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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JESUSONE 원문보기 글쓴이: 제이원
시편 15:1~5 주의 장막에 거할 자 2020. 9. 2
1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2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3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4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5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
본문 1절입니다. 여호와께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가 누구이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가 누구인지를 묻습니다. 주의 장막이나 주의 성산은 같은 뜻입니다. 주님이 거하시는 곳이기에 거룩한 산이고 거룩한 장막이 됩니다. 성경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직접 뵙게 되면 죄인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죄인이 여호와를 보고 살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거룩한 주님과 누가 함께 살겠느냐고 질문합니다.
여기서 대면예배, 비대면 예배라는 말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코로나19 사태로 이 말을 모르는 국민이 없을 정도입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비대면 예배는 예배가 아니기에 코로나에 걸려 죽어도 성도는 죽으면 천국이기에 목숨을 걸고 대면예배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런 말을 하는 자들로 인하여 교회가 온갖 욕을 얻어먹고 있다고 하면서 비대면 예배가 이웃사랑이며 성경적이라고 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여기서 대면이나 비대면 이라는 말은 목사와 성도들이 또는 교인과 교인이 서로 대면하느냐 아니냐는 것으로 구별합니다. 교회든 정부든 이런 개념이라면 성경의 대면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여호와를 보고 살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대면이 무엇인지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에서 믿음의 조상이라면 아브라함을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실 때에 처음에는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창12:1~4). 그 다음에는 환상으로도 말씀하십니다(15:1). 그런데 직접 나타나셔서 말씀도 하십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말씀하실 때에는 사람의 모습으로 낮추어 오셨습니다(창18:1~5). 아브라함은 그분이 여호와인줄 모르고 나그네 대접하듯이 친절하게 대접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3:2절에서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영광의 모습으로 대면하면 아브라함도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창세기 32:29~31절입니다. “29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30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2)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31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야곱이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았으나 죽지 않았다고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하나님께서 영광의 본체로 야곱을 대면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자라고 합니다(32:1). 여호와를 직접 대면한 것이 아니지만 그 사자를 통하여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자를 보고 죽지 않은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어 만나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름이 바뀌는 것은 옛 사람 야곱이 죽고 새 사람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그 흔적으로 평생 장애인으로 살아갑니다.
출애굽기 33:10~11절입니다. “모든 백성이 회막 문에 구름 기둥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 문에 서서 예배하며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모세가 회막에 나가서 여호와를 대면할 때에 모든 백성들은 장막 문에 서서 예배합니다. 여기서는 여호와께서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대면도 여호와께서 자기를 낮추어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이지 그 영광의 광체를 직접 본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모세도 죽습니다.
출애굽기 33:18~23절입니다.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모세조차 여호와의 영광을 직접 뵙게 되면 죽습니다. 출애굽기의 이 말씀은 구약 전체에서 도도히 흐르고 있습니다.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도 주의 사자를 보고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라고 합니다(삿13:22). 기드온도 여호와의 사자를 만나서 사사로 세움을 받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여호와의 본체의 영광이 아닌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지만 죽는다고 합니다. 그러자 여호와의 사자가 죽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기드온이 쌓은 제단이 여호와 살롬입니다(삿6:24). 살롬이 유대인들의 인사말 이지만 이것은 여호와를 뵙고도 죽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거룩하신 여호와의 장막에, 그 거룩한 주의 산에서 누가 함께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본문 2~5절을 표준 새 번역으로 봅니다. “2 깨끗한 삶을 사는 사람,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 마음으로 진실을 말하는 사람, 3 혀를 놀려 남의 허물 들추지 않는 사람,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 친구를 모욕하지 않는 사람, 4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는 자는 경멸하고 주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존경하면서, 맹세한 것은 해가 되더라도 변함없이 지키는 사람입니다. 5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않으며, 무죄한 사람을 해칠세라 뇌물을 받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목록으로는 10가지입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은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함께 살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 각자에게 질문을 해 봅시다. 이 말씀대로 살아가십니까? 한 문제가 10점이라고 생각하고 자기의 점수를 채점해 보시기 바랍니다. 채점하기 전에 하나님의 채점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며 절대적이시기에 완벽하여야 됩니다.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와 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방식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채점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중에 한 가지라도 어기면 모든 것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약2:10). 시간을 좀 드리겠습니다. 몇 점이나 나왔습니까? 저는 영점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장막에 살 자격이 없습니다.
시편 14:2~3절입니다. “2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3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지난주에 본 말씀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이 성경의 결론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주신 것은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두어 죄를 알게 하셔서 유일하게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려고 율법을 주셨습니다. 선지자들의 글과 시편도 그리스도를 증거 합니다(눅24:44).
오늘 본문 시편 15편은 어떻게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까? 시편 14편과 연결하여 보면 어떤 인간도 이렇게 살아낼 자가 없습니다. 세상의 상대적인 평가는 거룩하시고 절대적인 하나님 앞에서 통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타락한 인간은 도토리 키 재기 하듯이 자기의 행위에 점수를 후하게 줍니다. 자신의 약함과 악함은 어쩔 수 없었다고 하면서, 타인의 약함과 악함을 보면서는 어떻게 그렇게 나쁜 짓을 할 수 있느냐며 분노합니다. 우리가 성경의 말씀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과 같고 우리의 속생각을 드러내는 예리한 칼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로 말씀을 보게 되면 남의 눈의 티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눈에 들보가 보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자신의 죄를 알게 되기에 이런 말씀을 완벽하게 이루어내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을 대입하여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거하며 주의 성산에 살자가 누구입니까? 예수님만이 정직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마음에 진실을 말합니다. 예수님만이 남을 허물하지 않고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고 비방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셨기에 십자가를 지십니다. 예수님은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십니다. 예수님만이 흔들리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와 함께 사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자격을 자기를 위하여 사용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순종하지 못하여 저주를 받아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 수 없는 자들에게 그 자격을 나누어주십니다.
요한복음 5:20~25절입니다. “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2)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날이 안식일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과 시편까지 자기들이 실천한다고 하는 자들이 예수님께 왜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었느냐고 비난 합니다. 38년을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그 사람의 고통은 아랑곳 하지 않고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율법의 조문을 지키는 것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내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십니다. 참된 안식을 예수님이 이루고 계신다는 말씀을 합니다.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을 신성모독이라고 하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가 하시는 모든 심판과 생명을 살리는 권한을 위임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살리시는 일을 자기 죽음으로 이루어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으로 우리의 죄를 알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누가복음 24:44~48절입니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들이 쓴 글과 시편에서 기록한 예수님에 대한 말씀이 이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이 아니라 승천과 성령 보내심까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성령이 임하게 되자 제자들이 복음을 전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성령 보내심과 재림까지 전하게 됩니다. 이들은 시편의 말씀도 예수님 중심으로 해석을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도 인간의 불가능성을 드러내면서 예수님의 성취를 증거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죄인이 용서를 받고 거룩하신 주와 함께 영원히 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5장의 말씀대로 예수님을 믿는 자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묵시적으로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아났고 하늘에 까지 앉혀진 자들입니다(엡2:4~6). 그러나 역사적으로 아직 우리가 이 땅에서 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몸의 구속이 일어날 때까지 탄식하며 살지만(롬8:23) 성도는 이 땅에서 부분적이지만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그 나라를 맛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 15편의 삶을 성도들이 이 역사 속에서도 맛보고 삽니다. 그런 곳을 교회라고 합니다. 이런 교회란 예수님의 피로 구속한 성도들이기에 성도들 안에서 이런 내용을 부분적으로 맛을 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 성령이 임하고 나니 자기의 것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주의 장막에 거하다는 것이나 주의 성산에 거한다는 말은 거룩하신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이 영원하신 분이시기에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이 영생입니다. 이런 모습이 구약에서는 어떻게 묘사되고 있습니까?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11:9)”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사65:25)” 그러므로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라고 찬양을 합니다(시84:1).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의 천 날 보다 낫다고 합니다.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시84:10). 주님의 나라는 어떤 차별이나 줄 세우기가 없습니다. 해함과 상함이 없는 참된 평화의 나라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를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다 이루시고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과 거할 자격을 은혜로 주셨습니다. 그 은혜를 받은 자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란 하나님의 나라를 함께 받은 자들입니다. 이들을 권속(眷屬) 곧 식구라고 합니다. 우리가 죄인이라서 한 집에서 밥을 먹는 식구라도 내 것 네 것을 따집니다만 예수님의 피로 만들어진 새 하늘과 새 땅의 백성들은 네 것 내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충만함임을 초대교회가 보여주었습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가득한 곳이 천국입니다. 이런 곳은 해함과 상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삶의 추구가 아니라 자기를 확대시키려고 모이는 곳이 교회라면 그런 곳이 바알의 신전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이 땅에서 자기의 이름과 자존심이 무너지고 그리스도가 자리 잡는 과정이기에 눈물골짜기 더듬으면서 갑니다. 그러나 그 끝은 주와 함께 영원히 살게 될 자들입니다.
요한계시록 21:1~4절입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주의 장막에 거할 자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 그리스도의 신부가 됩니다. 그들 위에 하나님의 장막이 함께 합니다. 이 말씀을 은혜로 믿게 된 자들은 눈에 보이는 세상의 눈물과 애통과 곡하는 것도 잠시 지나가는 것에 불과함을 압니다. 예수님을 믿어 죄 사함을 받은 자들의 복이 이렇게 어마어마한 겁니다. 이러한 자들은 주님을 대면하여 보고 살 그날을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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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JESUSONE 원문보기 글쓴이: 제이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