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녀가 있었다. 은하였다. 어디 가느냐고 물었다. 배웅 나왔다는 것이다. 십 리나 되는 어두운 새벽길을 혼자서 온 것이다. 무섭지 않느냐고 했다. 늦어서 떠나는 걸 못 보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뿐, 뛰어오느라고 몰랐다는 것이다. 눈깔사탕 한 봉지를 내게 주는 것이었다.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다. 은하의 마음씨가 고 귀여운 눈동자같이 곱다고 여겨졌다. 우리들의 이야기를 듣고 계시던 숙부님이 빙그레 웃으신다. 나무 등걸에 불이 붙어 불길은 더욱 확확 타올랐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은하는 나의 가슴 깊이 꿈과 별을 심어 놓았다. 계집애 하면 고 귀여운 별을 생각하고 그 별과 비교하게 되었다. 편지를 쓰고 찢기가 수백 번, 지금껏 소식 한 번 전하지 못한 '쑥빼기'인 나였지만. 열일곱 살 땐가 여름 방학에 친구를 따라 두메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모닥불을 피워 놓고 멍석을 깔고 둘러앉아 피우는 이야기꽃도 재미있었지만 모닥불에 묻어 놓은 옥수수와 감자를 꺼내 먹는 맛도 구수하였다. 이슥하여 동네 사람이 가고 나는 멍석에 누워 하늘 가운데를 흐르는 은하수를 바라보며 고 귀여운 은하의 눈동자를 찾다가 그만 잠이 들어 버렸다.
검은 연기를 뿜는 기차가 레일을 벗어나며 달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기차가 아니고 용이었다.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보니 용이 아니고 뱀이었다. 이 뱀은 순식간에 허물만 남았다. 회오리바람이 불자 허물은 수만 수천의 반짝이는 별이 되어 은하수로 치솟아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러자 은하수에서는 홍수가 일어났다. 은하수의 별이 소나기같이 지구로 쏟아져 내 이마에 부딪치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꿈을 깨었다. 빗방울이 후둑후둑 이마를 때리고 있었다.
15년 만인가 처음 고향엘 다니러 갔었다. 숙부님은 아직도 건강하시다. 동생들에게 우선 은하의 소식을 듣고 싶었지만 다른 사내애들의 소식을 물은 다음 이름도 모르는 척 알아보았다. 시집을 가서 잘 산다는 것이었다. 간 건너 마을에 사는데 다음 날 방문할 할머님 댁 바로 옆집에 산다고 한다. 방문을 그만두기로 하였다. 은하가 지금은 가정 주부로서 모습이 퍽 달라졌으리라 짐작은 가지만, 내가 지니고 있는 인상은 열세 살 때이고 귀엽게 반짝이며 웃음짓는 눈동자의 소녀인 것이다.
할머님 댁에 가서 옆집에 사는 그네를 볼지 말지, 하지만 만약 만나게 된다면 열세살 때 박힌 아름다운 꿈과 별이 산산이 깨어질 것만 같아 그만두기로 하였다.
어느 해 목련화의 봉오리가 부풀어 터진 날 새벽, 우리 집에서는 하나의 새 생명이 태어났다. 이제나저제나 하고 밖에서 서성거리던 나는 딸이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는 것이었다. 첫아기는 아들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낳은 지 사흘째 되는 날 저녁, 잠자는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가 눈을 반짝 떴다. 순간 아가의 눈동자가 별같이 빛나는 것이 아닌가. 나는 한참 동안 황홀해서 멍했다. 그렇게도 수 없이 찾고 그리던 별을 바로 내 귀여운 딸애의 눈에서 찾아 낸 것이다. 딸의 이름은 미리내라고 지어야겠다. 밤 하늘을 수놓은 별밭은 온통 내 귀여운 딸애의 눈동자로 가득 차 반짝거리고 있었다.
국순전(麴醇傳)
임 춘
국순(麴醇)의 자는 자후(子厚)이며, 그 조상은 농서( 西)지방에 살았다. 그의 90대조 모(牟:밀)는 후직(后稷)을 도와 백성들에게 곡식을 먹게 한 공이 있었다. 『시경』에 노래로 전하기를 "우리에게 밀을 전하여 주었네."라고 한 구절은 이를 말하는 것이다.
모(牟)는 처음에 벼슬을 하지 않고 숨어 살았는데 주위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나는 반드시 직접 밭을 갈아 스스로 먹는 것을 장만하겠네." 하고는 계속하여 밭고랑 사이에 살았다. 임금은 그가 장래성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수레를 보내 초빙해서 만나 본 뒤에 그의 고향으로 다시 돌려보내고, 신하들을 내려 보내 그를 방앗간 사이에서 사귀게 하였다. 그러자 모에게는 숨어 사는 자의 기풍이 점점 사라지고, 임금의 은혜를 받아 점점 명예를 중히 여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에게는 훈훈한 인정미와 아울러 온화하고 너그러운 기풍이 풍겨나게 되었다.
모가 말하기를, "나를 이렇게 변화시켜 준 것은 벗들이다. 내 어찌 그대들을 믿지 않겠는가?" 하였다.
마침내 그의 청덕(淸德)이 임금에게 알려져서 임금은 그가 사는 마을에 정려(旌閭:술집을 표시하는 기)를 세우게 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도록 하였다. 이어서 그는 임금을 따라 하늘에 제사 지내는 단(壇)에도 올라가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공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중산후(中山侯)에 봉해져서 1만 호의 백성을 거느리는 수장이 되었고, 국씨(麴氏)라는 성도 얻게 되었다.
그의 5세손은 성왕(成王)을 도와 사직(社稷:토지신과 농사신)을 섬기게 되니, 그의 힘은 천하를 통일한 시대에 태평을 누리게 하는데 일조를 하였다. 그 뒤 강왕(康王)이 즉위하자 그는 조정에서 점점 멀어지게 되었고, 마침내 임금의 명령으로 금고형(禁錮刑:벼슬을 못하게 하는 형벌)을 받게 되어 영원히 조정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이리하여 후세에 뚜렷이 알려진 자가 없고 그 자손들은 모두 민간(民間)에 숨어 살았다.
위(魏)나라 초기에 비로소 국순의 아버지 국주(國酒)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상서랑(尙書郞) 서막(徐邈)이 그를 조정에 데리고 들어가 입이 닳도록 칭송하니, 한 신하가 임금에게 탄핵하기를, "서막이 국주와 사사로운 교분을 빌미로 조정의 기강을 점점 어지럽힙니다."하였다. 임금이 화가 나서 서막을 불러 나무랐다.
서막이 머리를 조아리고 아뢰기를,"신이 국주를 따르는 것은 그에게 성인의 덕이 있기 때문입니다."하였다. 그 뒤 진(晉)나라가 왕통을 이어받자 국주는 벼슬에 뜻을 잃고, 유령(劉伶)쇓완적(阮籍) 같은 죽림칠현들과 어울려 죽림(竹林) 속에 묻혀서 놀다가 일생을 마쳤다.
국순은 호탕하고 도량이 넓어 기상이 도도히 흐르는 물과 같이 거침이 없었다. 그는 깨끗하면서도 맑지는 않았고, 흔들어도 흐려지지 않아 그에게서 풍기는 멋이 일세를 휩쓰니 사람들이 그의 성품에 감동하였다. 그는 일찍이 업 법사(葉法士)와 함께 온종일 담론하여 좌중에 앉았던 사람들을 감동시킨 일로 이름이 더욱 널리 알려졌다.
그리하여 그의 호를 '국처사(麴處士)'라고 하여 공경대부로부터 신선이나 방사(方士:마술사)는 말할 것도 없고 거리의 백정이나 목동, 오랑캐와 외국 사람까지 그의 향기로운 덕성에 감동한 자는 누구나 그를 흠모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언제 어느 곳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 국순이 나타나지 않으면 모두들 허전해 하며 이르기를, "국처사가 없으면 즐겁지가 않다." 하였으니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와 같았다.
대위(大尉) 산도(山濤:죽림칠현 중 한 사람)는 장래를 점칠 수 있는 지식이 있었다. 일찍이 국순을 보고 이르기를, "어떤 늙은 여인네가 이와 같이 향기로운 자식을 낳았는가? 그러나 장래에 천하의 백성들을 반드시 그르칠 자도 이 국순이 아니라고는 못할 것이다."하였다. 나라에서 그를 불러 청주(淸州) 종사(從事)로 삼았다가 다시 평원(平原) 독우(督郵)로 삼았다. 얼마쯤 뒤에 그는 혼자 한탄하기를, "나는 이 적은 봉급을 받으며 남에게 허리를 굽혀 아부할 수는 없다. 차라리 시골의 젊은 사람들과 술동이 앞에 마주 앉아 담론하는 것이 낫겠다." 하였다. 당시에 관상을 잘 보는 어떤 사람이 그의 관상을 보고 이르기를, "자네의 얼굴에 붉은 기운이 도니 뒷날 반드시 귀히 될 것일세. 분명히 천종록(千鐘祿)을 누릴 터이니, 많은 녹을 주려고 하거든 벼슬길에 나가게." 하였다.
진나라 후기에 양가(良家) 자제의 추천으로 주객원외랑이라는 벼슬을 받았는데, 임금이 그를 보고 매우 기특하게 생각하여 앞으로 높은 자리에 등용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어서 그를 재상으로 임명하고 광록대부 예빈경으로 삼았다. 그리고 군신들이 회의하는 자리에는 임금이 몸소 그를 잔에 받쳐 들었는데 그의 행동거지가 임금의 마음에 꼭 들어맞았다. 그리하여 임금이 칭찬하기를, "경을 일컬어 청(淸)이라고 하는 것은 나의 마음을 열어 주고 또한 나의 생각을 살찌게 해주기 때문이다."하였다.
국순이 임금 곁에서 하는 일은 손님을 접대하는 일과 늙은이들을 위로하는 일, 귀신을 섬기고 종묘에 제사하는 일들이었다. 그리고 임금이 밤에 잔치를 베풀면 궁녀들 외에 어떠한 근신(近臣)도 참여할 수 없었으나 그만은 늘 참여하였다. 이 때부터 임금은 그에게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는데, 그래도 국순은 입을 다물고 간쟁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법을 지키는 선비들은 그를 원수처럼 미워하였다. 그러나 임금은 늘 그를 총애하였다.
국순은 또 재물을 증식하기를 좋아하였는데, 당시의 여론은 그러한 그를 비루하게 여겼다. 임금이 그에게 묻기를, "경은 무슨 취미를 가졌는가?" 하니 그가 대답하기를, "옛날 두예(杜預)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연구하는 취미가 있었고, 왕제(王濟)는 말(馬)에 대한 취미가 있었는데, 신에게는 돈을 모으는 취미가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은 크게 웃고 그에 대한 사랑을 더욱 돈독히 하였다.
국순은 본래부터 입냄새가 많이 났었는데, 어느 날 임금 앞에 나아가 무슨 말인가를 아뢰자 임금은 그의 입 냄새가 싫어서 이르기를, "경은 나이가 늙고 기운이 모자라서 내가 맡긴 임무를 감당하지 못할 것 같네." 하였다. 국순이 관을 벗고 아뢰기를, "신이 벼슬을 주는 대로 받고 사양하지 않았으니, 이것 때문에 집안이 멸망하는 화를 입을까 두렵습니다. 바라건대 신을 고향의 집으로 돌려보내 주시어 신으로 하여금 스스로 만족하면 그칠 줄 아는 분수를 알게 하소서."하였다.
그러자 임금이 좌우로 하여금 그를 부축하여 나가게 하였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 목이 마르는 병을 얻어 하룻밤 사이에 죽었으며,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국순의 족제(族弟) 청(淸)은 뒤에 당나라에서 벼슬을 하였는데 벼슬이 내공봉(內供奉)에 이르고 그 자손들은 다시 번성하게 되었다.
역사가는 이렇게 적고 있다.
"국씨의 조상은 백성에게 공이 있어서 청백(淸白)한 것으로써 자손에게 물려주었다. 주나라의 울창주 같은 것은 그의 향기가 위로 하늘에까지 닿았으니 가히 그 조상의 품격이 남아 있다고 이르겠다. 국순은 병 속에 담길 수 있는 지혜가 있으며, 항아리에서 나와 일찍이 재상으로 선발되었고, 술동이 앞에서 담론하면서도 능히 간쟁하지 못하여 왕실을 어지럽히고 멸망시키는데 이르게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온 천하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거원[巨源:산도(山濤)의 자]의 말이 족히 믿을 만하다.
?『서하집(西河集)』
◆ 옛날 밀로부터 술이 되어 내려온 역사와 역대 제왕들의 취향에 따라 부침하는 술의 운명과 계통을 전기문 형식으로 쓴 픽션
◆ 임춘(林椿) 고려 의종∼명종 년간. 호는 서하(西河). 여러번 과거에 실패하였으나 그의 문명(文名)은 이인로(李仁老), 오세재(吳世才) 등과 함께 강좌칠현(江左七賢)으로 일컬어진다. 유고집 『서하 선생집』에 가전체 소설로 알려진 「국순전」(술의 의인화), 「공방전」(돈의 의인화)이 실려 전한다.
구 두
계용묵
구두 수선(修繕)을 주었더니, 뒤축에다가 어지간히도 큰 징을 한 개씩 박아 놓았다. 보기가 흉해서 빼어 버리라고 하였더니, 그런 징이래야 한동안 신게 되고, 무엇이 어쩌구 하며 수다를 피는 소리가 듣기 싫어 그대로 신기는 신었으나, 점잖지 못하게 저벅저벅, 그 징이 땅바닥에 부딪치는 금속성 소리가 심히 귓맛에 역(逆)했다. 더욱이, 시멘트 포도의 딴딴한 바닥에 부딪쳐 낼 때의 그 음향(音響)이란 정말 질색이었다. 또그닥 또그닥, 이건 흡사 사람이 아닌 말발굽 소리다.
어느 날 초어스름이었다. 좀 바쁜 일이 있어 창경원(昌慶苑) 곁담을 끼고 걸어 내려오노라니까, 앞에서 걸어가던 이십 내외의 어떤 한 젊은 여자가 이 이상히 또그닥거리는 구두 소리에 안심이 되지 않는 모양으로, 슬쩍 고개를 돌려 또그닥 소리의 주인공을 물색하고 나더니, 별안간 걸음이 빨라진다.
그러는 걸 나는 그저 그러는가 보다 하고, 내가 걸어야 할 길만 그대로 걷고 있었더니, 얼마쯤 가다가 이 여자는 또 뒤를 한 번 힐끗 돌아다 본다. 그리고 자기와 나와의 거리가 불과 지척(咫尺)임을 알고는 빨라지는 걸음이 보통이 아니었다. 뛰다 싶은 걸음으로 치맛귀가 옹이하게 내닫는다. 나의 그 또그닥거리는 구두 소리는 분명 자기를 위협하느라고 일부러 그렇게 따악딱 땅바닥을 박아 내며 걷는 줄로만 아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 여자더러 내 구두 소리는 그건 자연(自然)이요, 인위(人爲)가 아니니 안심하라고 일러 드릴 수도 없는 일이고 해서, 나는 그 순간 좀 더 걸음을 빨리하여 이 여자를 뒤로 떨어뜨림으로 공포(恐怖)에의 안심을 주려고 한층 더 걸음에 박차를 가했더니, 그럴 게 아니었다. 도리어 이것이 이 여자로 하여금 위협이 되는 것이었다.
내 구두 소리가 또그닥 또그닥, 좀 더 재어지자 이에 호음하여 또각또각, 굽 높은 뒤축이 어쩔 바를 모르고 걸음과 싸우며 유난히도 몸을 일어 내는 분주함이란, 있는 마력(馬力)은 다 내보는 동작에 틀림없다. 그리하여 한참 석양 놀이 내려비치기 시작하는 인적 드문 포도(鋪道) 위에서 또그닥또그닥, 또각또각 하는 이 두 음향의 속모르는 싸움은 자못 그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나는 이 여자의 뒤를 거의 다 따랐던 것이다. 2, 3보(步)만 더 내어 디디면 앞으로 나서게 될 그럴 계제였다. 그러나 이 여자 역시 힘을 다하는 걸음이었다. 그 2,3보라는 것도 그리 용이히 따라지지 않았다. 한참 내 발뿌리에도 풍진(風塵)이 일었는데, 거기서 이 여자는 뚤어진 옆골목으로 살작 빠져 들어선다. 다행한 일이었다. 한숨이 나간다. 이 여자도 한숨이 나갔을 것이다. 기웃해 보니, 기다랗고 내뚫린 골목으로 이 여자는 횡하니 내닫는다. 이 골목 안이 저의 집인지, 혹은 나를 피하느라고 빠져 들어갔는지 그것을 알 바 없었으나, 나로선 이 여자가 나를 불량배로 영원히 알고 있을 것임이 서글픈 일이다.
여자는 왜 그리 남자를 믿지 못하는 것일까. 여자를 대하자면 남자는 구두 소리에까지도 세심한 주의를 가져야 점잖다는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이라면, 이건 이성(異性)에 한 모욕이 아닐까 생각을 하며, 나는 그 다음으로 그 구두징을 뽑아 버렸거니와 살아가노라면 별(別)한 데다가 다 신경을 써 가며 살아야 되는 것이 사람임을 알았다.
계용묵 (桂鎔默/1904.9.8~196l.8.9)
소설가. 평북 선천군(宣川郡) 출생. 어려서 한학을 배우고, 1928년에 도일하여 도요[東洋]대학 동양학과에서 수학하였다. 27년 단편 《최서방(崔書房)》을 《조선문단(朝鮮文壇)》에, 28년에 《인두지주(人頭蜘蛛)》를 《조선지광(朝鮮之光)》에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는데, 35년에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백치(白痴) 아다다》를 《조선문단》에 발표하여 주목을 끌었다. 그 후 《청춘도(靑春圖)》 《유앵기(流鶯記)》 《신기루(蜃氣樓)》 등을 발표하였고, 일본의 《매일신문》(42.2.21)에 《일장기(日章旗)의 당당한 위풍》이란 친일적인 수필을 발표한 바 있다. 광복 후에는 《별을 헨다》 《바람은 그냥 불고》 《물매미》 등을 발표하였다. 원래 과작인 데다 콩트풍의 단편만을 썼으나, 짧은 것일수록 기교를 중시하고 예술적인 정교한 맛이 풍부하다. 대체로 그의 작품은 인간이 가지는 선량함과 순수성을 옹호하면서 인간 존재와 삶의 의미를 추구하였다. 그러나 현실과의 적극적인 대결을 꾀하지는 않았다. 갈등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고 담담한 세태묘사에 머물렀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수필집으로 《상아탑(象牙塔)》(l955)이 있다.
광문자전(廣文者傳)
박지원
광문은 거지였다. 일찍이 종루(鐘樓:종로) 거리에서 빌어먹고 살았는데, 여러 거지들이 그를 두목으로 추대하였다. 그리하여 다른 거지들이 밥을 빌러 나갈 때 그는 그들의 소굴을 지키는 일을 맡았다.
어느 추운 겨울 날이었다. 다른 거지는 모두 밥을 빌러 나갔으나 거지 아이 하나가 몸이 몹시 아파서 그들을 따라가지 못하였다. 그 아이는 자리에 누워서 고통을 참지 못하여 신음하고 있었다. 그를 간호하던 광문은 가까운 거리로 나가서 우선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빌어다가 병든 거지 아이를 먹이려고 했는데, 광문이 음식을 빌어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죽어 있었다.
나중에 밥을 빌어 온 거지들은 그 거지 아이가 죽은 것을 보고 광문이 죽였다고 생각하고는 광문을 둘러싸고 몰매를 때렸다. 광문은 거기에 더 견뎌 내지 못하고 밤중에 쫓겨나고 말았다. 그는 추위를 피하기 위하여 마을 안으로 들어가 어느 집에 들어갔더니, 그 집 개가 몹시 짖었다. 그는 그 집 주인에게 붙잡혀 도둑으로 몰려 새끼줄에 꽁꽁 묶였다. 광문은 애걸하였다.
"저는 도둑이 아니에요. 거지들한테 몰매를 맞고 도망 온 겁니다. 제 말을 못 믿겠거든 내일 아침에 저를 따라와 보세요."
주인은 그의 말이 순박한 것에 감동하여 그를 헛간에 재운 뒤에 새벽에 놓아 보내었다. 광문은 고맙다고 인사를 한 뒤에 떨어진 돗자리를 하나 달라고 부탁하였다. 주인은 그에게 돗자리를 내주고는 그의 뒤를 따라가 보았다. 그 때 여러 거지들이 죽은 거지의 시체를 끌고 와서 청계천의 수표교(水標橋) 다리 밑에 던지고 갔다. 그것을 본 광문은 그 다리 밑으로 내려 가서 그 시체를 자리에 말아서 싸 가지고 둘러 업더니 그것을 서교(西郊:지금의 서교동)의 공동 묘지로 가져가 묻어 주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울면서 한편으로는 넋두리를 하였다.
이 광경을 본 주인은 그를 불러 놓고 사연을 물어 보았다. 광문은 그간의 일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주인은 광문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옷을 주어 갈아입게 한 뒤에 다시 그를 부잣집인 약방에 심부름꾼으로 취직을 시켜 주고, 그의 신원 보증도 서 주었다.
얼마쯤 지난 뒤에 약방 주인은 외출을 할 때쯤에는 늘 약방 안을 유심히 둘러보고 또 귀중품을 넣어 놓는 궤짝의 열쇠를 확인하곤 하였다. 그리고는 광문을 보고 무어라고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곤 하였다. 광문은 주인이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고 느꼈으나 그 원인은 알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냥 말없이 일만 부지런히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약방 주인의 처조카가 돈을 가지고 돌아와 주인에게 말하였다.
"며칠 전에 제가 돈을 꾸러 왔었는데 마침 이숙(姨叔)께서 출타 중이셔서 급한 김에 방에 들어가서 그냥 돈을 가져갔었습니다. 이숙께서는 혹시 그 사실을 알았습니까?"
주인은 그제야 자신이 광문을 의심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광문에게 사과하였다.
"얘야! 내가 참으로 졸장부다. 공연히 너같이 착한 사람을 의심했단다. 너를 볼 면목이 없구나."
그는 이 사실을 자신의 친지들에게 이야기하고 그 친지들은 그 말에 살을 붙여 더욱 광문의 훌륭한 점을 칭찬하니, 소문은 금세 서울의 큰 부호들이나 상인들에게까지 퍼지고, 이어서 조정에 출입하는 높은 벼슬아치들에게까지도 자자해졌다. 그리하여 그에 대한 일화는 양반 귀족들의 잠자리에서까지 오르내리곤 하였다.
이렇게 광문이 옛날 훌륭한 사람들보다 더 과장되게 알려지자 이제는 그를 약방에 추천해 준 주인까지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음을 칭찬받게 되고, 다음으로는 그 약방 주인도 훌륭한 사람이라고 그 명성이 온 서울에 알려졌다.
당시에 서울에서 돈놀이를 하는 자들은 주로 머리 장식품인 옥이나 비취 또는 의복이나 그릇 종류 아니면 종이나 땅 문서를 저당 잡고 돈을 빌려 주었는데, 광문이 보증을 서 준다고 하면 채권 유무를 따지지 않고 단번에 천금을 내어 주기도 하였다.
광문의 사람됨을 따져 보면 얼굴도 매우 볼썽 사납게 생겼고, 사람을 사로잡을 만한 말재주도 없었다. 게다가 입은 커서 주먹이 두 개씩은 들락날락할 정도인데 그는 특히 마당놀이인 만석(曼碩)놀이(요즘의 가면극 같은 놀이의 일종)나 철괴(鐵拐)춤을 잘 추었다. 당시 아이들이 서로 헐뜯고 욕할 때 "얘, 네 형이 달문(達文)이지." 하곤 했는데, 달문이는 곧 광문의 다른 이름이었다.
광문은 길을 가다가 싸움하는 이를 만나면, 자기도 옷을 벗어부치고 함께 달려들어 싸울 듯하다가는 갑자기 벙어리처럼 뭐라고 입속으로 웅얼거리며 땅에 엎드려 금을 그어 놓고 무엇인가 시비곡직을 판단하려는 시늉을 한다. 그러면 거기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모두 웃게 되고 싸우던 사람들도 어쩔 수 없이 따라 웃어 자신도 몰래 분한 마음이 풀어져 버려 싸움이 끝난다.
또 광문은 나이 사십이 넘도록 머리를 땋고 다녔다. 사람들이 장가를 가라고 하면 그는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얼굴이 아름다운 사람을 구하는 것은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도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나같이 못생긴 사람이 어찌 장가를 갈 수 있겠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집을 마련하여 살림을 하라고 하면 그는 또 이렇게 말하였다.
"나에게는 부모 형제나 처 자식도 없어요. 게다가 아침에 노래를 부르고 나갔다가 저녁이면 부잣집 문간에서 잠을 잡니다. 우리 서울에 집이 8만 채인데 내가 매일 한 집씩 옮겨 다니며 자도 내 한 평생에 그 많은 집을 다 돌아다니며 잘 수 없을 거예요."
이 때 한양에 있는 이름난 기생들은 아무리 아름다워도 광문이 소문을 내주지 않으면 유명해지지 않았다.
언젠가 서울에서도 유명한 한량들인 우림(羽林)의 무관들 그리고 여러 궁전의 별감(別監)들과 임금의 사위인 부마 도위(駙馬都尉)들이 종을 거느리고 옷소매를 휘저으며 이름난 기생 운심(雲心)을 찾은 일이 있었다. 그들은 마루 위에 앉아 술을 따라 놓고 비파를 뜯으며 운심에게 춤을 추라고 하였다. 그러나 운심은 짐짓 사양하면서 춤을 추지 않았다.
이 때 광문이 마루 밑에서 서성거리다가 마루에 성큼 올라와 상좌에 앉았다. 광문의 옷은 남루하고 행동은 거칠었지만 그의 의욕은 양양자득하였다. 눈꼬리에는 눈곱이 끼고 술 취한 듯한 목에서는 연해 딸꾹질이 났다. 염소털 같은 머리를 등쪽에 틀어 돌린 것을 본 사람들은 그를 당장에 두들겨 내쫓고 싶어하였다. 그러나 광문은 개의치 않고 오히려 앞으로 다가앉아 무릎을 치며 곡조에 맞추어 콧노래를 불렀다. 그러자 운심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광문을 위하여 칼춤을 추었다. 드디어 온 좌석은 기쁨으로 가득찼고 그들은 광문과 벗을 삼기로 한 뒤에 헤어졌다.
--『연암집(燕巖集)』
미국 문화를 생각한다
성기조
우리의 문화와 전통이 행방불명되었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와 때때로 전통문화에 대한 논의가 일기도 한다. 묘하게도 전통문화에 대한 논의가 있었던 때를 점검해 보면 외세에 맥을 못추던 때가 된다.
3 1운동이 있은 후, 만세만 부르면 독립은 저절로 될 줄 알았던 많은 사람들이 일제의 혹독한 총독정치에 질려 머리를 땅에 떨구고 기를 못 펴던 때, 일군(一群)의 문학자들은 문학을 통한 항일운동에 불을 당겼다.
한용운, 이상화 등 민족시인의 등장이 그것이다. 그 뒤 많은 사람들은 우리 시가(詩歌)의 전형적 형태인 시조부흥 운동에 정력을 쏟았다. 시조를 통한 민족정서의 표출로 민족정기가 회복되면 독립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것이 최오의 전통문화에 대한 논의였다. 1930년대의 일이다.
6 25 전쟁 때, UN군으로 말미암아 서구문화가 정신차릴 수 없이 밀어닥친 50년대, 민족문화의 수립이란 대명제를 세우고 전통에 대한 논의가 일었다.
70년대에 접어들면서 전통에 대한 논의는 정치권에 도전하는 운동의 실체로 이론개발의 현장으로 확인되어, 판소리, 마당놀이, 사물놀이, 길놀이 등이 무섭게 확산되었고 젊은이들이 전통에 관한 연구와 이의 전수에 힘을 기울였다.
이러한 현상은 미국문화가 휩쓸고 있는 우리 나라에서는 두 번 다시 없었던 일로, 문화적 반성의 기회를 제공해 주어 자주문화와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우리 문화 가운데 특히 대중문화는 45년 이후 아무런 '걸름'이 없이 미국문화가 직수입되고 전파 확산되어, 서울을 비롯한 몇몇 도시의 일정 구역은 마치 미국의 변방지대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그 중에서도 음악 의상 식생활 관습 따위가 미국화되어 가는 주종이었고, 언어생활에서도 미국어로 인한 오염은 우리말의 아름다움마저 여지없이 깨고 말았다. 그래서 미국인의 한국어를 말하는데 특징이랄 수 있는 혀짧은 발음을 흉내내는 사람까지 생겼고 으레 그들은 미국에서 돌아왔기 때문에 우리말을 잘 할 수 없는 게 자랑스럽다고 여기기도 했다.
미국문화의 해독은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미국은 막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하여 지적 헤게모니를 거머쥐기 위하여 우리의 사고방식, 생활양식 그리고 양심까지도 바꿔 놓게 하는 마술사가 되었다. 합리주의 능률주의적 사고방식, 햄버거나 켄터키 치킨, 맥도날드, 웬디스의 상표가 붙은 패스트푸드(간이식) 가게 코카콜라 그리고 청바지와 로큰롤 음악 등은 우리 전통을 압도하게 되었다.
실로 우리의 전통문화의 숨구멍은 어디에도 열려 있지 않은 현실에서, 젊은이들의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은 고집스럽기까지 했다. 이들이 찾아내고 이들이 이론을 세우고 이들이 연출해 낸 문화적 전통이 앞날의 우리 정신을 내세울 수 있는 바탕이 된다고 생각할 때, 미국 문화에 찌들어가는 우리의 문화를 살리는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문화가 침식 당하면 민족정신은 간데 없다. 이런 비운을 우리는 세계 역사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우리 문화의 보존 발전과 미국 문화의 선별적 수입은 우리 민족의 주체성을 확립하는 길이 된다. 생각없이 흥얼거리는 저속한 미국의 대중가요가 우리의 정신을 좀먹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무소유(無所有)
법정
"나는 가난한 탁발승(托鉢僧)이오. 내가 가진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젖 한 깡통, 허름한 요포(腰布) 여섯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評判) 이것 뿐이요."
마하트마 간디가 1931년 9월 런던에서 열린 제 2차 원탁 회의(圓卓會議)에 참석하기 위해 가던 도중 마르세이유 세관원에게 소지품을 펼쳐 보이면서 한 말이다. K. 크리팔라니가 엮은 {간디 어록(語錄)}을 읽다가 이 구절을 보고 나는 몹시 부끄러웠다. 내가 가진 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의 내 분수로는.
사실,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날 때 나는 아무것도 갖고 오지 않았다. 살 만큼 살다가 이 지상의 적(籍)에서 사라져 갈 때에도 빈 손으로 갈 것이다. 그런데 살다보니 이것저것 내 몫이 생기게 된 것이다. 물론 일상에 소용되는 물건들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없어서는 안 될 정도로 꼭 긴요한 것들만일까? 살펴볼수록 없어도 좋을 만한 것들이 적지 않다.
우리들이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게 되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적잖이 마음이 쓰이게 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것이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맨다고 할 때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흔히 자랑거리로 되어 있지만, 그만큼 많이 얽히어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지난 해 여름까지 이름 있는 난초(蘭草) 두 분(盆)을 정성스레 정말 정성을 다해 길렀다. 3년 전 거처를 지금의 다래헌으로 옮겨 왔을 때 어떤 스님이 우리 방으로 보내 준 것이다. 혼자 사는 거처라 살아 있는 생물이라고는 나하고 그 애들뿐이었다. 그 애들을 위해 관계 서적을 구해다 읽었고, 그 애들의 건강을 위해 하이포넥슨가 하는 비료를 바다 건너가는 친지들에게 부탁하여 구해오기도 했었다. 여름철이면 서늘한 그늘을 찾아 자리를 옮겨 주어야 했고, 겨울에는 필요 이상으로 실내 온도를 높이곤 했었다.
이런 정성을 일찍이 부모에게 바쳤더라면 아마 효자 소리를 듣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렇듯 애지중지 가꾼 보람으로 이른 봄이면 은은한 향기와 함께 연둣빛 꽃을 피워 나를 설레게 했고, 잎은 초승달처럼 항시 청청했었다. 우리 다래헌(茶來軒)을 찾아 온 사람마다 싱싱한 난(蘭)을 보고 한결같이 좋아라 했다.
지난 해 여름 장마가 개인 어느 날 봉선사로 운허 노사(雲虛老師)를 뵈러 간 일이 있었다. 한낮이 되자 장마에 갇혔던 햇볕이 눈부시게 쏟아져내리고 앞 개울 물소리에 어울려 숲 속에서는 매미들이 있는 대로 목청을 돋우었다.
아차! 이 때에야 문득 생각이 난 것이다. 난초를 뜰에 내놓은 채 온 것이다. 모처럼 보인 찬란한 햇볕이 돌연 원망스러워졌다. 뜨거운 햇볕에 늘어져 있을 난초잎이 눈에 아른거려 더 지체할 수 없었다. 허둥지둥 그 길로 돌아왔다. 아니나 다를까. 잎은 축 늘어져 있었다. 안타까워 안타까워하며 샘물을 길어다 축여주고 했더니 겨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어딘지 생생한 기운이 빠져버린 것 같았다.
나는 이 때 온몸으로, 그리고 마음 속으로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집착(執着)이 괴로움인 것을. 그렇다. 나는 난초에게 너무 집념해 버린 것이다. 이 집착에서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했다. 난(蘭)을 가꾸면서도 산찰(僧家의 遊行期)에도 나그네길을 떠나지 못한 채 꼼짝 못하고 말았다.밖에 볼 일이 있어 잠시 방을 비울 때면 환기가 되도록 들창문을 조금 열어 놓아야 했고, 분(盆)을 내놓은 채 나가다가 뒤미처 생각하고는 되돌아와 들여 놓고 나간 적도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말 지독한 집착이었다.
며칠 후, 난초처럼 말이 없는 친구가 놀러 왔기에 선뜻 그의 품에 안겨 주었다. 비로서 나는 얽매임에서 벗어난 것이다. 날을 듯 홀가분한 해방감. 삼 년 가까이 함께 지낸 '유정(有情)'을 떠나보냈는데도 서운하고 허전함보다 홀가분한 마음이 앞섰다. 이 때부터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난을 통해 무소유의 의미 같은 걸 터득하게 됐다고나 할까.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소유사(所有史)처럼 느껴진다. 보다 많은 자기네 ?을 위해 ?임없이 싸우고 있는 것 같다. 소유욕(所有慾)에는 한정도 없고 휴일도 없다. 그저 하나라도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일념으로 출렁거리고 있는 것이다. 물건만으로는 성에 차질 않아 사람까지 소유하려 든다. 그 사람이 제 뜻대로 되지 않을 경유는 끔찍한 비극도 불사(不辭)하면서 제 정신도 갖지 못한 처지에 남을 가지려 하는 것이다.
소유욕은 이해(利害)와 정비례한다. 그것은 개인뿐 아니라 국가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어제의 맹방(盟邦)들이 오늘에는 맞서게 되는가 하면, 서로 으르렁대던 나라끼리 친선 사절을 교환하는 사례를 우리는 얼마든지 보고 있다. 그것은 오로지 소유에 바탕을 둔 이해 관계 때문인 것이다. 만약 인간의 역사가 소유사에서 무소유사로 그 향(向)을 바꾼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싸우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주지 못해 싸운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간디는 또 이런 말도 했다.
"내게는 소유가 범죄처럼 생각된다 ."
그가 무엇인가를 갖는다면 같은 물건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이 똑같이 가질 수 있을 때 한한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므로 자기 소유에 대해서 범죄처럼 자책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소유 관념이 때로는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한다. 그래서 자기의 분수까지도 돌볼 새 없이 들뜨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 한 번은 빈 손으로 들어갈 것이다. 내 이 육신마저 버리고 훌훌히 떠나갈 것이다. 하고 많은 물량일지라도 우리를 어떻게 하지 못할 것이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 번쯤 생각해 볼 말씀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역리(逆理)이니까.
돼지의 대덕(大德)
설의식
금년은 세차(歲次) 간지(干支)로 정해(丁亥)니 풀어서 '돼지해'다. 부르기가 거북한 이름이다. 더럽고 못나고 먹기만 하고 놀기만 하는 일체의 악명을 온통 돼지에게 돌리어 '돼지 같은 놈, 돼지 같은 놈'하고 거세(擧世)가 일치하야 나무라는 관계상, 어학만으로는 불쾌한 이름으로 정론(廷論)이 되어 있다.
그렇게 불쾌하거든 애초에 쓰지 말 일이다. 쓴다고 할진대, 자(自)·갑자(甲子)·을축(乙丑)으로부터 임술(壬戌)·계해(癸亥)에 이르는 육갑(六甲)의 노선은 수미일관(首尾一貫)이니 하는 수 없다. 요즈음 세태처럼 방편대로 뜯어 고치는 '뒤범벅'일 수는 없다. 성립이 급하다고 기정된 수의 법문을 즉석에서 고치는 '입법의원(立法議院)'처럼, 그렇게 간단하게 '정인(丁寅)'의 호랑이로 고칠 수는 도저히 없는 노릇이다.
작년은 병술(丙戌)이니 '개'요, 재작년은 을유(乙酉)니 '닭'이다. 닭이라 하면 새벽을 연상하야 서광(曙光)을 의미하고, 각성을 우의(寓意)하야 태동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랬는지, 을유의 재작년에 해방의 서광을 보았고 대업의 태동을 보았다.
새 날이 밝는다고 닭은 울었지만 아직도 새벽이었던지라, 강산은 얼빤한 어둠 속에서 갈피를 못 찾았고 민중은 늦잠이 풀리지 못한 채 허둥지둥하였다. '닭'으로 표현하기에 거의 알맞는 정도의 동태였음은 묘한 일이었다.
'개'는 영역감(領域感)에 민첩한 동물이여 영지욕(領地慾)에 탐람한 동물이다. 그러므로 자령(自領)을 편수(偏守)하기에 사력을 다하며 덮어놓고 배타(排他)를 일삼아 짖기를 잘 한다. 침경(侵境)은 고사하고 접경도 못할 정도로 날뛰고 야단이다. 그리고 뼈다귀만 만나면 으르렁거리고 싸움을 잘 한다. 냄새도 잘 맡지만 꼬리도 잘 흔든다. 한 술 밥에도 꼬리를 흔들고 한 덩이 고기에도 아양을 부린다.····이렇게 쓰다가 보니 '개' 이야기가 아니라 작년 1년간 걸어온 우리 자신의 자화상(自畵像) 같아서 붓이 저절로 멈추어진다. 자괴(自愧)와 자책을 느끼는 까닭이다.
을유가 그렇고, 병술이 그런지라, 정해의 금년은 무엇을 암시하는가? 혹은 무엇을 계시하는가? 엉터리없는 '해(亥)'자에다 연(緣)을 달아서 돼지의 대덕(大德)을 일컬어 보자.
돼지라고 더러운 것을 자진하여 즐겨할 이치는 천만에 없겠다. 집이거나 자리거나 사람들이 더럽게 하여 주니까 그저 순수(順受)할 뿐이겠다. 매사에 까다롭지 않은 태음적(太陰的) 기질이 유달리 드셀 뿐이다. 미추(美醜)와 편부(便否)에 대한 둔감이라 하기보다도 그를 초월한 태연자약이니 말하자면 포용(抱容) 중에도 대포용이다.
'하해(河海)는 불관오독지수(不關汚瀆之水)'라 하야 하해(河海)가 가진 관용의 지덕을 일컫거니와 이같은 논법으로는 돼지의 그 점이 실상 돼지의 미덕인 것이다. 그런고로, 나무라기보다도 차라리 이 잡을 나위도 없이 광막(廣漠)한 돼지의 대덕을 우리도 본떠서 금년 1년은 태음적으로 나갈 수 없을까? 숙시(孰是)라 할 것 없이, 숙비(孰非)라 할 것 없이, 대포용(大抱容)·대둔감(大鈍感)으로 거세정조(居細精粗)를 한입에 집어 삼키고 상하 좌우를 한 팔에 끼어 품는, 그러되 태연자약하는 그러한 지도자가 과연 없을 것인가? 해년(亥年)을 위하여 우리는 이것을 대망한다.
먹기만 하고 놀기만 하는 돼지의 살림을 '악(惡)'으로 지목하야 모두들 나무라기만 한다. '제 똥 구린 줄 모른다'는 속담도 있지마는 책기(責己)엔 불충(不忠)이요 책인(責人)엔 충(忠)인 식으로 책돈(責豚)에는 어찌도 그리 충실한가? 먹기만 하고 놀기만 하여서 그야말로 돼지같이 살찐 사람이 인세(人世)에는 과연 없는가?
돼지는 놀고 먹을지언정 그래도 최후는 '살신성인(殺身成人)'의 대희생(大犧牲)을 천성으로 각오한 짐승이다. 사람에게 이 각오가 있는가? 중생의 번영을 위하여 자신의 1명(命)을 버리는 희생, 그를 감수하는 대덕을 가진 자 과연 몇이나 되는가? 글 아는 돼지가 있어서 만일 이 수록(隨錄)을 읽는다면 독파(讀破) 지차(至此)에 빙그레 웃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방성하야 대곡할 것이다.
돼지를 못났다고 하는 것은 아마 그 체국(體局)을 가리킴이리라. 특히 없는 듯한 짧은 목과 명목만의 그 꼬리를 가리킴이리라. 미상볼 '볼품'으로는 낙제다. 거듭 말하거니와 오직 '볼품이 없을 뿐'이다. 이 볼품 때문에 못났다고 하는 것은 볼품만으로 발라 맞추려는 덜 익은 사람들의 덜 익은 말이다.
볼품 있는 꼬리로서는 금류(禽類)에 공작(孔雀)이 있고 수족(獸族)에 여우가 있다. 필자는 공작의 꼬리를 미워한다. 그 오만불손한 꼬리! 유한 마담의 부화(浮華)와 같은 그 잡색의 어지러운 꼬리, 시대가 시대인만큼 형식의 장식에 흐르는 값싼 무지개적 환몽(幻夢)의 상징 같은 그 꼬리를 필자는 즐기지 않는다. 더구나 간사하고 요망(妖妄)한 여우적 꼬리, 하늘거리고 날름거리고, 이리로 알랑,저리로 달랑거리는 그 환술적(幻術的) 꼬리는 애초에 불취(不取)다.
돼지에게 있어서는 볼품 있는 꼬리가 본질적으로 필요치 않았다. 볼품보다도 '속품'으로 살아가는 돼기의 처세관으로도 그러하거니와, 청빈에 자안(自安)하고 누옥(陋屋)에 자적(自適)하는 그 심법상(心法上)으로도 아도에 필요한 흔드는 꼬리의 소유가 필요치 않았다. 배추동물(背推動物)로서의 지체(地體)와 명분을 확보하기 위하여 꼬리의 명목만 세우면 그만이다. 이로써 못났다 할진대, 차라리 명분 있는 속품의 못난이가 될지언정 신기루(蜃氣樓) 같은 볼품의 잘난 이는 안 되겠다! 하는 것이 돼지의 소신이요 또 본회(本懷)인 것이다. 사람으로서 돼지의 이같은 심경에 공명하는 자 그 얼마나 될 것인고!
돼지는 목이 짧다. 사뭇 없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닌 정도로 짧다. 없기론 생선이 1위요 포유족(哺乳族)엔 아마 돼지가 상석일 것이다. 그러나 목이 짧으니까 반드시 못난 것이요, 길어서 잘났다는 논법은 어디에 있는가?
목이 길기론 기린(麒麟)이 수석이다. 그러나 실상 길어서 결이다. 그 길다란 목을 느리어 좌로 우로, 혹은 전후로 상하로,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는 그 줏대 없는 겁장이 태도는 보기에 어떠한가? 이리 살피고 저리 살피면서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는 그 보조는 풍신 좋은 체구와는 전연 딴판이다. 이로써 기린 자신에 욕은 될지언정 자랑될 이치, 천만에 없겠다.
돼지는 다행으로 짧아서 곧은 목이다. 고집은 셀지 모르나 좌고우시(左顧右視)의 추태는 있을 수 없다. 목표를 향하여 일직선으로 직진(直進)할 뿐이다. 그러기에 '저돌지용(猪突之勇)'이라 하야 부탕도화(赴湯蹈火)의 용(勇)과 검산(劒山) 도수(刀樹)를 초개같이 보는 유진무퇴(有進無退)의 용은 오직 돼지에게 있는 것이다.
정해(丁亥)의 금년은 돼지의 대덕(大德)을 본뜨자. 대포용·대희생·대용맹으로 신지(信地)를 향하여 일로로 직진(直進)하자!
공방전(孔方傳)
임 춘
공방의 자는 관지(貫之:꿴다는 뜻)니, 그의 조상은 일찍이 수양산의 굴 속에 살았었다. 그리하여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는데 황제(黃帝) 때에 최초로 초빙되어 채용되었으나 성질이 강경하여 세상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였다. 황제가 관상쟁이 신하로 하여금 그의 관상을 보게 하니, 그 신하가 한참 동안 그를 들여다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산과 들에 아무렇게나 자란 바탕이라 아무리 씻고 닦고 하여도 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폐하께서 조정의 신하들로 하여금 그를 풀무 속에 넣고 녹여서 변화시킨 뒤에 광채를 내게 한다면 본래의 자질이 드러날 것입니다. 임금은 신하를 임용하는 데 있어서 이와 같이 그 자질과 됨됨이를 따라 변화도 시키고 키우기도 하는 것이니, 바라건대 폐하는 그를 무딘 동(銅)이나 쇠붙이와 같이 취급하지 마십시오."
드디어 황제가 관상쟁이의 말에 따라 그를 풀무 속에 넣고 변화시킨 결과, 공방은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뒷날 난리를 만나 다시 강물 가의 용광로로 옮겨 갔는데 이 때부터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
공방의 아버지 천(泉)은 주(周)나라의 대재(大宰)가 되어 나라의 세금을 맡아 다스렸었다.
공방은 그 됨됨이가 바깥쪽은 둥글고 안쪽은 모가 났는데, 시대에 따라 그의 직책이나 역할도 변화하였다. 저 한(漢)나라 때에는 홍로경이 되었는데, 당시에 오왕(吳王) 비가 교만하고 아첨을 잘하여 나라를 마음대로 쥐고 흔들 때라 공방이 그를 많이 도와 주었다.
호제(虎帝) 때에는 온 천하가 흉년이 들어 모든 창고가 비자, 임금이 걱정하여 공방을 부민후(富民侯)로 삼고, 염철승(鹽鐵丞) 근(僅)과 함께 조정에 머무르게 하였다. 근(僅)은 늘 공방에게 이름을 부르지 않고 '가형(家兄)'이라고 불렀다.
공방은 성품이 탐욕스럽고 염치가 없어서 나라의 재산을 총괄하게 되매 '(子母輕重法)'이라는 저울에 다는 법을 만들어,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옛날과 같이 용광로에 넣어서 일정한 틀에 녹여 부을 필요가 없게 하였다. 이리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저울 눈금을 가지고 서로 다투게 하고 물건 값을 마음대로 좌우하게 하여 결국에는 곡식을 천히 여기고 자신을 중히 여기게 하였다. 동시에 백성으로 하여금 근본을 버리고 말단의 이익을 추구하게 하여 농사의 중요성을 방해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간관(諫官) 등이 그를 논박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임금은 그 논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공방은 또 권세있는 사람의 비위를 잘 맞추어 그들의 집을 마음대로 드나들며 권력을 빙자하여 벼슬을 사고 팔게 하니 모든 권력이 그의 손바닥에서 놀아났다. 마침내 공경대부 같은 높은 벼슬아치들도 모두 고개를 숙이고 그에게 아첨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에게 뇌물을 주겠다고 약속한 문권이 산처럼 쌓였다. 그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물건을 받았는데 상대방의 인간됨이 어떤가를 따지지 않았음은 물론 시정(市井)의 잡배들이라도 재물만 많으면 다 사귀었다. 그리고 때로는 시골의 건달패들을 따라다니면서 활 쏘고 장기 두고 바둑 두는 일도 협조하였는데 당시의 사람들이 말하기를, "공방의 말 한마디는 천금과 같이 중하다."고 하였다.
원제(元帝)가 즉위하자 공우(貢禹:간의대부)가 상소하였다.
"공방이 그동안 오래도록 중요한 직책을 맡았으나 농사의 중요함을 알지 못하고 오로지 물품을 교환하는 이익만을 추구하니, 나라와 백성에 해가 되어 공사(公私)가 모두 위험한 지경에 빠졌습니다. 게다가 뇌물이 횡행하여 청탁이 공공연히 행해집니다. 곧 '천한 자가 짐을 진 채 수레에 오르니 도둑이 노릴 것은 뻔한 일이다.'라는 말은 『주역』에 분명히 씌어 있는 교훈입니다. 바라건대 그의 관직을 빼앗아 그의 탐욕스러움을 징계하소서."
당시에 곡식을 중요시하는 정책으로 벼슬길에 나와서 국경의 군비를 충당하는 정책을 세우려던 자가 공방의 일을 질투하여 공우의 상소에 찬성하니 임금이 드디어 그 상소를 윤허하였다. 벼슬길에서 쫓겨나게 된 공방은 그의 문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 동안 우리 임금님을 만나 홀로 천하를 경영함에 있어서 국가의 경비를 충족하게 하고 백성의 재물을 풍부하게 하려던 것뿐이었는데, 지금 하찮은 죄로 축출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등용이 되든 축출을 당하든 간에 나에게는 하등의 손익이 없다. 다행히도 나의 목숨은 실과 같이 끊어지지 않고 있으니 주머니의 아가리를 틀어막고 가만히 들어앉은 채 먼 강가의 조그마한 마을로 돌아가겠다. 그리하여 낚시나 놓고 개울가에서 놀다가 물고기가 잡히거든 술이나 사서 마시겠다. 그리고 육지와 바다의 상인들과 함께 배를 띄우고 놀면서 나의 평생을 마치는 것으로 만족하련다. 비록 천종록(千種祿:많은 재물)과 오정식(五鼎食:다섯 솥의 음식)을 준다고 한들 이 즐거움에 비하겠는가? 어떻든 내가 시행하던 정 오래지 않아 다시 계속될 것이다. 마침내 그를 사랑하는 벽(癖)을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노포(魯褒)가 그를 논박하고 잘못된 풍속을 바로잡으려 하였다. 저 완선자[阮宣子:진(晉)나라 원수(阮修)]는 성품이 호방하여 속물(俗物)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공방의 무리와 지팡이를 끌며 같이 노닐다가 술독 근처에 가면 그만 술을 사서 마시곤 하였다. 또한 왕이보[王夷甫:진(晉)나라 왕건(王愆)]는 공방을 상대하면 창피하다고 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