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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게시판 ▒▒ 스크랩 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 / 마광수
靜 波 추천 0 조회 14 14.06.30 18:02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 / 마광수

 


노예들을 방석 대신으로 깔고 앉는       

옛 모로코의 왕이 나오는 영화를 보고 돌아온 날 밤       

나는 잠을 못 잤다 노예들의 불쌍한 모습에 동정이 가다가도       

사람을 깔고 앉는다는 야릇한 쾌감으로 나는 흥분이 되었다       

내겐 유일한 자유, 징그러운 자유인       

죽음 같은 성욕이 나를 짓눌렀다.       

노예들이 겪어야 하는 원인모를 고통에 분노하는 척 해보다가도       

은근히 왕이 되고 싶어하는 나 자신에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역시 내 눈 앞에는 왕의 화려한 하렘과       

교태부리는 요염한 시녀들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이 얄미운 욕정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나는

온갖 비참한 사람들을 상상해 본다. 굶어 죽어가는

어린아이의 쾡한 눈 쓰레기통을 뒤지는 거지 할머니,       

그런데도 통 마음이 가라앉질 않는다.       

왕의 게슴츠레한 눈과 피둥피둥 살찐 쾌락들이 머릿속에 떠올라       

오히려 비참과 환락의 대조가 나를 더 흥분시킨다.       

아무리 애써 보아도 그 흥분은 지워지지 않아       

나는 그만 신경질적으로 수음을 했다.       

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       

다음날에도 나는 다시 극장엘 갔다.       

나의 쾌감을 분석해보기 위해서, 지성적으로.       

한데도 역시 왕은 부럽다 벌거벗은 여인들은 섹시하다.       

노예들을 불쌍히 생각해줄 여유가 나에게는 없다       

그 동경 때문에 쾌감 때문에.       

그러나 왕을 부러워하는 나는 지성인이기 때문에 창피하다.       

양심을, 윤리를, 평등을, 자유를 부르짖는

지성인이기 때문에 창피하다. 노예의 그 비참한 모습들이       

무슨 이유로 내게 이상한 쾌감을 가져다주는 걸까       

왜 내가 평민인 것이 서글퍼지는 걸까       

왜 나도 한번 그런 왕이 되고 싶어지는 걸까       

아니 그럭저럭 적당히 출세라도 해서 불쌍한 거지들을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보고 싶어지는 걸까       

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자가 되지 못할까       

왜 진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

  

-  시집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민족과 문학사, 1991)

............................................................................................

 

 브레히트의 ‘어느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을 연상케 하는 이 시는 시인이 1977년 국내 상영된 <바람과 라이온>이란 영화의 한 장면에 시선이 꽂히고 영감이 가지를 뻗어 얻은 작품이다. 20세기 초 모로코 왕이 노예들을 의자 대신 깔고 앉는 영화장면에서 시인의 마음속에 잠재된 권력욕구와 그것을 부정하는 지성인으로서의 민주주의 의식이 양가감정으로 서로 충돌하고 있다. 그것에 마광수 교수의 리버럴한 솔직함이 더해져 '왜 진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라며 스스로 묻고 자괴한다.

 

 마광수 교수가 이 시에서 말한 갈등과 고뇌는 비단 그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머리로 입으로 민주주의를 말하고 평등을 주장해도 가슴 한쪽에서 얄궂은 성욕과 얄미운 욕정과 이상한 쾌감과 서글픈 동경이 뒤엉켜 꿈틀댈 때가 있다. 위선과 허위라 해도 보통사람들에겐 그 통제를 강제하고 엄격히 요구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윤리의식은 좀 달라야 한다. 지성의 균형이 허물어지면 자칫 여러 사람이 눈물 흘리고 피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이 가지고 많이 배우고 지체 높은 사람에게 말조심과 겸손을 요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 이야기를 덧붙여본다. 백여 년 전 북아프리카 모로코 주재 미영사관에 말을 탄 현지 부족전사들이 기습해 영사관직원을 무차별적으로 찔러죽이고 영사를 납치했다. 이들은 미국정부를 향해 자국 내 모든 미국인들의 철수를 요구하는데 당시 미국 대통령 테오도르 루즈벨트는 이에 굴복 않고 ‘만일 미 영사가 살해된다면 상응하는 보복을 가하겠다.'며 모로코 연안으로 미 함정을 파견하는 등 강경 대처하여 마침내 영사가 풀려난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

 

 헐리웃의 영화제작자들이 여기에서 힌트를 얻어 영사 대신 미모의 영사부인을 납치한 것으로 스토리를 바꾸어 납치한 부족장과 납치된 영사부인 사이의 로맨스를 엮어 영화화한 것이 바로 '숀 코네리'와 '캔디스 버겐'이 주연한 <바람과 라이언>이다. 숀 코네리가 모로코의 부족장으로 나오고 납치된 영사부인 역이 캔디스 버겐이다.

 

 나도 군대생활 할 때 마지막 휴가를 나와 본 영화라 아직도 몇 장면은 기억에 남아있다. 영화제목을 설정케 한 마지막 장면이자 영화의 핵심 언어라할 수 있는 이런 대사도 생각난다. "당신은 스쳐가는 바람이지만 우리는 이 땅에서 나고 자란 사자 같은 존재다. 당신들은 목적을 이루면 떠나가겠지만 우리는 이 땅에서 살다 이 땅을 지키다 죽는다" 그리고 바람이 모든걸 휩쓸고 가버린 뒤 바다를 향한 호탕한 웃음이 오랫동안 가슴에서 에코로 퍼졌고 머리 속에서 공명했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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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4.07.04 12:41

    첫댓글 뚜렷한 주제임에도 시적인 향기가 아쉽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 작성자 14.07.05 15:55

    마선생이 시인으로 보다는 성해방을 추구하는 소설을 써와서기도 하고, 현대 산문시의 특징이라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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