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속에 믿음이 있는가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요21:15-17)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5-17)
① 기독교의 핵심 내용을 세 개의 단어로 정리하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고 말씀드렸어요! 그리고 그 관계를 나무에 비유해서 믿음은 뿌리, 소망은 줄기와 가지, 사랑은 꽃과 열매라고 말씀드리면서 세 가지가 일체라는 것, 그리고 믿음은 자연스럽게 소망이 되어야 하는 것이고, 소망은 사랑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어요! 다시 말씀드리면 소망적인 삶 속에 믿음 있음이 증명이 되고 또한 그 소망적인 삶은 사랑의 실천이 있을 때에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어요!
② 그러면 그것으로 다 되었는가? 신앙적인 삶의 완성인가? 그렇지 않아요! 믿음이 소망 되고 그 소망이 사랑 되었으면 그 사랑 속에 그 믿음이 여전히 있는지 확인해보는 것이 정말 대단히 중요해요! 왜냐하면 믿음이 빠진 사랑이 있더라구요! 처음부터 믿음이 없는 거짓 사랑이었든지 아니면 중간에 믿음을 버린 변질된 사랑이든지!
③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랑 때문에 울고불고 심지어 세상이 어지러워지기까지 한 것은 그 사랑 속에 믿음이 없기 때문이에요! 거짓된 사랑이었던 거죠! 앞서 말씀드렸지만 처음부터이든지 아니면 중간이었든지 그 사랑 속에 믿음이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설교는 ‘사랑 속에 믿음이 있는가’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려고 해요! 그러면 결국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하나의 원으로 연결 돼요! 완전체가 되는 거예요!
④ 자, 먼저 요한복음 21장 15절 이하의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세 번째로 찾아가신 중에 베드로와 주고 받은 내용이에요! 우선 15절만 읽으면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⑤ 무슨 상황인고 하니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 후 베드로를 비롯해서 7명의 제자들이 모여있다가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나 잡으러 가야겠다’ 하고 일어나니까 다들 함께 일어나서 고기 잡으러 배타고 나갔어요! 그런데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고 날이 새어가는 것을 보면서 허탈해하고 있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신 거예요! 마침내 물고기 있는 곳을 일러주셔서 153마리나 잡게 해주셨고 그래서 제자들이 생선도 굽고 준비해 간 떡도 먹으면서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했는데 조반, 즉 아침 식사였어요!
⑥ 바로 그 식사 후에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물으시는 거예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 말고 여섯 명의 제자가 더 있었는데 ‘저들보다 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거예요! 그러자 베드로는 예전 같으면 ‘네, 제가 저들보다 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했을텐데 이제는 그렇게 하지 못한 거예요! 왜?
⑦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대제사장 앞에서 심문을 받으실 때 베드로가 그 가까이에 있다가 ‘너, 저 예수와 한 패거리지?’라는 돌발 질문에 ‘아니, 나 저 사람 몰라!’하고 예수님을 강력하게 부인한 일이 있거든요! 그것도 세 차례나!
⑧ 그런데 이미 예수님이 베드로의 세 차례 배신을 예언하신 바가 있어요!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요13;38) 베드로는 성격이 불 같은 사람이었고 이미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거든요!
⑨ 아무튼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말한 적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고작 하는 말이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아마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을 거예요! 그것도 주님께 대한 자기의 사랑을 자기가 아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한 거예요!
⑩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세요!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이제 막 크리스찬 된 자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가르치라는 뜻이에요! 그리고 이어서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요21:16) 예수님이 두 번째는 첫 번째와 달리 그냥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어요! ‘이 사람들보다’라는 말을 뺏어요! 이제 더 이상 잘난체 할 수 없는 베드로인 거예요!
⑪ 다시 말해 예수님이 두 번째는 남들과의 비교는 접고 그냥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는데 베드로의 대답은 똑 같을 수밖에 없었어요!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 양을 치라”고 하셨어요! 크리스찬들을 돌보라는 말씀이에요!
⑫ 그리고 계속해서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⑬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같은 질문을 하셔서 베드로를 곤란하게 하신다는 인상을 줘요! 그런데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세 번의 질문이 각각 차이가 있어요! 헬라어에는 사랑이 네 가지로 쓰여요!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는 아가페,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스톨게, 친구끼리의 우정인 필리아, 남녀간의 사랑으로 전락한 에로스, 원래 에로스는 인간이 신을 추구하는 열정을 가리키는 말이었어요!
⑭ 그래서 말씀인데 예수님의 첫 번째 질문 때 ‘네가 이 사람들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그 ‘사랑’은 ‘아가페’였어요! 그리고 두 번째 질문 때 ‘이 사람들보다 더’를 빼고 그냥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을 때도 그 ‘사랑’은 아가페였어요! 그러니까 베드로에게 ‘너의 사랑은 하나님과 같은 사랑이냐’고 물으신 거예요! 엄청난 질문이죠!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처럼 사랑할 수 있겠어요!
⑮ 그러자 베드로는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했는데 여기 ‘사랑’은 ‘필리아’예요! 그러니까 베드로의 대답은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이 아실텐데 그 사랑은 우정일 뿐입니다.” 그렇게 두 번 똑같은 대답을 했어요!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던 제가 무슨 아가페의 사랑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다만 친구간의 사랑인 필리아로 대답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 양을 치라”고 하셨어요! 크리스찬들을 돌보라는 말씀이에요!
⑯ 마침내 예수님의 세 번째 질문에서는 “네가 나를 ‘필리아’하느냐?” 즉 ‘네가 나를 친구간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어요! 베드로의 마음은 무거웠어요! 세 번이나 같은 질문을 하시니까요! 그런데 같은 질문이 아니에요! 이에 대해 베드로의 대답은 역시 “제가 다만 친구간의 사랑으로밖에 주님을 사랑할 뿐입니다.” 그렇게 겸손하게 대답했어요!
⑰ 예전의 베드로는 그렇지 않았거든요! 아가페의 사랑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넘쳐났어요! 그런데 고초와 죽음의 위협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대답했던 상황 가운데서 자기의 연약함을 깨달았거든요! 그러자 예수님은 처음에 하신 말처럼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어요! 역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크리스찬들을 잘 가르치라는 뜻이에요!
⑱ 아마도 예수님은 베드로의 세 번의 잘못을 용서하신다는 뜻으로 또 그 사랑의 의미를 바로 깨닫게 하시려고 세 번이나 사랑에 대해서 물으셨고 또 명령하신 듯해요! 여러분, 사랑 안에 믿음이 담겨져 있지 않으면 그 사랑은 알맹이 없는 껍데기일 뿐이에요!
⑲ 잠깐 유머, 군인들이 싫어하는 역 이름은? (작전역) 학생들이 좋아하는 역 이름은? (방학역) 어린아이들이 무서워하는 역은? (미아역) 이산가족이 좋아하는 역은? (상봉역) 가장 싼 공사비로 지은 역은? (일원역) 영화인들이 좋아하는 역은? (개봉역) 세탁소 주인이 좋아하는 역은? (대림역) 제비족이 좋아하는 역은? (강남역) 낚시꾼이 좋아하는 역은? (강변역) 무당들이 좋아하는 역은? (신당역) 등산객이 좋아하는 역은? (약수역)
⑳ 요한일서 2장 15절 이하에 보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5-17) 아멘! 두 가지의 사랑을 말씀하고 있죠! 세상을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㉑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사랑이에요!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은 믿음이 있는 사랑이죠! 세상에서 말하는 사랑은 믿음이 없는 사랑이라서 결국 속고 속이는 사랑이에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근거한 사랑이에요! 그것들은 그냥 바람처럼 지나가버려요! 헛된 것들이에요! 그러나 믿음에 근거한 사랑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한 사랑이고 그래서 영원해요! 한결같은 행복을 누리게 한다는 뜻이에요! 아멘!
㉒ 그래서 말씀인데 한결같은 행복을 누리려면 믿음에 근거한 사랑, 곧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사랑을 가져야 해요! 아멘! 그리고 사랑은 사귐으로 확인 되고 지속 발전해나가죠! 그런데 그 사귐 속에는 믿음이 가득해요! 믿지 못하는데 무슨 사귐이 있겠어요! 그러니 사랑의 사귐 속에 믿음도 함께 있는 거예요! 더 정확히 말하면 믿음이 사랑을 지켜주고 있어요!
㉓ 그래서 요한일서 1장 3-4절에 보면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아멘! 사도 요한이 보고 들은 바를 전하는 내용은 바로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그 사랑으로 서로 사귐을 갖게 하려 한다고 말씀하고 있어요! 그래서 기쁨이 충만해진다고 결론을 내려요! 할렐루야!
㉔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시16:3) 아멘! 여러분, 믿음 없는 사랑에 속고 속이는 삶을 살지 말고 믿음 있는 사랑 가운데서 사귐을 여전히 갖고 한결 같은 행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