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도 많은 분들이 강의에 참석하셨다.
강원대 국문과에 한학을 하신 교수로 계시다 고려대로 올라간 뒤로 이렇듯 시민모임의
초청에 응해주신 것 자체가 좀처럼 쉬운 일은 아니란 생각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서울에서 오시어
흔쾌한 강의로 기억을 남기신 정옥자 선생님처럼 춘천에 집이 있어 자주 오시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선선히 발걸음을 해주신 것은 강의중에도 누차 말한 김정기 선생 같은
애제자가 있어서 미리부터 중간에서 연락을 잘 해준 덕분이기도 하였다.
같은 연배로서 나는 특히 교수들의 연구를 갈수록 좋은 눈길로 보기가 힘들어지고 있는데
심경호 선생이야말로 첫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한국의 석학(碩學)이라고 말하고 싶은
분이다. 다 아다시피 연구업적은 물론이고 지금은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도 한중일을
아우르며 그 선두에서 우리나라 한학의 너른 입지를 굳히고 넓히며 새로운 모색을 하려고
활동하는 아주 바쁜 분이기 때문이다. 그간 몇 번은 얼굴을 뵈었으나 가까이서 대화를 나눈 것은
나 역시 오늘이 처음이었다.
선생은 특이하게도 서울대를 나와 교토대에서 학위를 하였다. 당시 고려대의 김흥규 선생도
조선의 시경론(詩經論)으로 학위를 했는데, 심경호 선생은 일본의 한학(중국문학)을 배우고 역시
시경론으로 학위를 하였다. 지금은 중국 유학도 많고 일본 유학도 많지만 당시에는 묵묵히
공부하고 연구하는 한문학의 학술풍토에서 너른 안목을 던져주는 신선한 모습이었다고 기억된다.
누구보다도 다방면의 글들을 쉴 새 없이 쏟아내는 열정에 나 역시 부지런히 선생의 글을
찾아 읽던 생각이 새롭다. 이런 연유로 보자면 선생의 한시 연구는 남다른 폭과 깊이를 지닌
안목으로 주목된다고 하겠고, 이번 다산의 춘천 기행도 대부분 한시인만큼 이해가 깊다고
할 것이다.
먼저 방통대 문원 학장님이 지난 번 저녁 대신으로 운영진에게 저녁을 사주신다고 하여 약속이
잡혔는데, 김정기 선생을 통해 심선생님도 그 시간에 오실 수 있다고 연락이 되어 남춘천
삼대막국수의 저녁 자리에 함께 모실 수 있었다. 교도소 강의를 마치고 오시는 길이라고 하였고
박승한 고문님, 문원 학장님과 동문이라 이런저런 이야기가 이어졌었다. 심선생님은 심지어
캐나다 밴쿠버에 가서까지 한문 강의를 하셨다고 하여 놀랐다. 더 놀라운 것은 밴쿠버대에
있는 허남린이라는 고교동기로 종교학을 공부하여 일본불교로 프린스턴에서 학위를 한 친구를
만나셨다는 말이었다. 한국인 교수 덕분에 좋은 대접을 받으셨다고 하였고, 나는 다음 6월에 또
가시면 안부를 전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사람의 인연이란 놀랍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의 강의는 요지문에 나온 대로 죽 설명하며 간간이 곁말을 보태는 방식이었고 한글파일을
화면에 띄우며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말은 좀 빨랐고 재미 쪽이라기보다는 약간 수준을 높여
연구자로서 할 수 있는 여러 정보의 전달에도 신경을 쓰는 방식이었다. 지난 번 뵈었을 때의
인상보다 말끔하고 활기차 보였다.
선생의 주지는 강원대를 떠나며 강원대출판부에서 출간된 <다산과 춘천>이란 책의 제목도
잘못이었다고 할 만큼, 다산의 생을 놓고 볼 때 출사기에 이은 유배기 이후의 삶에서 춘천기행은
큰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는 것이다. 너무 강진의 다산초당을 중심으로 많은 소개가 있었던
덕분에 호조차 '다산'으로 널리 알려졌으나 애초 '여유당'이란 생가의 당호가 더 맞다는 말이다.
선비의 생에서 누구나 '참여'와 '소요'가 있는데, 다산 말년의 시기는 소요에 중심이 놓인
일민(逸民)의 삶이란 점에서 중요하다고 하였다.
학자로서 저술로 보면 다산에게는 딱히 역사 분야에 저술이 타분야보다 약하지만 <아방강역고>나
<대동수경> 같은 지리서를 통해 사서를 편찬하였다며, 그것을 보완하고자 하는 의도가 춘천기행
이었다고 하였다. 거기에는 조선의 상고사에 대한 관심이 있었고 고조선의 열수를 한강으로
비정하면서 문헌사학의 방법으로 남한강 북한강을 습수 산수라고 부르며 특히 춘천의 고대 맥국도
춘천이 아닌 압록강 북쪽으로 비정하는 주장을 하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이 말에 특히 일본인
학자들이 <열수고> 같은 저술을 내면서 다산의 고증을 따라 이른바 '반도사관'이라는 식민지사관을
만들기도 했다는 지적을 보태주셨다. 지금이야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고조선 땅이 요동땅이란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조선의 19세기 다산의 시기에는 문헌사학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심교수의 관점이었다.
사실 다산의 기행시와 글은 한두 번 읽는 것만으로는 제 맛을 알기가 힘들다. 한문 자체도 아름
답다고 강의중에도 강조하였지만, 춘천부분에 대한 서술은 현실비판이나 미적인 측면에서도 매우
뛰어난 성취를 보인 작품인 것이다. 남인 학자로서 다산의 남다른 점은 소론이나 노론 등 타 당색의
학자나 인물은 물론이고 글도 접하며 관계를 맺었다는 점이라고 '콘택트'라는 영어를 써서 강조하
기도 하였다. 첫 춘천여행에서 청평사를 찾은 것이 퇴계선생의 시에서 보인 관점을 따랐고 두보의
사천성 한시를 차운한 것이었다면, 두 번째 뱃길은 소동파의 시를 차운하며 이재의라는 노론계의
젊은 학자와 동행하며 '노론의 성지(聖地)'인 곡운구곡을 찾은 것이었다.
그만큼 토론을 통해 노론의 학문적 주장을 깊이 알면서 곡운구곡을 찾아가 9곡 가운데 3곡을 자신의
관점으로 고쳐놓기까지 한 것이다.
9곡의 아름다움을 한시와 함께 보면서 미적인 견해와 의미를 따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래서 질문
시간에 그보다는 현실비판의 관점과 마찬가지로 이미 안동김씨의 세도가 있게 된 뿌리인 과거 척신
거족들이었던 이들에 대한 비판적 의식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지 않겠느냐고 마지막 질문을
하였다.
아무리 쇠락되어 보인다고 해서 선대(先代)의 유적을 선뜻 자기 관점대로 뜯어고친다는 일이 결코
가볍고 쉬운 일은 아닌 것이다.
사실 심선생의 번역된 글을 따라 주의해서 읽지 않으면 노론계인 이재의가 문암서원 참배시에
이름이 빠져 있고 다산이 곡운의 정사 영당에 참배하지 않은 점을 깨닫기가 힘들다.
선생의 책은 고증이 잘못 된 곳도 있고 하여 벌써부터 재답사를 통해 고치려고 하고 있다고
하였다. 또한 정약용과 춘천이라는 주제가 요새 새로이 관심거리가 되고 있다며 선생은 장차 국립
중앙도서관의 강의 후 춘천 답사길에 함께 다시 보자는 말을 남겼다.
ITX막차 표를 사고 역전의 카페인에서 잠시 뒷풀이로 차를 마셨다. 황재국 선생, 지란지실의
이난숙 선생, 강대의 원종식 교수, 김정기 선생 들이 운영진과 함께 담소를 나눈 뒤 헤어졌다.
첫댓글 심도있는 깔끔한 정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