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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그다음 날 열 시쯤 기철이 방을 얻은 모텔 근처에서 만나 경숙의 뜻에 따라 택시를 타고 속초를 지나 간성 쪽으로 올라갔다.
집을 나오기 전 경숙은 또 여러 번 망설였다.
이렇게 자기가 기철을 만나러 가는 것이 잘하는 것인지 하고
그러나 안 가면 영 기철을 못 보게 되고 그러면 무엇인가 소중한 것을 놓치게 될 것 같은 생각 귀한 것을 잃게 된다는 생각이 경숙을 모텔까지 오게 한 것이다.
기철과 같이 택시를 타고 가며 경숙은 무슨 죄를 짓는 것 같은 생각도 없지 않지만, 그보다는 자기의 삶이 새롭게 피어나는 것 같다는 느낌이 크다.
삼 일 전만 하더라도 남자와 같이 택시를 타고 어디를 간다는 것은 전연 생각도 못 했고 자신의 마음이 한 남자를 향해 이렇게 소녀처럼 흔들릴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도로 양편으로 펼쳐지는 경치들이 모두 새롭게 보인다.
사람의 감정은 막혔던 둑과 같아서 무너져 흐르기 시작하면 거침이 없는 것인가? 그 둑이 높고 큰 수록
기철은 같이하면 할수록 죽은 남편과 비슷한 분위기 자기를 늘 우선으로 생각하던 그런 분위기와 또 다른 신선함이 그리고 우수에 잠긴 것 같은 분위기가 이상하게 경숙의 보호 본능을 자극하며 경숙은 조금씩 기철에게로 마음이 기우는 것을 막지 못한다.
기철도 마음이 즐겁기는 마찬가지다.
자기가 누구이며 무엇을 하던 사람이고 어떻게 살았는지 전연 모르는 처음 만난 그 사람, 그 사람이 여인이고 이렇게 만나자는 데이트 신청에 응한 것을 보면 그 여인이 자기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자기도 그 여인에게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이렇게 삶을 새롭게 하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아니 어쩜 현재까지 한 여자만을 바라보고 살던 남자가 우연한 기회에 다른 여자를 만나 그 여자에게서 색다른 매력을 느꼈 거기에 빠지는 것인지 모른다.
간성 쪽으로 올라가던 택시를 어느 해변 조용한 횟집 앞에서 세운 것도 경숙이다. 겨울이라 별로 손님이 없는 외진 해변 음식점에 손님이라고는 기철네 뿐이다.
바다가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음식을 주문하고 저만치서 밀려오고 밀려가는 파도를 바라보고 있던 경숙은
“웬 한숨을 그렇게 쉬십니까?”
하는 기철의 말에 정신을 차린다.
오랜만에 조용히 바다를 바라보는 감회에 아니 남편이 죽은 후 처음에는 실감이 나지 않아 살아서 돌아올 것 같은 남편을 기다리며 수없이 나아가 바라보던 바다, 그리고 끝내 남편이 안 나타나자, 회한이 쌓여 바닷가에 살면서도 의식적으로 피하던 바다를 이렇게 편안한 마음으로 다시 바라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 못 했던 경숙이 감회에 젖어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나보다.
“내가 한숨을 쉬었어요?”
“그래요. 그것도 땅이 꺼지게.”
“그랬군요. 오랜만에 보는 바다가 감회에 젖게 했나 봐요.”
“바닷가에 살면서 바다를 오랜만에 본다?”
“그럴 일이 있어요. 아참! 그런데 어제 같이 온 그 어부 아저씨는 어떻게 알아요?”
어색해지는 분위기를 바꾸려고 경숙이 얼른 그동안 궁금했던 것을 묻는다.
“그쪽이---.”
“내 이름은 경숙이에요. 이 경숙.”
기철이 자기의 호칭 때문에 머뭇거리자 얼른 자기의 이름을 가르쳐 준다.
“아! 네! 내 이름은 박 기철.”
이렇게 서로의 이름을 가르쳐 주며 둘이는 미팅하는 대학생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며 신선함을 느낀다.
‘박 기철’ 경숙은 속으로 기철의 이름을 되뇌어 본다.
그리곤 “그런데요?”하고 묻는다.
“무슨 말?”
“어부 아저씨와는 어떻게 아는 사이냐고요?”
“아! 그거! 경숙씨가 소개해 주었잖아요?”
“농담 그만하시고, 말 해봐요. 두 분이 어떻게 알게 됐는지.”
“정말! 경숙씨가 소개해 준 것이나 마찬가지에요.”
“아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래서 기철은 어부와 같이 술을 먹게 된 사연과 거기서 자기가 경숙의 죽은 남편과 닮았다는 소리를 듣고 이상하게 가슴에서 일어나는 경숙에게 연민과 또한 호기심으로 다시 경숙의 가게를 찾아 술을 먹게 해 달라고 떼를 쓴 이야기를 했다.
“그것이 어째 내가 어부 아저씨를 기철씨에게 소개한 것이 돼요? 그렇게 나에 관한 이야기를 다 듣고 그리곤 내게 남편이 어디 갔느냐고 물었어요?”
말을 다 듣고 경숙이 샐쭉해져서 묻는다.
“경숙씨가 ‘살려고 심하게 경쟁하는 대열에 함께 끼어 복닥거리기는 것이 싫어요. 그냥 주어지는 대로 살고 싶어요,’와 같은 인생을 달관한 것 같은 말을 하지 않았어도 내가 그렇게 경숙씨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터이고 그러면 어부 아저씨를 안 찾아갔을 테니까 내가 어부 아저씨를 찾아간 것은 순전히 경숙씨 때문이라고요. 그리고 그림 이야기를 할 때 남편과 둘이 같이 그린 그림이라고 하는 말을 듣고 순간적으로 남편과 많이 다정했나보다 하는 생각에 심술이 나 그렇게 말한 것 같아요. 미안해요. 나중에 나도 많이 후회했어요.”
기철은 미안한 마음에 길게 설명을 한다.
“미안해 할 것까지는 없는데, 별난 논리가 다 있네요. 그런데 기철씨의 말을 듣고 나니 기철씨의 행동이 모두가 계획적이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 안 그런가요?”
경숙의 말에 다소 섭섭함이 배어있다.
“솔찍히 말해 반은 계획적 이였지만 반은 ---.”
“그럼 반은요?”
“반은 아까도 말했지만 내가 경숙씨 남편과 닮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경숙씨에 대한 연민과 그런 경숙씨를 보듬고 싶은 마음이 컸다고 하면---”
“내가 그렇게 외로워 보였어요?”
“외로워 보였다기보다 비 맞아 떨고 있는 참새 같다고 할까?”
“피! 거짓말!”
“정말이예요. 내게는.”
그 말에 다소 마음이 풀린 경숙이
“그럼 우리 집에서 술에 취해 잔 것은요? 그것도 계획적이었나요?”
하고 물었다.
“아니오. 그것은 정말 우연이에요.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그날은 좀 지치고 술이 많이 취했었어요. 그래서 나도 모르게”
“정말이에요?”
“정말! 하늘에 걸고 맹세하지요.?”
“사람을 못 믿는데 하늘을 어떻게 믿어요?”
“그럼, 어떻게 하면 믿어 주겠어요?”
“알았어요. 그것이 계획적이었다고 해도 또 우연이라고 해도 이제는 돌이킬 수는 없지요”
이렇게 말을 한 경숙이 또 엷은 한숨을 쉰다.
어떤 일이 계기가 되어 두 사람이 가까이 되었든 아직 사랑이라고 까지는 아니더라도 서로에게 깊은 호감을 가지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렇게 된 지금에 그것이 계획적이었냐 아니냐가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그런데 기철은 오십 대가 훨씬 넘었고 차림으로 보아 분명히 가정이 있는 사람이다.
아니 기철의 모습에서 가정이 있는 사람이라는 냄새가 난다.
10여 년간 음식 장사를 하며 많은 손님을 겪어본 경험으로
기철은 오늘이 될지 내일이 될지 모르지만, 가정으로 돌아가야 할 사람이다.
아니 혹 안 돌아간다고 고집을 해도 자기가 설득하여 돌려보내야 할 사람이다.
그렇게 해서 기철이 떠나고 나면 다시 옛날의 황량한 생활로 돌아가야 한다.
그 쓸쓸하고 외로운 생활을 다시 해야 한다는 생각이 경숙을 괴롭게 하고 기철을 보기 전에는 남편은 죽은 사람이라 체념하며 그냥 세월에 떠밀리며 살아왔는데 이제 잠시 기철과의 만남으로 많은 세월을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살아가야 하는 처지가 된 자기가, 더욱이 그 상대는 엄연히 같은 하늘 아래서 숨을 쉬고 있기에 목이 메는 보고 싶음과 기약 없는 기다림을 어떻게 감당하나 하는 생각이 들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지난 10여 년간의 고독이 지금 자기를 그렇게 몰고 가는 아닌가 하는 생각에 자기가 처량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공연한 일을 시작한 것 같은 후회의 감정이 한숨으로 표현된 것이다.
그러나 당장 헤어나기에는 기철에게로 기울어진 마음의 추가 이미 너무 무거워졌다.
이야기 끝에 또다시 한숨을 쉬는 경숙을 보고 경숙이 지난날에 대한 깊은 회한에 잠기는 것 같아 안쓰러운 생각이 든 기철은 자기가 경숙의 상처를 싸안았으면 좋겠다는, 아니 싸안아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잠시 침묵하던 기철이 이렇게 말을 시작한다.
“경숙씨! 우리의 만남이 얼마 안 돼 경숙씨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그리고 또 우리의 만남이 얼마 동안 계속될지 모르지만 내가 경숙씨 곁에 있는 동안이나마 경숙씨를 따뜻하게 감싸주고 싶소. 내가 경숙씨의 죽은 남편과 닮았다는 것은 어쩌면 내게 그런 책임이 있다는 것인지도 모르는 것 아니겠소.”
“사람이 닮았다는 것만 가지고 그렇게 생각한다면 세상의 닮은 사람은 모두 그런 책임이 있게요.”
경숙이 웃으며 말한다.
“내가 좀 거창하게 말했나. 진진하게 이야기하려다 보니 그렇게 되었소. 하여튼 내 생각은 그래요.”
“고마워요. 그리고 얼마가 될지 모르는 기간 동안 우리의 만남이 진실하기 바래요.”
경숙은 진정어린 마음으로 이 말을 한다.
“고맙소. 최선을 다 하리다.”
하며 기철이 경숙의 손을 잡는다.
자기의 손을 잡는 기철을 보며 경숙은 둑이 무너진 강물처럼 흐르는 자기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한다.
그러면서 억제하지 못하는 감정이라면 지금의 감정에 충실하고 나중에 후회하지는 말자고 그리고 이 일로 고통이 생기면 오늘의 즐거움에 대가라고 생각하자고 마음을 다진다.
그때 마침 음식이 들어왔다.
점심 후 둘이는 바닷가로 나갔다.
오늘은 겨울답지 않게 따뜻하여 바닷가에 있을 만하다.
바닷가 바위틈 양지바른 곳에 앉으니, 봄날같이 따사롭다.
경숙이 먼저 말을 꺼냈다.
“참 어제저녁 나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했는데. 무슨 이야기에요.”
어제저녁 전화를 할 때 기철은 경숙이를 만나 자기의 사연을 이야기하려고 했다.
그렇게 해서 경숙의 이해를 받고, 그리고 자기가 경숙을 좋아하게 됐다고 고백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경숙이 이렇게 물으니까 조금 난감한 생각이 든다.
내가 우울증 환자라면 그래서 세상을 피해 도망하듯 강릉에 왔다면 경숙이 어떻게 생각할까?
자기의 불분명한 미래와 자기가 우울증 환자라고 한다면 경숙은 내가 자기를 희롱하려고 아니 온전치 못한 정신 때문에 병적으로 접근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래서 못처럼 기적적으로 둘 사이에 쌓여 온 감정이 깨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그래서 어른
“별 것 아니에요.”한다.
“어제는 할 이야기가 있다며 만나자고 그렇게 떼를 쓰고선.”
“그냥 경숙씨를 만나고 싶어서 한 말이에요.”
“참! 기철씨도---” 하며 경숙이 미소를 짓는다.
그 미소를 흐뭇한 마음으로 바라보던 기철이
“어부 아저씨의 이야기를 들으니 경숙씨의 삶이 평탄지 않은 것 같더군요.”
“누구나 한평생의 삶이 평탄하기만 하겠어요?”
“그렇기는 하지요. 그러니까 참! 경숙가 어떤 생활을 해왔을까 궁금한데.”
“궁금한 것도 많으시네.”
“그러지 말고 이야기해 봐요.”
“이야기 하자면 길지요.”
“그러니까 그 이야기 좀 들려주시겠어요?”
“갑자기 왜 그런 이야기를---”
“그러면 나도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된 사연을 이야기 해 주리다.”
자기 이야기를 경숙에게 하고 이해와 양해를 구하기로 마음먹은 기철이 자기 이야기를 하기 전에 우선 경숙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 보고 싶은 생각에 이렇게 제안했다.
“기철씨도 무슨 사연이 있어요?”
“세상에 사연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소”
“하긴 그래요. 그럼 먼저 해보세요.”
“내가 먼저 부탁했잖아요. 먼저 해 주세요”
그런 말을 하는 동안 주마등 같이 지나가는 각자 자기의 삶을 생각하느라 그들 사이에 잠시 침묵이 자리한다.
“이야기 해봐요.”
그 침묵을 기철이 깬다.
“무슨 이야기요? 다 아시지 않아요?”
“경숙씨의 지내온 일을 모두 다 아는 것은 아니죠. 경숙씨 남편이 죽었다는 것, 그 남편이 나와 닮았다는 것, 아이가 없다는 것. 바닷가에서 허름한 음식점을 한다는 것, 그것 뿐 이잖아요?”
“그거면 됐지 무얼 더”
“그 전에 경숙씨 이야기. 경숙씨가 지내온 생활 이야기와 남편이 어쩌다 돌아가시게 됐는지 하는 것들.”
“욕심도 사나우시네. 남의 과거는 그렇게 속속들이 알아 무얼 하시게요?”
“상대를 좋아한다면 상대의 과거까지도 모두 알고 그 과거까지 이해하고 좋아해야 되는 것 아니에요?”
이 말은 기철이 자기의 과거를 이야기하였을 때 경숙이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덧붙였는지 모르겠다.
“피할 수 없게 만드시는 군요.”
이렇게 해서 경숙이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 이번 회가 너무 늦었지요
미안합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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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감하고 감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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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9월 중순인데도 더위가 식을 줄 모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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