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세기 불가리아와 프랑크 왕국, 비잔틴 제국의 관계
김병용
I. 머리말
II. 불가리아 민족의 형성과정
III. 불가리아와 비잔틴 제국 간의 관계
IV. 9세기의 불가리아와 비잔틴 제국, 프랑크 왕국과의 갈등과 협력
V. 맺음말
I. 머리말
불가리아는 흑해 해안에 위치한 나라로 많은 역사적 문화적 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가장 먼저 문명이 발생한 곳이다. 아름다운 해안도시인 바르나(Varna)의 공동묘지에서는 기원전 약 50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들이 발견되었는데 이 유골들은 잘 세공 된 금으로 치장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들이 본 연구와 직접적인 관계되는 것은 아니나 금을 사용한 최초의 인간이 불가리아에 살았었다는 것이 본 연구를 시작할 자극을 준 것은 사실이다. 아울러 불가리아의 왕들이 12支로 즉위 년도를 표시하였던 사실과 훈족의 왕들과도 관련을 맺고 있었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불가리아 연구는 특히 아시아 지역의 연구자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줄 수 있는바 앞으로의 활발한 연구를 기대한다.
불가리아의 형성은‘아바르(Avar)’족이 중국 근처에서부터 이동하여 우랄 알타이산맥과 카스피 해를 거쳐 흑해를 웃돌아 도나우 강 중류에 자리 잡음으로 시작된다. 그 후 칼 대제에게 정복될 때까지 약 200여 년간 제국을 건설하여 그 지역의 여러 슬라브족들을 다스렸다. 또한 ‘불가르(Bulgar)’족은 코카서스 근처에서 유래하여 볼가 강을 거쳐 이동하여 흑해로 진입하여 기존의 슬라브족을 지배하였다.
불가르족이 도나우 중류지역에 등장했다는 것은 프랑크 왕국의 팽창이 도나우 중·하류에서 끝났음을 의미한다. 달리 말해 불가리아인 들이 프랑크인 들의 발칸침투를 막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도나우 중류지역에서 펼쳐진 두 국가간의 다툼은 그 지역에 살고 있던 몇몇 슬라브족들이 독립할 계기를 제공하였고 모라비아왕국의 형성에 도움이 되었다.
당시 프랑크 왕국의 발칸반도로의 팽창은 자연 비잔틴제국과의 마찰을 낳게 하였다. 즉 로마 가톨릭교 선교의 선봉장격인 프랑크왕국과 그리스 정교의 선봉장격인 비잔틴제국은 선교활동을 두고 첨예한 갈등양상을 보인다. 즉 로마 교회의 선교국으로서 프랑크 왕국,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선교국으로서 비잔틴제국, 여기에다가 개종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불가리아사이의 갈등과 협력은 당시 시대상을 잘 설명해 줄 뿐 아니라 유럽의 근·현대사 이해를 위한 역사적 기반을 제공한다.
본고는 이에 관한 전반적인 이해 및 앞으로의 세부적 연구의 기초 작업으로 작성되었다. 연구 방법으로는 독일문헌들을 중심한 문헌작업을 채택하였다. 불가리아에 대한 선구적 역사서는 19세기 말엽 E. Dümmler (1887/88)가 서술한 3권으로 구성된 『동프랑크 왕국사』를 들 수 있다. 또한 20세기에 들어서는 O. Halecki(1956)의 『중부 동유럽의 역사』가 정평이 나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1차 사료들은 독일 중심적인 입장에서 기술되어 있어서 객관적인 서술이라고만 볼 수 없다. 이에 대해 불가리아의 관점에서의 역사연구가 이루어 졌는데 M. Com?a(1960)는 고고학적인 연구를 통해 사료의 부족을 채우려는 시도를 하였다. 구 동독학자 D. Angelov(1980) 역시 이와 같은 입장에서 연구하여 9세기 말엽 불가리아는 완전한 민족적 정체성을 확립하였다고 연구저서를 통해 주장하였다. 본 연구의 문제제기는 바로 이 점을 확인하는데 있다. 즉 불가리아가 세운 국가가 종교적인 통일성을 확보하고 성립되었다고 불가리아라는 정체성이 확립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지를 검토해 보려고 한다.
이 문제에 대해 최근까지 중요한 연구업적을 내고 있는 V. Gjuzelev(1966, 1993)는 9세기 전반부의 프랑크 왕국과 불가리아의 관계를 연구한 결과 불가리아가 프랑크왕국과 비잔틴제국 사이에서 완충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9세기의 불가리아의 성장이 Gjuzelev의 주장처럼 프랑크왕국과 비잔틴제국의 대립적인 관계를 완화시켜줌으로써 두 국가의 충돌을 막는데 기여하였다고만 생각하기에는 여러 의문점이 있다. 다시 말하자면 불가리아의 성장으로 말미암아 크리스트교의 세계가 프랑크 왕국과 비잔틴 왕국 둘로 나뉘게 되었다는 기본적인 논지는 보다 비판적 관점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사료된다. 본 연구에서는 이런 문제의식에 입각하여 불가리아 왕국의 전개과정 및 9세기 전반부의 팽창정책과 후반부의 크리스트교의 국교화 정책을 검토하면서 이러한 의문점에 대한 해답을 모색하겠다.
II. 불가리아 민족의 형성과정
불가리아 민족은 100년 동안 복잡한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다. 불가리아 민족은 슬라브 족, 원불가리아 족, 트라키아 족이 섞여 탄생하였다. 그 중 슬라브 족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오늘날 불가리아 지역에 살았던 최초의 민족은 트라키아 족으로 고증된다. 그들은 로마인이 이곳에 등장하기 전부터 발칸반도의 동편에 거주하여 왔으나 국가라 부를만한 형태의 체제를 발전시키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문자를 사용하였고 문학활동을 하였다. 도시에 거주하던 트라키아 족은 비교적 쉽게 그리스화 내지는 로마화 되었다. 이에 따라 트라키아 족은 쉽게 로마와 비잔틴 제국으로 흡수되었고 스스로의 정체성은 거의 해체되어 갔다. 그 이후 이어지는 민족 이동과 함께 트라키아 족은 발칸반도에서 그들의 족적을 감추었다.
오늘날 불가리아 지역으로 몰려든 민족은 슬라브 족과 원불가리아 족1)이었다. 슬라브족은 6세기 후반부에서 7세기 전반부에 걸쳐 발칸반도에 등장하였다. 그들은 모에지아,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등지로 퍼져갔고 그 곳의 원주민들을 빠른 속도로 흡수하여갔다. 슬라브 족은 그들의 정치체제를 확립시켜갔으며, 7세기 말엽에 이르러 트라키아 족이 뿔뿔이 흩어짐에 따라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였다. 이와 같은 트라키아 족들의 슬라브 족으로의 동화과정을 통해 불가리아 민족의 정체성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원불가리아 족은 7세기 후반부에 이 지역으로 진입하였다. 그들은 수적으로 슬라브 족에 비해 열세였고 지역적으로 넓게 분산되어 있었다. 원불가리아 족이 어디에서 이곳으로 이주하여 왔는지에 관하여는 현재까지 완전히 밝혀진 바는 없다. 다만 발굴된 유물들에 쓰인 글씨의 해독과 언어학적인 접근을 통해 원불가리아 족이 훈 족, 오구스 족, 위구르 족, 카자르 족, 페체넥 족, 쿠만 족 등과 같이 튜르크 족군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몇 사료들을 통해 그들이 4세기 경에 이미 "불가르"로 불리었고 코카서스 북쪽에 거주하였음이 밝혀졌다. 이 원불가리아 족의 일부는 카자르 족에 복속되었고, 다른 한 집단은 볼가 강을 향해 북쪽으로 이주하여갔다. 또 다른 한 집단은 판노니아지역으로 가서 아바르족에 복속되었다. 그리고 한 집단은 도나우를 향하여 남서쪽으로 이주하여 슬라브족과 함께 681년 모에지아 지역에서 불가리아왕국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까지 슬라브 족과 불가리아 족이 함께 세운 이른바 "슬라브-불가리아 왕국"은 아직 뚜렷한 정체성을 띠지 않고 있었지만 동편의 비잔틴 제국과 서편의 프랑크 왕국 사이에서 통일정권을 수립하여 가고 있었다. 마케도니아에 있던 슬라브족과 쿠베르(Kuber) 지배 하에 있던 원불가리아 족은 비잔틴제국의 지배 하에 있었으며, 모에지아에 있는 슬라브 족과 북동 불가리아에 있던 원불가리아 족으로 구성된 작은 지역이 장차 불가리아왕국으로 발전되게 된다. 두 민족은 점차 그들 사이의 차이를 무너뜨리고 하나로 발전하여갔는데 모에지아,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등지에 퍼져있던 모든 슬라브족이 이에 가세하였다.
또한 이 지역의 경제적 발전도 주목된다. 그리고 빠른 경제성장과 함께 여러 슬라브 족끼리는 물론 원불가리아 족과 융화되어 갔다. 이 융화과정은 9세기까지 지속되었는데 그것은 정책적으로도 지원되었으며 다양한 민족적 구성의 융합과 조화를 최상의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불가리아민족은 7세기에서 10세기까지 위에서 언급한 트라키아 족, 슬라브 족, 원불가리아 족 등의 민족들의 동화를 통해 형성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불가리아왕국은 옛 로마의 식민지였던 모에지아(Moesia), 소 스키티아(Scythia Minor), 트라키아지역에 이르는 발칸 반도의 동쪽, 동남쪽 지역을 광대하게 차지하였다.
III. 불가리아와 비잔틴 제국과의 관계
5세기 말엽부터 6세기초업까지 슬라브족이 발칸반도로 진입하였다. 이 이동은 유스티니안 1세(Justinian I.) 때 더욱 두드러졌는데 비잔틴제국은 동, 서쪽 경계를 강화하느라 북쪽경계를 소홀하게 되었다. 당시 이주한 슬라브 족은 스클라벤 족(Sklavenen)과 안트 족(Anten)이었다. 안트 족의 이주는 7세기 초엽까지 계속되었는데 수천 명의 전사들이 발칸반도 남부까지 쳐들어왔으며 심지어는 콘스탄티노플 근처까지 침범하였다. 그들은 처음에는 약탈을 일삼았지만 점차적으로 온후한 기후와 기름진 땅에 정착하여 갔다. 6세기 후반에 이르러 이들 슬라브 족의 정주지가 처음으로 형성되어 7세기 전반 비잔틴 황제 포카스(Phokas, 602-610)와 헤라클레이오스(Herakleios, 610-641) 재임기간에는 발칸반도에 정착하였다. 슬라브 족의 발칸정착은 당시 비잔틴제국이 북쪽경계에서 내란과 페르시아인들과 전쟁을 하는 동안이라 비교적 쉽게 이루어졌다.
7세기 중엽에 이르러 발칸반도의 북쪽과 동쪽은 거의 슬라브화 되었다. 슬라브 족은 평지와 산지 등 거의 모든 지역을 파고들어 그 곳 원주민들을 완전히 동화시켜갔다. 아울러 문화의 교환도 이루어져 슬라브족이 트라키아 원주민들이 갖고 있던 그리스-로마문화의 영향을 받은 흔적들이 그들의 풍습이나 강 이름, 지명 등에 나타난다. 그러나 그들은 비록 정착은 하였지만 정치적인 통일을 이룩하지 못했고 분쟁을 일삼았다. 이에 따라 비잔틴제국의 공세가 있자 저항 한번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슬라브 족은 발칸반도로 진입할 때 벌써 불가리아 족과 교류하였고 함께 동로마제국의 정벌에 나섰으며 626년 아바르 족의 지휘 하에서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였다. 불가리아 족은 5-7세기에 볼가 강 하류에 흩어져 살았다. 그리고 그 곳에서 다른 투르크계의 다른 종족들과 동화하여 대 불가리아왕국(볼가불가리아)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칸 쿠브라트(Khan Kubrat)가 죽은 후 642년경에 이 왕국은 분해 되었다. 쿠브라트 아들들의 지휘 하에 볼가강 어귀에 살던 카자르 족(Chazaren)에 쫓기어 뿔뿔이 흩어졌다.
칸 쿠브라트의 아들 중 셋째아들인 아스파룩(Asparuch, 혹은 Isperich, Ispor)은 서쪽으로 이주하여 흑해의 북부해안선을 따라서 678/679년에 도나우강 어귀에 도달하였다. 비잔틴제국은 당시 소아시아로 침입한 아랍인들을 상대하여야하였고 게다가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에서 개최된 제4차 공의회와 함께 파생된 종교적인 분쟁을 수습하느라 이 불가리아의 도나우지역으로의 침입에 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681년 4-5월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틴 4세(Konstantin IV.)가 불가리아를 평정하려 진군하였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아스파룩의 군대는 도나우를 건너 소 스키티아(Scithia Minor, 오늘날 Dobrud?a)지역으로, 동쪽으로는 모에지아(Moesia Inferior)지역으로 진군하였다. 그리고 그 지역의 슬라브 족을 정복하여 슬라브 족의 정주지였던 플리스카(Pliska)를 수도로 삼았다. 이렇게 탄생된 불가리아 국가의 다수 피지배층은 슬라브 족이었고 8-9세기를 거치면서 지배층이었던 불가리아 족이 그들과 동화되어갔다.
681년 9월 중순경 황제 콘스탄틴 4세는 불가리아와 평화협약을 맺었다. 이에 따라 비잔틴제국은 불가리아에 매년 조공을 바쳐야하였다. 불가리아는 그에 대한 대가로 제국령을 더 이상 침범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였다. 이 협약으로 비잔틴 제국은 사실상 불가리아를 하나의 국가로 인정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불가리아(Bulgaria)라는 국명이 681년 8월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정치적불안정이 불가리아왕국의 성립에 일조하였음은 앞서 이미 언급하였다. 695년 폐위되어 세르손(Cherson)에 유배되어 지내던 비잔틴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2세(Justinianus II.)가 705년 초 불가리아 칸 아스파룩의 후계자인 칸 트레벨(Khan Trevel)에게 피신하여 그의 도움으로 황제권을 다시 장악하였다. 이에 대한 대가로 비잔틴제국은 681년의 평화조약을 새로이 맺어 칸에게 황제(Caesar)칭호를 부여하였을 뿐 만 아니라 많은 선물을 주었다.(LMA, p. 916). 두 국가의 이와 같은 관계는 여러 차례 변화를 겪었지만 이를 통해 불가리아는 더욱 견고하게 발전하였다.
불가리아의 지배권은 739년까지 둘로(Dulo) 가문이 장악하였다. 칸 코르미소스(Khan Kormisos, 739-756)가 즉위하였고 8세기 중엽이 지나면서 두 국가의 관계는 위기로 치닫게 되었다. 불가리아는 자신의 영향력을 과신한 나머지 남쪽과 남서쪽의 슬라브 족을 공략하였다. 이들은 모에지아와 소 스키티아 지역에 살고 있던 슬라브 족과 혈연적으로 연계되어 있었다. 비잔틴 제국의 황제 콘스탄틴 5세(Konstantin V.)는 이 침략을 좌시하지 않고 756-775년까지 해상과 육로로 열 번 이상 불가리아를 공격하여 옛 영토를 회복하고 불가리아를 정복하려하였다. 이 전쟁에서의 패배로 불가리아의 정치적 불안정은 계속되었고 코르미소스가 퇴위한 이후에는 왕권마저 위태롭게 되었다.
이와 같은 위기 속에서 칸 카르담(Khan Kardam, 대략. 777-802)이 즉위하여 새로운 왕조가 건설되어 100년 이상 불가리아를 지배하였다. 칸 카르담은 다시 남쪽으로 공략을 시작하였으며, 803년 칸 크룸(Khan Krum, 803-814)이 즉위하여 카르파티아 산맥과 다뉴강 사이로 왕국을 팽창시켰다. 크룸은 칼 대제의 아바르제국 원정(795-796)이 있은 후 수년 뒤 804-805년 도나우 동편의 아바르 족을 공격하여 그들 영토의 일부를 점령하였고 수많은 사람들을 포로로 잡았다. 그는 법령을 만들어 법치를 함으로써 원불가리아 족과 슬라브 족 사이의 민족적인 갈등을 완화시켰다. 그의 집권말기에는 남쪽과 남서쪽으로 세력을 팽창하여 그 곳의 슬라브인 족을 그의 왕국민화 시켰다. 또한 809년 오늘날의 소피아인 세르디카(Serdica)요새를 점령하여 남서쪽으로 팽창의 길을 열어놓았다. 그러자 비잔틴제국의 니케포로스 1세 (Nikephoros I.)가 811년 대군을 이끌고 불가리아의 수도인 플리스카(Pliska)까지 진격하여 도시를 파괴하였다. 니케포로스 1세는 전쟁에서 이겨 많은 노획물을 얻어 귀국하였으나 도중 베리가바(Verigava, 오늘날 V?rbi?ki) 지역을 통과할 즈음 불가리아의 기습공격을 받아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그 후 크룸은 그의 남하정책을 지속하여 한때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기도 하였지만 814년 4월 갑작스런 죽음을 맞게 되고 불가리아의 정복전쟁은 끝이 나고 말았다.
그 후 아들 오무르탁(Omurtag, 814-831)이 뒤를 이었다. 오무르탁은 비잔틴제국과 30년간의 평화조약을 맺었고 이 조약으로 남쪽국경의 요새화와 플리스카 궁전의 확장을 꾀할 수 있었다. 또한 군사력을 강화하면서 특히 북서쪽 경계를 강화하였는데 이로써 프랑크 왕국의 남동쪽 팽창정책과 마주치는 것을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IV. 9세기의 불가리아와 비잔틴 제국, 프랑크 왕국과의 갈등과 협력
불가리아와 비잔틴 제국 사이의 갈등은 칸 크룸(Khan Krum, 803-814)의 재임기간에 당시 아바르 왕국이 멸망하여 가면서 야기된 슬라브 족, 불가리아 족, 프랑크 족과의 얽힌 관계 속에서 발생하였다. 프랑크 왕국은 788년 바이에른과 손을 잡고 남동쪽으로 팽창하여 아바르 왕국과 전투하여 승리하였다. 그리고 그 후 도나우 강 중류지역의 슬라브족의 세계로 힘을 뻗쳐 그들을 지배하려 하였지만 쉽지 않자 우회적으로 선교를 위한 설교와 복음을 전달하는 방법으로 그들의 목적을 실현하여갔다.2)
796년 슬라브 족 선교와 관련하여 주교회의가 열렸다. 칼 대제는 선교를 통해 슬라브족을 왕국에 동화시켜갈 것을 명령하였고 교황 레오 3세(Leo III, 795-816)는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3) 프랑크 왕국의 이와 같은 팽창은 슬라브족은 물론이거니와 불가리아와 비진틴제국에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여기서 당시 프랑크왕국의 남동유럽에서의 경계가 어디였는지를 살펴보자. 카롤링거 왕조의 남동유럽으로의 선교의 시작은 740년경부터 잘츠부르크(Salzburg)를 기점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탓실로 3세(Tassilo III.) 치하의 바이에른의 경계는 몬드제(Mondsee), 크렘스뮨스터(Kremsmünster), 마트제(Mattsee) 등 서부 오스트리아와 남티롤의 인니센(Innichen)이 형성하고 있었다. 이를 발판으로 카롤링거 왕국은 계속 동방으로 진출하였다.4)
클레벨(E. Klebel)에 의하면 9세기 전반부에 프랑크왕국의 남동쪽 경계가 형식적으로 드라우(Drau)와 도나우(Donau)강으로 여겨졌다. 실질 경계는 엔스(Enns)강으로 프랑크왕국 연대기에는 한번도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아바르와의 경계 limes avaricus"가 되었다.5) 그러나 카롤링거 시대의 왕포고령(Capitularia)에 따르면 프랑크왕국의 지배권은 전 판노니아(Pannonia)지역에 미쳤다. 다시 말하여 드라우와 도나우 강이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또한 805년 슬라브인들과 아바르인들의 나라들은 프랑크왕국에 속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판노니아지역은 프랑크왕국에 소속되어있지 않았다는 것이 보다 정확한 사실인 것 같다.
불가리아와 비잔틴제국의 전쟁에 관하여 살피기 전에 먼저 아바르 왕국과 불가리아와의 관계를 살펴보겠다. 몇 자료에 의하면 불가리아는 아바르 족을 완전히 파괴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프랑크 왕국이 아바르 왕국을 정복하였을 때 아바르 족의 일부가 불가리아의 허락 하에 도나우 강 중류의 불가리아 국경에 피신하여 지냈다. 이 아바르 족이 그 후 불가리아와 비잔틴제국의 전쟁에 불가리아를 위해 싸웠다.
797년 랑고바르드-바이에른 군대가 프리아울의 에리히(Erich von Friaul) 지휘 아래 판노니아로 쳐들어왔고, 프랑크 왕국의 피핀왕도 슬라브 족과 격전을 벌였지만, 타르사티카(Tarsatica / Trsat)의 주민들의 저항으로 이 지역의 총독이었던 프리아울의 에리히와 게롤드가 죽었다. 당시의 상황에 관하여 아인하르트는 그의 칼 대제 전기에서 칼의 동서인 게롤드가 아바르 족과의 전투에서 "누군가에 의해 incertum a quo" 살해되었다고 전한다.6) 그러나 제국연대기에서는 이 살해 사건에 관하여 침묵하고 있으며 단지 전장에서 명예롭게 전사하였다고 전하고 있다.7) 그 후 아바르 족이 프랑크왕국과 계속하여 전쟁을 하였는지 아니면 프랑크왕국이 그들의 저항을 막아내어 지배하였는지 알려진 바가 없지만 프랑크왕국이 아바르 족을 완전히 장악한 것은 803년으로 알려져 있다.
판노니아에서의 아바르 족의 저항에 대한 프랑크왕국의 실질적 보복전쟁은 802년에 시작되었다. 이 해에 카달로(Chadaloh)와 고테람(Gotearm)이라 불리는 두 명의 백작과 많은 전사들이 판노니아의 성(castellum Guntionis)에서 전사하였다.8) 그 이듬 해 803년 칼 대제는 바이에른으로 진군하여 그 곳에서 부대를 판노니아로 진군시키고 그 결과를 레겐스부르크(Regensburg)에서 기다렸다. 연대기들에서 수년간 사라졌던 프랑크왕국의 남동쪽에 관한 이야기가 803년에 아바르인 투둔(Tudun)9)의 투항을 내용으로 다시 등장한다. 이 기사에 의하면 투둔은 황제에게 수많은 슬라브인, 훈인 (multi Scalvi et Hunn)과 함께 굴복하였다고 한다.10) 이로 미루어 보아 아바르 족의 마지막 저항이 803년경에 끝난 것으로 보인다. 망국의 아바르 족은 슬라브 족의 구속을 받으며 살아가야 하였으며 프랑크 족의 보호를 받으며 그나마 종족적인 근거를 유지할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프랑크 족이 아바르 족을 정복하고 그들을 보호한 이유를 불가리아 때문으로 추정하여 볼 수 있다. 10세기 경에 작성된 수다(Suda) 문서에 의하면 칸 크룸(Khan Krum, 802-814)에 의해 아바르 족은 완전히 정복당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사실은 804년에 있었던 사실에 대한 기술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앞서 보았듯이 아바르 족은 803년 프랑크 족에 의해 정복당한 후 슬라브 족으로부터 압박을 받자 카프칸(Kapkhan) 집단이 프랑크 족에게 피신하였었기 때문이다. 아바르의 카프칸 테오도르는 그 후 805년 악헨(Aachen)으로 칼 대제를 찾아 슬라브 족의 침입에 대한 도움을 요청하였고 이 요청은 수락되었다. 그러나 그 후 얼마 있지 않고 테오도르가 죽자 이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이 사료를 통해 당시 프랑크 왕국의 국경에 대한 보다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오늘날과 같은 정확한 국경선은 없었지만 옛 로마의 군사도로였던 카르눈툼-사바리아(Carnuntum-Savaria)가 프랑크 왕국의 남동쪽 경계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테오도르 뒤를 이은 카간은 이와 같은 상황을 이용하여 칼 대제에게 한걸음 더 나아가 왕국건설을 허락하여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개종하여 아브라함(Abraham)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이 세례는 오늘날의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Wien) 지역에 있는 피솨(Fischa)에서 805년 9월 25일에 거행되었다.
이로 보아 빈에서 엔스강(Enns)까지 아바르 왕국이 지배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로르시(Lorch)에 옛 도로 통행세관이 있었던 것 또한 이와 같은 추정을 뒷받침 한다. 즉 아바르 왕국은 프랑크 왕국의 변방국가 즉 'provincia Avarorum'으로서 기능하였다. 다시 말하여 프랑크 왕국은 아바르 왕국을 슬라브인들로부터 보호하였고 이에 대한 대가를 지불받았다. 이와 같은 관계는 822년까지는 확실하게 성립되어 있었고 프랑크왕국에 대한 조공국가로서 아바르 왕국은 828년 최종적으로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문서에서 슬라브 족이 불가리아 족을 포함한 개념이라는 주장들이 있지만 이는 아직 많은 고찰이 필요하다. 불가리아는 당시 발칸반도의 남쪽, 남동쪽의 비잔틴 제국의 영역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이로 미루어보아 불가리아는 802년부터 814년까지 비잔틴제국과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불가리아의 침입으로 비잔틴제국의 황제 니케포로스 1세(Nikephoros I., 802-811)는 칼대제의 황제칭호로 심각하게 대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803년 두 지배자는 남부 이탈리아와 일리리아 해안지대가 비잔틴 제국령이라는 점에 합의하였다.
동으로는 불가리아로부터 서로는 아랍으로부터의 침입에 힘겨웠던 니케포로스 1세는 결국 프랑크왕국에 평화를 제의하기 위해 810년 악헨으로 사신을 보냈지만, 811년 불가리아와의 대규모 산악전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이렇듯 황제가 전사한 것은 콘스탄티노플이 성립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11) 이와 같은 사실은 당시 문서에서 쓰여진 슬라브 족에 불가리아인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칼 대제는 니케포로스 1세에 응답하여 그의 사신을 콘스탄티노플로 보냈다. 그러나 니케포로스의 아들 쉬타우라키우스(Stauracius)가 뒤를 이어 불가리아와 전투를 지속하였지만 중상을 입고 몇 달 후 죽고 말았다.12) 다음 황제 미카엘 1세(Michael I.)는 니케포로스의 사위로 강력한 힘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당시 문제시 하여오던 칼대제의 황제칭호를 인정하여줌으로써 프랑크왕국을 불가리아전에 끌어들이려 하였다. 그러나 칼 대제의 집권은 거의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고 814년 죽었다. 그가 죽은 후 프랑크 왕국은 내분되고 약화되었다.
여기서 불가리아의 성장은 프랑크 왕국과 비잔틴 제국사이에서 완충작용을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813년 레오 5세(Leo V., 813-820)가 비잔틴 제국의 황제에 오르면서 불가리아 공격에 대비하여 도시방어를 강화시켰다. 당시 불가리아 칸 크룸 또한 칼 대제와 마찬가지로 집권 말기에 있었으며 비잔틴제국이 방어를 강화하여 갈 때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817년 두 국가 사이에는 평화조약이 맺어졌고 불가리아의 칸 오무르탁(Khan Omurtag, 814-831)은 티모칸 족(Timo?ani), 브라니케브 족(Brani?ever), 아보드리트-프레데네켄트 족(Abodriten-Praedenecenten) 등 세 슬라브 족이 불가리아와 동맹관계를 끊고 프랑크왕국에 접근하였을 때 족장들을 축출하여 엄벌하였고 이 사건을 계기로 왕국은 더욱 견고한 국가기강을 확립하기 위해 융화정책을 펴갔다. 왕국 내부의 민족적인 갈등을 자신이 슬라브 족과 결혼하여 난 두 아들에게 슬라브 이름(Enravotha와 Zvinitsa)을 줌으로써 슬라브 족을 자연스럽게 동화시키려하였다. 불가리아는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보내진 선교사들을 박해하였으며 슬라브 족 포용정책을 통해 오늘날의 루마니아와 헝가리아 지역을 지배하면서 프랑크 왕국과 비잔틴 제국 사이에 큰 왕국을 발전시켰다.
818년 프랑크 왕국의 루드비히 경건왕은 여러 민족의 대표들을 헤리스탈리움(Heristallium)에서 맞이하였는데 그 중 불가리아와 동맹관계를 끊고 프랑크 왕국과 새로운 관계를 맺기 위해 그 곳에 온 티모칸 족(Timo?ani)이 있었다. 티모칸 족은 슬라브인으로 프랑크 왕국의 보호를 요구하였지만 그 이듬해인 819년 갑자기 노선을 바꾸어 판노니아 지역 크로아티아인의 통치자인 리유데빗(Ljudewit)의 반란(819-823)에 가담하였다. 이 때 프랑크 왕국은 이 반란에 개입하였고 불가리아는 티모칸 족과 다시 동맹관계를 맺으려 시도하였다. 이를 계기로 불가리아는 프랑크 왕국의 팽창에 맞서 싸우게 되었다.
불가리아와 프랑크왕국은 824년 2월에 처음으로 외교적인 접촉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불가리아의 사신들은 프랑크 왕국과 평화조약을 맺기 위하여 방문하였으며 프랑크 왕국의 왕은 이와 같은 뜻밖의 사절단의 저의를 파악하기 위해 바이에른 출신의 막켈름(Machelmum)을 불가리아 사신들과 함께 불가리아 칸 오무르탁에게 보냈다.
그 후 824년 12월 오무르탁은 사신을 다시 보냈으며 루드비히 경건왕은 이들을 접견하기에 앞서 불가리아인들과 이웃하여 다키아(Dacia)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아보드리트 족을 불러 불가리아 왕의 저의를 파악하려 하였다. 아보드리트 족은 불가리아의 부당성과 침략성을 호소하였으며 이로 말미암아 프랑크왕국의 왕은 불가리아 사신을 돌려보냈다. 루드비히 경건왕은 825년 5월 마침내 프랑크 왕국과 국경에 관한 논의를 하기 위해 악헨을 방문한 불가리아 사신을 맞이하였다.13) 당시 아보드리트 족의 서쪽 국경은 오늘날 바나트(Banat)지역에서 시작되는 도나우 강의 지류인 타이스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불가리아 왕 오무르탁은 826년 824년에 보냈던 사신대표를 다시 바이에른으로 보내 양국 사이의 국경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였고 이를 어길 시는 전쟁도 불사하겠노라 경고하였다. 그러나 판노니아와 아바르왕국과의 접경지대에 잇던 백작 발데리히(Balderich)와 게롤트(Gerold)는 불가리아군대의 침략가능성이 없음을 보고하였다. 그러나 그 이듬해(827년) 불가리아는 드라우강 계곡으로 침투하여 판노니아지역의 슬라브족을 복속시키고 총독을 두어 다스렸다. 이를 계기로 프랑크 왕국은 남동부 국경지대에 있는 프리아울 변경백작령을 4개의 백작구역으로 재조직하여 경계를 강화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곧 루드비히 경건왕이 불가리아를 침공하였지만 불가리아의 칸 오무르탁은 이에 굴하지 않고 판노니아 지역을 넘어서 지배권을 팽창시켰다. 양국간의 전쟁이 언제 끝났는지 알 수 없으나 829년에서 오무르탁이 죽은 해인 831년 사이에 평화조약이 맺어졌고 국경이 확실히 결정된 것으로 여겨진다.14)
양국 간의 전쟁은 불가리아가 도나우 중류에 진입하여 '나라'를 세운 후 그 지역의 슬라브인들을 복속시켜 가는 과정에서 일어난 충돌이었다. 불가리아의 침입에 힘입어 판노니아 의 거의 모든 크로아티아가 프랑크 왕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불가리아 칸 오무르탁의 바살이었던 라티미르(Ratimir, 829-838)의 지도 하에 자치정부를 수립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모라비아의 슬라브인들도 당시 정치적으로 독립할 좋은 기회를 얻었다. 이와 같은 슬라브 족의 독립화 과정은 칼 대제 이후 분열된 왕국의 약화와 불가리아 왕국의 성장에 힘입고 있었다. 불가리아 왕국은 바낫(Banat)과 스렘(Srem) 지역, 다시 말하여 오늘날의 벨그라드에서 도나우 강과 자베강(Save)사이에 위치한 시르미움(Sirmium, Serbia)에 이르는 지역에 대해1018/19년 비잔틴제국에 빼앗길 때까지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불가리아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발칸반도에서의 고립을 막고 비잔틴제국과의 분쟁에 효과적인 대처를 할 수 있었으며 중부유럽에서 프랑크왕국과 대등한 강력한 왕국을 수립하였다.
V. 불가리아의 기독교화와 국가의 정체성
9세기 중엽부터 시작된 동중부 유럽과 남동부 유럽의 기독교화는 그간 서유럽에서 진행되었던 기독교화와는 다른 차원에서 시작되었다. 즉 로마 가톨릭과 그리스 정교 사이의 경쟁 속에서 이루어졌는데 기독교가 슬라브인들의 영혼을 다투어 책임지려고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동프랑크 왕국은 남동부 유럽으로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서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동중부 유럽에 위치한 대모라비아 공국(830-907)의 선교에 앞장섰다. 프랑크왕국의 선교는 로마 교황과의 유대를 통해 798년 아바르 족의 선교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잘츠부르크 대주교구, 그리고 바이에른 주의 파사우(Passau)와 프라이징(Freising) 주교구 등을 중심으로 '칼 선교 Schwertmission'라고 불릴 정도로 정치적인 압박과 군사적인 무력이 동원된 것이었다.
이에 반하여 콘스탄티노플의 황제와 총대주교는 외교적인 여러 방법을 통하여 불가리아를 압박하였으며 오무르탁 이후의 칸들(말라미르(Malamir, 831-836), 페르지안(Persian, 836-852), 보리스(Boris, 852-889) 때 왕국은 크게 확장되었는데 특히 남동쪽, 다시 말하여 같은 슬라브 족이이 많이 거주하였던 곳으로 큰 저항 없이 확대되었다.
불가리아 왕국은 프랑크 왕국과 전쟁을 치룬 후 9세기 중엽까지도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845년 불가리아 사신들이 루드비히 독일왕이 있는 파데르본(Paderbon)으로 보내졌으며 이전의 평화조약이 재확인되었다.15) 불가리아는 프랑크왕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비잔틴제국과의 관계 또한 쉽게 할 수 있었다. 아울러 불가리아는 발칸반도에 기거하는 남동 슬라브인들을 하나로 묶어 성공적으로 통솔하였다. 852년 보리스가 집권한 후 잠시 동안 세르비아인과 분쟁이 있었고 세르비아의 승리로 끝났다. 862년 비잔틴제국이 대모라비아왕국과 손을 잡자 위협을 느낀 불가리아왕국은 동프랑크왕국과 손을 잡았다. 칸 보리스가 루드비히 독일왕(Ludwig der Deutsche)왕과 손을 잡는 다는 것은 동프랑크왕국 바이에른 교회의 선교를 허용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에 비잔틴 제국의 황제 미카엘리스 3세(Michaelis III.)가 원정하여 불가리아를 압박하여 864년경 30년 평화조약을 맺었고 보리스는 당시 자신의 대부 이름을 따라 미카엘리스라는 이름으로 영세를 받았다. 이에 따라 불가리아의 제후들과 국민들은 865년 초가을 공식적으로 정교를 받아들여야만 하였다. 불가리아는 콘스탄티노플 교회에 종속되어야 하였고 이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866년 로마 교회에 편지를 보내 접촉을 시도하였지만 결과적으로 성공을 거두지 못 하였다.16)
불가리아의 비잔틴제국과의 관계개선은 불가리아의 지배층이 내부문제, 다시 말하여 민족적 다양성을 극복하는 데에 집중하도록 하였다. 소수 지배층이었던 원불가리아 족은 수많은 전쟁으로 그 수가 갈수록 줄어들었고 그 자리는 슬라브 족으로 채워졌다. 그리고 주위 슬라브 지역이 왕국에 편입되면서 지배층의 슬라브화는 가속화 되었다. 제후와 평민들의 개종 후 예배언어로 슬라브어가 채택되었으며 불가리아는 870년 제8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로마교회 추진자들의 저항을 물리치고 동방정교를 받아들였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는 불가리아의 대주교 및 주교들을 임명하였다. 성 콘스탄티누스-키릴(Konstantinus-Kyrill)과 메토디우스(Methodius)에 의해 만들어진 슬라브어의 정착은 독립적인 슬라브 문학과 예배의례를 탄생시켰다. 슬라브 교회 제도의 발전은 불가리아의 슬라브화에 결정적으로 작용하였다.
보리스는 889년 그의 아들 블라디미르(Vladimir)에게 정권을 맡기고 수도원에 들어갔다. 블라디미르는 이교도들을 위한 정책을 폈고 동프랑크 왕국과의 유대를 통해 불가리아에서 비잔틴제국과 대모라비아 왕국의 영향력을 제거시키려하였다. 그의 이와 같은 정책은 이교도들을 잔인하게 탄압하였던 아버지 보리스의 정책에 반한 것이었다. 그래서 보리스는 893년 블라디미르를 밀어내고 작은 아들 시메온(Symeon)을 왕위에 올렸다. 왕국회의는 시메온을 왕으로 즉위시켰고 슬라브어를 공용어로, 프레슬라브(Preslav)를 왕국의 수도로 선언하였다. 시메온은 894-896년 비잔틴제국과 헝가리를 상대로 전쟁을 하였고 그 후 불가리아는 20년간의 평화 시기를 맞이하였다. 시메온은 콘스탄티노플에서 고급교육을 받았으며 학문 문학 예술을 촉진시키는 정책을 썼다. 수도 프레슬라브에는 화려한 건축물들이 지어졌고 불가리아는 시메온과 함께 문화의 전성시기를 맞이하였다.
VI. 맺음말
이상 불가리아의 형성과 발전과정을 살펴보면서 이 과정에 미치는 대외적인 환경과 문화적인 환경의 영향을 분석했다. 대외적인 환경으로는 비잔틴 제국과 프랑크 왕국과의 경쟁적 체계를 주목하였으며 불가리아가 이들과 대항하기도하고 이들과 협력하기도하면서 발칸반도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굳혀 나가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당시 프랑크 왕국은 서유럽을 형성시킨 후 동진을 시작하여 8세기 말 아바르제국이 멸망하자 보다 적극적으로 동진하였다. 아울러 비잔틴제국은 제국의 동쪽이 이슬람화 되면서 제국의 서쪽인 발칸에 대한 지배를 공고히 하려하였다. 여기에서 이 두 왕국과 불가리아와의 관계가 긴장국면으로 돌입하였음을 보았다.
불가리아 왕국의 중앙집권화는 칸 크룸(Khan Krum, 803-814) 재임기간에 강력하게 실시되었는데 이는 당시 불가리아가 가졌던 대외적 위협 하에 진행되었다. 즉 불가리아는 동쪽으로는 비잔틴제국, 서쪽으로는 프랑크왕국과 경계하여 두 대국 사이에서 살아남을 방도를 모색해야 했다.
칸 오무르탁은 중앙집권에 기반을 둔 강력한 선왕의 정책을 이어갔으며 민족적인 내부갈등을 융화와 포용정책으로 다스림으로써 기독교화로 정치적 통일을 이룬 비잔틴 제국과 프랑크 왕국 사이에서 강력한 군사력으로 국가의 기강을 확립하고 있었다. 오무르탁의 정책은 후왕들에게서도 지속되었다. 칸 보리스(Khan Boris, 852-889)는 다 종족으로 구성된 불가리아를 하나의 민족국가로 엮어 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865년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함으로써 종족적인 이질성을 극복하고 보다 강력한 정치적 통일성을 확립하려하였다. 다시 말하여 그는 슬라브 족과 원불가리아 족 사이의 인종적 문화적인 차이를 극복하고 하나의 강력한 정치적인 민족을 탄생시킴으로써 두 강국 사이에서 생존의 길을 모색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정치적 견지에서 불가리아의 기독교화는 서유럽의 기독교화와는 다르게 로마 카톨릭과 그리스 정교 사이의 경쟁적 관계 속에서 국익을 위해서 종교를 정략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또한 기독교화는 특히 다민족으로 형성된 불가리아의 민족 동질성과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아울러 9세기 비잔틴 제국과 프랑크 왕국 세력 사이에서 불가리아의 역할은 왕국의 생존을 위한 결정이었지 두 왕국을 갈라 놓는 다시 말하여 기독교 문화권을 로마 가톨릭과 그리스 정교 문화권으로 분리시키는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보는 입장에 따른 편견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다 민족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거대 세력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해가며 그 세력을 확장 시켜갔던 불가리아 왕국의 중세사는 당시의 국가와 민족의 형성과정에서 종교의 역할에 관한 좋은 역사적 사례를 제공한다. 아울러 강대국 사이에서 통일과 민족의 동일성 및 발전을 추구해야 하는 우리의 현대사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고 하겠다.
1 원불가리아 족은 튜르크계로 발칸반도에 진입하여 슬라브 족과 동화되는 때까지의 불가리아 족을 칭한다.
2 V. Gjuselev, "Bulgarisch-fränkische Beziehungen in der ersten Hälfte des 9. Jahrhunderts," Byzantino-Bulgarica(1966), pp. 14-39, pp. 17-18.
3 H. Dopsch, Geschichte Salzburgs. Stadt und Land I,1, Salzburg(1981), p. 163.
4 W. Pohl, Die Awaren. Ein Steppenvolk in Mitteleuropa 567-822 n. Chr., München 1988, p. 319 이하.
5 E. Klebel, Die Ostgrenze des karolingischen Reiches. Festschrift zum 70. Geburtstag O. Redlichs, Wien 1928, p. 353; Gjuselev, 앞의 책, p. 19.
6 Einhard, Vita Caroli 13, 182: Geroldus Baioariae praefectus, in Pannonia, cum contra Hunos proeliaturus aciem instrueret, incertum a quo, cum duobus tantum qui eum obequitantem ac singulos hortantem comitabantur, interfectus est. 비교: S. Abel / B. Simson(Ed.), Jahrbücher des Fränkischen Reiches unter Karl dem Groβen 2, Leipzig(1883), p. 189.
7 Annales regni Francorum inde ab a. 741 usque ad a. 829, qui dicuntur Annales Laurissenses maiores et Einhardi, MGH Scriptores rerum Germaicarum in usum scholarum separatim editi(이하 SRG) 6, ed. by F. Kurze, Hannover(1895), Nachdruck 1950(이하 ARF로 인용), p. 108: Eodem anno gens Avarum a fide, quam promisserat, defecit, et Ericus dux Foroiulensis post tot prospere gestas res iuxta Tharsaticam Liburniae civitatem insidiis oppidanorum oppressus est, et Geroldus comes, Baioariae praefectus, commisso contra Avares proelio cecidit.
8 Annales s. Emmerami maior, MGH Scriptores(이하 SS) 1, ed. by G. H. Pertz, Nachdruck Hannover 1976, a. 802, p. 93: Cadaloc et Goterhammus seu ceteri multi interfecti fuerunt ad ccastellum Guntionis. 이 성의 오늘날 위치에 관하여 Klebel, Ostgrenze, p. 4이하.
9 '투둔'은 프랑크인에 의해 임명된 아바르인 관리를 일컫는다. 여기에 관하여 참조: Pohl, Die Awaren, p. 300 이하.
10 ARF, p. 118; Einhardi Annales, MGH SS 1, a. 803, p. 191; Einhardi Fuldensis Annales, MGH SS 1, a 803, p. 353; Abel/Simson, Jahrbücher 2, p. 297; H. Wolfram, Die Geburt Mitteleuropas. Geschichte Österreichs vor seienr Entstehung, Wien 1987, pp. 263이하; Pohl, Die Awaren, p. 322. 아바르인은 문서에서 자주 훈인으로 표현되었으며 불가리아인 또한 훈인으로 불리어지곤 하였다.
11 I. Asimov, Constantinople. The Forgotten Empire, boston(1970), p. 147이하.
12 N. H. Baynes, The Byzantine Empire, Oxford Unniversity Press(1958), p. 50.
13 ARF, p. 167.: Quo cum peracta venatione fuisset reversus, Bulgaricam legationem audivit; erat enim de terminis ac finibus inter Bulgaros ac Francos constituendis.
14 Annalista Saxo, MGH SS VI, ed. by G. H Pertz, Nachdruck Stuttgart 1980, anno 832, p. 574: Legati Bulgarorum cum muneribus venerunt. 이 연대기에서 말하는 832년의 기사 "불가리아인들이 선물과 함께 왔다"는 기사를 두고 양국 사이의 평화가 그 이전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지만, 정확하게 언제인지에 관하여는 이견이 있다. 비교: S. G. Evans는 그의 저서 A Short History of Bulgaria, London 1960, p. 39에서 832년까지 불가리아의 주도 하에 평화가 지속된 것으로 적고 있는 반면, W. Geier는 그의 저서 Bulgarien zwischen West und Ost vom 7. bis 20. Jahrhundert. Sozial- und kulturhistorisch bedeutsame Epochen, Ereignisse und Gestalten, Wiesbaden 2001, p. 44에서 평화조약이 827~829년 사이에 맺어졌다고 적고 있다.
15 Annales Fuldenses, MGH SS 1, G. H. Pertz(Ed.), Nachdruck, Hannover 1976, a. 845, p. 364: tempore vero autumni in Saxonia apud Padrabrunnon generale placitum habuit, ubi fratrum suorum et Nordmannorum, Sclavorum quoque et Bulgarorum, legationes suscepit, audivit et absolvit.
16 Nicolai I. papae epistolae, ed. E. Perels, MGH Epp. VI, München 1978, pp. 568-600: 이 문서는 교황 니콜라우스 1세가 불가리아 칸 보리스의 질문에 대답하는 편지형식의 문서이다. 이는 칸 보리스가 불가리아의 기독교화와 관련하여 보낸 115가지의 질문에 니콜라우스 1세가 도서관장 아나스타시우스(Anastasius)의 도움으로 106가지 대답을 866년 11월 13일 불가리아 사신들과 그들을 동반한 교황사절단에게 각각 건네주었던 것이다. 교황의 수장권과 관련한 비잔틴과의 경쟁적인 선교활동에 관한 중요한 자료이며 당시 불가리아의 삶, 풍습, 문화와 국가체제에 관하여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 편지의 내용 중 핵심은 교회 설립을 위한 불가리아의 요구에 대한 로마 교황의 조심스러운 반응이다. 여기에 관하여 V. Gjuzelev, Art. "Responsa Nicolai I. papae consulta Bulgarorum", LMA 7, p. 759; H. Zimmermann, Das Papsttum im Mittelalter, Stutgart 1981, p. 88이하.
출처: http://mahan.wonkwang.ac.kr/medsociety/summery/bulgaria.ht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