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되찾기 위해 총을 든 여성들, 한국광복군의 여성 대원들
— 글. 심옥주(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원 원장)
민국民國의 독립으로 향하는 길은 험난했다. 국내외 3·1운동이 절정을 이루었던 1919년 이후 21년이 지나서야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었다. 일제강점기 억압의 그늘에서 나라를 되찾겠다는 시대정신은 ‘이천만 충의 자녀가 다 독립의 군인’이라고 명시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민개병의지처럼 확고했다. 대한의 남녀라면 주의사상의 여하를 막론하고 무장 행동으로 적의 침탈세력을 박멸하는 한국광복군의 군인될 의무와 권리가 있다는 한국광복군 공약 1조와 같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총을 든 여성들, 그들이 여성광복군女性光復軍이다.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정규군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었다.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식에는 대한제국의 육군무관학교, 일본 육군사관학교, 신흥무관학교, 만주활동의 독립군, 임시정부의 청년, 중국에서 활동한 한인 청년, 일본군을 탈출한 학병과 사병 출신, 그리고 여성도 포함되었다. 창설 당일의 사진을 살펴보면 군복을 착용한 여성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군복을 입은 여성과 사복으로 참석한 조순옥, 오광심, 지복영, 김정숙, 신순호, 민영주 등이 참석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여성이라고 하면, 남편과 자녀를 뒷바라지하고 피난길에 올랐던 모습을 떠올리겠지만 여성광복군의 군복을 입은 여성의 모습은 참으로 이채롭다. 반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존립을 위해 피난길에 나선 기나긴 여정이 격화되면서 그 자녀들이 군복을 입고 총을 든 것은 자연스러운 변화였는지도 모른다. 일제 탄압의 수위가 높아지면서 총을 든 독립운동가의 수는 늘어만 갔다. 그 독립전쟁터에는 부상자를 치료하는 간호사로 독립투사를 자처한 여성이 있었다. 칼날같은 추위 속에 독립투사가 입었던 군복은 여성재봉부대가 담당했다. 몇몇의 여성은 어깨에 재봉틀을 둘러메고 군복을 여미는 투쟁의 현장에 있었다. 그 외에도 선전·선동활동과 첩보 활동, 군자금 모금을 위해 국내외를 오간 여성도 있었다. 이들은 독립전쟁의 한가운데 서서 치열한 역사와 마주한 국민개병國民皆兵이다.
여성광복군은 한국광복군은 창설 이전이었던 을미의병과 정미의병에서 여성구국의지를 피력한 안사람 의병단으로 활동하거나 나라를 되찾기 위해 손에 태극기를 들었던 여학생비밀결사대가 있었는데 이들은 여성투쟁의지의 잔흔이 결집된 실체라고 말하고 싶다. 그 결의가 피어난 한국광복군 내의 여성대원을 여성광복군으로 지칭한다.
1937년 중일전쟁이 개전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군무부 내 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독립전쟁 수행을 위한 군인 및 군사간부 양성을 위해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대한독립당동지회·국민회·애국부인회·단합회 애국당 등 6개 단체를 연합하여 대일항전의지를 다졌다. 여성들은 국내외에서 조직된 ‘애국부인회大韓愛國婦人會’를 통해서 독립전쟁을 위한 독립자금 지원, 정보전달 활동으로 의지를 피력했다. 특히 대일항전에 참여한 여성부대를 살펴보면,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여대원·여성광복군이 대표적이다.
조선의용대 산하 조직된 ‘부녀복무단’ 은 단장 박차정을 중심으로 이화림·장수정·한수은·김기숙 등 22명의 여성부대원이 유격·선전·통신활동 등을 수행했다. 부녀복무단은 최전방의 우군진지에 출동하여 확성기·비라살포 등 대적선전활동을 담당했는데, 단장 박차정은 곤륜관 전투현장에서 입은 부상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는 남녀 청년이 대외전략을 실천하고 일치단결로 난관을 극복하자는 의도로 조직된 단일청년조직이다. 전체 대원 34명 중 11명이 여성대원이었다. 10대부터 30대 청장년으로 연령층이 구성된 여성대원은 김학규의 부인 오광심과 지청천 장군의 자녀 지복영, 오광선 장군의 자녀 오희영과 오희옥, 김관오의 부인 방순희, 이준식의 부인 김병인, 김붕준의 장녀이며 송면수의 부인 김효숙, 신건식의 자녀 신순호, 오항섭의 부인 연미당, 조소앙의 자녀 조계림, 민영구의 부인 이국영 등으로 독립운동 지도자의 자녀와 부인이 중심이었다.
1938년 이후 대일항쟁이 격화되자 여성들은 후방지원활동에서 전방의 격전지로 투입되기 시작했다. ‘여성광복군’은 광복군 사령부 부대편제 과정에 포함되어 전투요원으로 활동한 여성이다. 여성광복군 대원은 총사령부·제1지대·제2지대·제3지대·제5지대에 배치되어 활동하였다. 긴박한 독립전쟁 과정에서 배치된 부대가 변동되거나 교차활동도 이루어졌다.심리전활동·선전공작활동·전략방송·정보선전활동·초모활동·적지구공작활동·구호반활동·정보수집활동·심리전활동 등이 주요활동이다.
여성광복군의 부대별 활동은 다소 차이가 있다. 총 사령부의 여성대원은 사령부 보좌 임정국무위원 비서, 총무처, 법무부, 외무부, 정보과, 심리작전활동, 전략방송 등을 수행했다. 제1지대 여성대원은 후방공작 및 선전공작활동 등을 했고 제2지대 여성대원은 중국유격대와 합작공작, 정보전선, 적후방정보수집, 특수활동, 지하공작, 의료활동 등을 했다. 제3지대 여성대원은 본부구호대활동 및 전방위 공작활동과 공작대 연락원 등으로 활동하고 서안 총사령부 복무와 초모 및 선전활동을 했다. 제5지대 여성대원은 초기 제5지대에서 활동하다가 1942년에는 제2지대로 이동하여 활동을 이어나갔다.
한국광복군의 여성대원 활동
활동단체활동특성지역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 | 유격·선전·대적방송·첩보 | 만주·중국 |
한국광복진선 | 청년공작대 여성대원 초모·선전·공작·대외전략 | 만주·중국 |
여성광복군 | 심리작전·의무대·정보수집· 특수훈련·대적방송·초모· 지하공작활동·회계·전략방송 - 총사령부 제1지대 제2지대 제3지대 | 만주·중국 |
위의 표와 같이 한국광복군의 여성대원활동은 1940년 이전부터 이어져왔으며 활동의 폭도 확장되었다. 이들 중에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활동부터 여성광복군 활동을 수행한 오광심과 최초 여성비행사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요임원으로 활동한 권기옥, 만주 일대에서 의병가족 및 독립군과 함께 투쟁활동을 한 남자현, 조선의용부대의 부녀복무단 단장으로 활동한 박차정 등은 주요인물로 주목된다. 독립군의 어머니로 불린 오광심(1910~1976)은 조선혁명당 산하 조선혁명군 활동과 사령부 군수처軍需處에서 복무하고 조선혁명군 유격대 및 한중연합 항일전 활동을 비롯하여 대한애국부인회 간부로 활동했다. 남편 김학규와 함께 임시정부 지원으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에서 사무 및 선전활동을 담당하면서 기관지 『광복』 발간에도 참여했다. 1934년 중국 난징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원을 중심으로 독립운동 단체들의 통합이 진행되자 남편 김학규는 그 소식을 알리기 위해 200페이지의 보고서를 썼다. 그리고 오광심은 이를 알리기 위해 나섰다. 삼엄한 일제의 피하도록 전체 보고서를 외워서 상황을 알렸는데, 그 일화는 오광심의 ‘님 찾아 가는 길’ 시와 함께 회자되고 있다.
지금 우리는, 그 날의 독립운동을 채웠던 시대의 절박함과 고귀한 희생에 어떻게 화답해야 할까. 린다 드 포(Linda de Pauw)는 선사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역사를 통시적으로 고찰하면서 여성이 전쟁사에서 빠져서는 안 될 중요한 행위주체였다고 말한다. 전쟁에 참여한 여성은 비율이 높지 않아도 전쟁행위의 한 주체였다. 전쟁과 여성, 역사의 상관관계 속에 점철된 국민개병의 의지가 곧 행위의 주체를 확인한 것이었다. 시대의 질곡 속에 여성이 총을 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대한민국 여성광복군女性光復軍으로부터 알아보았다.
비바람 세차고 눈보라 쌓여도
님 향한 굳은 마음은 변할 길 없어라
님 향한 굳은 마음은 변할 길 없어라
어두운 밤길에 준령을 넘으며
님 찾아가는 이 길은 멀기만 하여라
님 찾아 가는 이 길은 멀기만 하여라
험난한 세파에 괴로움 많아도
님 맞을 그날 위하여 끝까지 가리라
님 맞을 그날 위하여 끝까지 가리라
− 오광심, 「님 찾아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