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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智異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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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서장 ♡ 스크랩 살며.. 느끼고.. 배우 영혼(靈魂)의 유영(遊泳)
nolboo 추천 0 조회 129 10.05.07 08:3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영혼(靈魂)의 유영(遊泳)

 

"어떠한 죄이든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용서받지 못할 자는 없다." 

 --미국 나성성서 명예 신학박사, 용문산 기도원 창립.(故) 나운몽 목사(1914.1.7~2009.11.26)----

 

 

이렇게 비가 억수로 쏟아 붓는 밤이면, 추녀 비가림막(幕) 밑, 의자에 나와 앉아 눈을 감습니다.

후회(後悔)와 미련(未練)이 교차(交叉)되는,  가슴 쓰리도록 몰려오는 50여년 전, 그 때의 그 아스라한 추억(追憶) 속에서, 내 영혼은 힘겨운 미혹(迷惑)속의 유영(遊泳)을 합니다.

 

잠자리에서 눈이 뜨이자 낡은 군복(軍服)에 검정 물감을 드린, 간이(簡易) 외출복(外出服)만을 걸치고 집을 나섰습니다. 중학교 다닐때 부터 가슴 속 깊은 밑바닥에 똬리를 틀고 꿈틀거리던 몽매간(夢寐間)의 한(恨)의 실체(實體)에 다가 가려는 야무진 계획을 실현 하려는 첫번째 시도(試圖)였습니다.

 

하루 종일 굵은 빗줄기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빗물이 흘러내려 얼룩지는, 차창(車窓)밖으로 보이는 시경(示景)은, 밑그림만 그리다 팽개쳐 놓은 동양화(東洋畵)의 퇴색(退色)된 화판(畵板)처럼, 그렇게 암울(暗鬱)하고 삭막(索寞)했습니다.

당시(當時)엔 우리 나라에 포장(鋪裝)된 도로가 없었습니다. 굴곡(屈曲)과 요철(凹凸)이 심한 흙길이 그대로이거나, 패인 곳에 잔 자갈을 깔아 놓은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덜덜거리는 낡은 버스가 차체(車體)를 요동(搖動)치며 춤을 추게하고, 창문 틈으로 빗물이 흘러들어 바닥에 흥건히 고입니다.

버스 승객(乘客)들은 자기의 뜻과는 관계 없이, 버스와 함께 춤을 추고 요동을 쳐야하기 때문에 장거리를 타고 나면, 허리와 엉덩이가 쑤시고 아픈 통증(痛症)과 함께 피로감(疲勞感)을 심하게 느께게 됩니다.

그 당시(當時) 버스는 지금의 직통(直通), 직행(直行)이 없이, 모두가 완행(緩행)으로 승객(乘客)이 원하는 곳이면 어떤 장소에서 든지 타고 내리기 때문에 목적지 까지 가는데 걸리는 시간이 지금의 몇배가 걸립니다. 자가용(自家用)으로 사용(使用)하는 승용차(乘用車)는 거의 없을 때입니다.

지금 이 버스를 타고 충주에서 출발해 문경(門慶)과 상주(尙州)를 거쳐 김천(金川)으로 가고 있습니다.

아침 식사도 걸은 나는 문경 정류장(停留場)에서, 차창(車窓) 밖에서 행상(行商)하는 아줌마들이 들이밀어 주는 삶은 달걀 몇알과 옥수수 몇통을 사서 아침겸 점심으로 요기(療飢)를 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 동네 빈터에, 허름한 천막교회(天幕)가 새로 생겼습니다.

서울에서 오셨다는 이 교회 백(白) 전도사(傳道師)님 혼자서 운영(運營)하셨습니다.

30대 초반(初班)쯤의 이 젊은 백(白)전도사님은 신학대학(神學大學)을 졸업(卒業)하고 바로 나오셨다는데, 큰 키에 피부(皮膚)도 희고, 얼굴의 윤곽(輪廓)이 또렷한 이지적(理智的)인 신사(紳士)분이셨습니다.

깔끔한 예복(禮服)을 입으시고 온화(溫和)하고, 인자(仁慈)하신 자태(慈態)와 표정(表情)으로,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이나, 직접 가가호호(家家戶戶)를 방문(訪問)하시어 신앙(信仰)을 갖기를 권유(勸誘)하셨습니다. 같은 동성(同性)이면서도 존경(存敬)과 흠모(欽慕)를 느껴 열심히 따라 다녔습니다.

밤에는 아무도  찾는 사람이 없는 텅빈 교회에서, 혼자 예배(禮拜)를 보시며 성경 말씀을 낭독(朗讀)하고 찬송가(讚頌歌)를 부르셨습니다. 혼자 예배(禮拜)보시고 설교(設敎)하시는 모습이 안타까웠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 사람이 아니고, 천국(天國)에서 내려 오신 성스러운 분이라고도 생각했습니다.

이 백전도사님의 홀로 수행(遂行)과 선교(宣敎)활동에 감복(感伏)하였는지 어린이들이나 아낙네들이 찾아들기는 했으나 1년이 다 가도록 20명도를 넘지를 못했습니다. 그 20여명 안에는 '준이'도 끼어 있었습니다. 지금 생전부지(生前不知)의 땅을 더듬어 그 분을 찾아가는 바로 이 사람입니다.

동네 심술 궂은 불량(不良) 소년(少年)들이 야음(夜陰)을 틈타 천막(天幕)벽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을 때도, 불평(不評)의 말 한마디 건너지 않고 바람에 펄럭이는 천막 안에서, 천막을 훼손(毁損)시킨 가엾고 불쌍한 저 영혼(靈魂)들을 악(惡)으로 부터 구해 달라고 울부짖으며 하느님께 기도하고 찬송가를 부르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악마(惡魔)의 유혹(誘惑)에서 구해내 하느님의 품으로 되돌려 드리기 위해 오신 천국(天國)의 사자(使者)일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한적이 많았습니다.

 

"준이"(백 전도사님은 나를 그렇게 부르셨습니다.)는 전도사님의 총애(寵愛)를 받았습니다.

맛 있는 과자나 빵을 사다 놓아, 항상 허기져 걸신(乞神)이 들려 있는 내 주린 배를 채워 주셨고, 하느님, 예수님, 그리고 성경(聖經) 말씀을  전해 주시려고 부단(不斷)히 노력 하셨습니다.

서울 댁에 다녀 오실 때는 학용품, 옷가지도 사다 전해 주기도 하셧습니다.

교회(敎會)가 아닌, 단 둘이 있는 사석(私席)에서는 당신을 '형님'이라 부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때 백 전도사님의 언행(言行)은 내 존경(尊敬)과 선망(羨望)의 대상(對象)이었습니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나가 천막교회 안과 밖의 청소와 정돈, 그리고 전도사님의 시중을 들어 드렸습니다.

그때 우리가 사는 마을에는  오랫동안 머물러 살아 온 터줏대감들은 별로 없고, 주로 여러 곳을 떠돌아 다니며 힘들게 사는 뜨내기 빈민촌(貧民村)이었습니다. 어린이들의 성정(性情)이 배타적(背他)이고, 사납고, 거칠었습니다. 입을 열면 욕설(辱說)이고, 만나면 싸움이고, 보는 사람이 없으면 도둑질이었습니다.

 

'준이'가 중하교 3학년이던 늦가을 어느날 밤중에 천막교회에 원인 모를 큰 불이 났습니다.

사람들이 집에서 뛰쳐 나왔지만, 바람이 부는 한 밤중의 치솟는 세찬 불길은 감히 끌 엄두도 못 냈습니다.

교회 천막과 그 안의 도서(圖書)며 집기(什器)들이 모두 타 잿더미가 됐습니다.

그 사건이 있고, 3일이 지난날 저녁, 전도사님의 하숙집을 찾았습니다.

"준이야, 나는 내일 이 곳을 떠난다, 하는님이 아직 지금의 내 선교(宣敎) 활동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 같다. 좀더 공부하고, 기도해서 하느님께서 허락해 주실 때 다시 이 곳을 찾아 올 거다,

준이도 열심히 공부하고 반듯하게 자라서 그때 만났으면 좋겠다.'

"어디로 가시는데요?"

"아직은 결정된 곳이 없다. 우선 서울 집으로 올라가 머물면서 생각해 보겠다."

백전도사님은 그렇게 떠나 가셨습니다.

그리고 준이와 두번의 편지 왕래(汪來)를 끝으로 소식이 두절(杜切)되었습니다.

준이는 가끔 백전도사님의 안부(安否)나 근황(近況)이 궁금했지만 알아 볼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 고등학교 2학년 때 백전도사님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내 안부와 당신의 그간의 생활을 적은 뒤에

"준이야,

지난 날 너와 함께 지냈던 백 전도사.

아니, 네 형은 여기, 김천(金川) 용문산(龍門山) 기도원(祈禱院)에 들어온지 삼년째가 된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기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기도하는 것이 내 일상(日常)의 전부다.

"----------------------------------------------------."

"너도 그동안 많이 컸겠구나.

이런 곳에서 너와 한번 만나고 싶다. 내 희망 사항이겠지만-------."

당장 달려가 뵙고 싶은 마음은 간절(墾切)했지만 어린 나로서는 찾아 갈 길도 모르고 능력도 없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할일 없이 놀고 있을 때입니다.

"경상북도 어모면 능치리, 용문산 기도원"

백전도사님이 보내주신, 주소(住所) 적힌 편지 봉투만 달랑 들고, 그 분의 '희망 사항'을 실현(實現)시켜 드리기 위해, 그렇게 뵙고 싶었던 분을 만나기 위해, 이른 아침에 집을 출발해 하루 종일 낡은 고물 버스 속에서 엉덩이 춤을 추며 김천에 도착했습니다.

온 종일 억수로 내리던 비는 멈추었지만, 칠흑(漆黑)같은 어둠 속, 난생 처음 찾은 김천에서 동서남북도 분간할 수 없었습니다. 어둠 속을 지나는 몇사람에게 닥아가 용문산 기도원 가는 길을 물었지만 모른다는 대답뿐이었습니다. 그 무렵이 용문산기도원(龍門山祈禱院)은 창립(創立)  초기(初期)여서 김천에서 조차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헤매다 보니 어둠 속에서도 '김천 우체국' 간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구세주(救世主) 같았지요.

"용문산 기도원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어느 쪽으로, 어떻게 가면 되겠습니까?"

출입문 가까이 앉아 있는 아가씨에게 물었는데, 뒤쪽 회전의자에 앉아 있던 국장인듯한 나이든 사람이 앞으로 나왔습니다.

"지금 가시렵니까?"

"예."

"지금은 가실 수 없습니다.

여기서 30~40분 정도 버스를 타고, 시(市) 외곽(外廓)으로 나가야 하고, 내려서도 8 Km정도 산속 험한 길을 걸어야 합니다. 지금  어둠 속에서 찾아 간다는 것은 무리입니다. 가까운 여인숙에서 자고 내일 가시죠."

"말씀 고맙습니다. 그런데 가는 방법이라도 지금 가르쳐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국장님의 자세히 일러주시는 말씀을 귀담아 듣고 우체국을 나왔습니다.

어둠 속의 거리를 헤매다 다행히 택시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 택시는 지금 처럼 안락(安樂)한 차가 아닙니다. 6.25전쟁 때 쓰이던 미군 지프차를 개조(改造)해 만든 시발(始發)TAXI입니다

택시는 하루종일 비내린 진흙탕 길을 한동안 달려 방향(方向)과 지형(地形)을 전혀 짐작할 수 없는 산 계곡(溪谷) 밑에 내려 줬습니다.

"여기서 계곡을 따라 10m쯤만 가면 초가집 한채가 있습니다. 그 초가집은 구멍가게인데,   앞에 두갈래의 길이 있어요, 오른쪽 길을 택해 계속 올라가면 기도원이 나옵니다. 고생을 많이 하실텐데."

 

그 외딴 초가집 마루에는 가물거리는 호롱불이 켜져 있었습니다.

오늘 하루종일 먹은 것이라곤 낮에 버스 안에서의 달걀 몇알과 옥수수 몇통 뿐이었습니다. 배도 고프고 몸도 많이 피곤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백전도사님과 아주 인접(隣接)한 장소(場所)에서 같은 공기(空氣)를 공유(共有)하며 호흡(呼吸)하고 있다는 생각 만으로라고 가슴이 벅찼습니다.

가겟집 마당에서 주인을 불렀고, 한참만에 쪽문을 열고 나오신 분은  희미한 등불 밑에서도 머리가 하얗게 센 할아버지였습니다. 열려진 문으로 보이는 방에도 역시 백발의 할머니 한 분이 손으로 무엇인지를 조물락 거려 만드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깊은 산 계곡에 노인 단 두분만 사시는 것 같아 마음이 썰렁했습니다.

"할아버지, 지나가는 배고픈 사람인데 뭐 요기할만한 것이 없을까요?"

'없는데, 저 안쪽 마을 쪼무래기들이 좋아하는 사탕, 엿, 음료수 등이 전부야. 건빵도 있구."

"할아버지, 건빵 한봉지 하고 음료수 한병을 주세요," 가면서 먹으려고 그것을 받아 바지주머니 양쪽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뒤돌아 나오려는데

"이 동네 사는 젊은이는 아닌데, 이 달도 없이 캄캄한 밤에 어디를 가려는 건가?"

"기도원에 가는 길이에요. 집 앞에서 오른 쪽 길로 올라가면 된다면서요?" 할아버지를 쳐다 봤습니다

"맞아, 맞기는 맞는데, 좁고 울퉁불퉁한 돌길이지, 바위 틈의 구멍길도 빠져 나가야 하고, 비가 많이 와서 웅덩이도 있을텐데----. 위험해-----, 보아하니 젊은 사람인데, 할아버지, 할머니 같은 우리 늙은이와 함께 자고, 내일 아침 일찍 먼동이 트는대로 바로 올라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 할아버지가 염려스러워 하셨습니다.

"말씀은 고맙습니다. 그런데 지금 꼭 올라가야 할 사정이 있습니다." 기도원 턱밑에서 잘수는 없었습니다.

인사를 드리고 막 삽짝문을 나서려는데 할아버지가 손짓해 다시 불러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추녀 밑 댓돌을 내려 오셔서 툇마루 밑을 더듬어 지팡이를 꺼내고, 다시 올라가 성냥 한갑을 갖고 내려와 내 손에 쥐어 주셨습니다,

"이 지팡이로 장님 처럼 길을 더듬으면서 올라가게. 그리고 물소리가 나거나 암벽에 부딪치면 이 성냥불을 켜 확인하고 길응 찾아 올라가, 손자 같은 젊은이가 이 밤중에 위험한 길을 꼭 가야 한다니 마음이 안 놓여."

돌아가신 친 할아버지 같은 정겹고 고마운 배려에 콧잔등이 시쿤둥해졌습니다.

"할아버지, 정말 고맙습니다. 며칠이 걸릴지 모르지만 내려올 때 꼭 뵙겠습니다."

할아버지의 거친 손을, 내 두손 안에 쥐고 감사의 말씀을 거듭 올리고 산길에 올랐습니다.

넘어지고, 부딪치고, 계곡물에 빠져 철벅거리면서 두어시간을 올랐습니다, 온 몸이 땀에 흥건히 젖었습니다, 비가 내리지 않는데도 한밤중의 산중이라 그런지 많이 추워 몸이 떨렸습니다.

자정(子正)이 다된 오밤중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읍니다. 달도 별도 없는, 사방을 둘러봐도 칠?같은 어둠의 장막(帳幕)뿐입니다. 어둠 속에서 사나운 산 짐승이라도 나올것 같은 기분에 신경이 곤두서기도 했습니다,

 

 "주여---! 내 죄요, 내 탓입이다. 내 탓입니다!!'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사, 죄를 사(赦)하여 주십시오!!'

"주여---! 어찌하오리까. 갈 길을 인도(引導)하여 주소서."

"주여----------------!,주여----------------!'

"주여------------------------------------------------!,"

계곡(溪谷) 양편(兩便)의 산 능선(陵線)에서 죄(罪)를 고(告)하고 사(赦)함을 받으려는 기도(企禱)소리입니다. 이 세상에 죄를 짓지 않고 살아 온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나도 죄인입니다.

칠흑같은 밤하늘을 향해 울부짖으며 통곡(痛哭)하는, 애절(哀切)한 기도 소리에 내 영혼은 위축됐습니다.

안내실(案內室)에가 등록(登錄)을 하고, 조그만 방을 하나 얻어들었습니다.

온갖 사념(思念)과 번민(煩憫)에 골몰(汨沒)하다 홀연(忽然)히 잠 속에 빠지려는가 했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비몽사몽(非夢似夢)간이었다고나 할까.

"손님, 새벽 예배 시간입니다. 참석하시겠습니까?"  하겠다고 하고 일어나니 4시었습니다.

흙 투성이인 옷을 대강 털고, 밤송이 같은 머리카락을 훑어내려 손질하고 천막교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른 새벽인데도 좁지 않은 천막교교회 안에  남녀노소의 예배객(禮拜客)으로 자리가 거의 꽉 찼습니다.

왼쪽은 남자, 오른쪽은 여자분들의 자리었습니다.

잠시후 앞쪽의 천막문을 밀치며 목사님이 셩경과 찬송가 책을 들고 들어 오셔서, 장내(場內)를 훑어 보셨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시작하셨습니다.

'틀림 없다, 백 전도사님, 아니 백 목사님이시다,' 몇년을 못 뵈였지만 생김, 태도, 음성이 확실했습니다.

목사님도 나를 알아 보신것 같았습니다. 찬송가를 부르시는 동안 시선(視線)이 내게 박혀 있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내 쪽으로 걸어 오셨고, 나도 빠른 걸음으로 닥아 갔습니다.

"너. 준이 맞지?" 헤어진지 5년여(年餘)만에 만나는 상봉(相逢)이었습니다.

얼마나 보고 싶었던 존경하는 분이셨던가. 말이 나오지 않고 목젖이 아래위로 몇번 꿈틀거렸습다.

백 전도사님은 나를 당겨 안으시고 등을 토닥거려 주셨습니다.

"잘 왔다. 네가 보고 싶긴 했어도, 이렇게 먼길을 찾아 주리라고는 생각 못했다.

주님께 감사기도를 드려야겠구나. 너도 이제 어른이 됐구나."

 

우리는 이렇게 다시 맞나 5일 동안, 학습(學習),침식(寢食), 예배(禮拜)와 생활(生活)을 함께 했습니다.

용문산 기도원(龍門山 祈禱院),

경상북도 김천시 어모면 능치리, 백두대간(白頭大幹)의 깊은 산중(山中), 산 높고 계곡(溪谷)이 깊어 경치(景致)가 수려(秀麗)한 곳입니다. 경내(境內)가 넓어,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각자 흩어져 기도를 해도 서로가 마주치거나 방해(妨害)되지 않는 신성(神聖)한 곳입니다.

평북 박천 맹중리 출생의 나운몽(1914~2009) 목사님은 한국 기독교의 성령 운동과, 구국기도 운동, 문서선교 사업에 선구자적 역할을 하신 분입니다.

1947년, 4월 7일, 김천 용문산에 애향숙(愛鄕塾)을 설립하여 기도와 성령 운동의 일꾼을 길러내기 시작했습니다. 1950년대에 한국 기독교 최초의 기도원인 '용문산 기도원'을 설립하여 구국제단(求國祭壇)을 쌓고, 1년 365일, 24시간, 지금까지 쉬지 않고 구국기도(救國祈禱)가 계속되고 있는 곳입니다.

구국기도와  문서선교에 일생을 바쳐 기도와 성령운동의 많을 일꾼을 길러냈습니다. 

그리고 그는 1975년 미국 나성성서 신학대학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분이시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졌다는 정감록(鄭鑑錄)의 정도령(鄭道令)과 불교의 미륵(彌勒), 그리고 기독교의 메시아(Messiah, 구세주)는 같다고 했습니다.

정감록의 정도령과 불교의 미륵, 성경의 예수 그리스도를 같이 풀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곧 정감록(鄭鑑錄)의 진사성인출(辰巳聖人出)은  진사년에 성인이 태어난다는 뜻으로' 주님께서 병진(丙辰)년에 잉태(孕胎) 되시어 진사(辰巳)년에 탄생(誕生)하셨다고 했습니다.

'정도령남해주래(鄭道令南海州來)'는 정도령이 남해주로 부터 온다는 뜻인데, 그가 바로 팔레스타인에서 출생(出生)한 도련님이요, 예수크리스트라는 것입니다.

 

불교(佛敎)에서는 앞으로 오실 미륵(彌勒) 부처님을 뜻하는 석가모니여래(釋迦牟尼如來)께서 생미륵(生彌勒)부처님으로 이 세상에 오시어 중생(衆生)의 죄(罪)를 사(赦)하고 구원(求援)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불자(佛者)로서 자비(慈悲)를 베풀고 수련(修鍊)의 깊이가 더해지면 도리천(桃利天)에 있는 감로(甘露)를 마실수 있고, 이 것을 마시면 번뇌(煩惱)를 잊고 오래 살수 있으며 죽은이가 살아나는 영묘(靈妙)한 물이라고 합니다. 감로(甘露)는 석졍수(石井水)를 말하며 이것은 진리(眞理)를 통찰(洞察)할수 있는 혜안(慧眼)을 얻어야 구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성불(成佛)한다는 것으로 미륵과 한몸인 부처가 되는 것이라 합니다.

 

나운몽 성령운동(聖靈運動)의 원리(原理)는 설립자(設立者) 나운몽에 의하여 제기(提起)된 혼합주의적(混合主義的) 신앙(信仰)과 원리(原理)를 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샤머니즘(Shamanism:원시종교의 한 형태)과 불교(佛교), 유교(儒敎)등의 종교원리(宗敎原理)를 기독교회(基督敎會)의 신앙(信仰)과 사상(思想)에 혼합(混合), 접목(接木)시킨 것이라 볼수 있습니다.

 

그 곳에 머무르는 동안 백전도(白傳道師)님은 시간만 나면 성경(聖經), 불서(佛經), 정감록(鄭監錄) 등의 책을 펼쳐놓고, 이 통합종교(統合宗敎)의 원리(原理)와 나운몽 박사님의 성령운동(聖靈運動)에 관해  이해(理解), 설득(說得)시키려고 노력하셨지만, 나이도 어리고 배운 것도 부족한 나에게는 절실(切實)하지도 않고, 매우 난해(難解)한 문제들이었습니다. 그 점은 지금도 그때와 별로 다름이 없읍니다.

 

인간(人間)은 연약(軟弱)한 존재(存在)입니다.

한계(限界) 밖의 크거나 작은 것을 볼수 없고, 멀거나 가까운 소리와 냄새를, 들을 수도, 맡을 수도 없읍니다.

태어나기 전의 전생(前生)을 되돌아 볼수 없고, 이 세상을 하직(下直)한 후의 사후세계(死後世界)를 예측(豫測)할 수 없습니다. 나의 전생(前生)과 현생(現生)과 내생(來生)을, 이끌어 주도(主導)해 가는 절대신(絶對神)은 누구인가. 이 풀리지 않는 명제(命題)는 인간을 괴롭히는 숙명론적(宿命論的) 과제(課題)입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자위(自慰)를 위해 이 절대신(絶對神)을 만들어 냈습니다.

원시인(原始人)들은 세상의 모든 동식물(動植物)과 사물(事物)에 까지 신(神)을 부여(附與)했습니다. 귀(貴)한 사람과 동물, 그리고 기암괴석(奇巖怪石)과 기화요초(奇花瑤草)까지에도 영험한 신(神)이 있다고 믿어 불로장생(不老長生)과 부귀영화(富貴榮華)룰 기원,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다신론(多神論)을 주장했습니다.

 

다음에 부족(部族)과 국가(國家), 사는 지역(地域)에 따라, 서로 공유(共有)하는 절대신(絶對神)인 유일신(唯一神)이 탄생했습니다. 이 유일신은 그 부족과 국가의 질서 유지와 공영(共榮)에 큰 기여를 했슬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유일신을 믿는 종교가 지금 세계적인 종교로,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 등일 것입니다.

소수(少數) 민족이 가지고 있는 토착(土着) 종교까지 합치면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입니다.

 

이런 종교적(宗敎的)인 문제에 봉착(逢着)될, 때 인간은 한 없이 무지(無知), 무능(無能), 무력(無力)함을 깨닫게 됩니다. 어디로 부터 와서, 이 세상을 살다가 어디로 가는가, 누가 데리고 왔다가 또 데리고 가는가.

이 세상에 머물러 살다 육신이 늙고 병들어 못 쓰게 되면, 영구불멸(永久不滅)의 영혼(靈魂)은 그 낡은 육신의 옷을 벗어 팽개쳐, 새 육신으로 갈아 걸치고 다시 어떤 모습으로 어떤 세상에 다시 태어나는가.

현생(現生)에서의 가호(加護)와 내생(來生)으로의 영생((永生)을 얻기 위해 인간은 신(神)을 선택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모시는 종교만 영생(永生)의 구원(救願)을 받을수 있는 유일(唯一)한 바른 정교(正敎)이고, 다른 사람이 믿는 종교는 간사(奸邪) 하고 요사(妖詐)스러운 사교(邪敎)라고 폄훼(貶毁)합니다.

지금 이 늙어진 몸, 노구(老軀)도 크리스트고, 천주교, 불교 등을 두루 돌아다니어 섭렵(涉獵)하며, 고민(苦悶), 좌절(挫折), 방황(彷徨)을 했지만, 내 영혼은 얻은 것 없이 떠났던 출발점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종교(宗敎)에는 관심(關心)이 없고, 꾸밈이나 거짓 없이 타고난 그대로의 천진난만(天眞爛漫)했던 소년이, 백전도사(白傳道師)님을 만나, 교감(交感)과 교정(交情)을 가지면서 하나님이라는 절대신을 모시게 됐습니다.

그러나 그 것도 잠간 소년을 귀여워 해 주시고, 사랑했던 그 분과의 생활은 오래 가지 못하고 헤어졌습니다.

소년은 자라 청년이 됐고, 경상북도 어모면 능지리 '용문산(龍門山) 기도원((祈禱院)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5박(泊) 6일(日)을 함께 기거(寄居)하는 동안 백목사님은 한국기독교 성령운동을 내게 강론(講論)하셨습니다.

 

우주(宇宙)가 태어나고,

천지(天地)가 처음으로 생겨난 개벽기(開闢期),

그리고 천지만물(天地萬物)이 창조(創造)된 태초(太初)에서 지금 까지,

그 천지만물(天地萬物)의 영장(靈長)인 인간(人間)은 자신(自身)들의 생사(生死)와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점지(點指)해 주시는, 신(神)의 존재(存在) 여부(與不)를 목마르게 갈구(渴求)하고 탐색(探索)했습니다.

 

경상북도 김천시 어모면 능치리에

947.4.7 애향숙(愛鄕塾)을 설립(設立)했고

1975. 미국 나성성서 신학대학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 했으며

1950년대에 한국기독교(韓國基督敎) 최초의 기도원인 용문산(龍門山) 기도원(祈禱院)을 설립하여 구국제단(求國祭檀)을 쌓고.1년 365일, 1일 24시간, 지금 까지 쉬지 않고 구국기도 운동, 성령 운동, 문서 선교에 진력(盡力)하여 기도와 성령운동의 많은 일꾼을 길러 낸 나운몽 목사(牧師)(1914.1,7~2009.11.26)를 존경합니다.

 

나운몽 운동의 원리는, 설립자(設立者)에 의하여 구체화(具體化)된 혼합주의적(混合州義的) 신앙(信仰)과 원리(原理)를 말합니다. 우리 민족(民族)의 정신문화(精神文化) 속에 흐르고 있는 샤어모니줌(Shamanism : 원시종교), 불교(佛敎), 유교(儒敎) 등의 원리(原理)를 기독교회(基督敎會)의 신앙(信仰)과 사상(思想)에 접목(接木) 시킨 것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50여년(餘年) 전(前), 감히 우럴어 뵐수 조차 송구(悚懼)스러웠던 40대 중반(中盤)의 나운몽 목사님과, 많은 가르침을 주셨던 존경하던 백 모사님은 이미 천국으로 가시고,  당시(當時)의 20대 청년(靑年) '준이'도 고희(古稀)를 넘은 상로(上老)가 되어, 뒤를 따르려 합니다.

현생(現生)에서의 만남과 가르침이 내생(來生)에서도 이루어 지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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