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영화는 도리스 컨스 굿윈의 <권력의 조건(Teamwork of Rivals)>을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입대하려는 로버트
[ 간략한 줄거리 ]
영화 <링컨>은 전장의 한 구석에서 흑인 병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링컨의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영화 <링컨>은 에이브러햄 링컨의 인생 마지막 4개월, 그러니까 1865년 1월부터 4월까지의 기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우리가 링컨에 대해 알고 있는 가장 극적인 사건들은 대부분 이 4개월 동안에 몰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861년부터 4년 넘게 지속된 남북전쟁의 핵심에는 노예제도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링컨 대통령(다니엘 데이 루이스 분)은 전쟁이 끝나는 순간 노예제 폐지 역시 물거품이 될 것으로 확신
하고 전쟁 종결 이전에 노예제 폐지에 관한 헌법 13조 수정안을 반드시 통과시키려 합니다.
하지만 수정안 통과를 위하여는 20표를 추가로 꼭 확보해야만 했습니다. 이 때 남군으로부터 평화 제의
가 들어옵니다. 하루라도 앞당겨 평화 협정을 맺으라는 주변의 압박, 피부색에 의해 차별받지 않을 평등
한 세상에 대한 신념, 양쪽 모두를 포기할 수 없는 링컨은 점점 힘겨운 결단의 순간에 내몰립니다.
그런 링컨이 평화 협정 체결보다는 우선 노예제의 완전 폐기를 헌법에 조항으로 넣어서 통과시켜야 한
다는 도박을 감행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미 수십만 명의 사상자를 낸 남북전쟁을 무슨 수를 써서
라도 종결을 지어야만 했습니다.
어느 쪽이 이기든 종전은 평화를 암시하므로 비록 북군이 승기를 잡았다 하더라도 평화가 선언된 다음
에 노예제 존속을 주장하는 남부의 주들이 노예제 폐지를 찬성할리는 만무합니다. 전쟁 막바지에 내놓
은 헌법 수정은 전쟁이 끝나기 전에 통과되어야 할 절대절명의 시간 다툼이라는 것을 링컨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링컨은 종종 악몽에 시달리고 우울해 합니다. 많은 사랑을 주었던 셋째 아들 윌리의 죽음
과 이로 인하여 신경 쇠약증에 걸린 아내 사이에서 아버지이자 남편으로서의 링컨의 모습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가 처했던 정치적 상황과 그의 내면의 모습이 겹쳐지며 그가 끊임없이 고뇌했을 딜레마가 펼
쳐집니다.
자세한 에피소드를 통해 설명하는 것이 아닌 그가 사람들을 마주하는 모습, 나누는 대화, 그리고 사소한
행동에서 인간 링컨의 모습을 느끼게 합니다. 셋째 아들이 죽고 이제 장남을 군대에 보낼 수 밖에 없는
아버지로서의 입장과 한편으로는 많은 아들들을 전장으로 내보내는 군 통수권자로서의 갈등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장남 로버트가 군 입대를 희망했을 때의 아버지로서의 심정, 그리고 이를 반대하는 아내를 바라보는 남편으로서의 속사정은 인간 링컨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가늠케 하고 있습니다.
링컨은 헌법 13조 수정안을 우선시하여 남부에서 제시해 온 평화협정을 일단 정체시킵니다.수정안 통과시까지 남아있는 기간은 단 4개월, 그동안 링컨은 수정안 통과에 반대하는 20명의 의원들 마음을 돌려놓아야 합니다. 천신만고 끝에 수정안은 통과되고 남북전쟁은 북군의 승리로 막을 내립니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헌법 수정안이 통과되는 순간에도 웅장한 감동의 연출보다는 급진파 의원인 스티브 새디어스(토미 리 존스 분)가 집으로 돌아가 자신의 흑인 아내에게 헌법 수정안이 담긴 종이를 건네는 순간이 잔잔하면서도 감동스럽게 다가옵니다.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헌법 수정안을 통과시키고 남북전쟁마저 끝낸 링컨은 극장에서 연극 관람 도중 광신적인 분리주의자 부스에게 암살당하면서 한 많은 일생을 마감합니다.
[ 아브라함 링컨(1809 ~ 1865)의 일생 ]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인 링컨은 켄터키 통나무 오두막집에서 태어나 여러 곳을 전전하며 가난하게 자랐습니다. 어린 시절은 고난의 세월이었습니다. 아홉 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이후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의지했던 누나마저 죽었습니다.
링컨은 우물을 파거나, 이웃의 돼지를 잡거나, 땅을 갈아서 가족의 빚을 갚아야 했지만 그러한 궁핍한 삶 속에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재능이 있었지만 정식 교육이라곤 1년도 받지 못했습니다.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뱃사공, 점원, 장사꾼, 우체국장, 측량기사 등을 전전했습니다. 자신을 좀 더 체계적으로 계발하기 위해 영문법과 셰익스피어 희곡, 기하학과 법학을 공부해나갔습니다. 결국 고학으로 변호사가 되었고, 진정으로 존경받는 사람이 되겠다는 야망을 품고 정계에 진출했습니다.
그의 정치 경력을 말하자면 별 볼일 없이 임기를 마친 하원시절과 상원의원 선거에서의 낙선 두 번이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이 무명의 정치가가 전국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던 쟁쟁한 라이벌들을 제치고 역사상 전무후무한 정치 역전의 드라마를 이루어냅니다.
링컨은 미국의 16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자신을 얕잡아 보면서 멸시했던 공화당 공천 라이벌들을 내각의 일원으로 임명하고 그들의 협력을 얻어내는 탁월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합니다. 남부의 반발로 남북전쟁이 발발한 가운데에서도 링컨은 훌륭하게 국가를 경영했습니다.
링컨은 평생 친절하고 겸손한 태도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예전에는 적대적이었던 사람들에게서 우정과 협조를 이끌어냈고, 실패에서 교훈을 얻었으며, 더 중요한 문제를 위해 작은 것을 양보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전쟁 중에 재선에 성공하여 국민의 지지를 받았고 마침내 남부의 항복을 이끌어냈습니다. 건국의 아버지들이 남겨준 영광의 땅에서 민주주의를 구하고 연방을 지키고 노예해방이라는 역사적 사명을 완수한 것입니다.
* 영화에서...
< 초기 생애 >
1809년 2월 12일 켄터키의 호젠빌에서 남쪽으로 4.8㎞ 떨어진 외딴 오두막에서 태어났습니다. 2세 때 그의 가족은 이웃마을인 노브크리크에 있는 한 농장으로 이사했습니다. 어렸을 적 기억은 주로 그 집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아버지 토머스 링컨은 1637년 잉글랜드에서 매사추세츠 주로 이민 온 직공(織工) 견습공의 후손입니다. 토머스는 선조들보다 훨씬 가난한 편이었으나 억센 개척민이었습니다.
그는 1806년 6월 12일에 낸시 행크스와 결혼했습니다. 그녀는 '굽은 어깨와 야윈 가슴에 신앙심이 깊은 여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 두 사람 사이에서 새러·에이브러햄·토머스가 태어났는데, 토머스는 어릴 때 죽었습니다.
1816년 12월 링컨 가족의 켄터키 농장이 소송에 걸리게 되자 토머스는 가족들을 이끌고 인디애나 주의 남서부로 이사를 갔습니다. 링컨 가족은 엉성한 통나무 구조물에서 출발해 하나씩 살림을 펴나갔으며 집 주위의 땅도 사들였습니다.
링컨의 나이 9세 때인 1818년 가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머니 낸시 링컨은 흰뱀풀이라는 독초를 먹은 소의 우유를 먹고 걸리는 밀크병에 걸려 죽었습니다. 2년이 채 안되어 아버지 토머스 링컨은 재혼했습니다.
남매로는 누나인 세라와 링컨뿐이었습니다. 살던 곳이 워낙 시골 개척지라서 주변 이웃이 없던 탓에 누나와 친하게 지내며 놀았기에 누나와 정이 많았습니다. 세라는 결혼해서 아기를 낳다가 21살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나 무척이나 링컨을 슬프게 했습니다.
계모인 새러 링컨은 딸 둘과 아들 하나가 딸린 과부로 원기와 애정을 가지고 가정을 꾸려나갔고, 토머스 링컨의 아이들을 모두 친자식처럼 대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에이브러햄을 귀여워해 그는 후일 그녀를 '천사 엄마'라 불렀습니다.
* 영화에서...
계모 새러는 시집 올 때 <성서>, <이솝 우화집>, <로빈슨 크루스>, <천로역정>, <아라비안 나이트> 등 5권의 책자를 가지고 왔습니다. 어린 링컨은 이것을 되풀이해서 읽고 거의 외우다시피 했습니다. 그는 후에 성장하면서 <워싱턴 전기>, <월터 스코트 작품집>, 키케로, 데모스테네스의 연설집, 셰익스피어 작품집들을 읽었습니다.
이러한 독서를 통하여 그의 우수한 영어 산문체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힘과 시정이 조화된 문체는 훗날 링컨이 성공해서 본연의 재질이 발휘될 때까지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가 사회에 진출한 초기에는 미사여구 대신에 가벼운 유머를 썼는데 그의 이야기는 그가 좋아했던 이솝 이야기와 비슷했습니다.
링컨의 가정생활은 가난하고 불행했으나 몽상에 잠기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습니다. 아마도 머리 속으로는 읽었던 위대한 작품들의 글귀들을 되새기고 있었을 겁니다. 그는 이상한 유머를 토로하는 때가 있는가 하면 우울증에 걸린 것처럼 기분이 푹 죽었다가 의기양양한 웅변조가 되살아나는 등 태도의 변화가 심했습니다.
1830년 3월 링컨 가족은 일리노이 주로 다시 이사를 했습니다. 일리노이에 도착한 뒤 농부가 될 마음이 없던 링컨은 여러 가지 일에 손을 댔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새로운 농장을 경작하는 한편 선원이 되어 배를 타고 미시시피 강을 따라 뉴올리언스까지 항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법률 쪽을 공부하기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이미 문법·수학을 독학한 상태였던 그는 법률책을 파고들어 1836년 법률시험에 합격했고, 이후 변호사 일을 시작했습니다.
* 젊은날의 링컨
< 대통령 링컨 >
1850년 무렵에 변호사를 개업하고 정계를 은퇴하였다가 1854년부터 노예제도에 관한 논쟁 때문에 다시 소란한 정계에 뛰어들게 됩니다. 그리고 1860년 링컨은 치열한 경쟁 끝에 제16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노예제도로 인하여 국론이 갈갈이 찢긴 사태에 직면하여 그는 대통령 취임연설식장에서 “나는 정부를 유지하고 수호하고 방위하겠다. 그러나 정부는 남부를 공격할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 남부가 공격해 오지 않는 한 전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남부의 연방탈퇴를 용인하지 않겠다”라고 공언했습니다. 연방의 고수를 확고하게 다짐한 것입니다.
군중들은 키가 크고 뼈대가 굵고 울툴불퉁한 튼튼한 몸집과 마음씨 좋은 이웃 아저씨처럼 생긴 얼굴에 헤라클레스 같은 거인의 슬픈 듯한 깊은 눈동자를 물끄러미 쳐다보았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강인한 정력과 성실한 인품을 풍기는 특별한 인상이 서려 있었습니다.
그는 시골티가 풍기는 풍채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나 그렇다고 이런 것들 때문에 그들이 그를 대통령으로 선출했을까요? 그가 유능한 정치가였기 때문이었을까요? 그가 임명한 내각에서 적어도 국무장관 슈어드, 재무장관 체이스, 육귝장관 카메론 이 세 사람은 수완에 있어서는 자기들이 링컨보다 우월하며 대통령을 자기들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촌뜨기라고 깔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의 풍채에는 각료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웅대한 기상과 고상한 성품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었습니다. 그가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보다는 그가 읽은 몇 권의 유명한 고전의 내용이 완전히 그의 살과 피로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어 본 사람들은 그가 재미있고 농담을 잘하는 지극히 소탈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놀랐습니다. 그는 속담을 인용하기를 좋아했고 때로는 음담패설도 서슴치 않았습니다.
시인 월트 휫트맨은 링컨을 이 나라의 비극(노예제 때문에 생긴 남북 갈등)에다가 웃음거리를 도입한 사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 누구보다도 장엄한 사상을 명쾌하게 표현할 수 있는 특기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 영화에서...부인 메리와 왼쪽 아들 로버트 그리고 멀리 링컨이...
< 연방수호와 노예제도 >
노예제도를 찬성하는 남부 사람들은 노예제를 반대하는 링컨을 그들의 대통령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덩치 큰 몸집에 긴 팔 그리고 촌티 나는 태도, 소매가 짧은 플렉코트를 입은 이상한 사람으로 보였고 도저히 그들의 영도자로 인정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링컨에 반대하는 것이 곧 하나님에 순종하는 것이다”라고까지 말항 정도였습니다. 이때부터 연방을 이탈하려는 계획이 분명해졌습니다. 위급한 사태가 시시각각으로 박두하고 있었습니다.
링컨의 남부에 대한 정책은 강경하면서도 온화한 일면이 있었습니다. 그는 노예제도의 확대를 억제하고 점차적으로 소유자에게 보상금을 주어가면서 노에를 해방하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좌우간 무엇보다도 우선 연방을 수호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있었습니다.
이 점에서는 확고부동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강경한 결단을 내리는 데도 서슴치 않았습니다. “노예를 해방하지 않고 연방을 수호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고, 노예를 해방해야만 연방을 수호할 수 있다고 해도 그렇게 하겠으며 또한 일부의 노예만을 해방하고 나머지를 그대로 두어야 연방이 수호된다면 그렇게 하겠다”라고 말했습니다.
링컨의 모든 성명처럼 이 말에서 그의 사상의 순박성과 그를 위대한 인물로 만든 타협성과 고집이 조화된 결정을 볼 수 있습니다.
* 남북 전쟁
아슬아슬하게 일촉즉발을 눈앞에 두고 살얼음판을 걷던 남북관계는 드디어 1861년 4월 12일 터졌습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찰스턴에 있는 북군 섬터 요새에 대해 남부연합(사우스캐롤라이나·미시시피·플로리다·앨라배마·조지아·루이지애나·텍사스·버지니아·아칸소·테네시·노스캐롤라이나)군의 포가 발사됨으로써 4년간의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이 시작된 것입니다.
남부는 인구 면에서 북부에 밀리고 농업위주의 사회였던 탓에 전쟁물자 생산도 미흡했습니다. 그러나 우수한 지휘관들이 북부를 떠나 남부로 합류했고, 특히 미 육군 사관학교 등이 위치한 버지니아가 가담한 덕분에 많은 사관생도들을 확보하였습니다. "침략자 북군을 물리쳐서 자기 주와 관습(노예제)을 지켜야 한다"라는 명확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사기가 훨씬 높았습니다.
* 섬터 요새에 대한 남군의 포격
그래서 전쟁 초반, 남군은 잘 훈련된 정예병력과 명장 로버트 E. 리 장군의 지휘하에 승승장구하였으나 장기적으로 볼 때 여러 면에서 남부 쪽에는 승산이 없었습니다. 일단 인구수부터 4:1로 북부가 많았고, 총기생산량은 북부가 97%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철도망도 북부가 더 잘 정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생수행능력 면에서는 북부가 절대적으로 유리했습니다.
4년 동안 여기저기서 상당히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양측의 수도가 있어 관심이 많았던 동부에 비해 서부는 당시에는 큰 관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1863년 7월 4일, 미시시피 강 유역의 마지막 남부 요새였던 빅스버그가 싸움닭 그랜트 장군에게 함락됩니다.
이 빅스버그 포위전은 남북전쟁의 주요한 전환점 중 하나였습니다. 이 전투로 인해 남부의 동/서가 단절되어 텍사스와 아칸소 주에서 남부의 다른 지역에 지원을 해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죠.
그 다음날은 워싱턴 인근에서 벌어진 게티스버그 전투(이 전투에 관하여는 본 시리즈 6편을 참조바랍니다)에서 북군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전투를 계기로 점차 남군은 패망의 내리막 길로 접어듭니다. 빅스버그가 함락된 후 그랜트 장군은 북부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서부 전역에는 그 후임으로 셔먼 장군이 임명되었습니다.
그랜트와 셔먼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남부의 전쟁수행능력과 의지를 완전히 꺾어야만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셔먼은 총력전의 개념으로서 초토화 전술을 수행했습니다.
1864년에 수행된 애틀란타 전역에서 셔먼이 승리를 거둔 후, 초토화 전술개념으로 수행한 게 유명한 '바다(대서양)로의 진군' 입니다. 애틀란타에서 출발해 서배너까지 진군하며 가는 길마다 쑥대밭을 만들어 남부의 전쟁수행능력과 의지를 완전히 꺾어버렸습니다. 셔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에 주민들이 나의 혹독한 처사에 대하여 비난을 한다면 전쟁은 어디까지나 전쟁이라고 대답하는 수밖에 없다...그들이 평화를 원한다면 우선 그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전쟁을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 당시 자신의 손으로 양키의 목을 졸라 죽였으면 시원하겠다는 말을 하는 남부의 부인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한편 동부전역에서는 그랜트 장군의 지휘 아래 리의 북부 버지니아 군을 다방면에서 공격해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큰 손실을 계속해서 겪었지만 그랜트는 공세를 멈추지 않고 리를 압박해 남군의 퇴각을 강요했습니다. 셔먼도 사우스 캐롤라이나, 노스 캐롤라이나를 거쳐 버지니아 쪽으로 진격해 리의 남군을 남북에서 압박하는 형세가 되었습니다.
1865년 4월 1일에는 남부의 수도인 리치먼드가 함락되었으며, 리는 전술적으로나 병참상황으로나 계속해서 싸울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같은 해 4월 12일, 애포머톡스에서 리가 항복문서에 조인함으로서 남부전쟁은 종결되었습니다.
* 애포머톡스에서의 항복 조인식, 왼편 그랜트 오른편 리
* 전쟁 막바지, 전략을 숙의중인 셔먼,그랜트,링컨, 왼편으로부터...
* 링컨의 죽음
남군이 항복한 이틀 뒤 1865년 4월 14일 대통령 부처가 포드 극장에서 연극을 보고 있을 때 암살자의 총탄이 링컨의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반미치광이 배우인 광신적 분리주의자 존 윌크스 부스가 대통령을 암살했던 것입니다.
* 암살 장면
링컨이 암살되던 날인 1865년 4월 14일 화창한 금요일, 이날은 링컨에게 가장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전쟁도 끝났고 노예제도 폐지 헌법 수정안도 통과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링컨은 전선에서 워싱턴에 막 도착한 큰 아들 로버트와 아침식사를 하며 그날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아들아, 전선에서 무사히 돌아왔구나. 이제 전쟁이 끝났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와 싸웠던 용사들과 평화롭게 살게 될 게다.” 다정한 말을 건네는 링컨의 얼굴이 무척 행복했다고 아들은 회상하고 있습니다.
그날 밤 링컨 부부는 포드 극장에서 ‘우리 미국인 사촌’이라는 연극을 관람할 예정이었습니다. 저녁 10시 경, 링컨은 극장 특별석에 부인 메리와 나란히 앉았습니다. 그 옆에는 링컨과 가까운 사이인 헨리 래스본 대령이 앉았습니다. 10분 쯤 지나서 암살자 부스가 하인에게 명함을 보이고 특별석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가 포드 극장의 배우인지라 하인이 의심을 할 수가 없었지요.
* 부스
그는 링컨 가까이 다가가서 곧장 총을 꺼내 대통령의 뒷머리를 겨냥하고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링컨이 앞으로 쓰러지자 헨리 래스본이 침입자를 잡으려 했습니다. 그러자 부스는 칼을 꺼내 래스본의 가슴을 난도질하고 특별석에서 4.5m 아래 무대로 뛰어내렸습니다.
그는 앞에 드리워진 국기 주름에 장화가 걸려 몸채 뒹굴며 떨어졌으나 번쩍거리는 단검을 휘두르며 “폭군의 말로는 이런 것이다(부루투스가 카이사르 암살 직후 그가 한 말)!”라고 소리치면 극장 밖으로 도주했습니다.
잠깐 동안 관객들은 총성과 부스가 무대 위로 뛴 것이 연극의 일부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윽고 대통령 부인이 “대통령이 총에 맞았어요! 대통령이 총에 맞았어요!”라고 소리치자 사태를 알아차렸고 특별석 근처의 젊은 의사 찰스 릴리 제일 먼저 달려갔습니다. 그는 대통령의 머리에서 쉴새없이 피가 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길 건너편에 있는 피터슨 하숙집으로 급히 링컨을 옮겼습니다.
각료들이 링컨의 주위에 모두 달려왔습니다. 메리는 시시각각 죽어가는 남편의 침대 맡에서 “왜 그 사람이 날 안쐈죠? 왜 내가 아니었죠?”하며 눈물을 쏟아냈습니다. 1865년 4월 15일 아침, 링컨은 숨을 거두었습니다.
헐레벌떡 도망쳤던 부스는 워싱턴 교외의 리처드 가레트라는 농부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처음에는 부스의 존재를 몰랐던 농부는 며칠 동안 부스를 손님 대접해주었으나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군 당국에 신고했습니다. 급히 출동한 연방군에게 포위된 부스는 불타는 헛간에서 항복을 거부하고 총격전을 벌이며 최후의 발악을 하다가 사살되었습니다.
* 살인 공모자들의 처형
암살 당일 아침 링컨은 각료들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나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무엇이라고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배를 타고 있는 것 같았는데 그 배는 캄캄해서 어딘지 알 수 없는 육지를 향해 쏜살같이 달리고 있었다. 나는 이러한 꿈을 중대한 사건이나 대승리가 있기 전에 꾸어 본 일이 있었다. 엔티에텀, 스톤 리버, 게티스버그, 빅스버그의 승리가 있기 전에도 같은 일이 있었다...”
* 암살 직후...영화 <킬링 링컨>에서
< 링컨에 얽힌 일화 >
링컨은 인생에서 두 번의 사업 실패, 10번의 선거 중에 7번의 낙선을 겪었습니다. 거기에 10살 때 어머니를 잃고, 20살 때 누이를 잃고, 27살 때 약혼녀를 잃고, 42살 때 둘째 아들 에드워드, 53살 때 셋째 아들 윌리엄을 저 세상으로 먼저 보내는 슬픔을 겪었습니다.
그는 외모 면에서는 별로 매력없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193cm의 껑충한 장신이었지만 비쩍 마르고 잘생겼다고 보긴 힘들기 때문입니다. 외모가 뛰어나지 않았고, 도회지가 아닌 시골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사람인지라 미국 남부 특유의 사투리가 약간 섞인 억양에다 목소리도 가늘었다고 합니다.
얼굴도 촌스럽고 못생겨서 그의 정적들은 틈만 나면 그를 고릴라에 비유하곤 했습니다. 사사건건 링컨과 뜨겁게 격돌했던 정적 더글라스가 이와 비슷한 발언을 했습니다. 그러자 링컨은 이렇게 응수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고릴라를 만나기 위하여 아프리카에 갈 필요가 없습니다. 일리노이 주 스프링필드에 가면 링컨이라는 고릴라를 만날 수 있습니다.” 더글라스는 도리어 머쓱해져 버렸습니다.
또 한사람의 정적 스탠턴은 더글러스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은 링컨의 숙적이었습니다. 선거기간 내내 연설할 때마다 링컨을 잘근잘근 씹으며 그를 공개적으로 적대시했습니다. 둘은 노예제에 대한 입장이 같아서 함께 더글라스를 상대해야 한 것을 계기로 처음 만남을 가졌습니다. 불같은 성격의 스탠턴이 그 당시 촌뜨기 신출내기 변호사이던 링컨을 자기와 함께 묶었다는 것에 노발대발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능력을 알아본 링컨은 대통령으로 취임한 다음에 카메론의 후임으로 그를 육군장관에 임명합니다. 참모진들이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반대를 했습니다. 과거 그가 링컨을 혹독하게 비난했던 사실을 들어서 말입니다. 링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탠턴이 나를 바보라고 하지 않던가요? 그가 그렇게 말했다면 정말 나는 바보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언제나 옳으니까요.” 링컨의 대인배다운 모습입니다. 전쟁기간 중에 스탠턴은 훌륭하게 업무를 수행했고 링컨을 극진히 모셨습니다. 스탠턴은 링컨이 죽은 다음에 누군가 링컨의 이름을 꺼내기만 해도 그 자리에 주저앉아 통곡을 했다고 합니다.
링컨의 비서 헤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두들 장관께서 이만큼이나 세상을 떠난 대통령과 가까웠는지, 대통령이 얼마나 장관을 사랑하고 신뢰했는지, 그 믿음과 신뢰를 뒤흔들려는 노력이 무익했는지 모를 것입니다.”
* 링컨의 내각, 왼편 긴수염이 스탠턴 육균장관, 오른편 앞이 슈어드 국무장관
링컨을 눈여겨 본 그레이스 베델이라는 소녀가 편지로 그에게 턱수염을 길렀으면 하고 조언한 일화는 유명합니다. 링컨 기념관에 가보면 실제로 이 편지가 그의 집무실 벽에 꽂혀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링컨은 그 후로 기르기 시작한 턱수염 덕분에 사람들에게 친근감을 주었고, 인자하고 따뜻한 인상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습니다. 링컨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것입니다.
그는 평소에 위트가 넘쳐났습니다. 가끔은 넘치다 못해서 대인관계를 유지하는 활력으로까지 사용했다고 하는데 이는 툭하면 찾아오는 공직희망자들이나 의회와의 관계를 유지할 때 그 힘이 발휘되었다고 합니다.
한번은 장관 한명이 지병으로 사망하자 그 자리에 들어가겠다는 공직희망자 중 한명에게 " 장의사가 동의한다면 관속에 들어가도 좋습니다 "라고도 했었고 매일같이 공직희망자에 시달리다 전염력이 강한 병에 걸렸을 때에는 주치의를 보며 " 드디어 제가 무엇인가 다른 나눠줄 만한 게 생긴 것 같군요 "하고 빙그레 웃기도 했습니다.
그는 자유분방하게 자랐기 때문에 기품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고, 업무 중에도 책상 위에 발을 올리고 책을 읽는 등 거리낌 없이 행동했습니다. 성격은 쾌활했지만 분위기를 못 읽는 사람이었던 듯합니다. 그의 측근들은 링컨이 시도 때도 없이 썰렁한 농담을 너무나 해대는 것이 가끔은 지겨웠다고 회고했습니다.
젊었을 적에는 평소에 영 맘에 안 든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놀리는 말을 작은 쪽지에 써서 길가에 슬쩍 떨어뜨리고는 누군가 그걸 주워 읽고 재미있어 하는 걸 몰래 지켜보면서 즐거워했다고도 합니다. 어느날 쉴즈라는 사람의 나쁜 점을 지적하는 글을 익명으로 신문사에 올렸는데, 해학, 풍자적으로 쓴 글에 구독자들에게 인기가 좋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쉴즈가 기고자가 링컨이라는 걸 알아내고서는 다짜고짜 찾아와 결투신청까지 하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링컨의 친구 한명이 중재를 해준 덕에 결투당일 결투가 취소되어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 일로 링컨은 겁을 먹어 자중했다고 합니다.
* 암스트롱을 메다 꼬나박는 링컨
1831년, 링컨은 일리노이주 뉴 세일럼으로 이사하였습니다. 이 동네에는 '클래리즈 그로브 녀석들'이라는 동네 젊은이들의 패거리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항상 패거리의 리더인 잭 암스트롱이 동네에서 가장 강한 싸움꾼이라 자랑하고 다녔습니다.
당시 링컨은 덴튼 오풋이라는 사람의 가게에서 서기로 일하고 있었는데, 오풋은 '링컨이야말로 동네에서 가장 강한 사내'라고 주장을 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잭 암스트롱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링컨에게 한 판 붙자고 제안을 했고, 링컨은 승낙했습니다.
두 사람이 붙은 날, 많은 사람들이 와서 왁자지껄 떠들고 구경을 하며 돈내기를 했다고 합니다. 링컨은 키 193cm에 몸무게 80kg 가량 되었으나, 보다 많은 사람들이 훨씬 키가 작지만 '황소처럼 힘이 세다'고 알려진 잭 암스트롱에게 돈을 걸었습니다.
싸움이 시작되자, 두 사람은 서로 탐색전을 펼쳤고 서로 끌어안고 용을 쓰고 팽팽하게 맞서다가 차츰 암스트롱이 밀리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링컨은 암스트롱의 목을 잡고 팔을 뻗어 들어올린 채 암스트롱이 꼬마인양 흔들어댄 후 집어던져 버렸습니다.
이 모습을 본 암스트롱 패거리는 분노하여 링컨을 공격하고자 하였습니다. 링컨은 오풋의 가게 쪽으로 물러나 가게 벽을 등지고서는 '전부 상대해 줄테니 한 놈씩 덤비라'고 응수하였습니다.
이런 링컨의 모습을 본 잭 암스트롱은 그의 용기에 크게 감동하여 패거리를 만류하였고, 링컨이 손을 잡고 악수를 나누며 "이봐, 이제는 에이브(Abe)가 우리 중 최고다! "라고 외쳤습니다. 이 일이 발생한 이후 암스트롱과 링컨은 절친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젊은 시절 링컨의 벌목 실력 또한 당시 자주 회자되던 이야기였습니다. 실제로 링컨의 젊은 시절을 묘사한 그림 중에는 그가 거대한 도끼를 들고 나무를 베는 모습이 많습니다. 링컨을 알고 지내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몇 배 이상 빠르게 엄청난 도끼질로 나무를 넘겨대던 괴력의 이야기를 자주 했다는 것입니다.
저 아래 "도끼질로 뱀파이어 때려잡는 링컨"이라는 괴상한 상상은 이 이미지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링컨:뱀파이어 헌터>라는 영화가 몇 년 전 개봉했는데, 이 이미지에서 파생된 듯 합니다. 인자하게 생긴 빼빼마른 할아버지 같은 링컨 대통령이 사실 젊었을 적에는 엄청난 파워맨이었다는 것은 참으로 유쾌한 아이러니입니다.
* 영화에서...
링컨은 남북전쟁 당시 전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보기위해서 자주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곳을 방문해 군인들과 밤새 놀고 이야기하길 좋아했다고 합니다. 전쟁이 거의 끝나갈 무렵, 당시 남부연합 해군의 가장 강력한 철갑군함이었던 메리맥 함이 버려져 있던 한 해군 기지를 공략하는 군대를 시찰을 나갔습니다.
거기에서 지휘관에게 공격을 하지 않는 이유를 물어보자 대장은 "수심이 얼마정도인지 가늠할 수 없어서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링컨은 흔쾌히 "그럼 여기 나하고, 육군장관하고 재무부장관하고 가서 확인하고 오겠네." 라고 말했습니다. 장병들의 극구 반대에도 밤에 몰래 미국의 최고 권력자 세명이 가서 수심을 확인하고 아침에 멀쩡히 돌아왔습니다. 이후 이 이야기는 링컨의 모험담 중 링컨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가 됩니다.
링컨은 남북전쟁 초기에 우유부단하고 멍청이 같은 시원치 않은 장군들 때문에 곤욕을 치렀습니다. 드디어 전쟁 중반에 그는 싸움닭 그랜트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북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자 여기저기서 시끌시끌했습니다. 특히 그가 술을 너무 좋아한다는 비방이 심했습니다. 이 얘기를 들은 링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랜트가 술을 마신다면 그 술의 이름을 알고 싶군. 다른 장군들에게도 같은 통의 술을 먹이고 싶단 말이야.”
링컨의 일상생활에서 즐거움 중의 하나가 관저에서 얼마 안 떨어진 국무장관 슈어드의 집에 가서 환담을 하는 일이었습니다. 마누라 메리가 잔소리를 하기 시작하면 슬그머니 나가서 슈어드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 링컨은 국무장관의 거실 소파에서 긴 다리를 쭉 뻗고 누워서 시시껄렁한 농담을 풀어놓곤 했습니다.
대통령 지명전 당시 가장 강력한 정적이었던 슈어드는 함께 국사를 논의하면서 촌놈이라고 깔보던 링컨의 점차 마력에 푹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주 아내인 프랜시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대통령의 관대함은 거의 신에 가깝다고 말할 수밖에 없구려. 그리고 그의 자신감과 동정심은 나날이 늘어간다오.” “대통령의 행정능력과 정력은 우리 중에서 가장 뛰어나요. 하지만 지속적이고 세심한 협력을 필요로 한다오.”
링컨의 비서였던 헤이는 슈어드가 “대통령에게 진실하고 깊은 애정을 갖고” 헌신했다고 회고합니다.
* 영화에서...내각 회의
[ 남북전쟁 당시의 생활 ]
1861년 초, 남북전쟁에 참전한 남군과 북군은 똑같은 정열을 가지고 총을 쏘았습니다. 남군이나 북군의 병사들은 18세에서 30세로, 애국심과 모험심이 가득 찬 젊은이들이었습니다. 전쟁의 열기가 더해 가면서, 젊은 지원자들은 그들이 존경하는 명사들의 환송을 받으며 전장으로 떠났습니다.
특히 아내와 여동생, 어머니, 여자 친구들도 애국심을 과시했습니다.
남군과 북군 병사들은 비슷한 사회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남군의 신병 열명 중 여섯명은 농촌 출신이었고, 북군 병사의 47 퍼센트는 농부나 농장노동자였습니다. 그러나 남군보다는 북군에 외국태생 병사가 많아서, 4분의 1 가량이 독일인과 아일랜드인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날 무렵, 거의 18만 명의 흑인 병사가 북군을 위해서 싸웠는데 대부분 전쟁이 일어나기 얼마 전 남부 출신 노예들이었습니다.
* 전선을 방문한 링컨
남북전쟁에 참가한 병사들의 생활은 가혹했습니다. 그들은 겨울을 통나무집, 천막 또는 참호에서 매운 연기가 자욱한 불을 쪼이며 지냈습니다. 조명은 총검 끝에 꽂은 초를 벽에 붙여 놓거나 땅바닥에 박아 놓은 것뿐이었습니다.
행군 도중 북군 병사들은 주로 커피와 소금에 절인 고기, 건빵을 먹었습니다. 이 건빵은 네모진 단단한 밀가루 덩어리로 ‘치통과자’, ‘철판 크래커’란 별명이 붙어 있었습니다. 남군은 커피가 없었고, 그 대신 도토리, 완두콩 또는 말린 사과로 만든 음료를 마셨습니다.
양쪽 군대의 표준적인 야전식량에는 감자, 설탕, 식초, 콩, 쌀, 소금과 기타 향신료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 식량 보급과정에서 배급량을 모두 탈 수 있는 병사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집에서 부친 소포나, 캠프를 따라다니는 상인들로부터 산 케이크와 파이, 사탕 등으로 음식을 보충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주로 남군 지역에서 싸웠던 북군 병사들은 현지 농민들의 돼지, 닭, 소, 사과, 복숭아, 옥수수 같은 것들을 징발했습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전투준비로 보내야 했던 병사들에게 권태는 최대의 시련이었습니다. 그래서 캠프에서 그들은 끊임없이 제식훈련, 행진, 검열, 전투훈련 등을 해야 했습니다. 이 때문에 북군과 남군은 모두 변화를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 북군 군악대
남군 캠프에서는 종교의식과 신앙부흥운동이 특히 인기가 있었습니다. 병사들은 독서를 많이 했는데, 주로 신문과 ‘10센트짜리 소설’이었습니다. 그들은 노래도 하고 간단한 연극이나 촌극 공연을 오락으로 삼았습니다.
병사들은 도박, 그중에서도 포커를 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다른 모든 군대와 마찬가지로 욕설이 유행했습니다. 술은 구하기 어려웠지만 틈틈이 현지에서 조달해서 마시곤 했습니다.
양군의 주요 무기는 탄환을 총구만으로 장전하는 단발식 소총이었습니다. 총들은 대부분 매사추세츠주에 있는 스프링필드 조병창이나, 영국의 엔필드사에서 만든 것이었습니다. 이 소총은 정확했지만, 사정거리가 550m 정도의 둔중한 무기였습니다. 이 소총을 장전하려면, 화약통에 담은 화약을 총구 안으로 쏟아 넣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납 탄환을 집어넣고, 막대기로 총열 밑으로 밀어 넣습니다. 끝으로 방아쇠로 공이를 작동시키면 격발뇌관으로 화약이 폭발해서 탄환을 밀어내게 되어있습니다. 가장 숙달된 사수도 이 작업을 마치는데 20초가 걸렸습니다.
* 흑인 노예들
남북전쟁에 참가했던 일반병사들은 전투를 두려워했습니다. 전투가 벌어지면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소총과 대포 연기로 앞을 볼 수 없었고 눈물이 났습니다. 고함과 비명, 함성, 폭발음, 나팔소리, 북소리가 대기를 가득 채웠습니다. 장교들은 병사들을 진정시켰습니다.
그러나 공포에 질린 병사들이 많았고, 수많은 낙오자와 꾀병쟁이들이 이 살육의 현장에서 빠져나갔습니다. 가장 공포를 느끼는 것은 전투가 시작되면서 진지로 이동할 때였습니다. 입술이 마르고 숨이 차며 온몸이 땀으로 젖었습니다.
일단 전투가 시작되면, 아드레날린이 젊은 혈관 속에 흘러들어가 병사들이 전진을 계속하도록 해주었습니다. 시간은 정신없이 빠른 속도로 흘러갔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전투는 야만적이었으며 백병전이 벌어지는 일이 많았습니다. 양측 병사들에게 총검이 지급되었지만, 실제로 사용된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접근전에서 흔히 사용된 무기는 몽둥이처럼 휘둘렀던 소총이었습니다. 전투의 가장 무서운 공포는 맹목적인 살육이었습니다.
전쟁은 민간인의 일상생활도 바꾸어 놓았습니다. 양군의 병사들이 전장에서 싸우고 죽어 가는 동안, 뉴욕 신문들은 잘 차려 입은 사람들이 브로드웨이의 상점과 백화점에 몰려들어 수입 식품과 포도주, 모자, 비단, 옷감을 사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북부인 중에는 교회와 자선단체에 모여 북군병사를 위해 의료서비스와 읽을 것, 영적인 위안과 따뜻한 의복을 전선으로 보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한편 농촌에서는 곡물과 고기,농산물 값이 폭등함에 따라 부채를 없애는 데 도움이 되었고 농촌의 노동자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농기계를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주요 전장터였던 남부에서는 더욱 고통스러웠습니다. 북군의 약탈 때문에 민간인의 생활은 파괴되었습니다. 북군이 접근하자 많은 사람이 피난했지만 더러는 남아서 북군의 지배 하에서 살았습니다. 북군이 해상을 봉쇄하고 내륙의 수송이 불가능해져 대부분의 남부인들은 식량, 의복, 의약품, 원료가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 남북전쟁을 촉발시킨 책 <엉클 톰스 캐빈>과 작가 스토우 부인
애틀란타, 리치먼드, 모빌 등지에서는 격렬한 식량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칼과 도끼로 무장한 폭도들은 상점과 창고에 난입하여 닥치는대로 물건을 약탈했습니다. 남부는 인플레이션으로 고생이 말도 아니었습니다. 리치먼드의 남부정부는 지폐를 마구 찍어내는 바람에 이런 물가고를 더욱 부채질했습니다.
처음에는 400만 명의 노예들에게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전쟁이 끝날 무렵까지도 농장에 남아 곡물을 생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노예해방선언이 있었던 1863년 1월 1일, 그 전에 북군과 접촉이 있었던 노예들은 농장에서 탈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탈출자들 중에서 북군을 위해 노무자, 나무꾼, 요리사, 잡일꾼, 하인 같은 일을 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들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임금으로 돈을 받아 보았습니다.
북군이 남부지역으로 진격하기 시작하자 노예들은 괭이를 집어 던지고 기쁨에 넘쳐 북군 전선으로 몰려갔습니다. 그랜트 장군이 미시시피 강을 따라 1마일을 전진할 때마다 1만 명의 해방노예가 사슬을 벗어 던졌다고 한 신문이 보도했습니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노예제도는 완전히 와해되엇습니다.
전쟁 마지막 몇 달 동안, 그리고 그 후에도 오랫동안 노예출신 흑인들은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생전 처음 자유를 시험해 보았고 오랫동안 헤어졌던 친구와 친척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것은 필요한 실험이었지만, 그 때문에 남부의 생활과 고용사정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가장 크고 어려운 문제는 전쟁이 끝난 뒤, 노예였던 흑인들에게 맡길 역할을 결정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예측할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 수술과 질병으로 인한 죽음
많은 군의관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포화보다는 질병 때문에 죽은 병사들이 더 많았습니다. 62만 명 가량으로 추산되는 총 전사자들 중에 반 이상은 설사, 발진티프스, 장티프스, 말라리아, 천연두 등의 여러 종류의 질병에 희생되었습니다.
캠프의 위생상태는 형편없었습니다. 야전병원의 상태는 그래도 약간 나았는데, 그곳에서도 상처에 감염되어 패혈증으로 죽는 일이 많았습니다. 몸에 상처가 생기면 사실상 사형선고나 다름없었고 수술은 완전히 원시적이었습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기 위해 후송된 한 북군 병사는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일선으로 돌아가겠다고 고집했다. 왜냐하면 북군의 돌팔이 의사들보다는 남군의 총탄에 맞아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편 병사들은 매춘부를 찾아가 그들의 욕구를 해결했습니다. 장교들은 몰래 정부를 두고 그들의 욕구를 만족시켰습니다. 남부의 수도였던 리치먼드는 매음굴로 악명이 높았고 북부의 수도였던 워싱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병 때문에 양측 모두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에게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한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첫댓글 링껀에 관한 일화는 이글로서 충분히 섭취했읍니다
노예해방 위대한 업적을
남긴 링컨의 삶의 여정이
너무나 굴곡과반전의 역사라
감동을느꼈음
2102년도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면서 하염없이 눈물이 그치질 않아...
아마도 이 영화의 원작인 <권력의 조건(Teamwork of Rivals)>을 몇
번씩이나 읽고 감동을 간직해서 더욱 그랬을 것 같습니다. 책 제목처럼
정적들을 내각에 끌어안고 끝내는 그들을 감복시키는 링컨의 고귀한 인
품이 참으로 가슴에 와닿던 기억이...지금도 가끔은 읽어보곤 합니다만...
링컨은 무능한 장군들과 적대적인 의원들, 소란스러운 내각에 대처해 길고
무시무시한 싸움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고 그들
의 느낌을 공감하며, 그들의 동기와 욕망을 이해할 줄 아는 남다른 재능이
있었죠. 그가 적수들을 한데 모으고, 역사상 가장 기이한 내각을 구성하고,
연방의 보존과 전쟁의 승리를 위해 그들의 재능을 결집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능력들 덕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