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요나라에 대해서는 자세히 공부하지 않아서 저도 자세히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 재야의 사이트에서 발해 후국사를 읽으면서
공부를 하다보니 아무래도 거란의 요나라도 어느정도 알아야겠지요.
요나라의 시조는 기수가한이라고 하는데, 현재 이 기수가한이
기자조선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일부 있습니다.
실제로 요사에도 요나라는 조선의 옛땅으로 8조금법이 있었다고
하며 거란족이 이 풍습을 지켜왔다는 식의 내용이 있습니다.
기자조선은 종래에 부정하는 사람들이 많고, 기(箕)라는 이름의
청동명문을 통해 보았을때 우리민족의 순수 지배계로 보아야 한다고
하는데,
하여튼 거란족이 시조로 받드는 기수가한이나 거란족이 거주하던
땅은 옛 조선의 땅이라고 사서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어느정도의 사실성이 있는가는 차후 연구가 되어야 할
문제일 것입니다. 우선은 저도 깊이 연구를 하지 않았기에 사서에
이러한 내용이 있다는 것만 알려드릴 뿐이지요.
그리고 거란족 시조인 기수가한의 탄생 설화도 중요한 대목입니다.
여기에 백마(白馬)가 나타난다고 들었습니다.
여기에 앞서, 선비족, 특히 모용선비의 모용황의 조상에 "검라"라는
인물이 백마(흰 말)과 관련해 그 설화가 전해지고,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설화에도 백마가 나타나는 것을 보니
혹시 신라는 건국초기부터 이미 유목민족과 어느정도의 관련성이
있었던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은 제가 신라김씨의 조상이 "투후 김일제"라고 하는 근거이기도
합니다.
물론 신라김씨의 조상이 과연 김일제인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만,
신라 초기사에 이미 존재한 유목민족과의 관련성은 한번 생각해 볼
일입니다.
그런데 거란의 요나라 태조 야율아보기(야율억)가 과연 기수가한의
후손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선비족도 그 시조를 단석괴라고 흔히 말하지만,
제베님의 북방민족 단상 글을 읽어보면
<<선비족 단석괴>>가 이후 "모용부, 탁발부, 우문부, 단부 등의
여러 부(部)들"과의 관계가 정확하지 않은 것을 생각한다면
굳이 기수가한을 야율씨의 선조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단지 기수가한은 거란족의 시조로 아마 선비족의 단석괴와 비슷했다고
생각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이후 거란족도 그 씨족이 많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말갈족도 그 씨족이 많습니다.
그 많은 거란의 씨족들의 지배층이 모두 기수가한의 후예라는 증거가
없습니다.
그리고 가끔 인터넷 사이트를 보면서 황당한 주장을 보았는데
거란 태조 야율아보기의 6대조가 궁예왕의 동생이었다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야율아보기가 실제로 궁예 동생의 6대손이라고 해도
말이 안되는게, 야율아보기와 궁예 연대를 보았을 때 6대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 문제가 되며,
또한 이 주장에 대체 무슨 근거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대체로 6대가 흘렀다는 것은 그 세월이 짧지는 않은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조선 태조 이성계의 6대조 이린은 명종 시대 인물로,
고려사에서 볼때 명종 이후의 왕들은 매우 많습니다.
또한 일각에서는 청나라 태조 누르하치의 6대조가 조선 개국공신이라는
주장을 합니다. 하지만 아직 사료를 찾아보지 않아 이것도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약간 이야기가 다른데로 흘렀지만, 아무래도 궁예와 야율씨를 이렇게
무리하게 연결시키는 것은 마치 요나라를 우리나라 역사의 일부로
두기 위해 이런 주장을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있는 사실대로 주장을 해야지요.
너무 거란족의 시조에 대해 많이 썼습니다.
요나라는 발해를 멸망시키고 동단국(뜻:동쪽의 거란국)을 세워
거란 태조의 장남을 그 왕으로 했는데,
이후 태조의 장남이 요나라 2대황제가 되지 못하고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자 동단국은 요나라에 항거를 합니다.
그래서 동단국도 발해후국들과 같이 요나라에 투쟁을 하게 됩니다.
이상으로 간단하게 글을 썼습니다만, 요나라의 건국 주체는
고구려인으로 보기는 어려울듯 합니다.
만약 고구려인이었다면, 발해와 친선관계를 좀더 오래 맺었어야 하는데
거란은 일찍이 발해를 쳐서 멸망시킵니다.
이에 고려는 "거란을 무도한 나라"라며 이들과 적대관계가 되지요.
다만 요나라 건국 즈음에 고구려인이 없었다고 생각하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알기론 요나라에 투항한 고구려유민 혹은 발해인들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요나라 강성에 약간이라도 영향을
끼친건 사실로 보아야 할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대체로 발해까지만을 한국사로 보고
이후 요나라, 금나라, 청나라는 우리역사로는 보지 않고 있습니다.
그 황실이 우리민족이었다 하더라도 이들이 자기 조상을 버리고
생각을 고쳐서 고려나 조선과의 관계를 끊었기 때문에,
(특히 금나라는 건국 이후 황실에서의 그 태도가 완전히 바뀌지요)
그리고 발해 때에는 있었던 쌀농사가 요나라, 금나라 때에는 그 풍습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쌀농사가 다시 만주에 등장하게 되는 것은 발해 멸망보다 훨씬 이후인
조선족이 퍼뜨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카페 게시글
신라,가야토론방
Re:Re:요나라 황실 야율씨
신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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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5.27 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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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농경 사회만을 문명으로 보는 시각에서 이제는 벗어나야 할 것 같습니다. 유목사회 역시 만주의 역사에 비추어 볼 때 분명 전파성을 지닌 문명으로서 이해하여야만이 이후 고구려, 발해 유민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을 듯 싶습니다. 유목이라는 사회도 충분히 동화되어 갈 수 있는 하나의 문명이란 것을 알 때에만 거란과
여진의 삶 속으로 녹아들어간 우리 선조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듭니다.
우리 역사를 공부하는데 있어 거란, 여진(말갈), 선비족의 역사도 첨부적으로 공부해두는것도 좋은 자세인거 같습니다^^
물론 저 역시 농경이 앞선 사회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요, 금 시대에 와서 쌀농사 풍습이 사라지고 유목사회가 나타났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민족과는 약간 다른 점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역사를 아는데에는 아무래도 동아시아 사는 알아야 할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