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수록 사람은 거울보다 지난 시간을 더 자주 들여다본다.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지우고 싶은 기억 하나쯤은 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날들.
그날들만 없었더라면 내 인생이 훨씬 나았을 거라고 믿었던 기억.
어느 비 오는 저녁이었다. 골목길 끝, 비에 젖은 작은 간판 하나를 발견했다.
'인생편집실'
유리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당신의 인생을 편집해 드립니다.
호기심에 문을 열었다.
안에는 오래된 책장들이 가득했고, 먼지 냄새가 은은했다. 책마다 사람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곳을 지키는 사람은 낡은 안경을 쓴 노인이었다.
그는 내 이름이 적힌 두꺼운 책 한 권을 천천히 꺼냈다.
“지우거나 고치고 싶은 장면이 있으십니까?”
나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삭제하고 싶은 기억이 있습니다.”
노인은 조용히 책을 펼쳤다. “몇 페이지입니까?”
나는 오래전 동료의 배신으로 사업이 무너졌던 날을 가리켰다.
그날 이후 모든 것이 무너졌다고 믿고 있었다.
노인은 빨간 연필을 들었다. “삭제하시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필 끝이 종이를 스치는 순간, 책에서 한 장이 조용히 사라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마음은 유독 홀가분해졌다. 가슴을 짓누르던 무언가가
사라진 것 같았다. 그날 밤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잤다. ‘정말 지워졌구나.’
며칠 뒤, 거래처 사람을 만났다. 그는 사업 실패로 힘들어하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의 말을 끝까지 들어 주고 위로의 말을 건넸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 잘될 겁니다.” 형식적인 말이었다. 나 자신이 낯설게 느껴졌다.
며칠 뒤에는 더 이상한 일이 생겼다. 오래된 사진첩을 넘기는데 몇 장이 비어 있었다.
사업이 망한 뒤 만난 친구의 얼굴이 사진 속에서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며칠 뒤, 아내가 말했다. “당신 요즘 왜 그래?” “뭐가?”
“예전에는 사람들 아픈 얘기를 참 잘 들어줬잖아.”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정말 그랬던가.
그날 밤, 나는 한참을 잠 못 이루다 다시 인생편집실을 찾았다.
노인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책을 펼쳤다.
“무슨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어떤 친구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노인은 조용히 책장을 넘겼다. “삭제하신 페이지에서 만나셨더군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노인은 다시 넘겼다. “당신이 가진 끈기도 그때 생겼습니다.”
또 한 장을 넘겼다. “사람을 쉽게 판단하지 않게 된 마음도.”
또 한 장. “남의 실패를 함부로 말하지 않게 된 것도.”
나는 책을 급히 덮었다. “그럼 그 일 하나를 지우면 이것들도 없어지는 겁니까?”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건은 혼자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기억은 다른 기억과 이어져 있지요.
인생은 나무와 같습니다.
가지를 하나 자르면, 그 가지에 달린 잎도 함께 사라집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낮게 물었다. “그럼 사람들은 왜 삭제하러 오는 겁니까?”
노인은 미소를 지었다. “아프니까요. 그 고통만 없어지면 행복할 거라고 믿으니까요. 하지만…”
노인은 내 인생책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상처를 지우면 흉터도 사라집니다.
흉터가 사라지면, 그 상처를 견디며 살아온 과정도 함께 사라집니다.”
나는 한참 동안 책을 바라보았다.
구겨진 페이지. 찢어진 자국. 커피 얼룩. 눈물에 번진 글씨.
어느 것 하나 깨끗한 페이지는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책은 아름다워 보였다.
나는 조용히 말했다. “복원해 주세요.”
노인은 말없이 사라졌던 페이지를 다시 끼워 넣었다.
순간 가슴 한구석이 다시 저려 왔다.
잊고 있었던 아픔이 밀려왔다. 동료에게 배신당해 사업이 무너지던 날.
잠 못 이루던 밤. 막막했던 시간.
하지만 그와 함께 친구의 얼굴도 돌아왔다. 아내의 손을 잡고 다시 일어서겠다고
굳게 맹세했던 기억도 돌아왔다. 용기를 북돋워 주었던 사람들의 목소리도 돌아왔다.
노인은 책을 덮으며 말했다. “인생은 소설이 아닙니다. 잘못 쓴 문장을 지운다고
더 좋은 책이 되지는 않습니다.”
나는 책을 돌려받았다. 문을 나서려는데 노인이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래도 삭제하고 싶은 페이지가 있으십니까?”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 페이지는 접어 두겠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오래된 책 한 권을 펼쳤다. 모서리가 접힌 페이지가 유난히 많았다.
다 읽고도 오래 남는 책은, 언제나 접힌 페이지가 있었다.
<오늘의 팝송> Kiss and Say Goodbye / The Manhattans
Kiss and Say Goodbye는 미국 R&B 그룹 The Manhattans의 대표곡으로, 1976년 발매됐다.
빌보드 핫100 차트 1위에 오르며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이별의 아픔을 담은 부드러운 하모니와 감성적인 가사는 당시 라디오와 나이트클럽등에서 자주
울려 퍼졌다.
The Manhattans는 1962년 뉴저지에서 결성돼 'Shining Star'등의 히트곡을 내며 1970~80년대
활발히 활동했다.https://youtu.be/5ie3oDNpRHE
첫댓글
'인생 편집실'
요즘 새로운 방식의 글쓰기 참 좋습니다.
후회라는 나쁜일이 있은 후
“당신이 가진 끈기도 그때 생겼습니다.”
또 한 장을 넘겼다. “사람을 쉽게 판단하지 않게 된 마음도.”
돌려받아 다시 보니 접힌 부분이 많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
잊고 넘어감이 상책이지요.
아마도 나의 인생에서 접힌 부분도 상당히 많을 듯합니다.
다 잊고 싶은 과거입니다.
공감합니다.
아픈 기억은 피하고 싶고 잊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런 기억은 피한다고 사라지는게 아니어서
긍정적으로 받아 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시니방장님.
돌아보면 지우거나 고치고 싶은
장면이 많았었는데.. 이 글을
읽고나니 지우고 싶은 장면이
없어지네요.
지우면 현재의 행복까지도 지워질 것 같거든요. ㅎ
맞습니다.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는 서로
인과로 얽혀있어 어느 하나만을 끊어낼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음자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