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진행된 논의에서 많은 것을 약속했지만 그 약속에는 훨씬 못 미친 무언가의 결과에 대한 슬픔이 남아 있다. 여호와의 증인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은 수십년 전 영국의회 의원이 표현한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실로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의 정신이 어떤 이상을 발전시킨 뒤, 그 이상을 구체화하려는 의도로 조직이 전개되는 방식을 보여 주었다. 흔히 일어나는 일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은 관찰을 하였다: 어떤 이상이 조직 안에 구체화되면, 그 조직은 점차적으로 자신을 탄생시킨 이상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머지 않아 교회의 주된 관심사는 조직유지 그 자체가 될 것이다. 이를 위해, 조직으로부터 이탈되는 일은 반드시 정죄되어야 하며, 필요하다면, 이단으로 진압시켜야 한다. 몇십년 혹은 몇백년 동안 새롭고 더 고결한 진리의 운송체로 여겨졌던 것이 인간의 영혼을 가두는 감옥이 된다. . . . 조직을 탄생시킨 이상은 조직과 아무런 관련이 없게 되고, 시작했던 이상과는 반대로 오직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게 된다. 이제, 이 전환 과정에서 일어나는 것은, 곧 조직이 원래 이상의 반대편에 서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이상을 향해가는 것이 아니라, 조직의 포로가 되는 것이다. . . . 조직은 처음 이상의 특정한 관심사를 실천하는 역활이 점점 줄어들게 된다. 여호와의 증인으로 알려진 이 조직은 약 1세기 전부터 호소력 있는 많은 것들을 약속했다. 그것은 기존 신조에 얽매여 있는 하나님에 대한 예배의 틀을 깨고, 형식적인 의식주의, 엘리트주의, 성직자 중심의 사고, 종파적 배타성과 편협함에서 벗어나 1세기 그리스도인의 순수성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대신에 순수한 형제애, 개방적인 토론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모든 결론과 결정의 최종 결정권자가 되게 하겠다는 결단력으로써, 그들의 소속 교파에 관계없이, 모든 성실한 사람들에 대한 편견이 없는 태도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상이었다. 실제와는 달랐다. 목표들이 전부 폐기되었거나 그 어느 것에도 진전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부의 탈증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여호와의 증인의 종교는 하나도 장점이 없다는 생각이나, 그 종교를 조롱하는 것은 단지 강렬한 편견을 나타낸 것일 뿐이다. 이런 경향을 가진 채 떠나는 사람들은 떠나는 동기의 순수성에 대해 의문이 제기된다. 좋은 것이 하나도 없다면, 왜 그들은 처음부터 그것에 끌렸을까? 아니면 왜 그들은 그 안에 5년, 10년, 20년 이상 머물렀을까? 자기 성찰이 항상 다른 사람의 입장이나 주장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보다 선행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형제의 눈에 있는 티끌에 초점을 맞출 수 있고 우리 자신의 들보를 보지 못할 수 있다. 일부의 사람들은 실제로 기본적으로 증인조직 내에서 어쩔수없이 발생되는 피상적인 결함이나 오류에 초점을 맞추고 확대한다. 그들은 표면적인 문제를 보지만 더 중요한 근본적인 문제를 보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흔히 반대되는) 입장과 주장이 그들이 옹호하는 특정한 종교 제도의 이점으로 우월해 보일 것이라고 느끼는 지역에서만 비난한다. 그들은 관련된 중요한 원칙들을 적용하여 그들이 나타내는 태도, 입장, 주장에서 어떤 점을 시정할 것인지 알지 못한다. 비슷한 형태로, 조직을 변호할 때 증인들은 흔히 내용보다 외관에 더 큰 비중을 두고, 본질과 반대되는 주장, 어쩌면 겉으로 나타난 모습과 수치로 비교하려는 데에 중점을 둔다. 1958년 뉴욕에서 열린 여호와의 증인 국제대회에서 청중들은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여호와의 증인들의 행복이 넘치는 상태는 영적 낙원의 번영으로 설명된다. . . . 이 영적 낙원이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며 그분의 왕국이 설립되었다는 증거이다. 이 대회의 연사의 ´영적 낙원´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때로부터 증인들은 지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가장 연합되어 있으며, 가장 깨끗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거듭 주장해 왔다. 1986년 3월 15일자 파수대(20면)의 기사에서는 이러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오직 여호와의 증인들 가운데 있는 영적인 낙원에서만, 우리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자기 희생적인 사랑이 존재하는 제자들임을 확인할 수 있다. (요한 13:34, 35) 그들의 나쁜 열매로써 거짓 예언자들은 자신들의 실체를 드러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좋은 나무들이 좋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마 7:15-20) 따라서 우리가 영적 낙원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 거의 모든 나라에서 놀랄 만큼 증가 일로에 있다. . . .그들이 하나님께 가르침을 받기 때문에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들의 삶에서 그리스도인의 열매를 맺는다. 오직 그들은 성적 부도덕, 낙태, 술취함, 도둑질, 우상숭배, 인종 편견, 그리고 다른 세속적 일과 관습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따르는 조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들만이 여호와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하라는 명령을 따르는 사람이다. (마24:14)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여호와의 증인을 그의 조직화된 축복 받은 백성으로 가리키고 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 주장은 그들이 다른 종교보다 다소 더 낫다거나 개선된 정도가 아니라, 현저하게 더 낫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이 분야에서 독보적이라는 뜻이다. 그들의 주장은 ´의심할 여지 없이´ 세계 사막의 유일한 영적 오아시스이다. 앞서 로마서 12:3에서 인용한 사도 바울의 권고를 볼 때, 마땅히 생각해야 할 이상으로 자신에 대해 높이 생각하지 말라고 권고한 바 있다. 이 조직이 주장하고 발표한 자기 이미지는 얼마나 객관적으로 증명되었는가? 인간의 믿음이 어떤 인간적인 시스템에 집중될수록, 그 시스템이 무엇이든지 간에, 사람은 영적인 것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된다. 매우 "종교적"인 것 같으면서도 본질적으로 비영적인 사람들이 된다. 그들은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라기보다 "조직 맨"들이다. 그들의 삶은 그들에게 조직의 승인, 지원, 그리고 그러한 지원이 제공하는 힘을 가져다 주는 활동으로 채워질 수 있다. 만약 조직의 뒷받침이 없어지면, 그들에게 나타났던 힘은 그와 더불어 사라진다. 종교 조직을 위한 열심과 그 조직의 성장과 번영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은 자발적이며, 내적 동기에 의한, 믿음의 결과인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함, 믿음, 온화함, 그리고 자제와 같은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이다. 대부분의 워치타워 조직의 신자들은 "무리와 더불어 어울리는 법"을 알고 있지만, 인간 조직을 떠나서 영적으로 제 기능을 발휘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보이는 인간 조직을 떠나면 그들은 인생에서 진정한 목표나 그것을 위해 노력함이 없이 표류하고, 영적으로 방향 감각을 잃었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의 믿음이 사람에게가 아니라, 순수하게 전적으로 하나님께 집중되었다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앞 장에서 논의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워치타워 조직과 연합하는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바로 육체적, 지상의 욕망의 충족을 강조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러한 희망과 기대는 "곧 실현될 것", "가까이 다가온", "문 앞에서", "바로 앞에" 있다는 확신에 의해 흥분되며, 그것은 인간의 해석에 기초한 계산에 의해서 계속해서 반복된다. 그리스도는 또한 거짓 메시아가 올 것을 예언할 때에, 거짓 메시아는 ´때가 가까웠다´라고 함으로써, 사람들을 미혹할 것이라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을 따라가지 마십시오´라고 충고하였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단순한 욕망이나 무엇을 원하는 사고가 아니라 믿음을 굳건하게 하는 것이며 인내하도록 도움을 준다. 왜냐하면 그 희망은 확고하고 흔들림 없는 영혼의 닻이기 때문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종종 특정한 시기에 얽매여 있는 흥분된 희망은 실망과 환멸을 거듭하고 있다. 이러한 기대는 신기루 이상의 실체가 아니며, 의지력 이상의 안정도 아니고, 습지 가스로 인해 발생하는 반짝이는 빛보다 더 많은 안정성도 없는 것으로 증명되었다. 젊은이들은 자신 있게 "이러한 사물의 제도에 있어서는 결코 늙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고, 그러한 믿음에 기초하여 그들의 모든 계획과 절차를 계획했다. 하지만 그들은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었고, 그들이 처음에 내린 결정들, 주로 거짓된 희망에 의해 계획된 결정들 때문에 대개 살림살이가 어려워지고 심지어 우울증의 문제까지 겪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말하자면, 1914년이라는 시기와 결혼한 그 조직은 "때가 매우 가까이 다가왔다"는 것은 절대적인 사실이라고 주장해 왔는데, 그것은 그 특정한 기간 안에 사람들은 죽음을 경험하지 않을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믿을 수 있음을 암시했다. 그런 허황된 희망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성립되지 않는다. 반대로 그것들은 진정한 희망을 파괴시키며, 순수한 믿음을 약화시킨다. 1978년 본부 집필부에 보낸 이례적으로 솔직한 메모에서 한 지부 사무실에서는 조직의 연대기 추측의 영향과 이것이 만들어내는 동기유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성경 연대기와 동기에 대한 질문이 있습니다. 많은 형제들은 새로운 질서가 1975년 혹은 그 직후에 올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질서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찾고 그들이 들은 것을 좋아하는 몇몇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들은 또한 기본적인 교리에 대해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침례를 받고 회중과 더불어 숭배에 참여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분명히 새로운 질서에 대한 그들의 희망과 그것이 매우 가까왔다는 것에 의해 동기를 부여 받았습니다. 그것은 대체로 물질주의적인 동기였습니다. 1975년이 와서 새로운 질서가 도래하지 않고 지나갔을 때, 영적인 동기가 매우 강하지 않은 그러한 사람들은, 현 사물의 제도에서 더 나은 질서를 누리기를 바라면서 물질적인 것들을 추구하는 세상과 함께 달리는 것으로 돌아가는 것이 최선이라고 보았습니다. 슬프게도, 진리에서 더 오래 몸 담았던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방식으로 영향을 받았습니다. 1975년 이래로 이 나라에서 [대략 3년간에 걸쳐] 약 3만명이 진리를 외면하거나 봉사 활동에서 비정규적이 되었습니다. 지부의 비망록에는, 연대에 대한 기대가 많은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으로 인해, 회중 활동에 대한 지지를 증가시키면서, "대다수 증인들이 그 시기를 고려하여 파이오니아를 시작하였으며, 학업을 중단하고, 정규직 고용을 마다하고 돈을 더 벌 수 있는 기회를 거절하였으며 심지어 건강까지도 소홀히 했다. 그리고 그 해가 지나자 "실망과 환멸을 느꼈다." 나는 1975년 예측을 둘러싼 거짓 긴박함으로 인해 매우 큰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극심한 정서적 스트레스를 겪고, 가족들은 수년간 경제적 압박을 견뎌야 했고, 좋은 직업을 포기한 사람들은 새로운 직업을 구하는데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알코올 중독에 빠졌고, 나이든 사람들은 암울한 미래에 직면했다. 보험 또는 유사한 기금을 조기에 사용한 사람들이나, 수술이나 다른 치료를 미루어 신체 건강이 심각하게 손상된 사람들도 있었다. 만약 그 희생이 진리를 위한 것이고 하나님을 위한 것이며, 고결한 목적을 위한 것이라면, 그럴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 개인[프레드 프랜츠]과 함께 시작되어 한 조직에 의해 공표된 정신 착란 때문이었고, 그것은 무로 끝났고, 완전한 허구임이 입증되었다. 그들은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볼려고 노력할지도 모르지만, 이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은 허황된 희망을 낳은 사람들에게 있다. 이제 워치타워 조직은 진화하여 서로 다른 두 가지 상황 모두에 대해, 곧 닥칠 재난을 감지하는 데 사용할 하나의 공식을 찾아냈다. 폭력과 불안이 가중되는 시기가 나타날 때는 예측이 옳았고 "때가 매우 임박했다"는 증거로 지적된다. 이러한 조건들이 가라앉고 나중에 평화에 유리한 정반대의 조건들이 전개될 때, 이것은 데살로니가 전서 5:3에서 "평화와 안전"을 외치는 사람들에 대한 바울의 말에 근거해 "갑작스런 멸망"이 임박했다는 증거로 활용된다. 파수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발표했다: 이 예언은, 이 사물의 제도가 끝나기 직전에, 유엔이든, 정치와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독립적으로든, "평화와 안전"이 어떤 예외적인 방법으로 선언될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말한다. 이제 레이건 대통령의 임기의 쇠퇴기와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의 해빙 분위기 속에서 핵무기사태 해소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세계 전반의 평화와 안보를 이끌어내기 위한 전주곡인지, 우리는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성경 예언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이 찾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세계의 파멸이 임박했다는 틀림없는 신호로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사도의 말의 맥락은 이 관점과는 정반대이다.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친구들이여, 그 때와 시기에 관해서는 여러분에게 아무것도 쓸 필요가 없습니다. 주의 날이 꼭 밤의 도둑같이 온다는 것을 여러분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평화롭다, 안전하다!” 하고 말할 그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닥치는 것처럼 갑작스러운 멸망이 순식간에 그들에게 닥칠 것입니다(살전 5:1-3, NEB). 사도는 "주의 날"이 도둑처럼 다가오므로, 사람들이 평화와 안전을 말하는 것은 특별한 선언의 형태로 일종의 신호나 경종을 울리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도둑들은 그들의 "곧" 도착을 알리는 "틀림없는 신호"나 경보를 제공하지 않음은 분명하다. 바울의 말은 그리스도께서 앞서 말한 말과 명백히 일치하고 있다. ㅡ그분의 돌아오심은, 어떤 예감을 들게 하거나 갑자기 시작된다는 판단을 내릴 암시도 없이, 평상시처럼 사람들이 먹고 마시며, 결혼하고,집을 짓고, 나무를 심고 하는 등, 사람들이 정상적인 상태로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이러한 희망이 정신에 얼마나 극단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지는 꽤 주목할 만하다. 맥스웰 프렌드가 다녔던 바로 그 ´회중 서적 연구 모임´에 국제본부 집필부 성원이 참석했다. 맥스웰은 본사의 선임 멤버들 중 한 명이었고, 길르앗 선교 학교의 강사로 수년간 일해왔다. 1970년대에, 한번은 밤 서적 연구 후에, 맥스웰이 연구 그룹에게 "글쎄요, 제 기도가 응답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내 친구가 나에게 이야기했다. 무슨 뜻인지 묻자 그는 "큰 환난"이 시작되기 전에 증인이 아닌 친척들이 모두 죽기를 기도해 왔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부활의 자격을 얻게 되지만, 만일 그들이 "큰 환난"이 닥쳤을 때 살아 있다면, 그들은 부활의 희망도 없이 영원히 멸망될 것이다. 그는 그 연구 그룹에게 마지막으로 살아 있던 비증인 친척이 죽었다는 것을 막 알게 되었다고 말했으며, 따라서 그의 기도는 응답되었다는 것이었다. 생각과 감정을 조직적 가르침이나 방침의 패턴에 맞추려는 이러한 경향은, 명백한 오류가 그들에게 드러날 때, 대부분의 증인들이 그 오류를 인정하기를 거부하거나 적어도 그 오류의 중요성을 낮추려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것으로 보인다. 마인드 컨트롤에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과정을 설명할 때 한 가지 자료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사고통제의 또 다른 주요 측면은 구성원들로 하여금 그룹에 비판적인 정보를 차단하도록 훈련시키는 것이다. 인간의 전형적인 방어 메커니즘은 왜곡되어 있어서, 자신의 이전 정체성으로부터 새로운 정체성을 방어한다. 첫 번째 방어선에는 부정(당신이 말하는 것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합리화(이것은 타당하므로 이루어지고 있다), 정당화(이것은 정당하므로 이루어지고 있다), 희망적인 생각(나는 그것(믿음)이 진실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현실로 실현될 수도 있다.)이 포함된다. . . . 전송되는 정보가 리더, 정책 또는 그룹에 대한 공격으로 인식되면 적대적인 벽이 높아진다. 성원들은 어떠한 비판도 믿지 않도록 훈련 받는다. . . .충성과 헌신이 모든 것 가운데서 가장 갖추어져야 할 조건이다. . . .사람들은 지도자나 정책, 또는 조직의 어떤 것에 대해서도 서로 비판적으로 이야기 할 수 없다. 성원들은 서로를 감시하고 부적절한 행동이나 발언을 지도자들에게 보고해야 한다. 무엇보다 명심해야 할 것은, 사람들은 탈성원들이나 비평가들과의 접촉을 피하라는 것이다. 인용된 자료는 특별히 여호와의 증인을 다룬 것은 아니며, 사실 그들을 언급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 묘사는 증인들에게 아주 잘 어울린다. 성서적 의미에서, 진리란 단순히 지적이거나 학문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상과 교리가 사실이냐 오류이냐를 판단하는 기준을 훨씬 넘어선다. 그것은 사람의 생각뿐만 아니라, 사람의 행동, 다른 사람과의 대인관계, 사람과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모두 포괄한다. 진리에 대한 갈망은 이 모든 면에서 정직성을 수반한다. 만약 우리가 자신에게 정직하지 못하여, 현실의 어려운 사실들에 직면하기를 거부한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부정직하게 될 수 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그 조직을 위해 글을 쓰는 사람들이 팩트가 아닌 정보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부정직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게 하는 많은 사례가 발생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여호와의 증인들에게는 믿음과 희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의미가 흐리고 왜곡되었다고 나는 믿는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봉사에서,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 하는 것이 우리가 왜 해야하는가 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결코 외면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우리의 동기, 곧 우리가 어떤 영으로 해야 하는가만큼은 결코 중요하지 않다. 이것들은 우리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고, 우리가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살아있는 믿음을 가진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요소로 작용한다. 고도로 구조화된 활동 프로그램, 수치 보고에 대한 강조, 그리고 워치타워 시스템에서 매우 두드러진 수치들이 이러한 진실을 흐리게 하고 그 중요성을 퇴색시키는 경향이 있다. 진리에 대한 열망 대신 조직의 충성으로 대체됨으로써 사람들과 그들의 필요에 대해 무감각해지게 되는 현상이 불가피하게 야기된다. 여호와의 증인들 중에는 여느 종교 못지않게 애정어린 사람이 많다. 물론 그들이 증인이 되어 사랑을 나타내는 사람이 되기를 멈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사랑의 표현이 매우 제한되고, 때로는 사랑의 정도나 범위조차 축소된다는 것이다. 때로는 그들이 증인이 아니었을 때는ㅡ 달리 표현했을지도 모르는ㅡ그 사랑을 나타내기조차 자유롭지 않다고 느낀다.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해가 떠오르게 하시며,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는ㅡ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형제가 아닌 다른사람들을 대함에 있어서는 냉담하고 거리감을 두면서 단지 형제들에게만 사랑과 따뜻함을 나타냄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하셨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워치타워 조직은 폐쇄적인 사회의 영을 조장하는데, 외부 공동체의 사람들에 대한 유일한 관심은 그들을 워치타워 사회의 성원이 되도록 자격을 얻게 하려는 것 뿐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어떤 심각한 비상사태(일부 자연재해, 사고 또는 기타 생명의 위협상황)에만 증인이 자신의 형제 자매 밖의 사람들의 필요에 관심을 보일만한 이유가 있을 뿐이라는 느낌을 준다. 내가 가장 심각하게 동요했던 것 중 하나는 증인 조직 내에서조차 이웃사랑의 부족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최고 상층부의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짧은 토론 끝에 수천 명의 삶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결정이 나올 수 있었던 방식은 무엇보다 나를 화나게 하였다. ´조직´의 중요성이 높아짐에 따라 조직 상층부의 사람들로 하여금 나머지 형제들에 대해 냉소적으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태도를 기를 수 있게 해주었고, 그럼에도 양심의 찔림이나 미안한 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깨닫게 되었다. 통치체 회기에서 나온 결론은ㅡ결정과 방침을 통해ㅡ증인 사회의 "일반 증인들"의 비행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엄격히 통제될 필요가 있다는 관점을 또 다시 강조하는 것이었다. 증인들의 마음에 부여되는 동기의 순수성은 이런 방식에 대개 의문을 일으켰다. 대다수 통치체 성원들 사이에 존재하는 영은 다른 형제들이 아닌 "오직 우리만 신뢰"하라는 것으로 보였다. 다른 형제들을 향한 책임감이 심각할 정도로 축소되었다. 대다수의 증인이 일반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사실을 유보하는 방식으로 조직의 과거사를 비스듬히 보여주는 데에는 조금도 양심의 가책이 없었다. 이러한 태도의 한 가지 예는 간행물의 배포에 관한 변화에서 볼 수 있다. 1990년 2월 25일, 미국에서는 1990년 3월 1일부터 워치타워 간행물이ㅡ기부금 없이ㅡ 명시 금액이 전혀 없이 무가로 배포될 것이라는 발표가 있었다. 전국 왕국회관에서는 조직에서 제공되는 정보가 ´우리의 성경 교육 업무를 크게 단순화하고 종교를 상품화하는 사람들과 스스로를 분리시키려´는 의향에 따른 워치타워 방침의 변화가 증인들에게 알려졌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간행물을 보다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제안되었다. 따라서, 전체적인 방침의 변화는 자선과 영리로부터의 해방이라는 포장 속에 가려져 있었다. 이 발표가 있기 훨씬 전에, 워치타워 협회는 종교부처의 종교 간행물 판매에 세금을 부과할 국가의 권리가 법원에서 쟁점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았다. 이는 미국의 유명한 텔레비전 복음 전도사 중 한 명인 지미 스와거트 부처가 배포한 간행물에 대해 캘리포니아 주가 6%의 세금을 부과한 것과 관련하여 제기되었다. 워치타워 협회는 전국교회협의회(Council of Christ, California Society for Krishna Society)와 그 밖의 다른 종교 단체들과 함께 이 사건에 대한 아미쿠스 퀴리(법정의 조언자, 대개는 변호사를 가리킴) 브리핑을 신청하여 국가에서 종교 단체가 종교적 간행물을 판매하는 것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위헌임을 선포하도록 촉구했다. 그러나 1991년 1월 17일, 미국 대법원은 국가가 그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판결했다. 그 다음 달인 1991년 2월, 워치타워 협회는 "무가 간행물" 배포를 위해 방침을 변경한다는 발표를 했다. 그 발표에는 세금 문제에 관해 단 한 마디도 없었다. 그 이유는 조직의 결정이 순수하게, 자비롭고 영리에 관심이 없다는 생각에 근거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인 성원들에게 전하였다. 이것은 너무도 뻔한 형태의 냉소주의이다. 1990년 3월 3일 애틀랜타 저널 (the Atlanta Journal & Constitution)의 기사는 부분적으로 워치타워의 변호사인 필립 버럼리와의 인터뷰에 기초하여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브럼리 변호사는 캘리포니아 주에서 지미 스와거트 목사가가 판매한 간행물과 테이프에 세금을 부과할 수 있다는 최근 판결을 포함하는 몇가지 대법원 판결은 증인 지도자들로 하여금 간행물의 기부금을 무가로 하도록 조정시켰다고 말했다. 만일 동기 부여의 요인이 정말로 워치타워 간행물에 포함된 메시지를 사람들이 더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면, 왜 이 "무가 간행물 방침"이 현재 경제 강국인 미국, 캐나다, 독일, 이탈리아 등에만 국한된 것인가? 왜 그 방침이 전 세계적이지 않은가? 만일, 점진적인 도입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졌다면, 왜 세계의 몇몇 가난한 나라들에서부터 그 시작을 하지 않았는가? 빈곤이 매우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소위 "제3세계" 국가에서는 왜 이 제도가 처음 시행되지 않았는가? 이 새로운 방침이 "종교를 상업화하는 사람들과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것이라면, 왜 그들은 다른 나라에서 낡은 방침을 계속 고수하고 있는가? 사실은 ´공짜´라는 말은 실제로 시행되는 것에 비교하면 공허하다는 것이다. 이전에, 증인들은 왕국 회관에서 그들의 간행물을 구입했고, 대중에게 "배포"할 때, 지정된 "기부금"을 요청하여, 처음에 지불한 대금을 보완하였다. 지금은 직접 돈을 내지 않고 왕국 회관에서 간행물을 받지만, 간행물 창구 옆에 ´기부함´이 놓여 있어 무엇을 받든 기부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뚜렷하게 주고 있다. 그런 다음, 일반 대중에게 ´배포´할 때, 그들은 어떠한 금액도 명시하지 않고, 간행물을 받는 집 주인에게 기부금을 낼 수 있다는 것을 알리는 상담을 한다. 만약 기부금을 받게 된다면, 증인은 그 기부금을 자신의 호주머니에 넣지 말고 (그것으로 자신의 간행물비를 충당하지 말고) 워치타워 협회에 기부금을 제출해야 한다는 지시를 받는다. 따라서, 많은 경우, 아마도 대부분의 경우, 조직은 이전에 받은 것을 받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전에 받은 것의 두배 이상을 받고 있는 셈이다. 어떤 출판물이 워치타워 저널 중 하나에 광고될 때, 그 광고는 기부금에 대해 어떤 언급도 하지 않을 수 있다. 단, 독자가 출판물을 요청한다는 글을 쓰고 함께 기부금을 보내지 않는 경우 본사의 관행은 현지 증인이 요청한 출판물을 들고 개인에게 방문하도록 하여, 이 방법을 통해 증인은 출판물에 대한 기부 제안을 할 수 있도록 한다. 조직 지도부가 그들의 새로운 방침을 칭찬하는 말은 계속해서 공허하게 울리고 있으며, 회원들에게 변화의 요인, 즉 그 이유를 위장하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지 않는 것은 증인들의 지성을 경멸하는 냉소주의의 뚜렷한 증거가 될 수밖에 없다. 조직 내에 참된 우정이 존재하는가? 사랑으로만 자신의 제자들임을 알 수 있다는 예수의 말씀대로, ´여호와 증인들 가운데 존재하는 영적 낙원에서만 오직 자신의 참된 제자임을 식별시킬 자기 희생적인 사랑을 찾을 수 있다´는 주장이 기억난다. 여호와의 증인들과 어울리거나 만나는 것을 관찰한 사람은 누구든지 집회 전후에, 또는 그들의 큰 대회들 중 하나에, 또는 왕국회관에 모이면, 형제애와 연합, 그리고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행복감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자연스럽게 이러한 사랑의 감정들의 깊이에 대한 진정한 증거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착하고 충실한 친구의 가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크다. "영적 낙원"에서는 그러한 우정이 번성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여느 종교 공동체에서와 마찬가지로, 여호와 증인들 사이에서도 우정이 싹트고, 그들 중 일부는 매우 가까운 사이일 수 있다. 나는 워치타워 조직과 연합한 동안 많은 친밀한 우정관계를 가졌다. 그리고 그 사람들 중 상당수는 지금도 나의 친구이다. 그들은 나와 비슷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고, 그 가치관이 결국 증인 조직으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켰다. 하지만 나는 또한 증인 공동체 내의 대부분의 우정이 얼마나 조건부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이것은 주로 사람들 자체의 잘못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대체로 어느 곳의 사람들이나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은 그들의 태도와 관계에 미치는 조직의 영향이다. 사실상, 공동체 내에서 단순히 우정을 받아들이는 것은 완전히 조건부이다. 우리가 살펴 본 바와 같이, 1986년 4월 1일호 파수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여호와의 증인과의 연합이 승인 되기 위해서는 여호와의 증인 특유의 성경적 신앙은 물론, 성경의 참된 가르침 전체를 수용해야 할 것을 요구한다. 어떻게 이것이 우정의 근거가 될 수 있는가? 지적했듯이, 많은 교리적 믿음들은 극도로 유동적이었으며, 일부는 거의 주마등 같이 다양하게 자주변화하고 있다. 이는 조직 상층부에게도 ´현재의 진리´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는 것으로 충분히 명백해진다. 교리 변화가 눈에 띄게 많고,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이 실망스러운 결과에 이르게 하는 예수의 비유와 같이, 즉 안정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나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의 견해를 진척시키는데 있어서, 이런 식으로 ´태킹´하는 것은 ´기회에 따라 우왕좌왕하는 아이나 인간의 기수와 같이 바람직하지 못함을 바울이 언급했듯이, 인간의 규정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헛된 숭배의 공허함만 남을 뿐이다. 증인 조직의 역사에서 한탄스러운 주된 요소는, 그 가르침의 불안정성 자체가 아니라, 특히 1920년대 이후의 모든 가르침이 현재의 변화된 어떤 가르침으로 남아 있든 사라졌든, 그것들이 견고하고 안정된 진리인 것처럼 받아들여야 한다는 조직의 고집이다. 그러한 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진리 속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들 중 하나라도 거절하는 것은 "진리 밖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수용에 의해 조건화된 우정은 가르침이 바뀔 때마다 변화해야 한다.ㅡ 그렇지 않으면 조건부 우정은 위태로워진다. 어떤 우정이 시험을 받는 때는 그 우정이 어려움에 처해졌을 때 어떻게 반응하느냐이다. 파수대는 "진정한 친구, 왜 그렇게 찾기 어려운가?"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어떤 사람들은 삶의 겉 모습에만 관심을 가지며 피상적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우정을 위해 필요한 희생을 기꺼이 하려들지 않는다. " 말려들지 마!"라는 말은 요즘 자주 듣는 유행어이다. . . . 한 나이 든 할머니가 관찰한 대로: "그들은 사랑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멀리 떨어져 있다." 포옹과 키스의 예절이 보편화된 문화권에서도 절실한 요구가 부딪힐 때는 실질적인 지원이 부족할 수 있다. "얕은 우정"이라는 부제 아래 그 기사는 계속 이렇게 기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친구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러한 관계에는 얼마나 깊이가 있는가? 흔히 어떤 사람은 그의 사람 됨됨이가 아닌, 그 사람이 제공하는 것 때문에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다. 따라서 그러한 우정은 짧은 기간 동안만 지속될 가능성이 높으며, "친구"가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 순간, 그는 즉시 버려진다. 오랜 시간을 두고 문제의 중요성을 따져보는 증인들은, 증인들 사이의 우정이 어느 정도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그리고 최종적인 분석에서 자신이 "조직"에 호의적인지에 대해, 그리고 그가 가진 자질이나 가치나 그가 지지하는 가치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그러한 조직의 차원에서 무엇을 제공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개인의 자질이나 가치는 그들이 조직의 이익에 부합되고 진보할 때에만 가치가 있다. 그러한 우정은 주로 클럽, 숙소, 노조, 또는 유사한 단체 내에서 좋은 지위를 가진 회원 자격에서 비롯되는 우정과 매우 비슷하다. "진정한 친구"를 찾는 방법에 대한 이어지는 기사에서 파수대는 "좋을 때만 친구"라는 속담을 인용하여 참된 우정에 대해 설명한다: . . .친구의 참된 가치에 대한 인식에 달려 있고 . . . 견고한 친구는 흔들리지 않고 그의 우정을 고수할 것이다. 곤궁이나 어려운 환경, 또는 처하게 될지도 모르는 반성해야 할 상황에 관계 없이 우정은 유지될 것이다. 충실한 친구는 상대방의 반응을 두려워하여 진실을 말하는 것에서 물러서지 않는다. "사랑하는 자가 가한 상처는 충실"하다고 성경은 말한다.(잠언 27:6) 진정한 친구는 비록 그것이 꾸지람하는 충고일지라도 ´진실을 말함´으로써 너를 사랑할 것이다.—잠언 9:8. 지나치게 호기심 많고, 개인적인 것 또는 소유욕이 강한 것을 피하는 것도 지혜의 과정이다. 겸손함은 독단적인 것을 피하도록 우리를 움직이게 할 것이다. 우정은 우리에게 우리의 의견을 강요할 권리를 결코 주지 않는다. 이 모든 진술들은 고귀한 정서와 진실을 표현한다. 그러나 파수대에 실린 그 적용에 따르면, 그들은 모두 증인 공동체 내에서만 진정한 우정을 찾을 수 있다는 견해를 고무시키기 위해 사용된다. 그 공동체 안에서 우정을 보여주기 위한 기준과 진정한 친구를 특징짓는 충성심은 조직에의 순응성과 단단히 결부되어 있다. 많은 증인들은 가장 친한 친구가 되기 위해 가장 좋은 자질을 가지라고 격려하고 있다: 순수하게 사랑을 주는 성품, 다른 사람들의 관심사에 대한 비이기적인 고려, 겸손, 열린 마음, 다른 사람의 사생활에 대한 존중 그리고 상대방의 의견에 대한 권리. 그리고 조직 방침이 허용하는 범위까지 이를 나타낸다. 그러나 조직의 방침은 그들에게 조직의 승인을 조건으로 한 우정을 표현하도록 의무화하며, 그 가르침과 방침을 완전히 수용하고, 조직의 활동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것을 조건으로 한 것이다. 만약 그 사람이 방금 말한 조직적 조건에 맞지 않는다면,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성경에 대한 존중, 사람에 대한 사랑, 높은 도덕적 기준, 양심ㅡ이 중 어떤 것도 그 사람을 향한 사랑의 표현의 지속을 보장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조직이든 꼭대기에서 그 조직을 통제하는 한, 그 한 사람이나 몇몇사람들의 늘어진 그림자일 뿐이다´ 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워치타워 조직 자체가 앞서 인용한 자체 논평을 옹호하는 방식으로 진정한 친구 역할을 하는가? 아니면 조직 자신은 성원들에게 부여하지 않는 충성심을 성원들에게 요구만 하는 것인가? 조직은 친히 시간과 노력을 들여 조직을 지지하고 조직의 견해와 방침ㅡ조직의 규모, 강점 및 영향력을 증대시킨ㅡ을 복종하는 사람들에게만 왜 우정적이고 충성스러움을 나타내는가? 더 많은 것을 더 크게 조직에 기여한 사람들에게는 따뜻하게 접근하여 칭찬의 말을 해주는 반면, 적게 기여한 사람들에게는 차갑게 대하며 좀 더 많은 것을 기대한다는 묘한 암시를 하지 않았는가? 지원, 시간, 비용, 노력 및 정책 제출을 제공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친근하고 충성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면서, 조직에 대해 거리낌 없이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조직을 교정해야 한다는 방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을 왜 사랑하지 않는가? 오히려 그들에게는 조직 자체나 하나님이 아닌 자들로부터 충고를 받는다고 간주하여 화를 내면서 조직의 적으로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적대적인 배교자로 꼬리표를 달지는 않는가? 조직의 관점을 알고 있는 개별 증인으로서는 동료 회원과 자신의 우정의 질을 색칠하지 않을 수 없다. 조직이 성원을 장악하고자 하는 영은 성원들의 우정의 관계에 미치는 범위와 힘을 심각할 정도로 제한하시키므로, 비이기적이고 용기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여 순수한 우정으로 자신을 희생시키고자 하는 마음은 조직의 관점에 억압되어 위태롭게 된다. 일반적으로 증인 조직에서 인생의 세월을 많이 보낸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전적 승인을 받는다는 조직의 주장이 확고하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했을 때, 이것은 고통스런 결과를 낳는다. 그것은 조직에의 충성을 호소하는 것과 양심의 목소리 사이의 격렬한 투쟁으로 특징지어지는 위기의 기간이다. 그럴 때, 사람들은 보통 도움을 받거나 상담을 받거나 힘을 보태기 위해 가까운 친구들에게 의지하게 된다. 참된 우정이 주는 큰 축복 중 하나는 깊은 관심사를 가진 것들에 대해 친구는 동의하지 않을지라도 친구에게 개방할 수 있는 자유이다. 그(혹은 그녀)는 사태의 이유와 특히 자신의 동기를 친구가 듣고 진심으로 염려해 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적 낙원´에서는 아무리 양심적이라 할지라도 다른 관점을 솔직하게 표현하게 되면, 거의 자동적으로 의혹의 눈초리를 몰고온다. 소문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이 때야말로 친구들이 ´좋을 때만 친구´인지, "곤궁한 처지에서나 어려운 상태, 혹은 처해질지도 모르는 반성의 상황에 상관없이"(파수대의 표현을 사용함) 우정이 얼마나 충실한 것인지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결과는 대개 환멸을 느끼게 한다. 자신이 관찰한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거의 고려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말하는 사람은 그것에 타당성이 있는지 여부를 고려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 없고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조직 지도부의 ´늘어진 그림자´는 우정에 드리워지고 거의 자동적으로 으스스한 영향을 가져온다. 조직의 승인을 상실하게 될 위기 상황을 겪을 때, 친구의 반응은 (파수대 용어로 거짓 친구라는 단어를 사용함) "말려들지 마세요!"이다. 일부 사람들은 "자세한 것은 모르고 더 이상 알고 싶지 않다"라는 말을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사법위원회´에서 취한 부정적 사실을 알게 된 뒤 "사정은 모르지만 개인이 잘못하지 않았다면 조직이 그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아무런 증거도 듣지 않은 채 사법판결을 받은 사람이 잘못한 것으로 추정되어 버린다. 나는 개인적으로 조직의 오류와 잘못들을 보고 사적인 대화에서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는 오랫동안 사귄 두명의 친구관계를 가진 이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명의 당사자가 조직의 조사를 받았을 때, 다른 한명은 어색해 하면서도 확신을 가지고 "그에 대한 나의 존경심은 변하지 않았고 여전히 내 친구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결과적으로 의사소통과 교제가 중단되게끔 하였다고 말했다. 파수대에서 인용한 나이 든 할머니의 말처럼 "그들은 사랑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멀리 떨어져 있다"는 말은 어려울 때 친구는 "형제보다 더 가까이 고착한다"는 말과 대조적이다. 기쁨의 열매 증인들의 기쁨이란 대다수 그들이 영적인 음식이 차려진 "풍성한 연회"에 참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비록 그들이 영적으로 "지상에서 가장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이라고 반복적으로 듣게 되지만, 사실은, 증인들이 무사히 그렇게 한다고 느낄 때, 그들은 종종 집회에서, 심지어 그들의 큰 대회조차도 이전 대회에서 계속해서 말해왔던 것의 연례적 반복이라는 단조롭고 피곤함을 주는 같은 내용임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증인들의 "봉사회"는 영업적 특징들을 많이 보여주며, 기술과 더 나은 활동과 생산성에 대해 끊임없이 권고를 강조한다. 대회 프로그램이란 해마다 너무 뻔한 것이어서 안 봐도 비디오다. 집회나 대회 어디에서 이루어지던, 모든 대화는 조직이 친히 제공하는 지침에 신중히 따라야 한다. 듣고 있는 실체는, 말하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조직으로부터 나오는 지침이나 가르침인 것이다. 그들이 집회나 대회 프로그램에서 무엇을 배웠는지를 묻는다면 증인들 상당수는 어떤 중요한 것을 기억하는지 답변으로 표현하기 어려워 한다. 그들은 대회를 통해서 믿음을 굳세게 하여 하나님에 대한 봉사를 향상시키고 그리스도인 생활의 증진에 기여할 수 있게 되는 어떤 것을 마음에 담아 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젊은 사람들이 특히 이러한 집회나 대회에서 지루함을 표현하며, 대부분이 단조롭다고 느끼게 된다. 독립 연령에 도달한 여호와의 증인들의 자녀들이 조직을 떠나는 비율은 언제나 눈에 띄게 높았다. 오랜 기간 장로이며 "도시 감독자"를 지냈던 한분이 본부로 보낸 편지에서 젊은이들의 가정과 회중의 교육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가정에서의 가르침은, 대부분의 경우, 피상적이다. 깊이가 부족하고 관련성이 없다. 일부 부모들은 "내화성" 물질로 매우 뛰어난 젊은이들을 만들었다. 하지만 일부의 사람들은 스스로의 길을 걷게 되며, 비록 진리에 자신을 노출시키기는 했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결코 큰 의미를 줄 정도가 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결혼하고, 직업을 얻고, 가정을 꾸리고, 그리고는 세상으로 사라지게 된다. 그들은 집회에 참석할지 모르지만 항상 뒷전에서 졸고 있다. 대부분의 증인이 지정된 책이나 잡지에서 집회를 위해 예정된 자료만 읽고(그 내용을 미리 읽는다 하더라도) 인용된 성경 구절을 찾아보거나 묵상하는 시간을 거의 갖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거의 모든 기사 또는 모든 성경 토론에서 워치타워 조직은 방침, 목표 그리고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것들을 정기적으로 논의할 뿐이며, 이러한 짓으로 인해 인용된 성경 내용에 대한 이해를 어둡게 하거나 심지어 문맥의 의미까지도 배제시킨다. 회중 성원들이 개인의 장성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들의 마음과 정신을 사용하도록 장려되는 것이 아니라, "독립적인 사고"와 유사한 어떤 종류의 해설도 피하게 하며, "충실한 종"이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순응할 필요를 끊임없이 촉구한다. 깨끗함을 유지하는 더 우월한 연합인가? 조직이 개인의 불법 행위와 잘못된 행위의 모든 경우를 세계에 방송해야 한다고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어떠한 타당한 목적도 될 수 없고 불친절하면서도 해로울 것이기 때문이다. 잘못된 점은 다른 교단의 실패를 널리 공표함으로써 워치타워 조직의 도덕적 우위에 대한 인상을 크게 만드는 것이며, 이는 여호와의 증인들 전체가 공통적으로 대표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동시에 워치타워 조직 자체의 신앙 체계 내에서는 어떤 도덕적 실패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도덕적 실패가 여호와의 증인 내에서도 비슷한 규모로 존재한다는 것이 명백한가? 오해의 소지가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예로서, 1983년 10월 1일 파수대 (7면)는 몬트리올에서 열린 증인들의 대회에 호의적으로 글을 쓴 퀘벡 언론인을 언급한다. 그의 말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만약 증인들이 이 세상에 사는 유일한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밤에 문을 잠그거나 도난 경보기를 켤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는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증인들이 모여 살고 있는 브루클린의 국제 본부에서 수십 년 전에 숙소의 모든 문에 자물쇠를 설치하는 것이 필요하였고 내가 있었던 15년 동안 어떤 기간에도 적어도 한 명 이상의 증인 도둑이 활동하였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 ´베델 가족´ 내에서 귀중품을 방치하거나 아무렇게나 두지 않도록 테이블 머리에 있는 쪽지로부터 경고가 필요했다. 도둑이나 알코올 중독과 같은 비행은 비교적 적었지만, 이것은 상당히 작은 마을과 같은 1,900명 이하의 집단이면서 작은 마을보다 비행의 건수가 훨씬 적게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되는 전문화된 집단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워치타워 출판물들은 호별 방문 ´야외 봉사´에서의 정기적인 활동이 영적 약함과 비행을 막아주는 강력한 보호라고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지부와 국제본부에서 방금 기술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러한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야외 봉사 활동이나 집회 참석 등의 요인에 의해 범죄 발생이 측정 가능한 수준으로 감소함을 보여주는 증거가 빈약하며, "전시간" 봉사자의 비행 건수는 그 봉사에 참여하지 않은 경우보다 적다는 것을 보여줄 만한 증거는 없다. 브루클린 본부에 보낸 편지에서 30년 이상 연합해 온 한 증인은 다음과 같이 썼다: 저는 회중의 4명의 사람들(그중 2명은 파이오니아)이 자살한 것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저는 회중 내의 결혼 문제(최소한 6명의 파이오니아를 포함해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봅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따로 분리된 사건이 아니라 회중의 문제들과 직접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한 자매의 말에 의하면 "남편과 헤어질 수 있도록 다음 달에 ´진리´를 버릴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말하는 보조 파이오니아를 여러 달 동안 하던 중인 한 자매와 대화를 나누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녀는 제게 어떤 도시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는데, 거기서 상담에 잘 훈련된 장로를 만나러 갔지만, 그녀는 약속을 취소했습니다. 나중에 그녀가 엄청나게 무모한 짓을 벌인 것을 알고서, 왜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도움을 청하지 않았느냐고 제가 물었을 때, 그녀는 "저부터 회중에서 쫓겨나기 위해서 그렇게 했어요."라고 대답했다. 여기서 그녀의 태도는 결코 독특한 것이 아니다. 앞서 인용한 지부의 비망록에 대해 마지막으로 한 가지 언급하겠다. 그 출처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인구가 많고 증인의 수가 가장 많은 나이지리아이다(비망록 작성 당시 10만 명이 넘었다). 이 비망록에는 나이지리아 증인에 대한 우호적인 진술, 그들의 지속적인 재판, 비아프란 전쟁 동안 중립을 유지하려는 노력, 국기에 대한 경례 거부로 어린이들이 직면하는 어려움 등이 담겨 있다. 그것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조직의 입장을 고수하는 증인들의 확고한 태도(일부 관찰자들의 논평)를 강조한다. 여기서도 여러 가지 좋은 경험이 이야기되었다. 이 모든 것은 여호와의 증인의 평판은 이상적인데서 꽤나 떨어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비망록에는 다음과 같이 명시되어 있다: 형제답지 않은 태도가 장로들 사이에 나타나기도 한다. 장로의 모임은 비난과 맞비난을 하는 논쟁장으로 알려져 있다. 일부의 사람들은 서로 모욕적 언사를 주고 받는 폭력적인 주장을 한다. 때때로 부족 또는 인종에 대한 고려가 제안의 수용 또는 거부에 영향을 미친다. 안타깝게도, 형제들은 사업과 직원/고용주 관계에서 형제답지 않은 태도를 종종 보인다. 고용된 형제들은 때때로 그들을 고용한 형제를 착취하고 강탈하기도 하며, 일부의 [증인] 고용주들은 심지어 집회에 참석하고 야외 봉사에 참여해야 하는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직원들을 가혹하고 수치스럽게 대한다. 일부는 오해를 통해서 혹은 명백한 부정직함으로 인해 사업상의 거래로 인해 비탄에 빠지게 되고 사업 관계가 파괴되었다. 때때로 형제는 세상 법원에서 변호사들을 통해서 형제를 고발하기도 하고, 몇몇은 세상 법원으로 가기도 한다. 죄인이 회개하더라도 장로들은 흔히 자비롭지 못한 성향으로 기우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여호와의 증인을 본질적으로 부도덕한 공동체로 묘사하려는 의도는 전혀 아니다. 그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 나는 여호와의 증인의 대다수는 도덕성이 바른 점잖은 사람들이라고 믿는다. 또한 어떤 공동체에서도 완벽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다른 종교 공동체보다 두드러진 도덕적 우월성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데 필요한 증거는 사실 부족하다. 이러한 영역을 망라하는 어떠한 통계 조사도 조직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60년 가까이 세계 곳곳의 증인들과 사귀고 친분을 쌓은 것에 근거하여 볼 때, 만일 그러한 통계가 가능하다면, 결혼의 실패, 이혼, 젊은 시절의 잘못, 혹은 어떤 종류의 죄악행위의 비율에 대해 통계적 수치는 워치타워 조직과 다른 종교 단체 사이에 큰 차이가 없을 것이라는 데 대해 개인적으로 의문을 갖지 않는다. 몇몇 경우에, 특히 가족 관계를 강하게 연합시키는 데에 특히 큰 중점을 두는 특정 종교들 사이에서, 그 차이는 사실 증인들에게 불리하게 나타날 수 있다. 어떤 증거가 있든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훨씬 더 순수하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할 만한(예수의 비유에 나오는 바리새인의 증후군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음에 하나님께 감사한다´) 근거는 확실히 없다. 이에 대해 조직의 가능한 대응 방식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비행자들에 대한 조치를 취하여 뉘우치지 않는다고 판단되는 이들을 제명함으로써 ´깨끗한 조직´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월하다는 주장일 것이다. 어느 누구도 잘못이 명백하게 드러났다면 그를 조치해야 한다는 점에 신경쓰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앞 장에서 살펴 보았듯이, 사람들을 제명시킨 그들의 기록은 양들을 돌보아야 할 진정한 목자의 임무인, 비행자들을 도와 바로잡고 회복되도록 한 기록보다 훨씬 더 주목할 만하게 많다. 어떤 조직이 단지 잘못을 처벌을 엄하게 한다고 해서 다른 조직보다 청렴하거나 우월한 것은 결코 아니다. 예를 들어 어떤 정부는 그 정책과 통치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지속적으로 추방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국가에 대해 반체제나 불만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지는 못할 것이다. 교도소에서 (양심이 아닌 다른 이유로) 발견된 여호와의 증인이 없다는 진술도 오해의 소지가 있다. 만약 법원에서 범죄를 저질러 유죄 판결을 받아 그 증인이 감옥에 가기 전에 제명이 발표된다 하더라도, 이것은 그가 범죄를 저지를 당시에 증인이었다는 사실이 바뀌지 않는다. 도덕적인 우월성을 입증하는 데 더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는 비행자의 비율이 다른 많은 종교계에서 나타나는 비율보다 더 낮다는 것을 조직이 보여줄 수 없었다 . 물론 그렇게 주장은 한다. 그러나 그 주장을 뒷받침할 사실적인 증거가 없다. 여호와의 증인이 이 지역에서 다른 종교 교우회나 공동체보다 반드시 더 나쁘거나, 그들이 일부 종교의 동료애보다 낫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 기록이 다른 모든 종교에 대한 독특한 우월성에 대한 주장을 입증하지 못한다는 것이며,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유일무이하게 깨끗한 "영적 낙원"의 그림을 인증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가장 영향을 크게 받는 사람들 앞서 살펴 본 요소들에 의해 모든 사람이 같은 정도로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다. 서글픈 현실은, 조직이 지시한 활동에서 점점 더 많은 짐을 져야 한다는 압력을 지속적으로 가장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가장 민감하고 양심적인 증인들에게 있다는 사실이다. "더 나은 질의 봉사"를 위해 노력하라는 조직의 "제안"과 "권고"를 이들이 따르지 못할 경우 죄책감을 느끼도록 은근히 암시하는 글은ㅡ 양심에 민감한 증인들로 하여금 충분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어, 조직의 지시에 순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끊임없는 죄책감을 낳게 하였다. 마치 러닝머신에서 달리는 것처럼, 참된 성취감이라기 보다 오직 매달 봉사 시간에 대한 실적을 달성하지 못할 경우, 공개적으로 표현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믿음이나 열정의 부족을 암시하는 방식으로 제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증인들이 단지 ´다수를 따라´ 행함으로서 그 압박감으로부터 거의 영향을 받지 않으려는 반면에, 어떤 의미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인가의 시험은 도움이 필요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며, 약하고 죄의식으로 고통을 느끼는 사람들의 몫이 되어 버린다. 그들이 주장하는 "영적 낙원"이 그토록 행복하고 즐겁다면, 증인 내에 우울증에 걸리거나 그로 인해 자살할려는 사람이 전혀 없지는 않더라도 적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는 그러한가? 워치타워 협회장이었던 프레드 프랜츠에게 온 한 통의 편지를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힘들고 잔인한 세상에서 사는 데 이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증인들이 조직에 의해 추가적인 압박으로 인해 심적인 큰 부담을 지게된다는 것을 압니다. 증인들은 모든 일에 충실할려고 안간힘을 써서 노력한다 할지라도 조직의 엄격한 봉사 목표, 집회 준비, 행실등의 표준을 따라가기에 벅차다고 느끼는 감정 때문에 또 세상에서 부딪히는 여러가지 어려움과 더불어 도대체 우순 순위를 어디에 둘지 갈팔질팡거리면서 그 모든 책임을 이행하려는 데서 우울증에 시달리게 됩니다. 저는 조직의 지속적인 압력에 나름의 방법으로 처신해야만 된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몇 집회만 참석하고 나머지는 참석하지 않습니다. 그 집회들이 나를 우울하게 하고 화나게 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 편지를 통해서 증인 조직내의 양심적으로 살아가지만 우울증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기 바랍니다. 이 편지를 보낸 장본인은 스위스 출신의 르네 그뤼티만 이었다. 그는 중립 문제로 감옥을 살아야 했고 그 후 직업을 갖기 위해 정신적으로 병든 사람을 돌보는 데 관심이 있어 정신과 간호사가 되어 병원에서 근무하다가 2년이 지나 혈장을 환자들에게 공급하는 피 문제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러니 그는 증인 조직에 매우 충실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우울증에 관한 여러 사례들을 보고 했는데 특히 그녀의 아내와 관련된 내용을 살펴보면 "영적 낙원"인데도 왜 우울증이 일어나는 지 분명히 알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