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특별히 어리숙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록 나의 부모님은 이 신앙을 가지고 계셨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들이 가는 믿음의 길에 의무적으로 따라간 것은 아니었다. 10대에 접어들면서 나는 집회 참석을 실제로 완전히 중단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내가 열여섯 살이던 1938년, 아버지는 나의 영성의 부족, 즉 무신앙적 진로에 대해 매우 진지하게 말씀하시며 ´ 내가 교회 가는 이웃보다 못 하고 있는데 여호와께서 아마겟돈에서 나를 살려주시리라고 생각하느냐´하고 물으셨다. 나는 ´진리 안에´ 온전히 있지 않다는 이유로 하나님에 의해 멸망에 직면하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얼마간의 동기부여 효과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이것 역시 유일하거나 주요한 동기부여는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아버지가 나를 임박한 미래의 멸망받을 존재가 될 수 있다라고 말씀하신 것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은총과 생명을 받을 가치가 없는 존재로 보았다는 사실에 어쩌면 더 흔들렸던 것 같다.) 간단히 말해서,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집회 참석을 계속한 후 출판물을 통해 내가 배우고 있는 것이 진리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회중과의 연합은 내 인생에 존재했던 공백기를 어느 정도 채웠고, 내가 참여하기 시작한 활동은 내 삶에 방향감을 주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러한 일들은 이의없이 영향을 미쳤으며, 더욱이 내가 그것을 정말 믿었다는 사실이다. 자료가 제시된 방식, 즉 논리적 논증으로 인해 나는 "진리"를 배우게 되었다고 믿게 되었다. 오늘 나는 스스로에게 "어떻게? 왜?"라고 물어본다. 그 논쟁은 심각한 결함이 있었고 또 지금도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오류를 식별한 것에 대해 어떤 특별한 느낌도 없다. 증거는 줄곧 거기에 있었다. 그러니 내가 그 오류를 깨닫기까지 거의 4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는 것을 생각하면, 분명 나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이유가 없다. 그 효과는 승격감보다는 굴욕적 감정이 더욱 분명하게 느껴진다. 다른 사람들은 단순히 성경에 대한 그들의 연구를 통해서, 내가 깨닫기 전에 이러한 결점들을 상당히 많이 보았을 것이다. 그들은 나처럼 조직 내부 통치체에서 9년간 경험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 내가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그렇게 확신했을까? 그리고 수백만 명의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확신할까?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분명히 분별력이 있고, 지적인데, 나와 비슷하게 확신할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하기에 나의 경우보다 더 어리숙하지 않는 한, 사용된 논증은 상당한 능력의 산물인, 즉 꽤 그럴듯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제시된 견해의 산물이라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 그와 더불어, 어쩌면 그 전체 문제의 열쇠는, 믿고 싶다는 욕망이었으며 믿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확실성과 확실성이 가져다주는 안전감을 바라는 것은 지극히 정상이다. 워치타워 조직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이든지간에 하나님 말씀에 대한 올바른 설명, 즉 유일하고 진실된 설명으로 모호함이 없이 제공한다. 사람들이 하나님, 그분의 목적, 삶과 인간의 미래에 대한 그들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어떤 출처가 있기를 바라는 것은 정상적이다. 하나님의 승인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가 원하는 것을 언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하는 것은 매우 정상적이다. 조직은 명확한 행동 규칙을 가지고, 그리고 이런 규칙을 충성스럽게 순종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강하고, 마음이 즐거우며, 하나님의 축복을 얻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매우 명확하게 윤곽이 잡힌 활동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많은 교회와 종교 부흥에서 발견되는 정서주의나 감정주의에 반하여 지적 호소력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 자신이 ´진리 안에 있다´고 믿는 것, 자신이 하나님이 다스리고 있는 지구상의 단 하나의 조직의 일부라고 믿는 것, 하나님이 약속한 미래의 백성, 성경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지구상의 유일한 집단이라는 확신이 그들이 추구하는 안정감을 심어 준다. 그점이 내가 가졌던 감정이었고 그것은 내가 증인 지도부의 지시로 마음을 다하여 주저하지 않고 자신을 봉사에 내맡기게 했다. 나는 성장해 가며 활동적인 조직의 일부였고 나는 그 조직의 확장을, 생명을 주는 진리의 확산과 동일하게 여겼다. 조직의 확장을 위해 일하는 것은 종교적 거짓에 사로잡힌 자들에게 해방을 가져다주는 진리의 정복력과 함께 오류와의 싸움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인생의 7번째 10년을 맞이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때,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이런 일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떨리는 경험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말년에 그것을 깨달았다. 1982년 3월, 타임지 기사의 등장 이후, 한 증인의 편지가 왔는데, 피터 그레그슨에게, 그 당시 내가 얹혀살고 있던 땅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코멘트가 포함되었다: 나는 이 편지가 레이몬드 프랜즈 형제의 관심을 끌기를 바라며 너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 나는 <타임>지의 기사와 나중에 그의 감사 편지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그것은 나에게 우리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나는 1917년에 침례를 받았고 1919년과 1922년에 시더 포인트에 있었으며 그 후 오하이오 주 전역에서 "지금 살아 있는 수백만명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를 전파하였다. 나는 우리 모두가 워치 타워에 의문을 제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로 몇 년 동안 일종의 공포 속에서 살았다는 사실을 의식한다. 최근에 배교자로 회중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느낌 없이, 파수대 연구에서 성경을 고려하여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글을 쓴 존 나이트는 93세였다. 워치타워 조직과 그의 연합 기간은 75년 이상이었다. 나중에 쓴 것처럼 워치타워의 모순을 볼 때 그의 초기 반응에 대해 자신을 탓하는 것이었고, 단순히 ´진리의 발견자´가 아니라 ´오류의 발견자´가 아니냐고 스스로에게 자문하는 것이었다. 그는 내가 불안하게 여겼던 것과 같은 것, 즉 협회의 출판물에서 발견되는 독단주의적 가르침에 의해 혼란되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베레아인들과 마찬가지로 워치타워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들이 사실인지 성경을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난 몇년 동안 워치타워 협회는 절대적인 위치로 군림하여 왔기 때문에 이 사실이 나를 끝없이 괴롭혔다. 나는 ´절대로´, ´틀림없는´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것이 친구들 대다수가 가지고 있는 견해이고, 실제로 내가 발견한 입장이어서, 협회의 명령에 복종할 의무가 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이제 워치타워가 차지한 특정한 입장을 뒷받침할 성경 본문을 찾을 수 없게 된 지금 내게 회의가 밀려 왔다. 존 나이트의 논평은 영국, 스웨덴, 벨기에, 독일, 스페인, 브라질, 나이지리아, 뉴질랜드 등 다양한 국가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받은 전형적인 생각이었다. 이들 중 다수는 20, 30, 4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증인이다. 놀랍게도 그들 대부분은 남들이 그렇게 느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 채 개인적으로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다. 진리는 자유와 분리할 수 없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듣고 있는 것과 읽은 것을 분석하고 진술한 것들의 사실성과 사용된 논증의 타당성을 신중하게 따져보는 것이 우리의 결단으로 삼아야 할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특정한 오류의 사슬에서 벗어나 새로운 오류 사슬이 우리에게 고정되도록 할 뿐이다. 기만적인 논증의 특정한 방법들을 인식하는 것은 우리의 정신과 마음, 그리고 양심의 자유를 보호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오류 논증의 일반적 함정 정직하거나 부정직한 논증, 원칙이 있거나 원칙이 없는 논증, 순수하거나 작위적인 논증이 있다. 우리는 이미 이러한 것들 중 몇 가지를 고려했는데, 여기에는 단순한 주장, 일방적인 발표(반대되는 증거가 억압되거나 무시되는 경우), 반대되는 견해를 취하는 사람들에 대한 조소적 인신 공격의 사용, 우월한 지혜나 권위로 인정되는 것에 근거한 "거만 떨기"가 포함된다. 이것들은 잘못된 주장이나 논증의 방법들 중 일부이다. 그 밖의 사항에는 다음이 포함된다: •쟁점 논쟁의 실제 자리에 "허수아비"을 사용하는 것과 같이 반대되는 주장의 엉뚱한 표현 •확정된 사실이 아니라 전제 위에서 계속 맴돌아 출발점으로 검증되지 않은 전제를 사용하는「순환 오류」의 사용. •유사성이 존재하지만 결론을 입증하는 데 필요한 종류가 아닌 잘못된 비유. •"거짓 딜레마"의 생성으로, 실제로 여러 가지 선택과 여러 가지 대안이 있을 수 있는 경우인데도 주장하고자 하는 것과 바람직하지 않은 다른 대안의 두 가지 선택만이 존재하는 것으로 유도하는 경우. •"빨간 청어"란 논쟁의 흐름, 즉 토론과 무관하게 논쟁의 약점으로부터 독자(상대방)의 주의를 딴 데로 돌리는 역할을 하는 것. •애드 호미넴 ("그 사람에게"라는 의미) 논증이 그의 주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반대하는 사람에 대한 성격이나 습성 등에 대한 공격으로 구성되어 있다. •편향성, 즉 특정 집단의 사고, 신념, 심지어 편견 또는 무지와 가까운 것으로 동일시하는 경향에 호소하며, 집단 내 대 집단 외의 2분법적 관점에서 사물을 뭉떵거여 보려는 경향이 있다. •연역적 추론의 오용, 넓은 원칙을 취하여 그것으로부터 근거 없는 또는 입증되지 않은 결론을 도출하거나, 그 반대의 경우, 특정한 부수적 사실을 이용하고, 이것들에 기초하여 반드시 적용이 되지는 않는 포괄적 원리를 확립함으로써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가 된다. 이러한 종류의 논증은 종종 겹치거나 합쳐지는데, "빨간 청어"는 "편향성" 에 대한 호소나 애드호미넴 공격으로 합쳐져 구성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논리적 오류들이 어떻게 이용되어도, 다양한 형태의 논증의 사용은 매우 그럴듯하게 보이며, 때로는 심지어 인상적인 것으로 보이는 내용을 이끌어 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거짓이다. 복잡하고 구불구불한 추리는 독자들에게 당혹감을 느끼게 할 수 있으며, 그는 작가가 자신보다 훨씬 더 똑똑하기 때문에, 혼란스럽다고 생각하는 소재가 실제로는 매우 ´심오한 것일 것이다´라고 단순하게 결론 내릴 수도 있다. 이해 안 되는 당혹감은 오히려 심오함으로 해석된다, 그래서 실제로는 별것 아닌 것이 심오함의 외관을 띠게 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나는 이러한 허위 논증 방법의 사용이 얼마나 널리 퍼져 있는지, 조직의 각종 간행물에서 얼마나 자주 일어났는지를 깨닫게 된 특별한 계기는 통치체 회기에서 논의한 결과였다. 견실한 논증이 완전히 없는 것은 물론 아니다. 중요한 점들에 대해서, 즉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의문을 일으키는 가르침에 대해서, 워치타워 출판물이 독자의 마음을 조종하기 위해 인위적이고, 기만적인 추론을 채택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반드시 집필진의 의도적인 결정에서 비롯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많은 경우에 그것은 아마도 논증하고자 하는 내용의 증거가 원하는 만큼 강하지 않다는 데서, 그리고 반대 이론이 나올 수 있다는 잠재의식적인 깨달음에서 발생한 것일 것이다. 필자는 독자들을 설득하려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아마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설득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느낌이다. 특정한 가르침이나 입장에 대해 ´충성´스러워지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주장해야 할 논점을 지지하기 위해, 뇌가 건전하지 않은 추리를 전개하게 할 수도 있다. 유일하고 참된 하나님의 조직을 지탱하고 있다는 믿음은 이것이 그에게서 발생할 수 있는 불안감을 억제하거나 무디게 하는 역할을 할 수 있으며, 그는 그 주장이 타당하다고 스스로를 확신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모든 결함 있는 주장이 그러한 잠재의식적인 동기에서 나온다고 믿기는 어렵다; 적어도 어떤 경우에는, 고의적으로 보여지는데, 그것은 지적으로 부정직한 짓이다. 다음의 인용문에서 예시된 내용은 명확한 권위의 횡포를 부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예시들은 전체의 일부분일 뿐이다. 분파주의에 대한 논의에서 1988년 출판물 <요한계시록—그 위대한 절정은 가까왔다!> 44, 45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4 초기부터 그리스도인 회중은 교만한 배교자들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배교자들은 기분을 맞추는 기만적인 말로써, 여호와의 통로를 통해서 베풀어진 “가르침과 반대되게 분열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기회를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로마 16:17, 18) 사도 바울은 그의 모든 편지 가운데서 거의 언제나 이러한 위협을 경고하였습니다. 현대에 와서, 예수께서 참회중의 그리스도인 순결성과 연합을 회복시키셨지만 분파주의의 위험성은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떨어져 나간 집단을 추종하여 분파를 만들려는 경향이 있는 사람이라면 예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청종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회개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에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긴 칼을 가지고 그들과 싸우겠다.”—계시 2:16. 15 분파주의는 어떻게 시작됩니까? 선생이라 자처하는 자가 (우리가 사는 시대가 마지막 날이라는 것과 같은) 일부 성서 진리에 반론을 일으켜 의심의 씨를 뿌려서 무리를 갈라지게 하고 자기를 따르게 합니다. (디모데 둘째 3:1; 베드로 둘째 3:3, 4) 어떤 자들은 여호와께서 일을 하시는 방법을 비평하고, 왕국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호별 방문을 하는 것은 성경에서 요구하는 일도 아니고 필요한 일도 아니라고 주장함으로써, 몸을 사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끕니다. 이러한 사람들도 예수와 그분의 사도들의 본을 따라 그러한 봉사에 참여한다면 겸손을 유지할 수 있겠지만, 갈라져 나가서 편한 길을 취하고 아마 사적인 집단으로 때때로 성서를 읽는 것만을 더 좋아할지 모릅니다. (마태 10:7, 11-13; 사도 5:42; 20:20, 21) 그러한 자들은 예수의 죽음의 기념일과 피를 멀리하라는 성경의 명령, 축일을 기념하는 일, 흡연 등에 대하여 그들 자신의 생각을 꾸며 냅니다. 더욱이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비하시키고 곧바로 큰 바빌론의 방임주의적인 길로 되돌아가 버립니다. 더욱 나쁜 일은, 일부 배교자들이 사탄의 영향을 받아 한때 자신들의 형제들이었던 “동료 종들”에게 덤벼들어 “때리기”도 한다는 것입니다.—마태 24:49; 사도 15:29; 계시 17:5. 이 자료는 어떤 잘못의 증거도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않으면서, 인신 공격에 모든 노력을 집중시킨다. 조직 지도부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자만심이 가득한 배교자´로 비난받는다. 이들이 특정 워치타워 해석과 방침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여호와의 일처리 방식에 대한 비판´이라는 꼬리표를 붙이는데, 실제 쟁점은 다른 여러 분야에서처럼 조직이 행동하도록 하게 하는 것이, 여호와께서 시킨 증거가 있느냐이다. 글쓴이는, 자신이 공격하는 사람들의 진위를 거짓으로 꾸며내거나 그들의 입장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것이다. 글쓴이는 반 정도의 사실에 근거하여 비난한다. 글쓴이는 자신의 주장을 증거로서 써 내려가지 않고, 단순히 주장만 하고, 반대편의 말을 인용하지 않으며, 독자들이 자신들의 입장에 대한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게 한다. 진리에 대한 어떤 양심적 고려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격하되고, 그 동기는 일방적으로 의심받으며, ´자기 인색의 영´에 호소하는 사람, ´분리되어 편안해짐´을 선호하는 사람, ´예수의 죽음의 기념식이나 다른 주제들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조작하는 사람´과 ´여호와의 이름을 비하하는 사람´ 그리고 "큰 바빌론의 넓은 길에 다시 빠지거나" 또는 "더 나쁜 것은, 사탄에 의해 돌아서서 그들의 형제인 동료 종들을 때린다"는 것이다. 성경을 구부려 조직역사에 맞춤 편향성의 오류는, 특히, 조직을 다양한 성경 예언의 중심 인물로 묘사한 데서 뚜렷이 드러난다. 단 한 가지의 예만 든다면, 워치타워 출판물은 1919년과 1922년의 사건들을 끊임없이 언급함으로써(잘못된 기반을 둔 "지금 살아 있는 수백만명 캠페인"과 1925년이라는 시기에 초점을 맞추어 열기가 한참 고조되었을 때 )ㅡ 다른 것들은 무시한 채 특정한 특징과 사건들을 강조하여 진전시킴으로써ㅡ 과거 특정한 시기에 일어난 비교적 사소한 성격의 사건들을, 전 세계를 뒤흔들 정도의 엄청난 의미가 있는 사건으로 과장하여 설명한다. 요한계시록(8장 9장)은 하나님의 천사들이 7개의 나팔을 부는 모습을 극적 파괴 효과를 동반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이후(15장 16장)에는 땅에 쏟아질 7개의 재앙과 하나님의 분노 7그릇에 대한 환상을 볼 수 있게 된다. 이 모든 것의 엄청난 영향이 땅을 뒤흔드는 것과 같은 영향을 준 것으로 제시된다. 워치타워 출판물에 따르면, 이러한 환상은 사실상 실현되어왔다. 어떻게 성취되었는가?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1922년부터 1928년까지의 7개 워치타워 지지자들의 대회에서 통과된 7개의 결의안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여호와의 증인 중 대다수가 1920년대의 그 어떤 조직적인 선언과 사건도 알지 못하며, 이는 세계 어느 누구에게도 알려져 있지 않다. 나는 여호와의 증인 통치체의 어떤 성원이라도 이 그릇과 재앙에서 쏟아져 나오는 해석과 그것들 개개의 성취에 대한 해석을 과연 조금이라도 자세히 설명하여 기억시키려고 노력할지에 대해 심히 의심스럽다. 어떻게 성취가 이루어졌는지 그 여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될 경우, 그들이 주장한 해석을 설명하는 워치타워 출판물을 직접 읽어야만 답변할 수 있을 것이다. 조직의 주장에 맞추어 성경을 지어 냄 명백한 순환 논리의 오류의 한 예로서, 몇 년 전 여호와의 증인들에 의해 두 번째 연구로 예정되어 있었던 <하나님의 천년 왕국이 다가왔다>라는 책에 나오는 예를 생각해 보자. 그책 내용에서 예수의 ´달란트´에 대한 비유는 사실상 그 비유를 워치타워 역사에 맞추어 수용하기 위해 다시 지어낸다: 오랜 시간이 지나 주인이 돌아왔다. 그는 종들과 회계를 하려고 하는데, 그렇게 하기 전에 적이 쳐들어와서 그들을 공격한다. 적은 이득을 취한 자들을 갈기갈기 찢고, 그들의 돈을 빼앗고, 그들 모두를 사로잡아 간다. 포로생활에서 돌아오면, 그들은 주인에게 그들이 얻은 모든 이익은 그들에게 빼앗겼다고 말한다. 주인은 이해한다고 대답하였으며 그들에게 기간을 연장해 어느 정도 증가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이 믿기 어려워 보인다면, 이 진술들이 언급된 서책 231, 232면에 기록된 것을 직접 살펴보라. 그것은 먼저 1918-1919년의 기간을 "포로" 시기로 추정하여 묘사한다. 그 서책은 인질로 잡혔던 사람들이 빚진 종으로 끌려 간 것보다 더 잔인한 "강도의" 공격을 받은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비유에서 제공되는 묘사를 고쳐 썼다. 이 책에서는 왜 이렇게 성경과는 다른 버전이 제공되는지 이유는 설명하지 않고 1919년 봄(다른 워치 타워 출판물에서 바빌론에서 "해방"된 때)까지 이런 상황이 진행되는 것으로 설명하며 이렇게 말한다: 44 외견상, 이 지상의 의로운 통치자의 종들이 모든 것을 빼앗긴 것 같았다. 그들에게 맡겨진 주인의 달란트는 사라진 것으로 보였다. 장래의 모든 기간에 주인의 봉사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어 그의 적들은 기뻐하였다. 과연 이 사람들이 다시 달란트의 이익을 남길 것인지 심히 의심스러운 상태가 되었다. 다음 단락에서는 워치타워 임원들이 1919년 3월 25일 감옥에서 풀려났다고 기술한다. 그러면서 하나의 질문을 제기한다: 45 달란트 비유는 외국 여행에서 돌아온 주인이 그들과 회계하는 그림을 그린다. 이것은 그들을 검사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1919년 봄에 사건의 반전과 더불어 그 종들의 하늘 주인이 그들을 검사할 때라는 것은 상당히 논리적으로 들릴 것이다. 그러나 종 반열에 맡겨진 달란트와 관련하여 어떤 회계가 이루어 졌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그 책은 이렇게 기술한다: 1918년 전시의 박해가 절정에 달하기에 앞서, 그들이 벌었을지도 모를 약간의 이익은 사라진 것 같았다. 마치 그들의 수중에 한푼의 이익도 없는 것 같았다. 이제 그들이 주인의 달란트의 이익을 남기고자 한다면 그들은 전후 시기에 이 이익을 벌어들여야 하며, 그것은 장래에 주인의 소유물이 증가한 셈이 될 것이다. 그들에게 달란트로 장사할 새롭고 더 큰 기회가 주어져야 했다. 이것이 하늘 주인의 자비로운 사려깊음으로 인하여 이루어진 당시의 역사이다. 이 책은 비유의 성취에 대한 이처럼 이상한 설명이라든지, 주인이 돌아올 때에 일어난 일에 대해 채색된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도록 비유를 완전히 다시 고쳐 쓴 문제를 뒷받침하는 근거를 명료하게 제시하지 않는다. 그책은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원래 의도된 방식이며, 그렇게 이해"되어야 하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달란트의 성경 비유는 그 자체로 두명의 충실한 종이 그들이 벌어들인 이익을 잃어버렸거나 (또는 강도 당함), 주인이 종들 중 어느 누구에게도 "새롭고 더 큰 기회"를 주었다는 데 대해서 아무런 언급도 없다. 그러나 그 조직의 역사에 맞추려는 설명은 그렇게 할 필요가 있었다. 즉, 이러한 일들이 "역사적으로 일어났으므로"그렇게 해석되어져야만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워치타워의 설명 방식은 「순환 논리의 오류」의 예를 그래픽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또한, 하나님의 승인과 권한 부여에 대한 적격성이 있는지의 논의에서도, 조직 자체는 그 당시에 독특하다고 여겨질 수 있는 어떤 일을 했든지 적격성의 여부를 묻는 시험을 통과하기 위한 기준과 조건을 스스로 선택한다는 점에서 순환 논리의 오류는 나타난다. 그들의 주장인 그리스도의 보이지 않는 임재 당시 "시험"의 결과가 그들에게 전적으로 유리하게 맞춰져 있어서, 그들이 반드시 시험의 통과자가 될 수 있게 되어 있다. 협회의 책인 <하나님의 천년 왕국은 다가왔다>(351면)는 ´그들의 주장대로 주인으로서의 그리스도께서 돌아왔을 때 그리스도께서 바라는대로 그들이 행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이렇게 말한다: 1919년에 시작된 검사가 그 이후 그리스도의 결정에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그는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발견하였음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 . 1919년 9월 1일부터 8일까지 8일간의 오하이오주 시더포인트에서 열린 대회는 돌아오신 주 예수께서 자신의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 반열이 누구인지를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는 통고였다. 이 모든 것은 편향성과 더불어 명백한 순환 논리 오류의 한 형태로서, "우리는 성경에 대한 해석과 적용이 시험에 성공적으로 통과되었고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으로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에, 우리는 시험에 성공적으로 통과되었고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으로 선택받았음에 틀림없다라고 스스로 전제와 가정을 오가는 방법으로 사실상 말하고 있다. 주장을 지지의 근거로 삼아 다시 그 주장을 밝힘으로써 처음의 주장을 유효하게 입증하는 하나의 경우이다. 오직 조직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하나님과의 관계 이 조직 개념은, 꿈에도 생각날 정도로 빈번히 강조되며, 여호와의 증인들을 통제 유지하는 데에 필수적이고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도록 철저히 주입된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하나님께서 조직과 분리하여 개인들을 대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거듭 상기받는다. 증인들의 마음 속에 이러한 관점을 주입시키기 위해 채택된 논증의 예를 생각해 보자. 1981년 5월 1일자 파수대에 실린 "조직"에 관한 기사의 첫 항을 참고하면: 고도로 지성적인 이 시대에, 이상한 일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조직이 있다는 사실에 의문을 제기해 온 일입니다. “하나님의 조직”이라는 표현의 사용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는 이유는 그들의 성서 번역 가운데 하나님과 관련해서 또는 다른 것과 관련해서도 “조직”이라는 말이 전혀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1978년 8월 22일자 깨어라! 잡지(4면)에서 선전(진화론을 믿는 특정 옹호자들에게 적용)의 힘에 대해 말한 요점을 추려 보면: . . . 그러나 교육을 받고 지성적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매우 편파적이며 사실과 맞지 않는 선전의 희생물이 된다. 이러한 형태의 선전은 반대자의 견해를 배척하는 우월한 태도를 가지며, 그것을 감상적인 것으로 취급하고 실제로 유의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다룬다. . . 그 이론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는 지성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모든 지성인들이 그것을 믿”는다는 이유로 그들도 그것을 믿는다. 깨어라! 에서 인용된 요점을 방금 언급한 파수대 문항과 비교해 보라. " 고도로 지성적인 이 시대에" 누구라도 "조직"이라는 관점에서, 즉 워치타워 협회가 옹호하는 일종의 조직이라는 측면에서 천상의 그리고 지상의 아들들로 구성된 하나님의 가족에 대해 언급하기를 꺼려하는 것은 "이상한" 것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만약 그 문장이 실제의 유효한 적용이 있음을 제시하여 증거를 나열한 후에 언급했다면, 이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문장은 어떤 증거를 제시하기 전에 먼저 주장되었고, 논의가 시작되는 부분에 채택되어, 증거를 고려하기 전에 독자의 마음을 편향시키려는 한 가지 목적만을 이루려고 할 뿐이다. 이어 이 기사는 성경에 없다는 단순한 이유로 ´하나님의 조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조차 꺼려하는 사람들을 대변하여 설명한다. 이 항에서 우리는 "빨간 청어"를 사용하여 실제 이슈로부터 주의를 돌리게 하고, 그 진정한 이슈에 대해 "허수아비"로 대체하는 예를 볼 수 있는데, 이는 에드호미넴(인신 공격)에 해당하는 것과 결합되어, 워치 타워의 관점과는 관점을 달리하는 사람을, 지적 시대를 살아가는 어떤 변칙적인 종류의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협회장은 모인 법인 인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제 우리에게 ´조직´이라는 단어는 영감 받은 성경인 바이블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지적되어 왔다. 그리고 여러분이 원하는 어떤 번역본에서도, 어떤 현대 번역본에서도, 여러분은 "조직"이라는 용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왜—여러분과 내가 하나님이 조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근거가 있는가? 이제 이것은 최근 몇달 동안 논의하기 위해 던져진 큰 문제였으며, 그 논의는 확실한 해답을 얻을 가치가 있었다. 이제 이 사례와 관련된 사실로부터 직접적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그의 서론에서 제시된 것은 전형적인 "허수아비 공격"의 예에 해당된다. 나나 에드워드 던랩이나 내가 아는 다른 어떤 사람들도 성경에서 "조직"이라는 단어의 출현이나 비출현에 대해서 주로 관심을 가지거나 또는 특별히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현재 많은 증인이나 전 증인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하늘과 땅에서 그의 종들을 위해 마련하신 것을 묘사하는 조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허용될 수 있는지 아니면 적절한지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렇게 하겠다는 "권리"에 도전하지 않는다. 그들이 우려하는 것은 모든 포괄적 권위, 높아진 우월성, 그리고 브루클린에 본부를 둔 워치타워 조직에 의해 제기되는 무조건적인 수용과 복종에 대한 요구이다. 이런 문제를 무시한 것은 협회장의 대화가 직설적이든 그렇지 않든, 결코 대답하지 않았던 사실인, 진짜 ´일어났던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성서에 ´조직´이라는 단어가 없는 것이 근본적인 질문이라는 외관을 전제함으로써, 실제의 이슈는 그냥 비켜나갔다. 실제 문제의 쟁점보다 훨씬 공격하기 쉽고 편리한 ´허수아비´를 세워 공격한 것이다. 일부 사람들이 ´하나님의 조직´이란 용어를 언급할 수 있는 바로 그 ´권리´에 도전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질문으로 시작했던 이 자료도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이 문제를 왜곡시키고 있다는 점에 유의하라: 성경의 빛으로 모든 것을 고려할 때, 영감받은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성경 가운데 고대 언어로 “조직”을 의미하는 원어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로 하나님께서 조직을 가지고 계시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물론 이것은, 빈약한 빛에 의존하여 조직이 있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데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을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로 즉시 몰아버린다. 그러나 그들이 여기서 사용 하는 바로 그 논리는 1957년 7월 15일자 파수대에서 발표한 내용에서 전혀 다른 시각으로 제시되고 있다. "성령—" 삼위일체의 제 3위인가 하나님의 활동력인가?"이라는 제목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포함되어 있다(431쪽): 아타나시어스 신조가 주장한 대로 성령이 여호와의 하나님과 동등하고, 삼위일체가 가톨릭 백과사전이 주장한 대로 기독교 신앙의 중심 가르침이라면 이런 것들이 성경에 그것을 나타내는 단어로 어느 정도 명기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 그리고 삼위일체 가르침은 "모든 밝혀진 진리 중에서" "이성으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명시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은 그 교리를 받아들이는 데에 달려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특별히 이 교리와 관련된 단어가 성서 가운데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이 명시적으로 삼위일체를 언급하거나 설명하거나 가르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삼위일체 가르침이 거짓이라는 강한 증거다. 제시된 주장에는 논리에 호소력이 있다. 그러나 이 파수대의 앞 진술을 일관성 있게 다음과 같이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오늘날 여호와의 증인 가운데서에서 발견되는 일종의 고도로 구조화된 조직이 통치체의 주장대로 여호와의 하나님께서 만들어 내셨다면, 그리고 파수대가 주장하는 것처럼 지구상에 하나님의 유일한 통로라면, 우리는 이러한 것들이 성경의 말씀으로 어느 정도 명기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되는가? 그리고 조직의 지시나 그 가르침을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에 반항하는 것이며, 구원은 그 조직에 대한 집착과 복종에 달려 있다고 파수대에 명시되어 있다는 사실을 볼 때 특별히 이런 용어가 성경에 명시되어서는 안 되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한 조직을 명시적으로 언급하거나 설명하거나 가르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그러한 조직에 대한 가르침이 거짓이라는 강한 증거다. 논증의 방법은 동일하고 병행적이며, 동일한 원칙과 전제에 기초한다. 조직 외부의 자료에 대해 사용될 때 그 논증은 분명히 옳은 것이 되고, 조직 자체에 적용하면 왜 받아들여질 수 없는가? 앞서 언급한 1981년 5월 15일자 파수대 기사 ´조직´ 시리즈의 첫 기사에는 불리한 증거를 가리워버리는 전형적인 예가 수록되어 있다. 분석해 본다면, 그 자료의 전반적인 영향과 요지는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의 중요성을 감소시켜버리고 조직에 대한 충성 개념을 높이는 것이다. 그 기사의 제목은 "여호와의 조직 혹은 ‘사단’의 조직—어느 쪽인가?"이며 주제의 성경본문은 여호수아 24장 15절이다. 해당 성경 본문을 이 자료에서 발전시키고자 하는 개념에 맞추어 어떻게 조작하는지 주목하라: <1981년 5월 15일자 파수대(영문) 기사 '조직' 시리즈의 첫 기사>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여호수아 24:15 1 오늘날 선택이 관련된 가장 큰 두개의 조직이 있읍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것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날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할 필요성은 이전 어느 때보다도 더욱 긴요합니다. 이천년 전에 한 역사적인 인물이 그러한 선택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으며, 그가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것은 온 우주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었읍니다. 2 이 사실에 대한 증인이고 역사적 사실을 조사하던 두 사람 곧 전에 세무 공무원인 ‘레위 마태’와 의사인 ‘누가’가 이 사실을 확증하는 증언을 합니다. 그 당시 온 우주의 주목을 받고 있던 그 역사적 인물은 중동 지방의 예수 그리스도였읍니다. ‘레위 마태’는 ‘사단’ 마귀가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말한 것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예수께서는 조직된 세상에 대한 ‘사단’의 주장을 반박하지 않으셨읍니다. 그러나 그분은 주저함이 없이 ‘사단’의 제안을 거절하셨읍니다. (마태 4:8-10) 예수께서는 자기가 이미 속해 있는 조직을 버리고 ‘사단’의 조직의 일부가 되기를 거부하셨읍니다. 언급된 성경 본문은 여호와 하나님과 거짓 신들 사이에서 개인적 선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그런데 파수대의 이 기사에는 바로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오늘날 선택이 관련된 가장 큰 두개의 조직이 있읍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개인적인 선택을 조직의 선택으로 전환시킨다. 증인들의 사고의 틀은 고대에 여호와를 선택하는 문제가 오늘날 어떤 조직을 선택하는 문제로 자연스럽게 전환된다. 이 기사의 두 번째 단락에서 하나님에 대한 예수의 충성에 대한 다음 세 가지 답변이 나오는데 이 답변은 조직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충성을 나타내는 답변이다. 이렇게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너의 하느님 여호와를 시험해서는 안 된다’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의 하느님 여호와를 숭배해야 하고, 그분에게만 신성한 봉사를 드려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신세계 역) 이 답변이 하나님에 대한 충성의 답변임에도 불구하고 이 파수대 기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림으로써 조직에 대한 충성이라는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자기가 이미 속해 있는 조직을 버리고 ‘사단’의 조직의 일부가 되기를 거부하셨읍니다. 성경 본문의 예수의 대답은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 충성이지 조직적 관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충성과 조직에 대한 충성을 동일시함으로써 증인들의 사고의 틀을 조직에 대한 충성이 매우 성서적 지지를 받는 것처럼 보이게 시도한다. 이제 흔히 제기되는 질문인 "우리는 어디로 가야하는가?"의 배경이 된 신약 성서의 본문을 살펴 보자. (요한복음 6:67, 68) 그래서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여러분도 가고 싶습니까?” 하고 물으셨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했다. “주여, 우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주께 있습니다. 이 신약 본문에 나타나는 예수와 시몬 베드로의 대화를 인용하여 1988년 3월 15일호 파수대 18면(영문)에서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생명의 말씀"을 소유하셨으므로 어디에도 갈 곳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여러분도 마찬가지로 여호와의 조직에 충성스럽게 머물기로 결정했습니까? 인용된 어구의 고딕체인 "어디에도"는 성경 본문에 "누구에게"로를 조직 개념으로 바꾼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충성을 조직에 대한 믿음과 충성으로 동일시 하도록 보이게 만든 것이다. 이렇게 워치타워는 그들의 주 해설서인 파수대를 통하여 그릇된 논증을 조작함으로써 워치타워의 권위를 한껏 높이려고 한다. 사실상 이러한 방식의 권위를 만드는 것은 결코 새로운 일이 아니다. 1세기의 사도들과 제자들이 죽고 세월이 흐르자 교회는 자체의 권위를 높이기 시작했다. 이에 가장 두드러진 점은 성경 해석의 권위를 몇 사람의 종교 지도자들에게로 국한시켰다는 점이다. 이점에 있어서 워치타워도 똑같은 전철을 밟고 있다 당시에 교회의 의미가 두 가지로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하나는 에클레시아의 의미로 사용되었고 두번째는 이 기본적 의미가 발전 확대되어 교회에서 지배권을 행사하는 우두머리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교회의 이름으로" 어떤 명령이나 지시를 내릴 때 사용된 교회라는 단어가 바로 그런한 우두머리를 지칭한다. 오늘날 워치타워의 "조직"이란 명칭도 원래의 의미는 전세계적인 여호와의 증인 전체를 가리키는 용어인데 그 의미가 발전 확대되어 성경을 해석하고 증인 사회의 성원들을 지배하며 처벌하는 권위를 가진 소수를 의미하게 되었다. 이렇게 역사는 종교적인 면에서도 패턴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양에 관한 독특한 해석 워치타워의 가르침에서 하나는 그리스도인들이 두 반열로 나누어져 있어, 한 반열을 나머지 다른 한 반열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더 특권층에 두는 가르침이다. 그 가르침은 조직 내에서 시행되고 있는 권위 구조를 지지하고 구성원의 자격에 대한 충실한 복종 의식을 형성하는 궁극적 역할을 한다. 이 논증의 본질은 무엇이며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어떤 형태의 논리가 사용되고 있는가? 진실로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하는데, 누구든지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그는 심판을 받지 않으며,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갔습니다.(요5:24) 이것은 실로 웅대한 약속이고 하나님과 그의 아들과의 놀라운 관계를 보여준다. 하지만, 워치타워 조직의 현재 가르침에 따르면, 그러한 약속과 특권 관계는 선택된 14만4천명 중 "기름부음 받은 남은자"의 일부분인 오늘날 지상의 오직 약 8,600명의 사람들만 해당된다. 나머지 400만 명 이상의 여호와의 증인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1980년대 통계]. 여호와의 증인 중 상당수는 실제로 이 사실을 모르고 있으며, 이점에 있어서 조직의 공식적인 가르침이 어느 정도까지 미치는지 온전히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실상, 그들의 죄는 실제로 용서된 것이 아니라, 그대로 유예되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예비 자녀"일 뿐이며, "천년 기간의 심판"이 끝날 때까지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하고, 이 다음에 마지막 시험이 따른다고 했다. 게다가 그들은 신약성경이 ´기름부음 받은 자´를 위해 쓰여져 있고, 이들 다른 4백만 명에게는 ´탈락자를 보충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말을 듣는다. 이 사람들은 8,600명 정도의 ´기름부음 받은´ 사람들의 일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기름부음 받은 자들은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려야 할 사람들이며, 그리고 주의 저녁 식사 때에 빵과 포도주를 혼자 외롭게 먹는 사람들이다, "기름 부음 받은 자"와 "다른 양" 반열의 이 두 단계 관계의 성경성에 대한 질문 때문에, 조직은 이 가르침에 대한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많은 이론들을 고안하여 준비했다. 그 이론에 사용된 논증 역시 유의할 만한데 그것은 ´다른 양´에 관한 독특한 해석이다. 요한복음 10장 16절에 나오는 "다른 양"이라는 명칭으로 쟁점이 되는 말씀은 다음과 같다: 나에게는 이 우리에 속해 있지 않은 다른 양들도 있습니다. 나는 그들도 인도해야 합니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 목자 아래 한 무리가 될 것입니다. 파수대의 가르침은, 예수께서 14만4천 명의 ´기름부음 받은´ 양에 속하지 않은 ´다른 양´들이 ´땅에서 살도록 예정된´ 반열로 지칭했다는 것이다. 통치체의 한 회기에서, 이 주제가 토론이 되었으며, 나는 몇몇 사람들이 다른 양의 표현이 이방인을 의미한다는 것을 어떤 증인들로부터 직접 들었다고 언급했다. 어느 정도 논의가 이루어진 후, 결국 전통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것으로 동의가 이루어졌다. 토론에서 테드 자라츠는 ´이 표현이 땅에 살 사람들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면 지상 반열이 비유 어디에 나타나겠는가?´라는 질문으로 순환 논리의 오류에 해당되는 표현을 하였다. 그러나 이 비유는 예수의 소식을 먼저 와서 듣고 ´그의 양´임이 증명된 자들과 그의 목소리를 알고 따르는 자들을 불렀던 이스라엘 ´양우리´에 있는 유대 민족에게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이방인을 제외하면 ´다른 양´이 될 사람들은 누구이겠는가? 하지만 1980년 7월 15일 파수대(23면)에서 우리에 들지 않는 양이 이방인을 지칭한다는 견해에 반대하는 파수대의 논리에 유의하라: 그리스도교국의 교회들은 여기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양] 우리”는 오직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만을 수용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고, “다른 양들”은 비유대인 즉 이방인들 가운데서 그리스도인들이 된 사람들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믿는 유대인들과 믿는 이방인들이 함께 “한 목자” 아래 한 영적 우리 안에서 “한 무리”가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런 가르침은 이 주제에 관한 다른 성구들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다른 양"이 이방인들을 의미한다는 견해가 그리스도교국의 교회에서 비롯된 것으로 돌림으로써 곧장 "빨간 청어"를 도입시킨다. 이것은 증인 독자들의 마음에 "편향성"을 자극시키는 영향을 준다. 그리스도교국은 ´큰 바벨론´의 주요 부분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이러한 편견에 의해 처음부터 그 견해는 혐오하게 된다. 그러나 공정하게 생각할 때 그러한 교회들이 어떤 것을 믿는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은 잘못된 추론임에 분명하다. 그리스도교국의 교회들은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구세주라는 사실과 더불어 인류를 위해 죽었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리스도교국의 대부분의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서에 나와 있고, 인류를 위해 거룩한 지침을 제공하며, 영원한 생명의 길을 가리킨다고 가르친다. 그들이 그리스도교국의 교회에서 가르치는 그러한 가르침이 미심쩍거나 그릇된 것인가? 그리고 이 주제에 관한 다른 성경의 구절들과 다르다"는 말로 독자를 ´허위 딜레마의 뿔´에 올려놓으려는 시도가 바로 이루어지고 있다. 14만 4천이라는 문자적 숫자 그대로에 대한 조직의 모든 가르침이 옳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 하더라도 논의 중인 요한 10:16의 본문에서 예수께서 이방인들을 언급했다는 것에 반대의 주장을 어떻게 펼 수 있는가? 전혀 펼 수가 없다. 이방인들이 개종하여 실제로 한 목자 밑에 한 무리로 모여들어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연합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 아닌가? 둘째 반열이라고 주장되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또 하나의 다른 명칭은 요한계시록 7장 9~17절에서 따온 ´큰 무리´이다. 진실은 그 자체로서 일관성이 있어야 하며, 따라서 안정적이고 믿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잘못된 논증의 주요 특징은 비일관성이며 오류를 정정할 필요가 있게 된다는 점이다. 워치타워의 한 가지 문제점은 이 모든 것을 정당화시키고 동시에 이 문제에 있어서 독자들에 대해 방어적이 되려는 태도를 나타낸다는 점이다. 워치타워 조직은 발표된 "진리"가 자주 변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의무가 있지만, 이러한 모순에 대한 중요성을 최소화하거나 부인하려고 한다. 그것은 오류를 "밝혀지는 진리"로 표현으로 해명하거나 독특한 주장을 함으로써 교리적 주제에 대한 불규칙적이고 변덕스러운 가르침의 과정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한다. ´위에 있는 권세´ 워치타워 역사에서 오류의 가르침 중 하나는 ´위에 있는 권세´에 대한 이해이다. (러셀 목사 시절에) 위에 있는 권세들이라는 이 표현에 대한 이해가 그리스도인들이 복종, 세금, 공물, 존경 등을 바쳐야 하는 지상의 정부당국을 지칭하는 것이었다(제6절과 7절은 아주 명백하다). 러더포드 판사 시대에 이러한 이해가 부정되었고 워치 타워는 (1929년에) "더 높은 권능"이 하나님과 그리스도라고 단정적으로 못박았다. 워치타워는 "더 높은 권능"이 세속적인 당국에 적용되는 것이 전혀 아니며, 그러한 견해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해석은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인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비추는 진리의 "점진적인 빛"에 대한 증거로서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30년 후인 1962년에 이 "점진적인 빛"은 거부되었고 그 용어는 실제로 세속 당국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관점이 재조명되었다. 그런데, 1981년 파수대 기사(29페이지)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제시하는지 주목하라: 14 다행히도, 1962년에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상대적 복종의 원칙에 대한 이해를 얻도록 인도하셨읍니다. 헌신한 그리스도인들이 세속 통치자들을 “위에 있는 권세들”로 순종해야 하며, 이들을 자기들의 유익을 위해 일하는 “하나님의 사자” 즉 종임을 기꺼이 인정해야 함이 밝혀졌읍니다. (로마 13:4) 그러나, 이들 “권세들”이 하나님의 법을 범할 것을 요구한다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그 당시까지만해도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서 13:1의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는 명령에 순종했었읍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태 복음 22:21에 기록된 예수의 이러한 말씀에 의해 제한을 받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그러므로, “가이사”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일들을 하도록 요구할 때 그들은 언제나 “‘가이사’의 것”보다 여호와의 법을 앞세워야 합니다. 보다시피, 1962년 여호와의 증인들은 - 처음 표면적으로! - 실질적인 진전이 있었다는 주장을 하였는데—"상대적 복종"의 원칙에 따라, 세속 당국에 대해 복종을 해야 하지만 절대적인 복종은 할 수 없다는 점을 이해하게 되었다. 만약 그 "더 높은 권능"들이 그들에게 하나님의 법을 위배되는 일을 하라고 요구한다면 그들은 복종할 수 없었다. 비록 집필자가 그 주제를 새롭게 연구하여 썼다고 생각했겠지만, 만일 그러하였다면 아마 그 기사의 집필자는 어떤 사실들을 모르고 썼을 것이다. 그 사실이란 방금 언급된 이해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러셀의 시대에 세속 권위에 대한 복종은 하나님의 요구조건과 상충되지 않는 당국의 요구일 때만 상대적인 복종에 불과하다는 것이 이미 이해되었다. 1886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시대들의 신성한 계획>이라는 책 266면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께서나 사도들은 지상 통치자들에게 권력의 남용으로 고통을 흔히 겪었지만 어떠한 방법으로든 간섭하지 않았다. 그들은 교회가 법에 순종해야 하며 권세를 가진 자들에게 비록 개인적으로 존경 받을 만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법에 충돌되지 않는 한 세금을 내는 등, 정해진 법에 저항하지 말고(롬 13:1-7; 마 22:21) 그들의 직무로 인하여 존경할 것을 가르쳤다(행 4:19; 5:29). 주 예수께서 그리고 사도들과 초기 교회들은 비록 이 세상 정부로부터 분리되어 있었고 결코 참여하지 않았지만 모두 법을 준수하였다. 1981년 12월 1일호 파수대는 그리스도인들이 군에 복무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누구를 총으로 쏘는 것은 삼가야 한다는 취지의 성명(1904년에 )을 언급하였다. 이는 이들 초기 성서 연구생들이 상대적 복종 원리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했다는 증거로 인용된다. 1904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과거 내용을 관찰하던 이 기사는 1915년 9월 1일호 ´파수대´에서 일견 몇 가지 불만족스러운 증거들을 "이끌어" 낸 것으로 보인다. 그곳에서 C. T. 러셀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와 전쟁"이라는 표제 아래 다음과 같은 논평을 하였다: 성경 연구 제 6권에서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이 모든 정당한 수단을 동원하여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는 제안을 우리는 제출하였다. 우리는 징병소집을 면제해 줄 것을 제안하였으나, 거절되어 징병을 소집할 경우 주의 추종자들은 실제 전투에 참여하는 것보다 의무반이나 식량 보급소에 일할 수 있도록 모든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 나아가 참호에 들어가 전투하는 것이 불가피 하다면 "살인하지 말찌니라"는 거룩한 계명을 범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우리가 제안한 진로의 방향이 최선의 것인지는 단정할 수 없다. 그러한 선택이 타협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군 요원이 되어 군복을 입는 것이 군인의 의무이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로 인정되고 받아들여져야 하는지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본다. 관리에게 항의하는 것은 소용이 없을 것이다.ㅡ 일반 국민은 그것을 모를 것이다. 그러한 상황이 되어도 그리스도인으로서 떳떳한 신분이 될 것인가? "그러나", 만일 군복무를 거부하겠다고 군복을 입지 않는다면, "그는 그 자리에서 총에 맞아 죽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우리의 입장에 대한 발표문이 바르게 이루어진 것이라면 모종의 면제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서, 평화의 군왕에 충성한다는 이유로 총에 맞아 쓰러지는 것이 두려워, 그들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더욱 나쁜 일일 것이다. 지상의 왕들의 현수막 아래서 그들을 겉으로는 지지하는 것으로 보이게 함으로써 하늘 왕의 가르침에 타협하는 것은 더욱 나쁜 일일 것이다. 두가지 죽음 가운데서 우리는 전자를 선택할 것이다. 우리는 하늘 왕에게 충성을 지키고 죽음을 택하겠다. 우리는 이러한 선택을 강요하지 않는다. 단지 제안할 뿐이다. 모든 책임은 각 개인이 온전히 져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주의 마음을 존경하는 여러 성서 연구생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는다. 우리는 일전에 그들에게 최선의 판단을 내릴 것을 권고해 왔으나 이제 그러한 권고가 너무 보수적이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그때 진술한 입장과 오늘날 이 조직이 취한 입장의 유일한 차이점은 러셀이 의무병 복무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이 입장을 강요하려 하지 않고, 그들이 무엇을 결정할 것인지에 대해 그들의 개인 양심에 맡겼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러셀의 시대에 세속 당국에 대한 복종이라는 상대적 성격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 있었다는 주장은 명백히 거짓이다. 조직은 제기된 점에서 대답을 회피 했다는 점에서 볼 때, ´높은 권능들´이 누구인지에 대한 기본적 질문이 제기됨과 동시에, 시선을 딴 데로 돌린 것이다. 비록 상대적 복종에 대한 이해가 나중에 바뀌었다고 해도, 이것은 여전히 "더 높은 권능"에 대한 완전히 잘못된 정의가 올바른 정의로 돌아가는 데에 30년이란 기간이 걸렸다는 사실은 조금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상대적 복종"의 원칙을 인식하는 것에 대해서, 로마서 13장을 다룰 때, 세속적인 권위에 대한 그리스도인 복종은 언제나 상대적이고 조건적이라는 수십 개의 성경 해설을 볼 수 있다. 그것은 1, 2 백년 전에 쓰여진 해설에도 그렇게 되어 있다. 심지어 파수대 잡지가 나오기 훨씬 전에도 그러하였다. 한 예로서, 1832년과 1851년 사이에 쓰여졌지만 지금도 여전히 인기 있는 알버트 반즈(Albert Barnes, Barnes´ Note)의 주석은 로마서 13:1에 나오는 ´위에 있는 권세에 굴복하라´는 명령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사용되는 단어는 복종의 정도를 명시하지 않고, 단지 전체적으로 그것을 기꺼이 지키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법에 위배되지 않는 것이라면 모든 것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원칙이라 보여진다. 치안판사가 하나님의 법에 명백히 어긋나는 것을 명령할 때, 그들이 그에게 복종할 것인지 말 것인지의 문제가 아니었으며 결코 그럴 수도 없었다. 이것은 워치타워 협회가 채택한 것과 동일한 입장이며 또한 찰스 테이즈 러셀이 태어나기도 전에 쓰여진 것이다. 그러나 인용된 파수대 기사는 1962년 당시 처음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기름부음 받은 백성을 그 빛으로 인도하신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다. "왔다리 갔다리"하는 이 모든 개념과 유추의 주된 잘못은 단순히 그것이 사실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진리를 밝히는 역사적 방식에 있어서 매우 심각한 잘못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파수대 기사에서 자인하는 지그재그 코스는 결코 하나님의 인도방식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반대, 즉 불완전한 인간의 추리를 보여준다. 우리 모두도 역시 그러한 불완전한 추리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자체는 주요한 문제가 아니다. 본질적 문제는 자신들의 추측이 "밝혀진 진리"로 신성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개인의 자유로운 판단을 통하여, 그 이해를 달리 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데에서 발생한다. 스스로 이러한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추측 해석에 절대적인 신뢰를 두는 것은 결코 추천할 만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진리는 병존한다. (요 8:32)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를 결정하기 위해 기꺼이 노력하지 않는 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자유를 결코 얻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자유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진리에 대한 사랑과 진리의 동반자인 정직성과 짝을 이루어야 한다. 우리는 당연히 수동적인 복종이라는 하나의 더 쉬운 길을 택하고 싶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비판적 사고와 분석의 힘을 중단하고 인간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을 무조건 믿게 되는 수용자가 된다면 진리는 자유가 아니라 속박의 결과로 이어질 뿐이다. 생명은 바로 진리에 대한 사랑이 요구하는 비용을 우리가 기꺼이 감수하느냐에 달려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승인된 숭배자들은 "영과 진리로 숭배"해야 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