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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기 안성 칠현산 칠장사(七賢山 七長寺)를 찾아서 ①
-천왕문, 대웅전, 나한전, 혜소국사비, 그리고 삼성각까지-
카페에서 공식적인 성지순례를 아주 오랫동안 하지 못 했지만 간간히 개인적으로 사찰 을 찾은 바 있었습니다. 누군가 사찰순례에 관심이 있다면 추진을 했을 지도 모릅니다. 수차 추진을 하다가도 이런저런 이유로 실행하지 못한 예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지 난번 건봉사를 다녀오면서 순례기를 올렸는데 그 중 석원(釋圓)님께서 이를 보시고 "함께하는 순례길 프로그램이 혹시 있나요? 함 동행하고 싶네요" 하는 반가운 글을 보 고서 추위가 오기 전에 사찰순례를 한 번 해 보면 어떨까 해서 <질문과 의견>방에 안성 의 3대사찰인 칠장사와 석남사, 청룡사 순례에 대한 의향을 타진하니 11월 셋째 주가 좋다는 다수의 의견에 따라 공지를 올리고 11월 15일에 실행할 것을 확정했습니다.
처음엔 8명이 넘지 않으면 실행하지 않으려 했는데 의외로 호응이 좋아 백우거와 청안거 2대로 가기로 했는데 덕명님께서 지인 2명과 함께 서울에 모여 가기로 해 2대에서 3대로 고쳐 적게 되었습니다. 하여 서울에서 동참할 분으로는 묘법님, 청안님, 화광님, 도솔님 과 지현양, 대각화님, 정파님, 덕명님외 2명, 비니초님, 그리고 백우 등 12명을 헤아렸습 니다. 그리고, 석원님께서 인천에서 현지로 오신다고 하셨고, 부천의 각현님은 김명국님 차로 수원에서 출발하여 현지로 오시기로 하는 등 활발한 동참의사를 보여 흐뭇한 마음 으로 순례의 날을 기다렸습니다. 이번 순례에 아쉽게도 염화님과 미소님, 정수님 등은 일정이 잡혀 있어 부득이 함께하지 못 하게 되었음을 토로하셨습니다.
순례를 앞두고 일기예보를 보니 연일 비가 오는데 순례 당일은 구름은 있지만 순례에는 지장이 없는 날씨였습니다.
그런데 순례 1주 전에 청안님과 대각화님은 순례날에 동참이 어려운 사정이 생기셨고, 이틀 전에는 도솔님이 유성의 지인 차로 현지로 직접 오신다고 하셨고, 하루 전에는 차 를 가지고 오신다는 덕명님 지인의 차가 고장이 나 부득이 불참하게 되어 서울 출발의 인원은 일곱으로 줄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부평에서 출발하는 덕명님 일행이 굳이 서 울을 경유할 필요가 없을 듯해서 현지에서 만나자고 하여 교통정리가 다 되었습니다. 만사는 무상하여 변동수가 많은 법입니다. ^^
순례 당일 모든 준비를 갖추고 서울역 맞은편 대우빌딩 앞으로 가니, 6시 40분쯤 되었습 니다. 그때 묘법님도 막 제일 먼저 도착하셨고, 이어 정파님과 화광님이 오셔서 반가운 인사를 나눈 다음, 준비해 간 가래떡과 물을 나누어 드리고 7시 5분에 칠장사로 출발하 였습니다. 비니초님이 마부가 되어 백우거를 몰아 경부고속도로로 해서 신갈에서 영동 선으로 바꾸어 타고 다시 호법에서 중부선으로 다시 바꾸어 타고 일죽 I.C로 빠져 나가 칠장사로 향했습니다.
칠장사 주차장 집결시간은 9시, 칠장사에 도착했을 때는 8시 45분경이 되었는데, 이미 각현님과 김명국님이 도착하셨고, 우리와 때를 같이하여 석원님이 홀로 도착하셔서 서로서로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처음 오신 석원님과 김명국님의 얼굴이 무척 궁 금한 바 있었는데 두 분 다 넉넉하게 보였습니다. 가래떡을 나누고 김명국님이 주신 캔 커피를 나누며 담소하였습니다. 9시 10분경, 덕명님과 도성님이 도착하셨는데 도성님 또한 초면이어서 무척 반가웠습니다. 대전 유성의 도솔님은 좀 늦는다고 연락이 왔는데 지인의 차로 오신다더니 그분은 사정이 생겨 못 오시게 되어 도솔님 차로 오신는 중이라 하여 9시 15분경 일주문을 통과하여 경내로 진입하였습니다
칠현산칠장사 입석(七賢山七長寺 立石)
칠장사를 알리는 입석입니다. 일주문 밖 칠장사 어귀에 서 있습니다. 글씨는 '도광(道光) 스님의 글씨입니다. 그리고 이 입석을 세우는데 시주를 해 주신 이름이 써 있는데 '설판시주(設板施主) 최남철(崔南澈)'이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입석에 '설판시주(設板施主)'라 써 있는데 실은 '설판시주(設辦施主)'라야 맞습니다. 설판(設辦)이란 말은 불사 또는 공양 등의 행사를 위해 여러 가지 물품이나 비용을 마련 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 비용을 모두 마련해 내는 것을 말합니다.
'설판시주(設辦施主) 최남철(崔南澈)'이라고 했으니 최남철 거사께서 혼자 입석에 든 비 용을 다 마련하여 시주했다는 뜻입니다. ^^
칠현산칠장사(七賢山七長寺) 일주문(一柱門)
불기 2543년(1999)에 신축한 일주문은 칠장사의 첫 관문으로 집으로 말하면 대문에 해당합니다. 집에는 문패가 걸려 있듯이 일주문에는 어떤 절인가 소속산명과 사명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산 ○○사로 나타나 있지요.
이 문은 기둥이 '한 일자(一字)' 모양이므로 일주문(一柱門)이라 하는 것입니다. 일(一)이란 중생과 부처가 하나이고, 진(眞)과 속(俗)이 하나이며, 만법이 일심(一心)의 소현임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문입니다.
칠현산칠장사(七賢山七長寺) 편액 -도광(道光)스님 글씨-
도광(道光) 스님은 전 칠장사 주지로 달마도와 글씨에 능해 칠장사에는 스님의 글씨가 많이 걸려 있습니다. 기묘(己卯)년에 편액의 글씨를 쓰셨으니 불기 2543년(1999)에 썼 음을 알 수 있습니다.
칠장사 경내로 가는 길
칠장사는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76번지(칠장로 399-18)에 위치하고 있는 고찰로서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용주사의 말사이며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5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 절은 선덕여왕 5년(636년)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하였으며, 고려 현종 5년(1014년) 혜소국사(慧炤國師 972~1054)에 의해 크게 중수되었습니다.
칠장사가 위치한 칠현산(七賢山)은 본래 아미산(峨嵋山)이었는데 고려시대 혜소 국사(慧炤國師 972~1054)가 이 산 아래 아란야(阿蘭若)를 짓고 수도처로 삼았습 니다.
하루는 선량하지 못한 7인이 찾아와 뵙기를 청하여 국사가 마주하였는데 이들이 국사의 신묘한 도력에 이끌려 설법을 청하였습니다. 이에 국사께서 법요(法要)를 설명하고 교화하여 일곱 현인을 만들었다는 연유로 산이름을 칠현산(七賢山)으로 고쳐 부르고 칠장사(漆長寺)를 칠장사(七長寺)라 개칭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인조(仁祖) 원년 (1623), 선조의 계비(繼妃)로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仁穆大妃)는 광해군에 의해 10년 동안을 서궁(西宮)에 갇혀 지내는 등 많은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 뒤 인조반정으로 복위가 된 다음 광해군에게 희생된 부친 김제남과 영창대군을 위해 이곳을 원찰로 삼으며 사찰을 새롭게 중수하였습 니다. 그런 인연으로 이곳에 대비가 친필로 사경한 금광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 1질과 자신의 심정을 한시로 읊은 친필 족자 1축을 하사하였습니다. <금광명최승왕경>은 현재 동국대학교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1674년(현종 15)에는 어떤 세도가가 산을 빼앗아 승려들이 흩어지는 비운을 겪었 으나 초견대사(楚堅大師)가 절을 다시 찾아 중수했다고 합니다.
근래에는 1982년 대웅전을 해체 보수했으며, 1994년에는 칠장사 복원 기본 계획을 마련하였으며,1997년 칠장사 당간 보호철책 설치,1999년엔 일주문 신축하는 등 성 보를 보호하고 보수하는 한편, 2006년에는 칠장사 종합정비 기본계획을 수립하여 칠장사를 새롭게 가꾸며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현존 당우로는 대웅전ㆍ원통전ㆍ영각ㆍ명부전ㆍ천왕문ㆍ요사채 등이 있고, 중요문 화재로는 인목대비의 친필 족자(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4호), 대웅전(경기도 유형문 화재 제114호), 천왕문 소조사천왕상(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5호), 혜소국사비(慧 炤國師碑:보물 제488호), 삼불회괘불탱(보물 제1256호)이 있으며, 절 입구에 고려 시대 철제 당간지주와 부도 14기 등이 있습니다.
범종각과 제중루가 제일 먼저 들어옵니다.
제중루 주변은 2단의 석축으로 되어 있는데 아마도 옛날에는 제중루로 누하진입(樓下 進入)하여 대웅전에 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중루 밑을 주차장으로 조성하 고 천왕문을 남쪽으로 비껴 세우고 대웅전을 들게 했으니 흐름이 굽어진 느낌입니다.
왼쪽의 천왕문과 범종각이 만추의 추색과 어우러진 모습입니다.
칠장사 안내도
이 안내도에 나타난 나한전은 최근에 혜소국사비 옆으로 신축하였습니다. 또한 홍제 관은 극락전으로 현판을 달리하고 있으니 이 점을 참고하여 안내도를 살피시면서 감상 해 보시기 바랍니다.
천왕문(天王門) -경기도 지방문화재 제115호-
이 문은 영조 2년(1726) 사간(思侃)스님에 의해 건립된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입니다. 영조 12년(1736)에 주지 설영(雪暎)과 도정(道政) 스님이 중수 했습니다. 안에는 소조사천왕상이 안치 되어 있습니다.
2000년 소조사천왕상을 보수하였고 천왕문 주변을 정비했습니다. 천왕문이 깔끔한 것으로 보아 그때 중수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 천왕문이 원래부터 여기에 있었던 것인지는 의문이 듭니다. 절의 주전은 대 웅전입니다. 가람배치상 일주문을 통과하여 여러 문을 통과하게 되는데, 여기는 일주 문과 천왕문이 있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이 문들은 물이 흐르듯이 부처님께서 계시는 대웅전으로 이어져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곳의 천왕문은 대웅전 축과 90도로 틀 어져 옆으로 들어가는 형국입니다. 이 점이 의아합니다. 대웅전 앞에 제중루가 있는데 높은 축대로 가로막혀 있습니다. 아마도 제중루 밑으로 해서 대웅전으로 들어가야 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천왕문은 제중루 아래 어딘가에 있어야 하지 않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앞은 주차장이니 현실적으로는 어려운 일입니다. ^^
여기에 주련이 있어 올려 봅니다.
四大天王威勢雄 사대천왕위세웅 사대천왕 위광은 크고도 웅장해라. 護世巡遊處處通 호세순유처처통 호세천왕 곳곳 돌며 모든 곳에 두루하며 從善有情貽福蔭 종선유정이복음 선행하는 중생에겐 복덕을 내려 주고 罰惡群品賜災隆 벌악군품사재융 악행하는 무리에겐 별을 주고 재앙 주네.
그런데 제3구와 4구가 바뀌어 달려 있습니다. ^^ 그런데 제3구의 주련에 낙관이 찍혀 있는 것으로 보아 글씨를 쓸 때부터 순서가 바뀐 것 같습니다. 뜻이야 달라질 게 없지 만... 그래도 주의 깊게 살폈어야 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_()_
동방지국천왕(東方持國天王)과 남방증장천왕(南方增長天王)
서방광목천왕(西方廣目天王)과 북방다문천왕(北方多聞天王)
칠장사 소조사천왕상에 대한 안내문이 있어 옮겨 봅니다.
칠장사 소조사천왕상(七長寺 塑造四天王像)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5호-
「칠장사 사천왕상은 흙으로 빚은 소조상이며 영조 2년(1726)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 다. 사천왕은 세상의 중심에 가장 높이 솟아 있다는 수미산(須彌山) 중턱에 살면서 사 방과 사대주(四大洲)를 수호하는 신장으로, 손에는 각각 비파(동방지국천왕), 보검(남방 증장천왕), 용과 여의주(서방광목천왕), 창(북방다문천왕)을 들고 있다.」
종무소 뒷편을 지나고 있습니다.
이 전각은 명부전인데 이 전각을 돌면 대웅전이 나옵니다.
부처님을 뵈러 대웅전으로 가는데 건물의 뒷모습을 보며 가게 되는 것이... ^^
대웅전 모습
대웅전(大雄殿)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14호-
건립연대는 분명하게 알 수 없지만 조선 후기에 세워져 몇 차례 중수를 겨쳐 순조 28년(1828)에 이건되고 1982년 해체보수 되었다고 합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입니다.
海底泥牛含月走 해저니우함월주 바다 밑 진흙소는 달을 물고 달아나고 巖前石虎抱兒眠 암전석호포아면 바위 앞 돌호랑이 아이 안고 자는구나. 鐵蛇鑽入金剛眼 철사찬입금강안 무쇠뱀은 금강의 눈을 뚫고 들어가고 崑崙騎象鷺鷥牽 곤륜기상노사견 코끼리 탄 곤륜산을 백로가 끌고 가네.
대웅전(大雄殿) 편액
대웅전 앞의 괘불대(掛佛臺)
마당에서 법회를 성대히 베풀 때 석주 사이에 당간을 높이 세워 고정하고 여기에 쾌불 을 걸고 의식을 봉행합니다.
불단(佛壇)의 모습
불단은 보궁형닫집에 석가삼존불을 모시고 있습니다.
우보처 보현보살 본존 석가모니불 좌보처 문수보살
삼존불 뒤의 후불탱화는 화기(畵記)에 고종 23년(1886) 서해(瑞海)ㆍ금문(錦文) 두 스님 이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어 이 때 삼존불도 조성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습니다.
대웅전 안에 모셔진 칠성탱화(七星幀畵)
지장탱화(地藏幀畵)
신중탱화(神衆幀畵)
대웅전에 들기 전 종무소에 가서 카페에서 사찰순례를 왔는데 간단한 의식과 절을 해 도 괜찮겠는가 하고 여쭈니 나한전에서 하면 좋겠다는 스님의 말씀이 계셔서 기쁜 마 음으로 나한전으로 향했습니다.
나한전 가는 길입니다.
이곳에는 나한전 뿐만 아니라 혜소국사비와 삼성각 등이 있습니다.
나한전 가는 길의 은행나무 단풍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이 은행나무 단풍이 샛노랗게 보여 아름다웠는데 사진은 그 색갈을 다 담지 못했네요.
나한전(羅漢殿)
나한전 옆 모습
나한전은 금년 불기 2559년(2015) 7월 11일 낙성되었습니다. 그동안 나한전은 정면과 측면 각 1칸의 협소한 건물이어서 그 앞에 가건물을 세워 기도해 왔는데, 이제 넉넉한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정(丁)자형 건물입니다.
정자형(丁字形)의 중앙 1칸은 부처님과 7아라한을 모셨습니다.
부처님과 7아라한
아라한(阿羅漢)이란 arhat의 주격인 arahan의 음사(音寫)로 흔히 나한(羅漢)이라 약칭하 여 쓰기도 합니다. 이를 한역하여 응공(應供)ㆍ살적(殺賊)ㆍ불생(不生)ㆍ무생(無生)ㆍ 응진(應眞)ㆍ진인(眞人)이라 번역합니다. 이는 소승불교에 있어서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이를 말하기도 하지만 크게는 대ㆍ소승(大小乘)을 막론하고 최고의 깨달음을 얻 은 이를 말합니다.
응공(應供)이란 공양을 받는데 응하는 이, 이에 상응(相應)하는 이, 공양을 받을 가치가 있는 이를 말합니다. 살적(殺賊)이란 번뇌의 적(賊)을 죽였다는 뜻이며, 불생(不生)이나 무생(無生)은 영구히 열반의 깨달음에 들어가서 다시 미혹의 세계에 태어나는 일이 없 다는 뜻이며, 진인(眞人)이란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란 뜻이며, 응진(應眞)이란 응당 예 배ㆍ공양을 받을 만한 진인이란 뜻입니다.
또한 아라한은 여래십호(如來十號)의 하나로 부처님을 뜻하기도 하여 응공(應供)이라 합니다. 그런데 후에 부처님과 제자인 아라한을 구별하여 불제자(佛弟子)가 도달하는 최고의 계위(階位)로 칭하게 됩니다.
아라한으로는 부처님의 10대 제자로부터 16나한, 500나한이 유명합니다. <금강경> 에 보면 늘 부처님을 따라 다니는 상수 제자가 1250인이나 됩니다.
그런데 칠장사의 나한전은 특이하고도 특별한 나한전입니다. 다른 절에서는 보통 16나 한, 500나한을 모시는데, 여기는 이상하게도 7나한을 모셨습니다. 혹시 아직 덜 조성해 서 그런가 하고 의아해 하실 수도 있지만, 그것이 아니라 7인의 도적들이 혜소국사(慧炤
國師)의 감화를 받아 지난 날의 잘못을 깨닫고 일곱 현인(賢人)이 되었다는 고사에서 일 곱 현인을 아라한으로 모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앙의 부처님은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혜소국사이십니다. 우리가 사찰을 순례를 할 때 그 내력을 알면 이해하기가 쉬운 것입니다. ^^
부처님과 나한님께 삼배 올립니다.
우선 보례진언(普禮眞言)을 하여 삼보님께 예를 올린 후 천수경을 독송한 오분향례와 칠정례를 올리고, 반야심경을 합송한 다음 석가모니불 정근으로 행하며 절을 한 다음, 성지순례발원문과 축원을 올렸습니다.
정근과 절을 행하는 모습입니다.
준비해 간 유인물을 나누어 드리고 삼사순례에 대한 정보를 읽어 드렸습니다.
참고로 과거 사진을 하나 올립니다. 나한전의 옛 모습과 600년된 나옹송(懶翁松) 사진 입니다. 깜빡 나옹송을 못 찍어서 올려 봅니다.
5년 전에 갔을 때의 나한전과 나옹송(懶翁松) 모습
나한전 뒷편에 있는 나옹송은 고려말의 나옹(懶翁) 스님께서 심었다고 전해집니다. 수령이 무려 600년이 넘는 소나무입니다. 나옹스님은 고려말의 왕사(王師)로서 본명은 원혜(元惠), 법명(法名)은 혜근(惠勤), 법호(法號)는 나옹(懶翁)이며, 당호는 강월헌(江月 軒)이며 속성은 아(牙)로 영해(寧海) 사람입니다. 나옹 스님의 제자가 무학대사이죠.
이 나한전과 어사 박문수의 이야기도 유명한데 박문수가 이 나한전에 머물다가 꿈에 과 거시험 문제를 계시 받아 장원급제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그래서 수능을 앞 둔 수험생들이나 부모들이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합니다. ^^
기념사진찍습니다. 준비하세요.
정면을 봤어야 하는데...
여기를 보세요. 하나, 둘, 셋!
나한전 옆 혜소국사(慧炤國師) 비각(碑閣) -보물 제488호-
혜소국사(慧炤國師) 비각(碑閣)
혜소국사(慧炤國師)는 고려 광종(光宗) 3년(972)에 안성에서 태어나 10세에 입산하여 광교사(光敎師) 충회(忠會)에게 와서 삭발하였고, 17세에 융철사(融哲師)의 가르침을 받으며 수행을 쌓아 마침내 득도하여 고승으로 많은 추앙을 받았습니다.
대사는 말년에 칠장사(七長寺)에서 수도하며 왕명으로 이 절을 크게 중창하였고, 83세가 되던 문종 8년(1054)에 이 절에서 입적(入寂)하였습니다.
이 비는 고려 문종 14년(1060)에 혜소국사의 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글은 김현(金顯)이 짓고 글씨는 민상제(閔常濟)가 썼습니다.
비신(碑身)의 높이는 241cm, 폭은 128cm 이고, 비신의 양측에는 쌍용이 새겨져 있는데 그 솜씨가 극히 뛰어납니다.
혜소국사비(慧炤國師碑) -보물 제488호-
비신(碑身)이 위에서 아래로 비스듬히 잘려 있던 것을 1976년 비각복원공사 때 보수했 다고 합니다. 이 비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왜군 선봉장의 하나인 가등청정(加藤淸正)은 이곳 칠장사에 침입하여 온 갖 만행을 저질렀다고 합니다. 그때 문득 수염이 하얗고 송라(松蘿)를 걸친 한 노스님 이 나타나 그를 꾸짖었다고 합니다. 이에 화가 치민 가등이 갖고 있던 장검으로 노 스 님의 목을 내리치니 노스님은 간 곳 없고 가등의 팔만 아팠다고 합니다. 잠시 후 비전 (碑殿)에 올라가 보니 혜소국사의 비가 부서져 있어 그것을 보고 혼비백산한 가등일행 은 서둘러 칠장사를 떠났다고 합니다. 한편 혜소국사 부도탑도 이때 왜적의 만행으로 없어졌다고 합니다. 거북모양의 용부(龍趺)
비석을 지고 있는 이 동물은 거북의 등모습에 얼굴은 용을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용의 아홉 자식 중에 첫째로 든 것이 비희((贔屓)인데, 비(贔)는 '큰 거북'이고, 희(屓)는 '힘쓰는 모양'이라는 뜻이니 비희는 "힘을 쓰는 큰 거북이" 라는 뜻입니다.
비희는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을 좋아하고, 몸통과 등은 거북을 닮고, 머리는 용을 닮았 으며 석비 아래에 둔다. 거북은 수명이 기니 영원과 吉祥(길상)을 상징한다."
그래서 거북이 아니라 용입니다. 따라서 귀부(龜趺)가 아니라 용부(龍趺)라야 맞다고 합니다.
귀부(龜趺)라 불리는 용부(龍趺)의 옆 모습
용이 정교하게 새겨진 이수(螭首)부분
원래는 이 모든 것이 한 몸을 이루었던 것인데 비신(碑身), 용부(龍趺), 이수(螭首) 삼등 분 분리되어 있습니다.
비각의 뒷 모습
삼성각으로 올라가다 내려본 모습
왼쪽은 스님의 수행처이고 오른쪽은 비각입니다. 경치가 멋있지 않습니까?
멀리 삼성각이 보입니다.
삼성각 모습
삼성각(三聖閣)
삼성각(三聖閣)은 칠성(七星)과 독성(獨聖), 그리고 산신(山神)을 모신 전각입니다. 정면 3칸과 측면 1칸의 맞배지붕건물입니다.
5년 전에 왔을 때는 지붕이 새어 천막으로 지붕을 덮었었는데 기와불사를 마쳐 깔끔하 게 단장한 모습입니다. 그리고 전각 안의 탱화도 완전히 바뀐 모습이었습니다.
삼성각(三聖閣) 편액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 삼존상과 칠원성군상(七元星君像)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를 중심으로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이 협시 한 삼존상과 칠원성군(七元星君)이 그 앞에 도열한 예는 처음 봅니다. 칠성탱화(七星 幀畵)는 불기 2556(2013)년 10월 8일에 조성되었음이 화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반존자상(那畔尊者像)과 독성탱화(獨聖幀畵)
산신상(山神像)과 산신탱화(山神幀畵)
탱화와 성상은 불기 2556(2013)년 10월 8일에 새롭게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은 삼성각을 참배하고 내려가 원통전으로 향합니다. 원통전은 2탄에서 소개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백우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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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칠장사 경내가 크고 가을 풍경이 아름답네요.
함께하였으면 더 좋았을텐데...
일정이 있어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편안하게 즐감했습니다. 감사합니다.
2탄도 기다려져요. ()()()
그러게요. 함께하셨더라면 좋았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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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순례를 한 분들은 다 어디로 가셨는지 자취가 없네요.
순례를 다녀온 후가 저는 제일 바쁩니다. 2탄은 월요일이나 가능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백우님의 예리한 눈길과 섬세한 감각, 놀라운 필력에 감탄합니다.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관찰하고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들을 글로 정연하게 표현하는 마치 한권의 책을 대하는 것 같습니다. 즐감했습니다. 제가 보지 못한 부분도 새롭게 느껴 봅니다. 감사합니다()()()
이번에 석원님과 함깨한 순례를 기쁘게 생각합니다.
사진만 올리면 무슨 사진인지 제자신도 몰라서 한 줄의 설명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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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를 다녀와서
붙여 보고 있습니다. 또한 누군가 알고 싶어하시는 분들도 있을 듯해서 가능하면 제 모든 힘을 다해서
부연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건너 뛰겠지만 그래도 한 글자 한 정보가 틀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올리고 있습니다. 석원님께서 바쁘신 중에도 글을 자세히 읽어 주셔서 힘이 납니다.
감사드립니다.
이렇게안아서 순레기를보기가 송구합니다 자세히도올리셨내요 감사합니다()
하필 그때 김장을 담그는 바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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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인연을 만들어 봅시다. 감사합니다.
향불교 법우님들의 뜻 깊은 순례기를 백우님의 높은 식견과 필력으로 마치 함께 동행하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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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화님 내외분이 함께하시지 못함을 참으로 애석하게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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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참하셨으면 멋진 사진 많이 담아 감상 많이 했을 듯합니다. 감사합니다.
절이 따뜻해 보입니다. 함께 하지 못해 아쉽기만 하네요. _()_
절이 참 좋지요
어느 날에 함께 해 보실까요
순례를 하며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로 없으니 그것이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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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기회가
백우님 수고하셨습니다.상엽홍어이월화를 읇조리리며 백우님과 나누었던 담화가
늦은 가을에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역시 향불교가 최고입니다.^
정파님과 대화를 나눈 것이 너무 좋습니다. 다시 또 만나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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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앉아서 칠장사의 거의 모든것을 만나보게 되어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함께하지 못한 아쉬움도...
그날 제가 다니는 절에서 김장을 하는데 제 시골에서 아버님이 농사지으신 배추, 무를 보시하는라 토욜은 아산의 밭에가서 수확, 일요일에 김장 동참하느라 빠질수가 없었습니다.
다음 기회에 동참할수 있기를 소망하며...
이제야 봅니다. 대원정사에 금년에도 무 배추를 보시하셨군요. 대단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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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동참을 기대합니다.
칠장사 경내가 사진으로 보니 더 아름답네요~~~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