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철이 그렇게 나가버리고 경숙은 한동안 자리에 앉아 기철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지만 잠시 다녀온다던 기철은 돌아오지 않는다.
같이 먹자며 사 온 연시는 건드리지도 않고 그대로 상위에 있는데.
과일을 치우며 경숙은 자기 질문에 갑자기 당황하더니 이제는 정말, 가버렸는가 보다. 이상한 남자도 다 있다. 자기가 한 말은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느냐, 밤에 잠도 못 자게’라고 말한 것뿐인데, 그 물음이 그렇게도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인가 하고 자문해 본다.
나간 지 한 시간이 넘어도 안 돌아오는 기철을 혹시 하는 생각에 문밖으로 나와 여기저기 둘러보았지만, 기철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번에는 정말 떠나버린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하며 그런 이상한 남자에게 잠시나마 마음이 흔들렸던 자신을 꾸짖으며 집으로 돌아온 경숙은 마침 점심 손님이 와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어 가지고 나오다가 어느새 기철이 돌아와 테이블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엷은 놀람과 함께 기쁨이 일었다.
손님상에 음식을 차려주고 경숙이 기철에게 다가가자
“여기 매운탕 하나 주세요.”
하며 기철이 왼쪽 눈을 찡긋한다.
테이블에 앉아 있는 기철을 보고 경숙이 보인 모습에서 경숙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눈치챈 까닭이다.
경숙도 미소를 띠우며
“어디를 다녀오신 거예요?”
하고 묻는다.
경숙은 다녀오겠다며 나간 기철이 정말 어디를 다녀온 줄 믿는 모양이다.
“그럴 일이 있었어요. 나중에 다 말할게요.”
“사람 놀라게 하지 말아요.”
그 말을 하는 경숙도 그 말을 듣는 기철도 자기들 사이가 벌써 상대를 걱정하는 사이가 됐는가 하는 생각에 마주 보며 미소를 짓는다.
“알았어요. 주의할게요.”
기철의 마음에 따뜻함이 번진다.
경숙이 차려주는 점심을 먹고 생각 같아서는 경숙과 같이 바닷가나 설악산 같은 곳으로 다니며 구경을 하거나 시내를 다니며 쇼핑을 하고 맛있는 것도 같이 먹었으면 좋겠지만 경숙의 마음도 확실히 모르고 음식점을 하는 경숙이 쉽게 따라나설 것도 같지 않아 경숙에게 시내에 볼일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저녁때 오겠다고 하고 음식점을 나왔다.
그런 기철을 보며 자기에게 어디를 갔다 언제 돌아오겠다고 말을 하며 집을 나선 남자가 몇 년 만인가 하는 생각이 들고 공연히 가슴이 울렁거린다.
그렇게 기철이 나가고 난 후 오후 내 장사를 하면서도 시간이 안 간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 몇 번이나 시계를 보았다.
그러면서 늦게 난 바람이 무섭다더니 내가 그런 꼴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멋쩍어 혼자 실소를 지었다.
그렇게 기다리던 기철은 어둠이 내려서야 돌아왔다.
그것도 그 동네에서 자기와 친한 큰 오빠 같은 동네 아저씨와 함께
음식점을 나온 기철은 마땅히 갈 곳이 없다.
그렇다고 음식점에 할 일 없이 앉아 있을 수도 없어 시내에 볼일이 있다고 하고 나왔지만 마땅하게 갈 곳이 없어 서성이다가 불탄 뒤 어떻게 변했나 하는 궁금증에 버스 정류소에 가서 속초행 버스를 타고 가다가 낙산사에서 내렸다.
바닷가에 있는 오봉산에 세워진 낙산사는 작년(2005년) 4월에 강원도 양양에서 난 큰 산불에 전각이 모두 소실되고 바다 근처 절벽 위에 의상대만 원형대로 남아 있고 그 후에 시작한 복원공사도 겨울이라 중단된 상태여서 을쓰련스러워 나그네의 마음을 더욱 쓸쓸하게 만든다.
그것을 보며 어쩌다 국보인 문화재를 이렇게 태웠나. 저세상의 조상들이 못난 후손을 무엇이라고 할까?
하는 생각을 하며 기철은 조상에게 송구한 생각이 든다.
낙산사를 대강 둘러보고 나와 대포항으로 갔다.
대포항은 언제나 사람이 인산인해를 이루는 곳이다.
그 많은 사람들 뜸에 끼어 여러 가지 생선도 구경하고, 사지도 않으면서 흥정도 하여 보고, 또 시장 안쪽에서는 갓 잡아 온 생선을 배에서 내리며 경매가 되어 출하되는 것도 보고, 건어물 판매장에서 오징어, 북어, 마른 새우, 미역과 다시마, 김을 보고, 킹크랩의 험한 모습과 딱딱한 껍질에 또 대게의 긴 다리에 작은 관심도 보이며 시장을 한 바퀴 돌았다.
시장은 언제나 활기가 넘친다.
건설현장도 이렇게 활기 넘치는 곳이고 기철은 그런 활기를 좋아했었다.
생동감이 넘치고 무엇인가 일어나고 있는 것 같은 활기를
하지만 지금은 갈 곳이 없어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것이지 흥미가 전처럼 그렇게 나지는 않는다.
시장 한쪽에서 다른 사람들이 생선회를 맛있게 먹는 것을 보고 자기도 먹어 먹어볼까 하다가 어디 들어가 혼자 회를 먹는 것도 쑥스럽고 거북스러울 뿐만 아니라 또 궁상맞아 보일 것이라는 생각에 그만두었다.
그러면서도 어제 아침만 해도 자기가 이런 곳에서 와서 다른 사람이 생선회를 먹는 것을 보고 자기도 먹은 싶은 충동을 느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이 변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
사건이 있고 난 후 지금까지 혼자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 와볼 그런 기회도 없었지만, 기회가 있었더라도 피했을 터인데 지금은 혼자 이런 곳을 구경하고 있으며 잠깐 동안이지만 그 틈에서 생선회를 먹고 싶다는 충동을 받다니 큰 변화가 온 것이다.
공황 출국장에 북적거리는 많은 사람들을 보고 사고 때 기억을 떠올리고 환영을 보고 환청을 들었는데 여기 대포항에서는 그런 느낌이 전연 들지 않는다.
그래서 이것이 경숙과의 만남이 만들어 놓은 결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 그 짧은 만남이 만들어 놓은 결과에 자신이 스스로 놀란다.
시장을 한 바퀴 돌며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동안 날이 저물고 있었다.
강릉으로 내려가 경숙의 가게에서 저녁을 먹는 것이 편하고 좋을 것 같아 버스를 탔다.
경숙의 집으로 들어가는 어구에서 어제저녁 소주를 같이 한 어부를 만났다.
어부도 어디를 다녀오는 모양인지 옷을 말끔하게 차려입었다.
어부가 먼저 기철을 보고 아는 체를 한다.
“아니 이거 서울 손님 아닌가? 어디를 다녀오는가?”
“아 어르신 안녕하세요?”
“별일 없지. 자네는?”
“저도 별일 없습니다.”
“다행이네. 그런데 어제저녁은 어디서 잤나? 늦도록 기다려도 안 오더군.”
“볼일을 보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기다리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아니 그렇게까지 사과할 필요는 없어. 그냥 궁금해서 한 소리니까.”
“일을 보다가 늦어져 거기서 잤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며 기철은 어제 일을 들킨 것 같은 생각에 무안한 감이 들었다.
“그랬나? 어쨌든 어제는 자네가 네게 술을 샀으니 오늘은 내가 한잔 사지. 어떤가?”
“좋습니다.”
하고 기철은 활짝 웃었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타향에서 어부가 이렇게 친절히 대해주니 기철은 여간 고마운 것이 아니다.
어부가 따라오라며 기철을 데리고 간 곳은 경숙의 음식점이다.
“이곳이 어제저녁 자네가 물어본 곳이지. 자네 말처럼 외부에서 보면 허술한 음식점이라도 이 집에서 만드는 매운탕은 맛이 꽤 괜찮아서 이곳 동네 사람들이 매운탕을 먹고 싶을 때는 거의 이곳으로 오지.”
하고 어부가 소개를 한다.
“그렇습니까? 어제 저도 외부와는 달리 매운탕 맛이 괜찮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기철은 그렇게 대답을 하면서 속이 간지러웠다.
그 매운탕을 이미 세 번이나 먹어보지 않았는가? 술안주를 포함해서
경숙은 기철이 볼일이 있어 나갔다가 저녁에 온다는 말을 하고 나가고 나서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진 것같이 허전한 생각이 들어 잠시 멍하니 앉아 있다가 점심을 먹으려는 손님이 들어오는 바람에 정신을 차린다.
그 후로 이상하게 손님이 평소보다 많이 들어 바쁜 와중에도 시간이 안 가는 것 같아 몇 번을 시계에 눈을 돌렸었는데 그렇게 시간이 지나 저녁때가 다 되어도 기철이 오지 않아 정말 기철이 오기는 올 것인지 의문을 가지며 그래도 기대 때문에 문이 열릴 때마다 눈길을 주었지만, 기철은 나타나지 않는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기철이 오지 않을 모양이라는 생각이 커지며 섭섭한 생각에 속으로 이렇게 오지 않을 거면 나갈 때 오겠다는 말이나 하지 말지 오겠다고 해서 기다리게 한다고 기철을 원망하며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주방에서 저녁때 든 손님의 음식을 준비하던 경숙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밖을 내다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원망을 하며 기다리던 기철이 경숙이 동네에서 가장 친하게 지내며 큰오빠같이 의지하는 동네 아저씨와 같이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그 아저씨는 경숙이 강릉에 와서 자리 잡으며 알기 시작하여 남편이 있을 때에도 많은 도움을 받았고 남편이 죽었을 때에는 거의 정신을 잃은 경숙을 대신하여 장사를 맡아 치러주었으며 남편이 가버린 후에도 경숙이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의논하고 도움을 받는 경숙이 큰오빠처럼 생각하는 분이다.
경숙이 홀로 나가며
“아저씨! 어서 오세요. 안녕히 지내셨어요?”
하고 인사를 한다.
“응! 잘 있었나? 오늘은 내가 귀한 손님을 모시고 왔지.”
이렇게 인사를 받고는
“이분은 서울에서 오신 분인데 어제 점심때 자네 집에서 저녁을 먹었다더군. 그래서 오늘은 확실히 자네 솜씨를 보라고 데리고 왔어. 그러니 자네 음식 솜씨 좀 발휘해보게.”
하고 기철을 소개하며 빙그레 웃는다.
그 웃음 속에는 ‘어제 자네가 자네의 죽은 남편과 꼭 닮은 사람을 보고 마음이 어떠했으리라 짐작이 가네 그래서 내가 오늘 일부러 이 사람을 다시 데리고 왔네. 혹 그동안 쌓인 자네의 한이 조금이라도 풀릴까 하는 생각에’하는 말이 들어있는 것 같다.
어부의 말을 들으며 가볍게 묵례를 하는 두 사람은 자기들의 비밀이 탄로 날 것 같아 얼굴을 붉히며 잠시 엉켰던 서로의 시선을 어디에다 두어야 할지 난감해하다 경숙이 재빨리 주방으로 피하여 그 어색한 분위기를 면한다.
경숙이 주방으로 들어가고 기철을 데리고 홀에 자리를 잡은 어부가
“이 집 주인 여자는 내게는 막내 여동생 같다네. 처음 강릉에 와서 자리를 잡으면서부터 지금까지 아주 가까이 지내는 사이야. 참으로 참한 여잔데 인복이 없어. 남편은 일찍 죽고 자식도 없으니.”
어부의 끝부분의 말은 그녀의 박복함을 한하는 독백과 같다.
기철은 어제 어부에게서 경숙의 남편이 일찍 죽었다는 말은 들었지만, 자식이 없다는 말은 오늘 처음이다.
그녀를 만나고 지금까지 그녀에게 아이가 있는지 없는지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하긴 경숙에 대하여 알기 시작한 것이 어제저녁 때부터이니 그녀에 대하여 자세히 안다는 것이 무리이긴 하다.
방안에는 잠시 침묵이 흐른다.
경숙이 처지를 잘 아는 어부는 측은함으로, 경숙이 의지할 곳 없는 혼자라는 것을 안 기철은 모든 식구를 버리고 이곳으로 온 자기와 동질감 같은 것을 느끼며.
이런 생각을 하던 기철은 경숙이 들고 온 밥상을 보고 이상한 생각을 한다.
밥상에는 소주가 두 병 같이 들어온 것이다.
첫댓글 즐감하고 감니다
즐~~~~감!
지키미님!
무혈님!
감사합니다. 끊임없는 성원에
더위가 한 풀 꺾긴 것 같지만 그래도 낮에는 찜통이네요
10일 만 참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