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교사다!(벧전5:3-4)
2014.7.20(김상수목사)
“3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벧전5:3-4)
전도를 하다보면 어린시절에 단 한 번이라도 교회에 갔던 경험이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더 전도하기가 쉽다. 아마 이것은 전도를 해보신 분이라면 거의 공통적으로 느끼셨을 것이다. 그런데 어린 시절에 교회에 가봤다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대부분이 성탄절이나 여름성경학교 때였다고 말한다. 왜 그렇게 그들은 어린 시절에 한두 번 교회 나갔던 것을 잊지 않고 선명하게 기억할까? 백색 도화지 같은 마음에 다른 때가 묻기 전에 십자가와 교회의 모습이 스케치되어 졌기 때문이다.
요즘 여름성경학교를 준비하는 교사들의 모습을 보면서, 잠시 옛날 주일학교 시절을 잠시 회상해 보았다. 그때는 주일학교에서 행사가 있으면 선물은 늘 공책이나 연필 같은 학용품이었다. 손에 쥔 두툼한 공책을 보면 마음까지 배불렀다. 보통 성탄절에 받은 학용품으로 1학기를 쓰고, 여름성경학교 때 받은 학용품으로 2학기를 지내던 시대였다. 성경학교도 월요일에 시작해서 금요일 오후까지 했다. 그것도 새벽, 오전, 오후 세 번을 모였고, 점심은 각자 집에서 먹고 다시 모였다. 찬송가사도 선생님들이 일일이 큰 종이에서 매직으로 썼다. 가난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예배당은 가득 찼고, 선생님들의 열정만큼은 대단했다.
지금은 거의 부르지 않지만 옛날에는 여름성경학교 교가라는 것이 있었다. 그때 가사를 생각하면서 인터넷을 검색해 봤더니 옛날 악보가 있었다. 조사하면 다 나온다.
"흰 구름 뭉게뭉게 피는 하늘에 아침 해 명랑하게 솟아오른다.
손에 손을 마주 잡은 우리 어린이 발걸음 가벼웁게 찾아가는 길
즐거운 여름학교 하나님의 집 아~ 진리의 성경말씀 배우러 가자"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 찬송을 오랜만에 불러보면서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마 유치부나 유초등부 어린이들의 기억에도 지금의 여름성경학교가 그렇게 평생 기억될 것이다. 교사는 그 귀한 거룩한 기억을 심어 주는 사람이다. 얼마나 귀하고 복된 사역인가…….
이 찬송의 후렴에 “아~ 진리의 성경말씀 배우러 가자”라고 했다. 이 한 마디에 성경학교를 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과 본질이 숨겨져 있다. 성경학교는 진리의 성경말씀을 배우는 곳이다. 그러면 진리는 무엇인가? 바로 예수님이다(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그렇기에 성경학교는 예수님을 가르치고, 배우고, 체험하는 학교다. 이 점을 잊으면 안된다.
이 시간에는 오늘 분문 말씀 속에서 주일학교 교사들이 어린이들 학생들에게 예수님을 가르칠 때, 가져야할 바람직한 자세이자 중요한 교육방법 이기도한 한 가지를 함께 나누기 원한다. 그것은 양 무리들에게 본이 되는 것이다. 다같이 3절을 다시 한 번 함께 읽자.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5:3)
이 말씀은 사도 베드로가 초대교회 당시에 교회 장로들(지금의 목회자들에 해당)에게 권면한 말씀 중의 일부분이다. 그러나 목회자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양무리를 맡은 모든 교사나 일꾼들에게 동일하게 해당하는 말씀이다.
여기에서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라는 말씀은 ‘맡은 양들을 지배하거나 군림하려는 자세를 취하지 말라’는 뜻이다. 또 “양 무리의 본이 되라”는 말씀은 ‘양 무리를 섬겨라. 또는 양무리에게 무엇이 모범인지를 보여주라’는 의미가 있다. 좋은 교사는 어린이나 학생들 위에 군림하고 지배하는 교사가 아니라, 예수님처럼 섬기고, 본을 보이는 교사다. 예전에 어떤 핸드폰 광고에서 “쑈를 해라 쑈를 해. 쑈쑈쑈!”라고 했던 것이 생각난다. 쑈(Show)는 보여주라는 말이다. 그런 면에서 교사는 거룩한 쑈를 해야 한다. 보는 것이 배우는 것이고, 보여주는 것이 가장 좋은 교수방법이다.
그렇다면 어떤 본을 보일 것인가? 구체적으로 열거한다면 한이 없겠지만, 우선 최소한 다음의 몇 가지는 즉시 실천해 보기 바란다.
첫째, 빠지거나 지각하지 말자. 그동안의 주일학교 경험으로 볼 때, 그 무엇보다 안 빠지는 교사가 좋은 교사다. 아무리 율동을 잘하고 재능이 많아도 빠지면 소용없다. 참으로 묘한 것은 예고 없이 교사가 결석하면,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그날따라 그 반 아이들도 함께 빠지는 경우가 많다. 뭔가 영적으로 통하는 것이다. 또 교사가 예배시간에 자주 지각해서도 안된다. 지각하는 교사 밑에서 지각하는 아이들 나오기 마련이다. 교사가 된 이상 주일 아침에 늦잠 자는 것은 아예 포기하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보다 더 일찍 나오는 것을 목표로 잡아라. 일찍 나와서 기도로 준비하고, 전화도 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직접 어린이를 데리러 가기도 하고, 또는 예배실을 청소하고 정리도 할 수 있다. 일찍 나와서 예배실을 청소하는 기쁨은 경험해 보지 않으면 모른다. 일찍 나오면 얻는 것이 참 많다.
둘째, 함께 놀자. 놀아야 재미가 난다. 재미로 교회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교회에 오는 것이 재미가 있어야 한다. 신앙생활이 PC방 보다 재미없으면 안된다. 이것은 어린이나 어른들이나 다 마찬가지다. 각 연령대의 눈높이와 수준에 맞춘 재미가 있어야 그 모임에 나가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모일 때마다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엄숙하기만 하고, 끝나는 시간은 언제일지 기약이 없으면, 그 다음부터는 그 모임이 재미없고 어렵게 느껴진다.
그런데 특별히 어린이들의 경우에 이처럼 함께 놀아야할 더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어린이들의 경우에 그들은 ‘함께 놀아주는 것을 사랑받고 있는 증표’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얼마나 더 많이 놀아주느냐가 더 많이 사랑한다는 표시가 된다. 사실 생각해 보면 예수님도 삼년 반 동안 제자들과 함께 노시면서 온 몸과 삶으로 큰 본을 보여주셨다.
그러므로 교사는 어린이들과 노는 일에 몸을 아끼면 안된다. 애들 하는 말로 던져야 한다. 그것도 확실하게 말이다. 애들 때문에 옷버리면, 주님이 사주신다. 주일학교의 프로그램, 게임, 2부 행사, 물놀이 등이 있을 때, ‘나는 나이가 들어서’, ‘나는 여자이니까’, ‘나는 부장이니까’, ‘나는 오늘 좋은 옷을 입어서’라는 핑계를 대면서 뒤로 빠지지 말라. 나 역시도 주일학교 사역을 하면서 틈이 날 때 마다 어린이들과 놀았던 기억이 있다. 큰 카펫에 아이들을 태우고 여기저기 끌고 다니고, 함께 뒹굴고 미끄럼을 타면서 와이셔츠를 몇 개씩 버렸던 기억이 있다.
셋째, 함께 찾아가자(전도, 심방). 얼마 전에 어떤 장결자를 직장으로 찾아갔다. 그런데 그분이 ‘자기 때문에 정말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냐면서 감격해 하는 것을 봤다. 어린이들도 마찬가지다. 전도의 현장이나 결석자에게 전화만 해도 어느 정도 관심표명이 되긴 하겠지만, 심방을 가면 더욱더 어린이들이 감동받는다. 교사는 맡은 양들의 안부에 늘 관심을 가져야 한다. 십여년 전에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과 같이, 자기 반 어린이가 교통사고로 죽은 것도 모르고, 한 달이나 지난 후에 간신히 그 아이의 엄마에게 전화해서 ‘아이가 왜 안보이나요?’라고 물었던 선생님처럼 하면 안된다.
그런데 친구들을 찾아갈 때 가능하면 같은 반 친구들과 함께 찾아가면 그 효과는 훨씬 크다. 교사가 전도하는 모습과 심방하는 모습을 보여줘라. 평일 날에 어려우면, 토요일이나 주일 점심시간이나 오후시간을 활용할 수도 있다. 하려고만 하면 시간은 만들 수 있다. 그렇게 하면 결석자 어린이에게도 그리고 심방자 어린이에게도 마음에 깊이 새겨진다.
제가 초등학교 6학년 가을에 익산역에서 화약을 가득 실은 화물열차가 폭발한 사건이 있었다. 그로인해서 이재민들이 많이 생겼고, 정부에서 시 외각에 임시로 천막촌을 만들어서 이재민들을 거주하게 했었다. 그때 우리 가족도 이재민 천막촌에서 몇 개월을 지냈던 적이 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이재민 천막촌으로 들어오는 입구 도로가 너무나 많이 질퍽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주일학교를 빠졌는데, 그날 오후에 주일학교 담임선생님과 친구들이 그 먼 거리를 걸어서 그리고 무릎까지 차는 진흙 속을 뚫고 심방을 왔다. 치마정장을 입은 선생님이 다리와 옷은 진흙이 범벅을 했고, 친구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때 그 여선생님과 친구들을 잊을 수 없다.
넷째, 함께 기도하여 함께 성령충만을 받자. 아무리 성능좋은 전자제춤이라도 코드를 꽂아야 전기가 통한다. 기도는 전기코드를 꼽는 것과 같다. 교사는 전기가 아니고 예수님과 어린이를 연결시켜주는 전기코드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우리의 신앙생활의 모든 것이 그렇듯이 교육 역시 마찬가지로 어린이와 학생들을 가르치고, 양육하는 주체는 교사가 아니고 성령님이시다. 이것은 요한복음 14장 26절을 보면 명확하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
내가 가르친다고 생각하면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부담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성령님이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시고, 나는 연결선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또 실제로 그렇다.
그런데 이렇게 기도할 때 어린이들, 학생들도 함께 기도해야 한다. 기도해야 어린이들도 성령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다. 물론 기도시간에 장난치는 아들이 종종 있다. 그래도 볼 것은 다 본다. 어린아이들의 손을 잡고 진심어린 기도를 하면 그 진심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된다. 때로 반별로 특정한 시간을 정하고 함께 기도할 수도 있다. 이것을 진행하는 동안에 매일 문자나 통화를 하면서 전화심방을 겸할 수도 있다. 가능하면 직접 통화해서 목소리를 듣는 것이 좋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사 여러분, 본을 보이는 것은 좋은 교사가 가질 바람직한 자세이며 또한 좋은 교수방법이기도 하다. 좋은교사가 되려면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는 식의 권면들이 언뜻듣기에는 굉장히 귀찮고 잔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때로는 좀 더 자고 쉴 권리를 포기해야할 때도 있고, 심지어 자신의 재정도 은근히 들어가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좀 더 고생해서 어린양들이 주님을 더 깊이 만날 수 있다면, 내가 좀 더 자고 쉴 권리를 포기해서 주님이 영광받으실 수 있다면 무엇인들 못하겠는가? 우리는 교사다. 우리는 주님이 원하셔서 부르신 주님의 일꾼들이다.
그러므로 오늘 주신 말씀을 마음에 새기면서, 교사를 포함한 모든 주의 일꾼은 예수님을 배우고, 어린이와 학생들은 나를 통해서 예수님을 배우게 하자. 교사가 되되 거룩한 본을 보이는 좋은 교사가 되자. 그래서 어린 시절에 어린이들의 마음에 평생 지워지지 않는 십자가를 그려주자. 주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으니, 우리도 죽도록 충성하자. 그래서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받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자.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