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늘 빚진 자의 마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로마서 1:14절을 보면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라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8:12절을 보면“형제들아 우리가 빚 진 자로되 육신에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요”라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13:8절을 보면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라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15:27절을 보면“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빚지다”라는 말은 헬라어 “오페일레테스”로서 상업적 빚이 아니라 과분한 친절을 크게 입은 자에 대해 느끼는 부채감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구원받은 것은 이방인을 전도케 하기 위한 것이기에, 그는 그들에게 늘 빚진 자의 마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에베소서 3:7~8절을 보면 “이 복음을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의 일꾼이 된 것 역시 빚진 자라고 고백합니다.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려고 은혜의 선물인 일꾼이 되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이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였는데, 직분을 주심도 이방인에게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전하게 하시기 위함이니, 그들에게 늘 빚진 자의 마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오늘 본문을 나누고자 합니다. 대다수 그리스도인은 고린도후서 2장 14절의 전반 절을 믿는 자의 승리를 말하는 본문으로 읽습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이기게 하실 것이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본문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개역개정성경에서 "이기게 하시고"라고 번역한 헬라어 동사 "뜨리암뷰오"의 의미입니다. “뜨리암뷰오”라는 단어의 배경은 고대 로마제국에서 거행하던 승리의 개선 행진(triumphal procession)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의 장군과 병사들은 엄청난 규모의 행렬을 지어 로마 거리를 행진하면서 장관을 연출했습니다. 승리한 장군과 병사들을 영예롭게 하고, 로마의 주신(主神) 주피터에게 감사하는 것이 개선 행진의 목적이었습니다. 이 승리의 축제는 일주일 동안 계속되기도 했는데, 로마 시민 전체가 몰려나와서 거창하고 화려한 승리의 행렬을 지켜보면서 환호했습니다. 개선 행진을 직접 목격한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유대전쟁사」에서 “개선 축제의 수많은 장관과 이루 말할 수 없는 온갖 화려하고 웅장한 광경을 정확하게 표현하기란 불가능하다”라고 하였습니다. 개선 행렬에는 전투 장면을 실감 나게 묘사한 웅장한 이동무대들이 동원되기도 했고, 적에게서 노획한 온갖 전리품들과 보물들이 실려 나왔고, 그와 함께 적국의 왕이나 장군들과 지휘관들이 쇠사슬에 묶여 끌려 나왔습니다.
그 뒤에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의 장군이 화려하게 장식된 마차를 타고 등장하였습니다. 전쟁포로들은 승리한 장군의 마차 앞에 끌려가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개선 행진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자랑했습니다. “내가 개선 행진할 때 내 마차 앞에 아홉 왕과 그 왕들의 자식들이 끌려갔노라.” 개선 행진의 절정은 로마의 광장에서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고 포로 중에 저명한 인물들을 처형하는 것이었습니다.
“뜨리암뷰오”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고린도후서 2:14절과 골로새서 2:15절 두 곳에만 나옵니다. 개역개정성경은 골로새서 본문에 나오는 "뜨리암뷰오"를 "이기게 하다"라는 뜻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이 동사가 일부 고대 문헌에서 “승리를 거두다,” “이기다”라는 뜻으로 쓰이기는 했지만, “이기게 하다”라는 뜻으로 쓰인 예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언어적으로 “뜨리암뷰오”는 “승리를 경축하다,” “개선 행진에서 끌고 가다”를 뜻하는 라틴어 동사 “뜨리움파레”(triumphare)에 상응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2:15절에서도 개선 행진을 배경으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단순히 "이기게 하다"가 아니라 "개선 행진에서 끌고 가다"라는 의미로 번역해야 합니다. 카톨릭 성경은 골로새서 2:15절을 “그들을 공공연한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들을 이끌고 개선 행진을 하셨습니다”로 번역하였습니다. 원문에 맞게 사역하면 “그들을 담대하게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들을 개선 행진에서 끌고 가십니다”입니다. "담대하게 구경거리로 삼으시고"라는 말은 승리의 개선 행진에서 포로들을 구경거리로 삼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골로새서 2:15절에서는 물론, 고린도후서 2:14절에서도 "뜨리암뷰오"가 직접 목적어를 동반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동사가 목적어와 함께 나올 때 “승리의 개선 행진에서 (포로가 된 적을) 끌고 가다”를 의미합니다.
골로새서 2:15절에서 "뜨리암뷰오"의 목적어는 "정사들과 권세들"입니다(정사들과 권세들의 정체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지만,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영적 존재들로 보아야 합니다). 이 본문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십자가로 악한 영들을 무장 해제하시고 그들을 승리의 개선 행진 가운데 포로로 끌고 가시면서 구경거리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2:14절에서는 "우리"가 "뜨리암뷰오"의 목적어입니다. “우리”는 사도의 임무를 수행하는 바울 자신을 가리키는 문학적 복수형(literary plural)입니다. "뜨리암뷰오"의 용례를 이 본문에 적용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개선 행렬에서 바울을 패배한 포로(defeated captive)로 끌고 가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해석이 맞는다면 바울은 승리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포로입니다.
바울과 같은 위대한 사도를 하나님의 포로로 간주하는 것은 매우 낯설고 부자연스러운 해석처럼 보입니다. 더구나 고린도후서 2:14에서 사도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포로로 끌고 가시는 것에 대해 과연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역설입니다.
"뜨리암뷰오"의 용례를 진지하게 고려할 때 고린도후서 2장 14절의 전반 절을 이렇게 번역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항상 승리의 개선 행진 중에 끌고 가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But thanks be to God, who in Christ is always leading us in his triumphal procession).
사도가 하나님의 포로라는 것은 그가 본래 하나님의 대적자였음을 전제합니다. 유대교에 있을 때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했고(갈라디아서 1:13, 23, 빌립보서 3:6),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였습니다(사도행전 26:9).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바울은 공포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많은 성도들을 옥에 가두었을 뿐 아니라, 고문을 가하여 강제로 예수를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였고 그들을 죽이는 일에도 가담하였습니다(사도행전 26:10~11). 이렇게 바울은 하나님의 대적자로 행동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굴복시키셨습니다.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오려고 다메섹으로 가던 바울은 하늘의 빛에 휩싸여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던 자가 하나님의 포로가 된 것입니다.
기세등등하게 날뛰던 바울은 이제 포로가 되어 하나님의 개선 행렬 가운데 끌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수치스러운 포로가 아닙니다.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포로입니다. 자신을 굴복시키신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승리를 소리 높여 외치는 포로입니다. 고대 로마의 개선 행진에서 전쟁 포로들은 자신들을 꺾은 로마 장군의 영예와 능력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구실을 하였습니다. 포로가 된 자들의 지위가 높을수록, 그들의 세력이 강대할수록, 승리한 장군은 더 큰 영예를 누렸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던 바울은 자신을 포로로 잡으신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2장 14절을 이런 식으로 읽고 이해하는 것은, 그다지 은혜롭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승승장구하는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신다"라는 개역 개정 성경의 번역에 마음이 끌립니다. 물론 공동 번역은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언제나 끼워주시고”라고 번역을 하였는데, 이것 역시 마음에 들지는 않습니다.
사도 바울 자신을 하나님의 포로로 제시하는 고린도후서 2장 14절 전반 절은, 바울뿐 아니라 그리스도인 모두가 하나님의 포로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구원받기 전에 우리는 모두 마귀에게 종노릇 하면서 하나님의 원수로 행하였습니다(로마서 5:10, 골로새서 1:21). 그런데 하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의 권능으로 우리를 굴복시키시고 포로로 잡으셨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권능은 하나님 사랑의 다른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포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사로잡혀서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을 온 세상에 드러내는 포로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항상 하나님의 승리가 개선 행렬 가운데 끌려가면서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포로로서 사랑의 승리자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 포로입니다. 그리스도가 얼마나 대단하고 크시고 놀랍고 아름다운 분인가를 온 세상에 드러내고 선포하는 포로입니다. 승리자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포로여도 좋습니다. 승리한 장군과 이긴 군사들도 “승리했다”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선포하지만, 패배한 적장과 포로도 역시 그들을 포로로 끌고 가는 장수, 즉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으로 승리하였다는 일을 드러내고 선포합니다. 승리자이든, 실패자이든 상관없이 그리스도가 드러나고 선포된다면 기뻐하고 감사하는 바울의 영성이 오늘 우리의 영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예수님에게 미친 전도자요 일꾼이 분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