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딧불로 수미산을 태우려는가?
의상 스님의 증명,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 하기때문에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이란 말이여,
오직 깨쳐야, 이 법성(法性)이란 것 자체가 그리되어 있다 이 말이에요.
모든 부처님이나 모든 조사 스님네의 깨친 그 법성(法性)은 말이여, 심심미묘(深深微妙) 하거든,
참으로 깊고도 깊고 미묘해서 언어도단(言語道斷)하고 심행처멸(心行處滅)이라
언어도(言語道)가 다 끊어져 버렸다 그 말이야, 일체 언설이 다 끊어져 버렸어.
언처(言處)가 끊어져 버리고 심행처멸(心行處滅)이라
마음으로 암만 그걸 생각해 보려 해도 생각해 볼 수 없어요.
이 심행처멸(心行處滅)이라는 건 십지(十地) 등각(等覺)까지도 말한 거요.
심행처멸(心行處滅) 했기 때문에 유증가지난가측(唯證可知難可測)이여
오직 증(證)-해서만 알지, 보통 언어 문자로서는 언어도가 끊어지고 심행처(心行處)가 멸했는데
어찌 언어 문자로 알 수 있냐 말이여. 오직 깨쳐서만 안다 이것입니다.
이 법성(法性)이란 것이 아까 말한 연기 자체라 말이야.
연기가 즉 법성(法性)이고 법성이 연기인데, 이건 앞으로 자세한 설명이 됩니다.
그래서 이 부처님이 정각을 하시고 난 뒤에도 연기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심심(甚深)하고 알기 어렵다고 그런 말씀 하신 게 있는데,
이것은 알기 어렵다 한 것은 자성을 깨치면 당장 알 수 있는 거지만
언어 문자로서는 절대로 모른다 이걸 말한 겁니다.
그러면 인제 우리 불교란 근본이 깨친 데 있다는 것은 선종에서만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문자로 근본을 삼는 교가에서도 오직 깨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지,
언어 문자를 가지고 근본을 삼지 않았다는 것은 대강 짐작이 될 줄로 이리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 깨치는 거라는 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이기라요 이건데,
신심(身心), 마음과 몸, 말이 다 개실단멸(皆悉斷滅) 하여도 말이지,
말짱 다 끊어져 버리고 없어진다 이 말이야, 지금 내가 자꾸 말하는 것은
일체 마음과 심행(心行)과 생각으로도 생각할 수도 없고, 말로도 형용할 수 없으니까,
모든 마음이 다 끊어져 버리고, 생각하는 마음, 그것이 다 끊어져 버리고,
표현하는 말이 말이지 다 끊어져 버리면, 그러면 이게 바로 깨친 게 되는 거 아닌가
그리 또 생각할 수 있는 기거든, 그리 생각할 수 있다 이 말이야.
그러지만 “신심어언(身心語言)이 개실단멸(皆悉斷滅) 하여도”
신심어언이 모든 게 다 단멸 하여도
종불능지(終不能至) 피지친증(彼之親證) 소현열반(所現涅槃)이라” 이것은 뭐냐면,
친증소현열반(親證所現涅槃)이란 것은 대각(大覺), 정각(正覺)의 경계는 모른다. 이겁니다.
대각의 실 경계 말이지, 우리가 참말로 공부해서 들어가서 언어 문자가 다 끊어지고
신심이 말짱 적멸한 대적멸, 적정한 적멸 경계에 들어가 버리거든,
그러면 그것이 즉 바로 깨친 거 아닌가? 그건 아니다. 그것이에요.
그것은 어째 그러냐면은 언어와 신심어언이 다 적멸한 이것을 갖다가
우리 불교에서는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 합니다.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 하는 것인데, 이 아뢰야식이란 것은 모든 게 다 끊어져 버렸어요.
끊어져서 표현하래야 할 수 없는 것인데 말이지,
그렇지만 이것은 실지 생멸식(生滅識)이라. 아직 불교의 근본 자성이 아닙니다.
자성이 아니기 때문에, 설사 신심어언이 적멸한 아뢰야식의 경계에 들어갔다고 해도
진여의 자성은 모른다. 이겁니다. 진여는 아니니까 아뢰야식이지, 진여 자성은 모른다 이거라.
그래 이것은 대승불교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 불교인 부처님의 원시불교에서도 이것을 근본으로 삼았습니다.
그래 연기가, 참말 연기라고 하는 것은 심심(深深)해서 참말 알기 어려운데,
제일 무엇이 장애가 되냐 하면, 아뢰야(阿賴耶)가 근본 장애를 삼는다. 이렇게 했습니다.
아뢰야(阿賴耶) 아뢰야 아뢰야가 근본 장애를 삼는다고 했거든,
아뢰야가 근본 장애를 삼는다는 거는 “신심어언이 개실단멸해도” 이것은 모른다.
이 말하고 같은 건데, 아뢰야가 가려서 이 연기 심심법을 모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경에도 있지만, 남전의 경에도 있지만, 율장(律藏)에서 처음에 나와요,
부처님이 정각을 하시고 난 뒤에 연기법을 턱 역순(逆順)으로 관(觀)하셨거든,
관하시고 난 뒤에 그 좋은 법을 갖다가 삼칠일 동안 관하고 난 뒤에,
아! 중생이 참말로 이 좋은 법을 모른다. 그 말이야,
모르는데, 그 모르는 원인이 어느 곳에 있나? 아뢰야가 가렸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게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실제 말하자면, 일체 모든 단멸(斷滅), 대적멸지인 무심인 말이지,
적멸지인 아뢰야(阿賴耶) 에서도 말이지, 부처님의 정각 경계는 모른다. 이겁니다.
그렇거든 “하황능이유사유심(何況能以有思惟心)” 하물며 능히 사유심, 생각하는 마음 말이며,
“측도여래의(測度如來) 원각경계(圓覺境界)리요”
부처님의 대각 말이야, 대각 세존의 원각(圓覺)한 경계를 어찌 측량할 수 있나 그 말이라.
아까 내가 자꾸 언어 문자를 가지고는 도저히 불교라는 건 모르는 것이고, 깨쳐야 한다. 깨쳐야 한다.
이리 얘기했거든, 그러면 언어 문자가 떨어진 적멸한 여기에서는 알 수 있나?
언어 문자가 떨어진 적멸한 무심경계에서도 부처는 또 모른다.
그건 아뢰야 경계기 때문에 그렇다 이리 또 말했거든,
무심경계에서도 모르는데 말이지, 하물며 사유심, 생멸 유심경계입니다.
유심경계로서 어떻게 부처님의 경계를 알 수 있냐, #연기법을 알 수 있느냐 이겁니다.
만약 유심경계를 가지고 연기법을 알려 한다면은
“여취형화(如取螢火)하야 소수미산(燒須彌山)하야도 종불능지(終不能至)라”
개똥벌레 불 가지고 수미산을 태우려 한다면 그거 미친 사람 아니야?
개똥벌레 불 가지고 산을 태우려 하면 산이 타냐 그 말이야.
- 성철스님 - (백일법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