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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11장45~57절/예수를 죽이려고 모함하는 사람들
우리는 주변에서 두 부류의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 부류는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항상 밝고 긍정적이며 미래지향적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다른 한 부류는 어떤 일에서든지 항상 어둡고 부정적이며 과거 지향적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긍정적인 사람은 어떤 어려움이나 슬픔을 당해도 좋은 방향으로 해석하고 희망적으로 받아들입니다. 반면에 부정적인 사람은 어떤 기쁨이나 행복이 와도 나쁜 방향으로 해석하고 절망적으로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전자에 속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아 성령 안에 거한다면 언제나 희망입니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생각합니다. 적극적인 생각은 믿음을 낳지는 않지만, 믿음은 적극적인 생각을 낳고 죽음마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장례를 지낸 나사로가 살려내는 표적을 들어내 주셨습니다. 나사로가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세 가지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에 도착하셔서 ‘무덤을 막고 있는 무겁고 큰 돌문을 옮겨놓아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실 때 언제나 먼저 장애물을 제거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에서 기적을 베푸시려 할 때 돌문이 막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돌문을 옮기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무덤에 함께 온 사람들은 이 말씀을 잘 듣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39절에 마르다도 예수님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항상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기적을 베푸시고 복을 주시길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장애물이 있습니다. 즉시 우리는 그 장애물들을 치워야 합니다. 주님의 복을 받는 사람들의 집을 방문해 보면 언제나 깨끗합니다. 자신이 복을 받을 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고 힘들게 살아도 항상 바른 자세와 자부심을 흩뜨리지 않습니다. 자신이 주님의 복을 받을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영적자세가 중요합니다. 우리의 영적자세는 항상 밝고 긍정적이며 미래지향적이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무덤의 돌문을 옮겨 놓자, 예수님께서 무덤을 향해 큰 소리로 명령합니다.“나사로야 나오라” 이것이 두 번째로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향해 큰 소리로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기적은 하나님께서 만드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도록 믿음으로 장애물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야 나오라”하고 외쳤을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어둠의 세력들에게 명령하십니다. ‘더러운 귀신들아, 어둠의 세력들아, 물러가라!’ 예수님께서 명령하실 때 모든 저주들은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드디어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그는 걸어서 무덤 밖으로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명령하셨습니다. ‘나사로의 얼굴에 감겨 있는 수건을 벗겨서 자유롭게 다니게 하라’. 우리는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도 세상의 습관, 문화, 가치관에 얽매여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끊어버리고 믿음의 사람이 되어 당당하게 세상으로 나아가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죽어서 나흘 동안 무덤에 갇혀 있던 나사로가 살아나 무덤 밖으로 걸어 나왔을 때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만약 우리가 현장에 있었다면 크게 비명을 질렀을지도 모릅니다. 나사로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와! 예수님은 특별하신 분이구나.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는 분이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 말씀을 보면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나사로의 부활에 세 가지로 반응했습니다.
첫째는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는 현장을 목격하고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며 놀라운 은혜에 동참하는 무리들입니다.
45절에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저를 믿었으나.”
나사로의 무덤 앞에 있던 유대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 눈앞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볼 때 죽은 사람이 살아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나 얼굴에 수건을 감은 채 무덤 밖으로 나온 것입니다.
신앙에는 이성의 요소와 믿음의 요소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성적으로 진실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이성이 믿음의 전부는 아닙니다. 이성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이성으로 사람이 변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성의 문을 통과하면 하나님의 영이 사로잡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사람의 이성이나 상식으로 나사로의 부활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직접 기적의 현장을 보았고,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현장에 있었던 모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의 능력이 나타나 구원을 얻게 하는 곳에 사단의 방해도 심해지기 때문입니다.
46절에서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하신 일을 부정하려는 사람들입니다.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의 하신 일을 알리니라.”
나사로의 부활을 본 사람들 중에 마리아에게 간 사람들도 있었고, 바리새인들에게 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과 능력에 몹시 불편해 했습니다. 그런데 나사로가 살아난 것이 사실이지만, 유대인들이 바리새인들을 찾아간 이유는 아직도 그들에게 부정적인 생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유대인들은 바리새인들의 눈치를 보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을 찾아간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대로 말하지 않고 아마 축소했을 것입니다. 아니면 바리새인들의 비유를 맞추려고 빈정대듯 말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두 번째 무리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부정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믿겠다고 말하지도 못하는 회의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의 하시는 일을 보고 그 능력에 매우 놀랐을 것이나 이것을 믿음으로 발전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께 적대적인 행위를 한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47~48절에서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자들입니다.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가로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회의를 소집해 ‘예수라는 사람이 기적과 표적을 많이 행하니 아주 골치 아프구나. 기적을 많이 행하면 사람들이 그를 따르고 믿게 될 터인데, 이는 종교적으로 큰 위기를 초래할 것이다’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라는 사람이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며 죽은 사람을 살리는 바람에 종교적 질서를 망가뜨리고 우리의 기득권을 뿌리째 흔들어 놓고 있다’고 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진리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신 일에 아주 무관심했습니다. 오로지 그들의 관심은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에만 있었습니다. 그들의 또 다른 관심은 정치적인 것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로마 사람들로부터 분할 통치권을 위임받아 백성들을 통치하고 있었는데, 만약 이것이 뒤집혀지는 날에는 자신들의 입지가 궁색해지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님에 대한 회의적이고 부정적인 생각과 다른 차원입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입장은 예수라는 사람을 잡아다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 부류의 사람들 중에 어디에 속해 있습니까? 물론 세 번째 부류의 사람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미 우리는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삶의 의미와 목적이 되어 주신 주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어야 복 받은 사람입니다.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생각으로 가득 찬 유대인들은 기적을 목격하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교회에 나오지만 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들과 별반 다름이 없습니다. 한 발은 세상에, 한 발은 교회에 두고 있습니다. 예배에 참석하지만 이중적인 삶의 자세로 언제나 괴로워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구원이 필요합니다. 지금 이 순간 모든 분들에게 성령 침례가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대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처럼 진리에 대해 관심이 없고, 오직 정치적 경제적 목적으로 예수님을 저울질하는 사람들은 회개해야 합니다.
49~50절에서 돌발적인 상황이 발생합니다.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 하는도다 하였으니.”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는 예상 밖의 예언을 했습니다. 그 예언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불리한 것이었지만, 예수님에겐 유익한 것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는 선언이 유대교를 상징하는 최고의 지도자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는 당시의 유대교의 도덕성이 얼마나 땅에 떨어져 있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대제사장의 발언이 거의 비판 없이 산헤드린에서 받아들여지고 이를 기점으로 예수님을 죽이려는 모의가 적극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사실입니다.
51~52절 말씀에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위의 두 구절을 조심해서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 말은 가야바가 스스로 한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한 것이다’라는 사실입니다. 두 구절은 예언적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악한 자를 통해서도 예언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의 아내는 밤에 꿈을 꾸고 그 내용을 남편에게 전달했습니다. 불신자나 기독교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예언이 역설적으로 전달되는 것입니다. 사탄이 역사하고 유대인들의 요구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했지만, 그로 인해 온 인류가 구원받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오묘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이런 돌발적인 예언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는 음모에 동기를 부여해 주는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53절에 “이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 하니라.”
모든 사건의 이면에는 음모가 있습니다. 정말 우연히 이루어진 사건도 있지만, 대부분은 우연을 가장한 음모가 숨어 있습니다. 기막힌 음모일수록 더욱 우연을 가장합니다. 예수님의 처형 뒤에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조직적인 음모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 것인가 하고 여러 각도로 고심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대중을 선동하고 총독 빌라도에게 협박까지 했습니다.
요즘 인터넷에서 교회를 비판하는 소리가 갑자기 많이 들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안티 기독교 사이트가 부단히 작업한 결과입니다. ‘기독교를 파멸시키자, 이 땅에서 교회를 몰아내자, 교회는 민족의 적이다’며 무서운 기세로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가 말살될 때까지 투쟁하겠다고 나서고 있습니다. 안티 기독교 사이트들은 연대해서 성경의 진리에 정면으로 대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요, 온 인류의 구원자요, 이 시대에 기적을 베푸시는 유일한 희망이라는 진리를 전면 부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영적 도전을 어떻게 받아들이셨는지 살펴보겠습니다.
54절에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거기를 떠나 빈 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머무르시니라.”
예수님께서 험악한 분위기에서 한 발 물러나셨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강하게 대응하실 것을 기대하겠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방법을 택하신 것은 ‘십자가’라는 중요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목표는 대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투쟁하거나 혁명을 일으키지 않으셨습니다. 가장 위대한 투쟁, 혁명은 십자가를 지는 것임을 아셨습니다. 십자가로 사랑, 용서, 복음의 혁명이 일어날 것을 아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어디로 갔는지 찾기 시작했습니다.
55절에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우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성결케 하기 위하여 유월절 전에 시골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더니.”
유대인들은 유월절에 성결의식을 치르려고 각처에서 예루살렘으로 몰려듭니다. 성결하게 하는 데는 두 가지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의식적인 정화, 혹은 속죄의식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둘째는 도덕적으로 정결케 되는 것을 말합니다.(약4;8)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자기정화인데, 따라서 사람들은 유월절 절기를 바로 지키기 위하여 유월절이 되기 전부터 예루살렘에 올라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죄를 정화하기 위하여 제물을 드리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표일 뿐입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의식을 통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을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예수님뿐이므로 누구든지 그를 거부하면 의식적인 정화에 최선을 다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로 나아가지 못합니다.(요14;6)
56절에 “그들이 예수를 찾으며 성전에 서서 서로 말하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저가 명절에 오지 아니하겠느냐 하니.”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싶어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에는 언제든지 불의한 자들에게 기꺼이 협력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아서 의인이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타락한 것처럼 보이는 곳에도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 보고서 속단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57절에 “이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고하여 잡게 하라 명령하였음이러라.”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행방을 찾기 시작한 것은 예수님에게 체포 명령이 내려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는 세력들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흐름은 오늘 우리에게도 적용되고 있습니다. 2000년대에 들어서 한국 교회는 여러 위기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안티 기독교 세력에게 공격을 받고 있는 교회는 어떻게 이런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본문 말씀으로 세 가지를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교회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부활신앙을 갖는 일입니다. 부활신앙을 회복한다면 어떤 압력, 위기, 고통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둘째, 체험 신앙입니다. 도덕이나 윤리로 세상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복음의 진리를 체험하는 신앙만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이성과 지식과 정보로 세상을 구원할 수 없지만, 복음과 부활의 능력을 체험한 신앙은 능히 세상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셋째, 순교 신앙입니다. 이제 우리는 순교를 결심할 때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우리 시대는 순교자를 필요로 합니다. 그만큼 영적으로 예민하게 물질문명과 싸우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적당히 예수님을 믿는다면, 결코 이 시대를 헤쳐 나가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생명을 걸고 헌신할 때 세상은 변화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