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김용순 | 날짜 : 11-10-07 10:34 조회 : 1548 |
| | | 남쪽 포구 간간히 여우비가 내린다. 달구어진 지구가 리듬을 잃었는지 찬란한 5월은 이제 더는 봄이 아니다. 노동절에서 어린이날까지 이어진 연휴로 고속도로는 주차장이 되어있다. 중부를 거쳐 대진으로 올랐다. 함양, 산청을 지나면서 지리산에서 내려온 뽀얀 구름덩이가 도로에 내려앉기도, 빗물을 쏟아 붓기도 한다. 통영이 가까워지면서 비릿한 바다가 코끝으로 다가온다. 거제대교를 건너자 이정표는 나의 묵은 기억들을 들추어내지만, 차창 밖은 낮 설기만하여 짐작도 할 수 없다. 한참을 더 달려 ‘옥포’가 나타났고 '두모 사거리'라는 표지도 보였다. 당시 나는 지금 옆 자리에 앉아 있는, 아내를 만나러 주말이면 이 ‘두모’ 고개를 넘어 부산행 객선에 올랐다.
장승포를 떠나온 해는 1971년, 다시 찾는 데는 40년이 걸렸다. 기억 속에 머물던 장승포는 뒷산이 오목하게 포구를 감싸고 방파제 끝으로 하얀 등대가 항구를 지키는 작은 어항이다. 안바다는 맑고 잔잔하여 물고기들이 비늘을 번뜩거리며 뛰어오르는 게으름이 나도록 한가한 항구였다. 앞 바다에는 손에 닿을 듯 동백꽃에 덮여있는 작은 섬, 지심도가 동백향기를 보내온다. 초승달처럼 좁은 땅에 경찰서, 수협, 시장, 다방 등의 나지막한 건물들이 바다 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지금의 장승포는 나의 곰삭은 기억들을 쓸모없게 만들었다. 호텔, 객선 터미널, 아파트, 대형마트 등은 기억과 현실의 퍼즐을 맞출 수 없게 한다. 때때로 짧은 로맨스가 피었던 해안가 다방, 아가씨가 예뻐 늘상 들락거렸던 술집 함흥관, 교환원 L양이 근무했던 우체국, 싱싱한 생선들이 팔딱거리던 어판 장, 시장 통, 등등은 어디에 있었던지 가늠조차 하기 힘들다. 내가 살았던, 종묘장이 있던 자리에는 횟집과 모텔이 들어서 있다. 한 시절, 땀 흘리며 젊음을 구가했던 나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한가 할 때면 낚싯대를 드리웠던 방파제와 하얀 등대만이 그 자리를 지키면서 옛 친구를 반긴다. 40년 세월을 뛰어넘어 유일하게 현재와 연결시켜 줄 수 있을 ‘장승포식당’을 반신반의하며 찾아 보았다. 선배 K형이 이곳에서 미역양식과 종묘배양장을 하고 있었다. 그의 권유로 첫 직장인 수산과학원을 그만두고 배양장 관리를 맡아 여기로 내려왔다. 나도 양식 사업을 해보고 싶어서였다. 아침에 바닷물을 퍼 올려 환수(換水), 보충해주고 현미경으로 종묘의 생육(生育) 상태를 관찰하여 밝기를 조절해 준다. 오전 중이면 하루 일과가 거의 끝났다. K형의 친구이며 동업자였던, ‘기해’는 그의 어머니와 처가 해안 길에서 ‘장승포식당’을 하고 있었다. 나도 하루가 멀다고 드나들었다. 장승포식당,주방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는 60대 아주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아담한 체구, 중부지방 말씨 등, 긴 세월의 바다를 건너 그 모습을 읽을 수 있었다. ‘기해’와의 재회를 은근히 기대하며, “기해씨 계십니까?”하고 물었다. ‘돌아 가셨습니다.’라고 답한다. 이미 18년 전에 죽었다고 한다. ‘어떻게 아시느냐’는 물음이 되돌아온다. 순간, 짧은 충격이 스쳐가고, “옛날 미역종묘장에 있었던 사람”이라며 “기억나시느냐?”고 물었다. ‘갑자기라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하고는, 식사 후 계산대 앞에서는 기억이 났다고 하며 반가워한다. 우리는 한참동안, 40년 세월을 주고받았다. 그해 가을, 종묘배양은 성공이었다. 종묘장을 관리한 몫으로 종사(種絲) 3,000m를 받았다. 나는 그것을 전부 이곳에서 양식하기로 하였다. 인부들을 고용하여 두어 주일간의 육상 작업을 마친 후, 2만여 평방미터 넓이의 시설물을 바다에 설치하여 종사를 감는 작업까지 끝냈다. 매일같이 바다에 나가 양식장을 보수하는 등, 관리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미역이 점점 자라 바다 밑이 시꺼멓게 되어갔다. 음력설쯤 첫 출하를 기대하고 있었다.
설을 일주일 앞둔 날이었다. 오후부터 비바람이 거세어지면서 파도가 방파제를 넘기 시작하였다. 밤중에도 방파제를 때리는 파도소리와 양식장 걱정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어둠이 채 가시기도 전에 황급히 양식장으로 달려갔다. 아직 파도가 세차게 해변을 후려치며 몽돌 구르는 소리가 요란하였다. 그런데, 양식장이 보이지 않는다. 신기루처럼, 작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완벽하게 사라져 버렸다. 다음날, 그다음 날에도 어딘가 떠다닐 양식장을 찾아 인근 바다를 뒤지고 다녔으나 어디에도 없었다.
부산 집에서 설을 보낸 며칠 후, 물건을 찾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급히 내려가자, 장승포가 발칵 뒤집혔다고 하였다. 양식장이 제법 떨어진 마을인, '장목' 근처까지 떠내려갔다 한다. 그 마을 사람들이 배를 타고 나가, 엉킨 로프 밑에 매달려 있는 미역을 경쟁하듯 채취하여 갔고 이 소문을 듣게 된 K형이 경찰에 고발하였다했다. 십여 명을 경찰서에 붙들어 왔으나 가족들이 몰려와 울며불며 소동을 벌려, 어쩔 수 없이 풀어 주었다 한다. 내가 내려간 이후, 경찰에서 현지에 조사하러 가자고 하였으나, 새삼 차비, 식대 등의 비용이 들어야 했다. 배상 받기도 애매한 상황에서 비용까지 들일 수 없어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수산과학원을 그만두고 이곳으로 내려와 1년여 흘린 땀이 거품처럼 사라졌다. 이렇게 나의 첫 사업은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 실패는 내 인생의 많은 실패 중 첫 번째였을 뿐, 가장 작은 실패였다는 것을 훗날에야 알았다.
기해가 죽었다는 이야기, K형도 이혼하고 ‘동부면’ 어디에서 초라한 늙은이로 외롭게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추억 속에 머물던 사람과 풍경이 옛 모습 그대로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라진 옛 친구들과 낮 설어진 풍경은, 아련한 추억의 궤적들을 지워 버린 듯, 쓸쓸하였고 새삼 나 자신의 변화도 일깨워 주었다. 덧없이 흘려보낸 40년 세월은, 패기 넘치던 싱싱한 청년을 쓸모없는 늙은이로 만들어 버렸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 평범한 진리에 나도 예외 일수 없다는 사실이 초겨울 찬바람처럼 스산하게 다가왔다. |
| 강승택 | 11-10-07 19:23 | | 안개비처럼 가슴을 촉촉히 적시는 글 잘 읽었습니다. 그동안의 김선생님의 작품과는 또다른 분위기가 느껴지는 내용이어서 내심 놀랐습니다. 주변의 상황묘사가 소설적 기법이라해도 손색없겠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 |
| | 김용순 | 11-10-09 08:00 | |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의 이야기 입니다. 추억을 찾아 가 보았지만, 세월은 모든 것들을 가만이 두지 않았더군요. 추억은 현실이 아님을 새삼 확인하는 여행이었습니다. 추억이 변해가는 동안 나도 변하고 있었겠지요. 벌써부터 산정호수에서 들이킬 막걸리가 기대됩니다. | |
| | 박원명화 | 11-10-09 16:19 | | 가을의 과육들이 달콤하게 익어가는 것처럼 갈수록 글의 기법이 흥미로워집니다. 소설 같은 수필, 시 같은 수필이 그리운 계절, 선생님의 좋은 글에서 감성의 눈을 떠봅니다. | |
| | 김용순 | 11-10-10 08:41 | | 이제는 새로운 일들을 저지르지 못하니, 지나간 일들을 반추하며 살아 갈 수 밖에 없는 서글픈 현실이 되었습니다. 항상 불만족 한 저의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
| | 임병문 | 11-10-10 07:32 | | 추억은 역시 사람을 여리게 만드는 군요. 생성과 순환, 그 모든 것들이 아련히 떠오르는 것은, 오로지 세월 뒤에 오는 느낌, 먼 발치에서 보는 정서가 아니겠습니까.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
| | 김용순 | 11-10-10 08:49 | | 세상 모르고 객기를 부리던 시절의 이야기 입니다. 이제는 남아있는 객기가 하나도 없으니, 그것으로 슬퍼집니다. 남아 있는 시간 동안, 작은 추억이 또 만들어 지겠지요. | |
| | 최복희 | 11-10-16 21:27 | | 추억은 아름답다고 하나 곱씹을 수록 아타까운 추억도 있게 마련이지요. 꾸준히 신작을 창작하시는 열정에 큰 박수를 보냅니다. 좋은 글 잘 감상했습니다. | |
| | 김용순 | 11-10-17 19:26 | | 최복희 선생님 안녕하세요. 요즈음도 실버넷 뉴스 앵커로 바쁘시지요? 이제는 추억이 될만한 새로운 일을 만들기에는 너무 늦었습니다. 그러니 지나간 일들만 반추하게 됩니다. 서툰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
| | 임재문 | 11-11-15 20:15 | | 김용순 선생님 저도 고향에 가서 제가 어릴적 살던 집을 보면 흔적도 사라지고 없어서 세월앞에 인생무상을 깨닫고 오곤 합니다. 저도 이제는 직장도 정년 퇴임하고 아들도 결혼해서 분가했으니 이제야 말로 할일을 다 마쳤구나 생각하고 그냥 사심없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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