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래에서 작은 어선을 타고 나가려면 새벽의 어둠이 채 가시기 전에 자취방을 나서야 했다. 지금은 옛모습이 하나도 남아있지않은 인천의 석바위 삼거리에서 소래가는 버스를 기다린다. 석바위 삼거리에서 직진하면 제물포를 통하여 인천과 동인천을 갈수있는 국도 이고 좌측길로 빠지면 소래를 갈수있는 길이다.
소래를 가는 버스는 한시간이나 한시간반 정도에한대씩 지나가므로 차를 기다리는 시간은 지루하기 조차 하다. 소래행 버스가 도착한다. 이른 아침이어서 차안은 한가하다. 비포장길 좁은도로가 의 허름한 집들과 주변의 나뭇잎사귀 들에 뻘건 먼지가 눈에 쉽게 띨정도로 쌓여있다.
작은 들녘이 나온다. 작은 똘도 지나간다. 작은똘 둔덕에 게들이 보인다. 농게... 우리들이 고향에서 농갈기라 부르던 농게 들이 보인다.
소래를 옛날엔 소래포구라 부르지 않고 그냥 소래 라고 하였던것 같다. 지금의 횟집들이 밀집되어 있는 포구 바로앞은 훵한 공터였고 뒷쪽 지금의 건어물상회들이 있는곳에 어민들이 허름한 집을 짓고 모여 살았다.
아마도 대부분은 백령도의 실향민 이었던것 같다.
배를타고 나간다. 작은 수로길을 타고 한참을 나가야만 바다 를 만날수 있었다.
내가 배를 타는것은 배를타고 바다로 가고 싶어서였다. 배도타고. 바다로도 나가고 또 얼마 되지않는 돈을 벌수있고 무엇보다 좋은것은 상품가치가 별로 없는 생선들을 솔찬하게 얻어서 자취생의 부식문제를 어느정도 해결할수있기 때문 이었다.
바다로 나가면 각 배마다의 표시가 되어있는 부표가 떠있다. 이부표(정확한 용어는 모른다)를 긴 막대로 걷어 올리면 그물이 나온다. 그당시에는 사람의 힘으로 그물을 걷어 올려야 했으므로 여간 힘이드는 작업이 아닐수 없었다. 걷어올린 그물은 아랫쪽에 고기들을 쏟아놓은후 다시 바다로 던져놓는다.
몇개의 그물을 올려서 배안에 쏟아놓으면 수북히 고기들이 쌓인다.
다시 소래포구로 돌아간다. 이때부터 뱃사람들은 바쁘다. 뱃사람 이라야 선주.그리고 또 두사람. 아르바이트생인 나까지 4명 뿐이다.
선주가 잡은 고기를 회를 치고 쏘주 대병을 가져온다. 배고픈 김에 회한점에 쏘주 한잔은 참 알딸딸한 기분이었다.
잡아놓은 생선들의 종류별 분리가 끝날 즈음에 배는 선창에 닿는다. 선주 부인들이 돈을 담을수 있는 앞치마를 두르고 선창에서 기다린다.
선주 부인들 뒤에는 고무다라이를 들고 있는 중년의 아주머니들이 보인다. 그중엔 작은 애기를 등에 업은 젋은 여인도 있다. 선주부인들과 다라이 당사 아주머니들의 흥정이 시작되고 흥정이 끝난 고무다라이 장사 들은 소래역에서 협궤열차를 타고 각동네로 생선을 팔기 위하여 빠르게도 떠난다.
나도 선주 부인으로 부터 몇푼의 품삯을 받는다. 그리고 팔지못하는 상처난 꽃게나 수컷꽃게 장대 같은 생선들을 얻는다.
제가 배탓던 소래는 그리 멀리 나가지는 않은것 같읍니다. 아마도 지금은 멀리 나가야만이 그나마 고기들을 잡을수 있을것같네요. 재밌어서도 한것 이었고 .ㅎ 소래부근에서 군생활을 하셨군요. 저는 최전방에서 또다시 후방으로 군생활을 좀 오래 하였답니다. 그렇지요..얹그제 군생활 한것 같읍니다. 감사합니다.
제글을 그리 읽어주셨다니 감사합니다. 알바 수준 이어서 ..그리고 젋고 힘셀때 여서 그리어렵진 않았읍니다. 수인선 협궤열차... 그때 사진이라도 한장 찍어두었다면 참좋은 역사자료가 되었을 지도 몰라서 많이 서운한 마음입니다. 한국에 나가면 꼭 찿아 보는곳이 목포와 소래포구 입니다. 오늘도 행복한 날 되시길요.
대학생 시절의 알바 그리고 당시만 해도 넉넉한 인심에 따뜻해집니다. 삶의 건강하신 구체, 포구의 이미지가 신선하게 다가 왔습니다. 성실하게 생활하셨으니 씨애틀에서의 꽃길을 걷고 계시는 지금 무심코 지나쳤을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글에 저의 지난날도 마주해봅니다ㅎ 미세한 결 맑으신 통찰 내면적 사고의 흐름에 발화가 감동입니다^-
그시절 소래는 허름한 어부들의 작은 집들이 모여있었고 훵한 공터였읍니다. 지금은 엄청 발전되어서 쪽가게 하나에도 수억의 권리금이 붙어서 거래가 된다 합니다.
그시절엔 인심도 좋았고요. 우리의 고국 어디에서건~~ 지금 생각하여보면 인천앞바다는 그당시에 황금 어장 이었던것 같읍니다 온갖종류의 물고기들이 수두룩 잡혔으니요. 어린아이를 등에업고 무거운 생선을 머리에 이고서 소래역으로 향하는 고무다라이 장사 아주머니들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그당시에 소래포구를 갈수 있었던 교통편은 송도역에서 수원으로 가는 협궤열차 수인선이 있었고 소래행 시내버스가 전부였읍니다. 배차간격이 너무 띄엄띄엄 있었지요. 그래서 더 낭만이.. 사실 그당시에 머리를 길게 기르는것 조차도 어르신들 눈에 안좋게 보이셨을 시대였고 담배를 물고 다니는것 도요,ㅎ 저는 짧은 스포츠머리에 담배를 피지도 않으니 더좋게 보신것 같읍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어느 지인의 고기잡이 배를타고 먼바다에 다녀온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는데. .
그힘들고 어려운일을 학생의 신분으로 알바를 하셨다니 무악산님의 학업에 대한의지와 정신력에
놀라울 따름입니다.
제가 군생활을 소래산 부근에서 하였기에 그쪽부근으로 지나다니거나 소래포구 이야길 듣게되면 늘 추억의 군시절을 돌아보게 된답니다.
까마득한 시절의 군생활이 어젯일인듯 하군요.
제가 배탓던 소래는 그리 멀리 나가지는
않은것 같읍니다.
아마도 지금은 멀리 나가야만이 그나마
고기들을 잡을수 있을것같네요.
재밌어서도 한것 이었고 .ㅎ
소래부근에서 군생활을 하셨군요.
저는 최전방에서 또다시 후방으로 군생활을
좀 오래 하였답니다.
그렇지요..얹그제 군생활 한것 같읍니다.
감사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저의 인생이 어찌보면 잘산것 같고
어찌보면 파란만장한 삶이었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은퇴하여 생활비 부담없는
생활을 할수 있다는것에 위안을 삼고
있읍니다.
고맙읍니다.
무악산님~
늘 감명 깊게 님의 글을 읽었는데
처음으로 댓글을 올려 봅니다.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쉽지않은 뱃일을 히셨으니, 같이 일하시던 뱃사람의
말씀이 틀리진 않습니다.
님께선 참 착하고 착실한
학생이셨네요.
어려운 환경에서도 학업을
놓치지 않으시려고 애쓰시던
앳띤 학생의 모습이 보입니다.
조금은 가슴 찡한 내용 이지만
소래포구의 이모저모와 그때 뱃사람의 얘기들을 잘 알려 주셨습니다.
앞으로는 많은 행복한 나날들이
우리 무악산님을 기다립니다.
늘 즐겁고 편안 하십시요.
제글을 그리 읽어주셨다니 감사합니다.
알바 수준 이어서 ..그리고 젋고 힘셀때
여서 그리어렵진 않았읍니다.
수인선 협궤열차...
그때 사진이라도 한장 찍어두었다면
참좋은 역사자료가 되었을 지도 몰라서
많이 서운한 마음입니다.
한국에 나가면 꼭 찿아 보는곳이 목포와
소래포구 입니다.
오늘도 행복한 날 되시길요.
제가 사는 곳에서 도보로 30분 정도 가면 소래포구가 나옵니다
저의 산책코스이기도 하고요
그곳과 가까운 곳에 사시는 군요.
소래도 많이 발전이되어서 주변에 고급상가
와 고층 아파트들이 많이 들어서 있더군요.
전망도좋아지고요.
고맙읍니다.
옛날을 회상하시는 글이
언제나 아름답기도 하지요.
무악산님의 글에서 보면,
성실함에서 이루어진 지금인 것 같습니다.
그 시절에 알바를 하면서 학업을 영위할 수 있는
의지력과 근면성이 보이는 것이지요.
내내 행복하실 것입니다.
옛날에 그리 힘들었어도 왜그리도 그시절이
그리워 지는지 모르겠읍니다.
지금의 생활이 훨 나은것인데도요~~
저한테 지게를 지고 등짐을 나르던 15살시절이 있었다고
하면 지금의 저의 자식들도 믿어주지를 않으니까요,ㅎ
자취할적에 연탄불을 너무 자주 꺼트려서
냉방고생을 하였는데 옆에 사시던 할머니께서
언제던 연탄불 가져가서 따뜻하게 지내라고
하셨던 ..그 고머운 할머니 생각이 납니다.
가슴 따뜻해지는
고향 이야기를 올려주시곤
하셨는데..
그 시절에 빡세게 아르바이트를
하셨네요.
성실하신 무악산님,
노후의
삶은 이제 고향에서
여유롭고,행복한 삶을
보내시길요.추억의 소래포구
잘 읽었습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요.^^
저의 생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 하였던
고향 이어서 주로 그런 글을 쓰게
되었읍니다.
세상을 참 보통사람들 보다 다르게 살았기에
사연도 많이 있을거고요.
미쿡이야기..그런 모습들도 적어보고 싶은데
작년부터 필력이 많이 힘들네요 ㅎ
고맙읍니다.
제가 살았던 묵호 어판장과는 구조는 같은데 소래 포구라 는 어휘를 듣노라면
웬지 낭만적인 곳으로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지요
그곳에선 고기를 잡고 팔고 뒷고기를 가져가는 그 모든 행위가 다
낭만적으로 여겨지고 묵화 어판장은 악다구니 와 함께 거친 인간군상들이 뒤엉킨 삶의 현장였던 느낌이 ㅎㅎ
오랜 만입니다 ...건강 하세요 항상,
묵호항 에서 살으셨던것 같읍니다.
동해안 여행때 가본곳 같읍니다.
그시절은 소래는 매우 한산한 곳이어서 포구라는 이름조차도
없던..그냥 소래 라 불리는 곳이었답니다.
어획량도 고깃배 십수척이 나가서 조업하여서
주로 고무다라이 장사 들에게 넘기던 곳이었지요.
교통편도 버스나.협궤열차가 하루에 몇편 다닌정도
였답니다.
오랜만 입니다.
항상 건강하시길요~~
소래포구에서 알바를 하셨군요
그래도 자취하며 소소한 먹거리도 얻어와 먹을수있었던 그행복한 순간 아마도 지워지지 않을겁니다 ㅎ
참 재미도 있었던 알바였읍니다.
배도타고..돈도벌고.부식 거리도 얻어오고요 ㅎ
덕분에 소래포구 찿아가서 추억에 저저보곤 한답니다.
오랜만에 댓글 교환하니..반갑읍니다. ㅎ
대학생 시절의 알바
그리고 당시만 해도 넉넉한 인심에
따뜻해집니다.
삶의 건강하신 구체, 포구의 이미지가
신선하게 다가 왔습니다.
성실하게 생활하셨으니 씨애틀에서의
꽃길을 걷고 계시는 지금
무심코 지나쳤을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글에 저의 지난날도 마주해봅니다ㅎ
미세한 결 맑으신 통찰
내면적 사고의 흐름에 발화가
감동입니다^-
그시절 소래는 허름한 어부들의 작은 집들이
모여있었고 훵한 공터였읍니다.
지금은 엄청 발전되어서 쪽가게 하나에도
수억의 권리금이 붙어서 거래가 된다 합니다.
그시절엔 인심도 좋았고요.
우리의 고국 어디에서건~~
지금 생각하여보면 인천앞바다는 그당시에
황금 어장 이었던것 같읍니다
온갖종류의 물고기들이 수두룩 잡혔으니요.
어린아이를 등에업고 무거운 생선을
머리에 이고서 소래역으로 향하는 고무다라이
장사 아주머니들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지금처럼 변하기 전 옛 소래포구의 낭만 가운데 한 대학생의 삶도 있었군요.
오늘 무심히 지나친 정경 속에 또 어떤 젊은이가 추억을 쌓고 있었을는지~.
잔잔한 감동을 받으며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그당시에 소래포구를 갈수 있었던 교통편은
송도역에서 수원으로 가는 협궤열차 수인선이 있었고
소래행 시내버스가 전부였읍니다.
배차간격이 너무 띄엄띄엄 있었지요.
그래서 더 낭만이..
사실 그당시에 머리를 길게 기르는것 조차도 어르신들
눈에 안좋게 보이셨을 시대였고 담배를 물고 다니는것 도요,ㅎ
저는 짧은 스포츠머리에 담배를 피지도 않으니 더좋게
보신것 같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