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저녁 기철이 술을 먹겠다고 할 때 분명 우리 집에서는 술을 먹을 수 없다고 경숙이 말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떼쓰듯 사정을 해서 겨우 술을 먹었다. 그것도 술은 자기가 사가지고 와서, 그런데 오늘은 경숙이 직접 술까지 상에 놓아 가지고 왔다.
기철은 어부가 눈치채지 못하게 웬 술이냐는 표정을 짓고 경숙은 그런 기철을 모른 체한다.
그 대답을 벽보를 가리키며 술을 따르는 어부가 대신한다.
“저 벽보같이 원래 이 음식점에서는 술을 팔지 않네. 그런데 나에게만은 특별대우야. 내가 원체 술을 좋아하니까.”
그 말을 들으며 이 양반이 독심술을 하나 내가 궁금해하는 것을 하나씩 모두 말하게 하고 기철은 생각했다.
기철은 그렇게 어부와 같이 저녁을 먹고 나오며 무슨 핑계를 대고 음식점에 더 있을까 하다가 어부가 이상하게 생각을 할 것 같아 그냥 어부를 따라 음식점을 나왔다.
그러면서 경숙과 시간을 함께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자기가 자기를 다시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다.
자기는 우울증 환자로 세상이 싫어 생의 패배자 같은 마음으로 어쩌면 마지막을 정리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닌가.
그런데 어제 오늘의 행적을 생각하면 스스로도 우스운 일이다.
어떤 여자의 죽은 남편과 자기가 닮았다는 말을 듣고 호기심이 생긴 것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또 어쩌다가 술을 먹고 또 피로하고 취해서 그 여자의 음식점 손님을 대하는 홀에서 잠을 잤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오늘 하루 지금까지도 그녀의 곁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녀에 대한 내 마음이 이런 것인가.
그리고 나중에 영희가 이 사실을 알면, 자기와 자식들을 버리고 떠난 사람이 아니 식구들은 자기가 가정을 버리기로 한 것을 모르고 자상한 아빠 다정한 남편으로 지금까지 자기만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다른 여자에게 정을 느꼈다는 것을 알면 얼마나 황당할까.
이런 생각을 하며 음식점을 나온 기철은 어부와 헤어져 다시 바닷가로 갔다.
헤어지기 전 어부가 볼일을 끝내면 어제 말한 자기 집 빈방에 와서 자라는 말에 건성으로 대답을 하며
밤 바닷가에는 한겨울의 찬 바람이 몰아치고 기철의 마음과 같이 높은 파도가 일고 있다.
한참을 바닷가에서 배회하던 기철은 추워서 더 이상 바닷가에 있기가 어려워지자, 경숙의 음식점으로 갈까, 하다가 시간도 늦고 알게 된지 하루 정도 되는 여자 집에 너무 자주 드나드는 것도 쑥스러운 생각이 들어 근처의 모텔로 들어갔다.
방을 정하고 나서 씻지도 않고 하루 종일 돌아다니느라 고단한 몸을 침대에 뉘었다.
그러나 잠은 오지 않고 음식점 여주인이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만 한다.
참으로 자기가 이상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토목쟁이로 30여 년간을 살아온 자기, 그동안 이런저런 자리에서 이런저런 사유로 많은 여자를 상대하고 그중에는 기철이 유부남인 것을 알면서도 사랑한다고 죽자고 쫓아다니던 여자도 많았다.
그러나 가정의 행복을 제일의 것으로 생각하고 또 영희를 사랑하는 기철은 그런 여자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래서 간혹 심술궂은 사람들에게 고자냐? 공처가냐? 하며 놀림도 받았다.
그런 기철이 이렇게 음식점 여자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남편을 잃은 후, 생의 애착도 잃어 자기의 껍데기 안에 갇히어 헤어나지 못하는 그녀에게서 30여 년의 직장 생활에서 결국은 범죄자가 되어 교도소까지 가야 했던 자기와 같은 생의 패배자로서 동질감 같은 상련을 느끼는 때문인가?
가정을 처자를 버렸다는 생각에 혼자라는 마음이 틈을 만든 것인가?
새로워진 환경으로 혼자가 되며 마음이 풀어져 감정에 구멍이 뚫린 때문인가?
아니면 우울증으로 생에 대한 부정에 빠졌던 기철이 그 여인으로 하여 다시 삶에 의미를 찾은 때문인가?
일어나 시계를 보니 밤 열시
지금쯤은 음식점 일이 대강 끝나가는 시간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음식점으로 전화를 걸었다.
어제 저녁을 먹고 나오며 음식점을 둘러볼 때 유리문에 적혀있는 전화번호를 기억해 두었던 것이다.
전화벨이 울리고 경숙이 전화를 받는다.
경숙은 저녁에 돌아온 서울 남자가 이웃집 아저씨 그것도 자기가 큰 오빠처럼 의지하고 지내는 아저씨와 같이 들어와 놀랬는데 이야기하는 것을 보니 서울 남자와 그 아저씨가 서로 잘 아는 사이인 것 같아 어리둥절하며 아저씨가 시키는 대로 모르는 사이처럼 인사를 하고 주방으로 들어와서도 궁금증이 가라앉지 않는다.
어떻게 서울 남자가 그 아저씨와 아는 사이인가?
혹시 친척인가?
그러나 아저씨에게서 서울에 그런 친척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다.
또 두 사람이 하는 이야기로 처음 만난 사이가 분명한데 어떻게 두 사람이 잘 아는 사이처럼 같이 음식점엘 들어와 같이 술을 마시는 것인가?
아무리 생각을 해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저녁을 끝내고 아저씨가 남거나 서울 남자가 남으면 물어보리라 마음을 먹고 저녁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는데 저녁 식사가 끝나자, 둘이 모두 약속이나 한 것처럼 같이 나가버린다.
서울 남자를 붙잡을까 하다가 아저씨가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아 못하고 아저씨를 붙잡아 묻다간 어제저녁부터의 일이 탄로 날 것 같아 망설여진다.
그러는 동안 두 사람은 시야에서 멀어지고
경숙은 저녁 내내 일을 하면서도 궁금증으로 일이 손에 잘 안 잡힌다.
그러면서 이제 서울 남자는 갔을 것이다.
아니 가지 않았어도 아저씨의 출현으로 민망해진 서울 사람은 이제 여기는 안 올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시원섭섭해하며 장사 마무리를 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여보세요? 화순집입니다.”
경숙이 전화를 받았다.
경숙의 말소리가 들리자 기철은 무어라고 말하고 자기를 어떻게 알려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인다.
전화에서 대답이 없자
“잘 못 걸려온 전화인가?”
하며 경숙이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기철이 다시 전화를 돌렸다.
“여보세요?” 하고 저쪽에서 소화기를 들자
“어째서 말도 하기 전에 전화를 끊습니까?”
하고 기철이 심통을 부렸다.
“누구신지요?”
쌩둥맞은 말에 의아해 하며 묻는 경숙 말에도 가시가 돋친다.
“누군 누구요. 서울 사람이지.”
“서울 사람이라뇨?”
갑자기 전화를 걸어 서울 사람이라는 말에 경숙은 감을 잡지 못한다.
“그 음식점에 하룻밤을 지낸 서울 사람. 몰라요?”
기철이 또 투정을 부린다.
“아! 난 또 누구라구요? 그런데 웬일이세요?”
이렇게 물으며 경숙은 이 남자가 아주 떠난 것은 아니구나 하곤 이상하게 안심하는 마음이 든다.
“웬일은 무슨 웬일.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 전화했지요. 반갑지 않은가 보죠?”
그 말을 하는 기철도 그 말을 듣는 경숙도 좀 쑥스럽고 어색한 것 같으나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어요?”
“뜻이 있으면 길이 있는 법 아니요?”
“참 거창하시네. 전화번호 하나 안 것 가지고. 그런데 지금 어디에요?”
“어디인 것 같소?”
“모르니까 묻는 것 아니에요.”
이렇게 말씨름하면서 둘 사이가 더욱 가까워지는 것 같다.
“모텔에 방 하나 잡았습니다.”
“그래요? 잘됐네요. 어제처럼 홀에서 자지 않아도 되겠군요.”
“지금 나 놀리는 거요?”
“놀리는 게 아니라 사실이잖아요.”
경숙은 이런 말을 하며 남편이 죽고 여태까지 지켜오던 생각, 더는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않으리라고 한 생각이 무너지고 있는 것을 느낀다.
“여하튼 좋아요. 이제 장사가 끝나갑니까?”
“장사야 아무 때나 끝낼 수 있지만 왜 그러세요?”
“장사일 끝냈으면 만납시다. 할 말이 있어요.”
“참! 그렇게 말하니 나도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요.”
“무엇인데요?”
“저녁에 같이 온 그 아저씨는 어떻게 알아요?”
“아! 그거 말이오? 다 아는 수가 있지.”
“그러니까 그 수가 무엇이냐고요?”
“만나면 이야기해 줄게요.”
“지금 해 봐요.”
“싫어요. 만나서 해줄게요.”
“오늘은 밤이 늦어서 만나기가 그러네요. 내일 낮에 만나죠.”
“내일 장사 안 해요?”
“장사야 하루 쉬면되죠.”
“정말 그래도 돼요?”
“안 될 게 무어예요. 내 장산데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겠어요. 걱정 마세요.”
“알았어요. 그러면 내일 만나요. 열 시쯤 데리러 갈게요.”
“아니 동네 사람들 눈도 있고 하니 내가 그리로 갈게요. 거기가 어디에요?”
이렇게 하고 전화를 끊은 경숙은 내가 왜 이럴까? 겨우 어제 만난 남자가 만나잔다고 덥석 만나자고 약속을 했으니 내가 어떻게 된 것이 아닌가? 지금이라도 다시 전화를 걸어 내일 일이 있어 못 나가겠다고 할까. 하다가 금방 약속을 하고 다시 취소하는 것도 그렇지만 기철이 들어있는 모텔의 위치는 대강 아는데 전화번호를 모르는 것이 더 문제다.
10여 년을 혼자 살면서 집 밖으로 나가 본 것이 많지 않아 경숙이 전화번호를 아는 집이 몇 안 된다.
그러면서 속으로 어떻게 아저씨를 아는지 그것이 궁금해서 만나기로 약속했다고 혼자 그렇게 단정을 지었다.
첫댓글 즐~~~~감!
즐감하고 감니다
무혈님!
지키미님!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