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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어느 어리석은 사람이 달마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성(性)과 깨달음
속인은 처자가 있어 음욕을 제除하지 못하거니 어떻게 성불합니까?
나는 마누라가 있어서 음욕을 없애지 못하니 어떻게 부처가 됩니까?
애초에 하느님은 우리 몸에 필요 없는 것은 만들어 보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의학적으로 맹장이 별로 소용이 없다고 알고 있지만, 한의학적으로 보면 맹장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중에 맹장수술을 아직 안한 사람이 있으면 미리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 것이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배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맹장염에 걸리면 어떡합니까? 또, 비행기 타고 가다가 맹장염에 걸리면 어떡합니까?
그래서 정말 그렇게 비행기 안에서 맹장염 걸려서 갑자기 대굴대굴 구를 사람이라면, 어느 날 갑자기 버스 안에서 죽거나, 또는 지하철 공사하는 데 빠져서 죽을 수도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그런 것까지 걱정해서야 어떻게 삽니까? 맹장이 있으나마나라면, 그저 맹장염 걸릴 때 그때 가서 맹장을 수술하면 됩니다. 그것을 일부러 미리 자르는 사람은 나중에 죽어서 목이 잘릴까봐 일부러 목에다 쇠로 기브스하고 다니는 사람하고 똑같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많이 하기 때문에, 이런 생각들이 사람을 이상하게 병자로 만들어서 별 우환을 다 떨게 됩니다.
그래서 달마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단지 견성을 말하고 음욕은 말하지 않는다. 견성만 하면 음욕은 원래가 공적하여 끊을 필요가 없고 탐착한 것도 아니다. 남은 습기가 있더라도 해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본성이 청정한 까닭이다.
여러분이 마음의 자성을 터득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감정도, 욕심도, 생각도 삶의 작용이기 때문에 다 일어납니다. 결국 자성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다 일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만, 일부러 그것을 일으키느냐 일으키지 않느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인 것이지, 사실은 일으켜도 그만 안 일으켜도 그만입니다.
단지 견성을 말하고 음욕은 말하지 않는다. 견성만 하면 음욕은 원래가 공적하여 끊을 필요가 없고 탐착한 것도 아니다.
내가 너의 자성을 밝혔느냐만 말하고 음욕은 말하지 않는다. 음욕이라는 것은 원래 없는 것이지만, 사람이 필요에 의해서 사랑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쓸 수가 있는 것이다.
사람은 보통 누군가가 사랑스럽거나 측은하거나 추워 보이면 끌어안아 주고도 싶은 것입니다. 그것은 자연의 에너지 자체가 저절로 사람의 몸을 끌고 가서 그 누군가를 따뜻하게 해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마음이 추운 사람들에게 따뜻한 히터를 틀어 준다고 해서 그들의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에너지라야 사람의 마음을 녹여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의 에너지는 딱 끊어지고 거기에다가 히터를 켜 놓게 되면 매우 우스운 짓이 되어 버립니다.
원래 자연의 따뜻한 사랑이 사람을 통해서 사람에게 전달되는 데 있어, 그것이 섹스가 됐든 뭐가 됐든 표현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지 자성을 깨닫고 나면, 원래 음욕 그 자체는 공적한 것이라 끊을 필요도 없고, 또 탐착한 것도 아니다. 그런 것에 상관이 없는 것이다.
깨닫고 나면 가만히 앉아 있어야 됩니까?
깨닫고 나서는 엎어져도 되고, 요가를 하면서 몸을 꽈배기처럼 꽈도 되고, 나무 위에 올라가서 둥지를 틀고 앉아도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옛날에 누군가가 달마에게 물었습니다.
살생과 깨달음
백정은 살생을 하는데 어떻게 부처가 됩니까?
견성만 말하고 업을 짓는 것은 말하지 않는다. 비록 업을 지어도 어리석은 사람과는 같지 않아 일체 업이 그를 구속하지 못한다. 단지 견성을 하지 못하므로 지옥 가운데 떨어진다. 업을 지어 생사에 윤회하지만, 본성을 깨달으면 마침내 업을 짓지 않는다.
아까 달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은 습기가 있더라도 해가 되지 않는다.라고. 여러분이 자성을 밝혀서 견성을 얻고 난 뒤에, 사실 가장 어려운 것이 바로 습기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 전의 어려움은 진정한 어려움이 아닙니다. 그것은 못내 아쉬워서 어려운 것이지 결코 어려워서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저 헤어지기 싫어서, 마치 떠나가는 이수일의 바지를 붙잡고 늘어지는 심순애처럼 나는 죽어도 너한테 달라붙어야 된다. 하는 식의 욕심을 부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 욕심 안에서 살다가 이제 자기의 본성을 깨닫게 되면 그런 짓은 안 합니다.
어떤 사람은 또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헤어질까 두려워 사랑하지 않겠습니다.
이런 사람은 사랑을 터득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나는 습진이 날까봐 두려워 키스하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말하는 사람과 똑같습니다. 그런 사람은 나중에 히스테리에 걸려서 스스로 발광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그저 풀어 줘야 합니다. 그런데 왜 사랑을 풀지 않느냐 하면 계산을 해서 그렇습니다. 사랑을 하는 데 있어 그렇게 손익계산서를 쓰게 되면, 그것이 바로 업을 짓는 것입니다.
원래 끊임없이 흐르는 생명 에너지는 항상 무한한 것이지만, 어느 틈바구니에 스스로 자꾸 매듭지어 매달리게 되면 스트레스가 쌓이게 되는 법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자성을 발견하게 되면, 비록 아직도 남은 습기가 있어서, 그 습기에 의해서 자꾸 일을 벌이게 되더라도 자신이 뻔히 살펴보면서 벌이게 됩니다. 그렇게 마음이 떨어져서 일을 벌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서 여러분이 잘못을 저지를지라도 계속해서 반복하다 보면 습기도 차차 없어지게 됩니다.
청명한 거울의 본성은 그림자에 물들지 않는다
습기가 있다 해도 일단 견성만 하면 해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본성이 원래 청정한 까닭이다. 견성만 말하고 업을 짓는 것은 말하지 않는다.
선생님, 나는 옛날에 실수로 사람을 하나 죽였습니다. 제가 깨달을 수 있습니까?
사실, 깨달음은 살생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사람을 죽인 사람은 아예 나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나에게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심성이 착한 사람입니다. 착하지 않은 사람은 깨달으려고 안 합니다. 이런 말 하니까 또 그러면 깨달으려고 하는 사람은 심성이 다 착한 사람입니까?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 중에는 깨달음이라는 것이 무슨 벼슬인 것처럼 생각하고, 나한테 와서 누가 더 도가 깊은지 비교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벌써 이렇게 비교하고 다니는 사람은 깨닫지 못한 사람입니다. 깨달은 사람은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주와 하나가 되었는데, 그 안에 낫이 있든지 호미가 있든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나는 내 스스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어쩌다 재수가 없어서 깨달았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어떡하든 재수의 극치로 깨달으려고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은 재가 수없이 쏟아져서 잿더미 속에 파묻힐 사람들입니다.(웃음)
견성을 말하고 업을 짓는 것은 말하지 않는다.
여러분이 깨달으려고 마음먹고 하는 것은, 도리어 업을 짓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나한테 와서 깨달음을 견주어 보려고 하는 사람은 업을 짓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은 깨달을 사람도 못 됩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지옥 가운데로 떨어질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지옥 한 가운데로 깊숙이 떨어져 내려가면서도 야호, 브라보! 하고 떨어져 죽을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업을 지어 생사에 윤회하지만, 본성을 깨달으면 마침내 업을 짓지 않는다.
본성을 깨닫고 난 다음에는 무슨 짓을 하든 그것은 업에 상관되는 일이 아니다.
일단 부처님이 하는 일은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무조건 다 잘 하는 일이지 못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깨닫지도 못한 주제에 나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다 해도 된다. 하는 사람들은 업을 지어서, 나중에 죽어도 그 업을 계속 하느라고 8천6백5십4만3천2백6십5 겁을 헤매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육조와 달마 그리고 예수까지도 그렇게 말을 하니까,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에게 물었습니다.
생각은 본성이 사용하는 소중한 도구
옛날에 육조가 말했습니다.
도를 배우는 사람은 모든 착한 생각과 악한 생각을 응당 다 없앨 것이다. 이름을 가히 이름 할 것이 없이 자성에 이름 한 것이니, 둘 아닌 성품의 이 이름이 실성實性이며, 실성 위에 일체 교문敎門을 세운 것이니, 말씀 아래 문득 스스로 볼 것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은 모든 착한 생각과 악한 생각을 응당 다 없앨 것이다.
여러분이 지금 생각하고 있는 그 생각은 여러분 자신의 생각일 뿐입니다.
아닌데요, 선생님! 옆의 내 짝도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아닙니다. 그것은 비슷한 생각을 두 사람이 하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내가 가진 볼펜이 모나미 회사에서 나온 볼펜이고, 이 사람이 가진 볼펜도 모나미 회사에서 나온 볼펜이라도, 그 둘은 똑같은 볼펜이 아닙니다. 내 볼펜은 내 볼펜이고, 이 사람 볼펜은 이 사람 볼펜입니다. 같은 상표, 같은 재료, 같은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내 것은 내 것이고 저 사람 것은 저 사람 것입니다. 그렇듯이 여러분이 지금 착한 생각을 하건, 악한 생각을 하건, 그 생각은 전부 다 여러분 자신의 생각입니다. 그 생각은 마음의 본성이 아니고, 마음의 본성에 의해서 일어난 그림자입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응당 다 없앨 것이다. 즉, 결국 전부 다 없애 버려라 하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이렇게 느꼈는데요.라는 것은 여러분 개인의 사정일 뿐 입니다. 그것은 본성이 아닙니다. 때문에 여러분이 그렇게 자기 생각에만 빠지게 되면, 공자와 같이 미련하게 50년을 방황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남들에 대해서도 어떻다, 어떻다 하면서 얘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 새끼는 도둑놈이라 나쁜 놈의 새낍니다.
이렇게 말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여러분도 조금씩은 다 도둑질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디 가서 잘못해서 거스름돈이라도 더 받으면 일부러 차비를 더 들여서 갖다 줍니다. 저쪽에서는 그 돈을 가지고 따지지도 않는데, 자기 혼자서 그러기를 잘 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착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 생각에 묶인 병신이고 죄인입니다.
이름을 가히 이름 할 것이 없이 자성에 이름 한 것이니,
착한 생각, 나쁜 생각, 좋은 그림, 나쁜 그림 할 것 없이, 거울에 무슨 그림자가 나타나든지 그것이 일어날 수 있는 바탕 그 자체에 이름 한 것이니,
둘 아닌 성품의 이 이름이 실성實性이며
그림자와 거울 이렇게 둘 아닌 성품, 거울 하면, 거울 안에 그림자는 당연히 있어야 되는 것이고, 거울은 당연히 유리이며. 여러분 마음에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것과 또 그 본성, 이 두 개가 같이 실성이며,
실성 위에 일체 교문敎門을 세운 것이니, 말씀 아래 문득 스스로 볼 것이다.
그 실성을 통해서 지금 내가 여러분에게 가르침이라는 것을 펴고 있는 것이니, 여러분은 이런 말씀을 다시 그림자로 받아들이지 않아야 자신의 거울, 즉 자성을 문득 스스로 볼 것이다.
온 세상을 태우는 깨달음의 불
가장 어렵고 가장 까다롭게 말하는, 가장 늙은 사나이 노자가 말했습니다.
장작은 다 피는 것을 볼 수 있지만, 불이 전하는 바는 다함이 없는 것이다.
언젠가는 나도 죽을 것입니다.
아니, 선생님은 영생을 얻었다면서요? 영생을 얻으면 영원히 안 죽는 것 아닌가요?
내가 아까도 말했지만, 진정한 영생은 이런 몸뚱어리가 영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소공자이지 소팽조가 아닙니다. 또 여러분은 소공자의 제자이지 소팽조의 제자가 아닙니다. 물론 여러분이 소공자의 제자로서 나는 팔백 년 사는 장난을 해 봐야 되겠다. 하고 접이불루接而不漏를 터득한다면 팔백 년을 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죽은 뒤에 여러분이 내 무덤을 만들어서 팔백 년 동안 열심히 닦고 쓸고 해도 나는 물론 나무라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 팔백 년 동안 살아서 팔백 년 후까지 우리 소공자 초험센타의 수위 노릇을 해서 수위로서 오랜 경륜을 쌓는 것도 아마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팔백 년을 살았다 해도 결국 여러분의 육신은 죽게 됩니다.
장작은 다 피는 것을 볼 수 있지만
자연으로부터 만들어진 모든 피조물은 언젠가 소멸되어 끝나는 것을 볼 수 있지만,
불이 전하는 바는 다함이 없는 것이다.
그 안에 자연 그 자체의 생명력을 터득한 불은 다함이 없는 것이다. 장작은 다 꺼져서 사라지더라도 그 옆에 옮겨 붙고 옮겨 붙는 화력은 다함이 없는 것이다.
비록 나는 죽을 것이지만 나의 가르침은 불이 전해지듯이 그렇게 퍼져 나갈 것입니다. 그것은 꺼지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단지 지금 여러분을 향해서 말을 하고 있지만, 내 불은 우리의 세계 안으로, 인류 사회 안으로 은연중에 지금 퍼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깨달음을 가로막는 벽
공자가 말했습니다.
무릇 도란 섞이는 것을 꺼린다. 섞이면 많고, 많으면 어지럽고, 어지러우면 걱정이 생기는 것이니, 걱정이 생기는 데 이르면 다시는 구해낼 수 없게 되느니.
보통 우리 사람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도가 아닙니다. 우리 사람들의 마음은 섞입니다. 사실은 섞이지도 않으면서 섞인 것 같은 착각을 합니다.
사람들이 결혼할 때 보면 주례하는 사람이 부부는 일심동체가 돼야 한다.라는 말을 자주 들려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부부 사이만큼 많이 싸우는 경우도 드뭅니다. 차라리 남남지간이면 어쩌다 지나가다가 서로 부딪혔든가 했을 때 한 번 싸울 것입니다. 그러나 부부는 하루에 한 번씩은 꼭 싸웁니다. 그것은 일심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뭐 먹으러 가자 그러면, 나는 양식 먹겠다., 나는 한식 먹겠다. 하면서 밤낮 싸웁니다.
그렇게 우리의 정情은 일심이 될 수가 없습니다. 정을 떠난 마음, 즉 청정한 자성만이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도입니다.
여러분이 나는 무엇을 하겠습니다, 선생님! 하면서 강한 의지력을 보이는 마음은 곧 꺼져 버릴 마음입니다. 그것도 역시 정에서 나온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장자는 또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성인聖人은 사람의 형체를 가졌으되, 사람의 정은 가지지 않았다.
사람의 형체를 하고 있으므로 사람과 더불어 살지만, 사람의 정은 가지지 않았으므로 옳고 그름이라는 마음의 판단에 집착하지 않는다.
만약 누가 나에게 나쁜 짓을 하려고 하면, 나는 그런 나쁜 일이 나에게 벌어지지 않게만 조심합니다. 저 새끼 나쁜 새끼다.라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하늘로부터 죄를 지어서 그런 나쁜 짓을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느님도 참 심심하시지, 저런 걸 다 만들어 놓으셨다니! 하면서 웃을 뿐이지, 기분 나쁘다고 해서 송곳으로 찔러 버린다든가 하는 짓은 결코 하지 않습니다.(웃음)
욕망을 떠난 자가 얻는 욕망의 완성
예수가 말했습니다.
많은 돈을 가진 한 부자가 있었다. 그가 말했다. 나는 뿌리고 수확하고 심는 데 나의 돈을 써서, 열매로 나의 창고를 가득 채워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게 하겠다. 그렇게 그는 그의 마음속에 생각했다. 그러나 그날 밤 그는 죽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사람이 인간적인 마음을 갖고 인간적인 욕심을 통해서 아무리 자기 욕심껏 욕망을 채운다고 하더라도, 바로 그 사람이 그날 밤 죽어 버리면 그게 전부 다 아무 소용없는 짓이다.
여러분이 부푼 꿈을 안고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하면서 별 오만 가지 생각을 다 하고, 나는 요번에 뭘 하고 뭘 해야지. 하고서 잔뜩 욕망을 부리다가 그 다음 날 죽어 버리면 결국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하지만 옛날에 예수나 석가, 그리고 노자와 같은 깨달은 사람은 비록 지금은 다 죽고 없지만, 그들의 혼은 아직도 살아서 그 불씨가 꺼지지 않고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죽으면, 앞에서도 애기했지만, 산 사람의 밥이 되어서 그 사람 사는 데 도와주는 고기 덮밥과 같은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돈도 벌지 말고 그냥 아무 욕심 없이 가난하게 되는 대로 살아가면 되는가?
우리도 이 시대에 맞게끔 벌 만큼은 벌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도 잘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자신이 잘되려고 여기저기 자꾸 다니지 말고, 어느 한 곳에서나마 잘될 수 있도록 여러분들의 생명력을 쏟아 부어서 현실화시켜야 합니다. 그 현실화된 것을 통해서 남들에게 저 사람은 저렇게도 할 수 있구나. 하는 것 정도는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아무리 많은 돈을 벌어 봐야 결국 죽고 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유한한 것으로써 무한한 것을 따르는 일은 위험한 일이다.
돈을 많이 번다는 식의 유한한 것을 가지고 무한한 것을 따른다는 것은 위험한 짓이다. 위험한 줄 알면서도 자꾸 욕심을 낸다는 것은 더욱 위험한 짓이다.
우리는 무한한 것을 통해서 유한한 것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만들어낼 만큼만 만들어 내고, 필요에 따라서는 만들어 놓은 것을 얼른 없애 버릴 수도 있습니다. 또 필요에 따라서는 안 만들어낼 수도 있습니다.
옛날에 노자와 같은 사람은 필요에 따라서 안 만들어낸 사람입니다. 그 때 노자가 만들어냈으면 아마 칼이나 창에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노자는 안 만들어내는 것을 통해서, 즉 무한한 것을 통해서 많은 것을 만들어냈습니다.
우리는 지금 무한한 것을 통해서 어느 정도는 만들어내야 합니다. 안 만들어내면 우리는 그저 거지 취급만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만들어낼 것입니다. 그냥 막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가장 우리의 불이 담겨 있는 것을 우리는 만들어낼 것입니다.
유한한 것으로써 무한한 것을 따르는 일은 위험한 일이다.
위험한 줄 알면서 자꾸 욕심을 내게 되면, 내가 정말 어떻게 해서든지 잘 살아야지. 하면서 살다 보면, 이제 정말 살만 하니까 죽어 버렸다., 출세를 하고 나니까 자식들이 불에 타서 죽어 버렸다. 하는 식으로 더 쓰라린 아픔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래서 장자는 말했습니다.
성인聖人은 시비를 조화시켜, 자연에 맡겨 가지런히 만든다. 이를 양행兩行이라고 일컫는다.
우주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동양 철학에서 말하듯이, 우리는 그 변하는 과정에서 때에 따라서는 금金으로 흐르다가 목木을 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서로 부딪치게 되는 상극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 때는 우리가 잘 참고 견뎌내야 합니다.
우리가 금金으로 있다가 물 안에 들어가거나, 또 흙을 만나서 흙 안에 들어가는 것은 상관없습니다. 거기엔 큰 부딪침이 별로 없습니다.
이렇게 오행을 잘 판단하면서 만물을 가지런히 조화시키는 일을 우리는 해야만 됩니다.
그래서 예수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만유를 알고 있고 스스로에게 필요하지 않은 자는 모든 곳에서 필요하다.
옛날에 예수는 만유를 알고 만인에게 필요한 예수가 되었습니다. 때문에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죽은 예수를 목에까지 걸고 다니고 있습니다. 그나마 못에 박혀 죽은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그것을 또 금으로 만들고, 거기다가 다이아몬드까지 박아서 걸고 다니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지금도 그렇게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지금 빨리 나를 필요로 해서, 내가 여러분 앞에 있을 때 빨리 여러분의 것으로 만들어야 됩니다.
어차피 나는 죽어 없어지더라도 사람들에게 필요하게 될 것입니다. 나에게는 사람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내가 필요할 것입니다. 내가 죽으면 사람들은 더욱 더 나를 찾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 나는 이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지금 내가 필요로 하는 여러분이 되는 길이 여러분에게도 가장 행복한 길입니다.
장자도 말을 했습니다.
도는 그 모든 것을 서로 하나로 통하게 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만유를 통하게 하는 길을 위해서 여러분의 세계에 적당히 맞춰 가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나로 인해서 흘러가는 빛이 여러분을 통해서 계속 흘러가도록 하고 있는 중입니다.
더불어서, 빛에 의해서 만들어진 여러분이, 더더군다나 지금 빛 안에 있을 때 빨리 자신 안의 빛을 발견해서, 이제 여러분이 나와 함께 죽어 없어진다 하더라도, 내 불빛이 여러분에게 전해지고, 여러분의 빛이 이 인류에게 전해지도록 해야겠습니다. 그것이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인간을 위해서 사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달나라에 간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행복한 길은 바로 사람을 위해서 사는 길입니다.
달나라에 가는 것이 인간의 삶에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달나라에 갈 수 있는 사람에게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의 힘을 불어 넣어 주는 것이 가장 소중한 일입니다.
로켓을 타고 가다가 중간에서 폭발하는 것을 막아 주는 일보다, 그 사람이 로켓을 타고 가다가 설사 죽는 일이 있더라도 그 사람을 영원히 죽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 우리 인류에게 가장 절실한 일입니다.
여러분은 바로 그런 일을 위해서 깨달음을 얻으려고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여러분 마음의 욕심을 위해서나 자기 자신의 위안을 위해서, 또는 할 일이 없어서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또 다른 업을 짓는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그런 지옥에 빠져 들어가지 않도록, 지금 이 순간에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이 바로 '깨달음'이라는 사실을 깊이 자각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 도마복음과 육조단경 강의 <깨달음의 빛>(코스모스북, 전자책) - 에서 발췌
첫댓글 관세음보살_()_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모셔간답니다.
행복하세요.
나무아미타불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