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2년 4월, 초기 파수대의 출판자들은 자신들이 1세기 회중의 ´원시 그리스도인의 소박함´으로 돌아오겠다는 선언을 하였으며 그 조직은 성령이 충만하며, 그 법은 사랑이며 그 다스림은 오직"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신 분의 뜻을 따르는 것이었다. 그들의 연합은 조직의 결속력이나 인간적 유대의 기준이 아니라 "사랑과 공동의 유익"에 의한 것이었다 라고 파수대는 기술하였다. 이듬해인 1882년 4월, 그들은 다시 한 번, 강제적으로 지켜야 하고, 주어진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누구라도 신자에서 제외시키게 하는 신조라는 울타리의 경계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 당시에 일반 교회와 그들을 구별시켜주는 특별한 명칭이 없었고, 자신들을 단지 "성서 연구생"이라고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마치 법과 정부가 있는 것처럼 하나의 사회처럼 조직화되었고 구성원들은 결속되어, 결과적으로 통치 권위로의 머리직분을 인정하였으나, 그들을 연결시켜주는 것은 결코 조직적 권위가 아니라, 공통적 관심사와 사랑을 통한 결속이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자유롭게 스스로 자신의 교리(신념)을 규정하고, 종파적 편견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한다면, 진리와 지식과 참 그리스도인 관계로 연합이 이루어질 것이다.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영이 구속받지 않는 몸의 지체들에게 지시할 것이며, 분파적 우월주의는 사라질 것이다. 우리의 조직이 영의 조직임을 인정하고, 그 영을 보거나 이해할 수 없는 세상적인 것에 흡수되기를 원치 않는다면, 우리는 기꺼이 특별한 사람들의 접근방식을 나타내고자 할 것이다. 우리는 항상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이름으로 불리우는 것을 거부한다. 즉, 그리스도인 이외의 이름을 거부한다. 이 변함없는 사실은, 그분의 말씀을 통하여 알게된 그분의 영과 모범으로 끊임없이 인도되는 사람들 사이에 분열은 있을 수 없다"라는 내용의 설교가 있었다. 강력한 가시적 조직이 바람직하다는 견해는, 수적 성장을 추구하는 ´본능적 인간´의 전형적으로 육적인 사고의 산물로 생각되었으며, 이러한 육적 사고의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이름을 가진 가시적 조직이 만들어낼 수 있는 힘을 동경한다. 그것은 "일단의 사람들이 보이는 조직 없이, 어떤 것을 어떻게 성취할 것인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전형적 비영적인 사람들이기도 했다. 연구생들이 속한 유일한 조직은 "세상에서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조직이었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했다. 어떤 조직력의 과시, 효율성, 힘 그리고 재산과 건물의 소유로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 위해 "외형적으로 관찰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조직의 단결 보다는 영의 단결이 선언된 목표였다. 연구생들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속한 보이는 조직과 더불어 기성 종교로부터 자유로워지도록 고무하였다. 그래서 자신들이 이런 일을 먼저 스스로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하라고 권유할 수 있겠냐고 말했다. 바로 이러한 점들이 초기 설명, 초기 입장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놀랄만한 변화가 일어나, 오늘날 증인들의 사고를 지배하는 조직의 입장을 거의 완전히 반전시켰을까? 1980년대에 33년 동안 순회 감독자로서 증인이었던 론 프리에(Ron Frier)가 워치타워 협회가 제공하는 가르침에 대한 권위에 대해 수년 간을 "고뇌"하며 그 근거를 집중 연구했다. 과거와 현재를 대조비교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1979년 3월 1일 파수대에서는 "여호와의 승리의 조직에 대한 믿음"이라는 글에서 신권조직이라는 표현이 처음 11항에만 15번 등장한다.4 최면을 거는 듯한 이런 종류의 반복적 표현을 협회가 끊임없이 이용하여 여호와의 증인이라면 협회가 진리로 발표한 것은 어떤 것이든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믿음의 부족으로 생각하도록 조종하고 있다. 조직에 대한 오늘날의 이러한 태도와는 달리 러셀과 그의 초기 동료들은 사실 지상 조직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 . . 지상 조직에 대한 그들의 인식이 100년 전과 오늘날이 크게 다른 것처럼, 러셀에 대한 그들의 시각도 오늘날과 처음의 시각과는 크게 다르다. 때때로 그에 대한 간단히 언급하는 외에는 러셀 행적의 대부분은 현대의 여호와의 증인들에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쓴 내용의 글은 더 이상 독서를 권하지 않으며, 그의 사비로 설립한 바로 그 출판사에서 그 많던 그의 책은 더 이상 한권도 출판되지 않는다. 파수대가 러셀의 독자적인 잡지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는 일찍이 자신을 ´하나님의 대변자´ ´진실을 밝히는 대리인´이라고 지칭한 바 있다. 1923년 3월 1일 파수대는 러셀이 어떤 이들은 자신을 "충실하고 지혜로운 종"이라고 말한 것과 또 어떤 이들은 협회를 "충실하고 지혜로운 종"이라고 말한 것으로 인용했다. 그것은, 그가 지상의 어떤 다른 사람의 간섭 없이 협회의 정책과 진로를 지시했다는 점에서, 협회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는 "온유함"과 "겸허함"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그와 그의 잡지를 하나님의 유일한 통로로 보는 것을 비성서적으로 여기는 사람들을 "불충실한 ´동료 종들´" 자만의 영을 가진"교활함"으로 묘사하는 동시에, "광기, 사탄 수족 공포증"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탄의 수족 공포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묘사했다. 그의 워치타워 협회와 끝내 제휴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채로 걸러진 사람들´로 묘사된다. 그는 "눈이 먼 장님 같은 사람들에게 불친절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 이 반대자들은 "주님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이 필요한 도움을 받을 만한 가치가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이 유혹의 시간에 적의 화살에 맞아 쓰러지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분명히, 그의 마음속에서 ´유능함, 겸손함, 교육감´을 보여주는 사람들 가운데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단지 하나의 특별한 ´종´, ´하나의 특별한 통로´를 선택했다는 겸손한 인식과 그 ´종´의 간행물에 대해 온유하게 수용하는 태도가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다른 모든 지식의 원천보다 의심할 여지없이 우월하다는 것을 필요로 했다. 그 글을 읽으면서 나는 아무리 종교적으로 지향한다 할지라도 인간의 마음속에서 전개될 수 있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뒤틀린 추리에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한 개인이 자신과 자신의 글에 대해 그렇게 극도의 찬사를 쓰고, 그 글들에 그토록 거대하고 결정적이며 중대한 중요성을 부여하며, 그 글들에 자신이 특별하고, 유일무이하며, 전에 볼 수 없었던 그리고 결코 번복되지 않는 하나님의 대리자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그리고 나서 이것을 의심하는 자들에게 온유함과 겸손과 교훈의 부족을 책망할 수 있는가? 나는 그것을 정신질환의 한 형태, 즉 개인적 중요성과 힘의 분위기가 발달하는 곳이면 어디서든 번식하는 자기중심주의의 세균으로부터 오는 감염으로 본다. 라이트 풋의 말에 따르면, 3세기에 이르러 주교는 "거룩한 은총의 없어서는 안 될 통로"가 되었다. 고 한다. 이 말은 살펴 본 사례에서 하나님의 메시지와 지시에 대해, 계시 받은 ´특별한 하나의 통로´로 자신을 내세우는 사람과 비교할 때 둘 사이에 평행점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인간의 중요성을 높이고, 암묵적으로, 인간의 권위를 높이는 수세기 전의 패턴이 다시 한번 표면화되고 있었다. 럿셀이 죽고 러더포드가 2대 협회장이 되었을 때 그는 럿셀처럼 과점주주도 아니었고(과점주주란 법인의 지분 과반을 차지한 주주를 일컬음) 창시자도 아니었으므로 초기의 그의 권위는 아무래도 럿셀만큼 인정받지는 못했다. 따라서 그가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서 이사진 다수를 해임시켰으며, 연대 강조를 통해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을 적대자로 내몰았다. 그는 럿셀과 달리 조직을 정비하고 강화하기 시작했다. 조직이 국가로 말하자면 군대와 같은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생각이 작용했고 또 육적인 사고로는 매우 당연한 생각이기도 했다 덕분에 조직이 강화되면서 동시에 민주적 선출의 장로회를 폐기시켰다 이 또한 중앙집권적 권위를 약화시키는 역활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조직을 곧 하나님의 대변인으로 내세웠으며 조직의 모든 방침은 마치 하나님이 직접 지시하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표현하였다. 다만 영국스콧틀랜드의 월시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조직과 다른 해석을 표명한다 할지라도 심하게 제명을 하는데까지는 이르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러더포드가 죽은 후 월시 사건으로 말미암아 협회의 대표 3명(프랜즈, 코빙턴, 수이터)은 목적의 달성을 위해 과거를 색칠했으며 조직과 다른 해석을 내릴 경우 제명이 될 수 있다는 입장을 법정에서 제시하였다. 1941년 세인트루이스 대회에서, ´성경에 언급되는 고대의 군왕들이 부활되어 곧 그들과 함께 할 것´이라는 러더포드 판사의 말을 듣고 그때까지 결혼을 미룬 10대와 10대 초반의 증인들은 이제 20대 중반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전후(戰後)의 번영과 관용이 증대되는 시대가 진행되고 있었다. 아마겟돈이 매우 가까왔다는 임박감에 대한 흥분되는 추측을 자극했던 끔찍한 설명들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특정한 현대적 연대와 시기에 예언을 적용하여 해석하는 다른 많은 개신교 신흥 단체들과 마찬가지로, 워치타워 조직의 모든 역사는 그 주장이 맞아 들어가는 것처럼 느끼도록 세계 상황과 관련된 해석의 입장을 보여주었다. 세상의 모든 불안한 뉴스는 증인들의 기대를 자극하는 수단으로 작용했으며, 그들에게 긴박감을 조성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 이어 평화시대가 도래하자, 어떤 소식으로도 전쟁 중 극적 상황에 비견할 만한 긴박감을 제공하지는 못했다. 여호와의 증인들 사이에서 다소 열의가 식어가는 분위기 속에서 이제 워치타워의 주장과 가르침의 일부가 옳지 않음을 의심하는 경향을 가진 사람들이 이에 대한 문제점을 다루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1952년 2월 1일 파수대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등장했다.(79, 80쪽): 우리는 주의 신권조직과 함께 온유하게 걸어야 하며, 자신의 생각을 종이 마련한 영적 음식보다 더 가치있는 것으로 내 세우거나 종이 마련한 양식을 탐탁치 않는 생각으로 비하시키기보다는 더 나은 이해가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신권질서를 존중하는 자라면 주의 보이는 조직에 대해 감사해야 하고 어리석게도 여호와의 통로를 거절하고 자신의 인간적 추리와 개인적 감정을 앞세우지 않을 것입니다. 조직은, 파수대 독자들에게 효과면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제외한 다른 어떤 근원보다도 오류가 없는 가르침의 통로로 묘사되고 있다. 그들의 오류를 지적하는 것은 그들이 "어머니"와 같은 조직보다 "더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겸손함이 결여된 교만을 드러내는 것으로 간주된다. 30년 넘도록 러더포드가 그토록 온 힘을 기울여 발전시켜 온 중앙집권적 권위에 의한 인간의 권위를 강조하는 과정과 인간통제력의 강화는 그의 계승자들에 의해 훨씬 더 큰 힘을 발휘하여 수행되었다. 그들의 언어는 워치타워 협회장직의 전형적 어투인 무뚝뚝하고 심지어 공공연히 독재적인 표현을 넘어설 정도로 구사되었다. 이러한 표현은 워치타워 출판물에서 자주 나타나므로 아무런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서 증인들의 마음은 "조직"이라는 용어를 브루클린에 기반을 둔 권위 구조와 거의 자동적으로 연관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의미의 ´조직´이라는 용어는 ´교회´라는 말이 사도시대 후에 습득되어진 것과 같은 병행적의미를 갖는다. 조직에 대한 증인들의 의존성은 1967년 10월 1일 파수대에서 잘 논의된 바 있는데, 이 파수대는 성경을 조직의 책으로 선포하였다(587, 590쪽): "이 땅에서 유일한 조직만이 ´하나님의 깊은 생각´을 이해하게 된다 !" 이어서 조직이 어떻게 예수그리스도만이 가지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중재자적 위치에 오르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특히 통치체 성원 칼 클라인의 고백과 베드로의 고백을 비교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 외에 생명의 말씀이 없으니 누구에게 가오리까? 라는 질문과 유사하게 칼 클라인은 워치타워 조직 외에는 생명이 말씀이 없다는 것을 고백함으로써 조직을 예수 그리스도의 지위를 찬탈하고 중재자적 위치에 오르게 한다. 워치타워를 탈퇴한 일부 사람들은 장로들의 조사와 ´심문´을 받는 것에 반대하면서, 그들이 침례를 받은 시기인 1985년 이전에는 ´조직에 헌신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헌신했다´고 지적해왔다. 지금 사용되고 있는 바뀐 질문들은 ´헌신과 침례´가, 침례 지망자에게 ´하나님의 영이 인도하는 조직과 관련된 신분으로서의 여호와의 증인의 한 사람임을 확인시키고 있음을 분명히 알려준다. 이것은 그가 이 조직의 통제와 사법 모임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떠한 "법적" 권리도 박탈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침례의 역사는 럿셀의 때에 두가지 요건을 만족하면 되었다 1 헌신의 상징이었는가? 2 물에 잠기었는가? 시간이 흐르면서 조직 밖 침례는 큰 바벨론이라는 이유로 무시되었고 재침례를 받아야 했는데 침례의 요건은 1 죄의 회개와 2 하나님께 대한 헌신이었다. 조금 지나자 2의 의미가 이제는 조직에 대한 헌신으로 바뀌었고 만일 조직에 대한 헌신의 약속을 어길 경우 제명 조치를 취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워치타워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조직이 과거의 기독교국의 역사 패턴 전체를 완성하는 데는 백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비교적 짧은 그 시간 안에 독자적인 시행을 통하여 합리적으로 온유하고 겸손하며 관대한 자세의 조직에서 "진실로 위대한 조직"이라고 믿는 추종자들의 마음에 조직적으로 발전된 전통적 가르침과 공식적인 신조로 바뀌었다. 조직은 형제이자 그리스도 휘하의 보편적인 제사장직의 일반 구성원으로서의 상대적 자유를 누리는 상황에서, 사도적 권위로서뿐만 아니라 중앙집권화된 통제와 권력을 가진 종교적 지도자들로 바뀌었다. 이것은 사도들이 다른 사람의 믿음을 통제하는 주인으로서가 아니라 그들의 기쁨을 위해 일하는 동료로서 인식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며 그들이 죽은 후 일어난 과거 역사를 되풀이 하는 것이었다. <양심의 위기>에서 말했듯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은 워치타워 조직에 부여된 신성하게 서열화된 배타적 권위의 개념에 있으며, 그러한 권위의 행사만이 통일과 질서와 생산성을 달성할 수 있다는 생각에 있다. 하나님과 워치타워 조직이 같다는 등식을 주장하는 증인들이 상당히 눈에 띄고, 이 사실은 대부분의 성원들이 인지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이 뇌리에 박혀있다. 나는 모든 증인들이 이 등식을 인정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아는 증인들, 심지어 몇몇 탁월한 위치에 있는 증인들조차도, 스스로 높여진 조직의 주장에 전적 신뢰는 하지 않는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 등식을 피하기 위해서는 발표된 진술에 대하여 그들의 마음에 지속적인 "편집"이 필요하다는 것을 확신하며, 실제로 그들이 말하는 것과 다른 것을 말하도록 조정하기 위해 극단적인 진술들을 정신적으로 재구성하고 개조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절대적인 복종과 충성을 요구하는 지도부의 요구에 수동적으로 인정해야 하는 이유를 마음 속으로 끊임없이 합리화를 계속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과 더불어, 그들은 그들의 실제 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알게 하기 위해 계속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아님은 너무도 분명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