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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갑옷 (출처는 ‘조선의 무기와 갑옷 -민승기 지음-‘)
1. 철찰갑
<세종실록> 오례의에는 작은 철편이나 가죽편을 가죽끈으로 엮어서 만든 찰갑을 ‘갑(甲)’ 이라는 하나의 그림으로 그려놓았다. 이 찰갑은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갑옷으로서, 고구려의 기마병이 입었던 찰갑이나 고려군의 찰갑과 기본 구조가 동일하다. 찰갑은 쇠나 가죽으로 만든 타원형의 방호재 표면에 상하좌우로 각각 2~4개의 구멍을 뚫고 이를 가죽끈을 사용해 가로 방향으로 먼저 엮은 뒤 다시 이를 세로 방향으로 연결하여 완성한다. 조선 전기의 ‘철찰갑(鐵札甲)‘으로는 수은갑과 유엽갑이 있다.
‘수은갑(水銀甲)‘은 철편의 표면을 수은으로 도금하고, 이를 말위(靺韋)라고 하는 고급 가죽으로 엮어서 만들었다. 하지만 수은을 철판 위에 바른다고 해서 흰색으로 도금이 되는 것은 아니며, 수은에 주석 등의 비철금속을 섞은 아말감을 철판에 바른 후 열을 가해 수은을 기화시킨 것이다. 주석과 수은을 섞은 아말감은 거울의 뒷면을 바르는 데 사용될 정도로 광택이 좋다.
실록에는 몇 차레 납염철갑(鑞染鐵甲)을 제조한 기록이 있는데 납은 곧 주석을 의미하며, 따라서 이 납염철갑이 수은갑의 다른 이름일 것으로 생각된다. 수은갑은 흰색이므로 백철갑이라고도 불렸으며, 주로 국왕을 시위하는 병사들이 착용했다.
반면에 ‘유엽갑(柳葉甲)‘은 일반 병사가 입던 가장 보편적인 철찰갑으로서, 철편을 옻으로 검게 칠하고 이를 연기를 쐰 사슴 가죽끈으로 엮어서 만들었다. 유엽갑은 찰이 나뭇잎처럼 생겼다고 해서 철엽아감(鐵葉兒甲)이라고도 한다.
철갑옷은 웬만한 화살로는 뚫기가 어려울 정도로 방호력이 뛰어나고, 쇠로 만들기 때문에 제작 비용도 피갑에 비해 저렴한 편이었다. 하지만 철찰갑은 찰을 엮은 사슴가죽은 몇 년 안에 쉽게 닳아 끊어지기 때문에 이를 보수하고 유지하는 데 어려움이 컸다. 이런 이유로 세조 3년에 제조되는 철갑의 2/3를 가죽제 피갑(皮甲)으로 바꾸었으며, 연산군 때에 이르면 대부분의 병사가 피갑과 지갑(紙甲)만을 입게 된다.
2. 피찰갑
<세종실록> 오례의에 나오는 피갑은 멧돼지의 생가죽으로 찰을 만들고, 연기를 쐰 사슴가죽으로 이를 엮어서 만들었다. 산돼지가죽은 질기면서도 가벼우며 오랜 시간이 흘러도 갑옷을 엮은 사슴가죽이 해지지 않기 때문에 유지 보수가 용이했다. 하지만 조정에서 피갑을 제조하여 바치도록 명하자 시중의 산돼지가죽 가격이 급등했으며, 세조 5년의 기록을 보면 산돼지가죽 한 장 값이 베 10필에 이르고, 피갑 한 벌을 만드는 데 베 50필이 드는 지경이 되었다. 당초에 세조는 말과 소를 도축하는 것을 막기 위해 피갑에 소가죽이나 말가죽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지만, 산돼지가죽의 부족으로 이러한 금령은 점차 약화되고 결국 피갑을 만드는 데는 소가죽과 말가죽도 사용하게 된다.
한편,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덕무는 가죽을 섣달에 진흙물에 담갔다가 말리고 옻칠을 하면 갑옷이 매우 견고해진다고 했다.
3. 쇄자갑
‘쇄자갑(鎖子甲)‘ 혹은 ’쇄아갑(鎖兒甲)‘은 철사를 고리 모양으로 만들어 서로 엮은 갑옷으로서, 서양의 사슬갑옷에 해당된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보장왕조를 보면, 요동성 주몽 사당에는 쇄갑과 창이 있는데, 이는 전연(前燕) 시대에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라고 한다. 이 쇄자갑은 원래 서역에서 비롯된 것으로, 중국에서는 당나라 시대부터 자체적으로 제작하여 사용했다.
이 쇄자갑은 조선 초기에 상당히 많은 수량이 제작되어 사용되었다. <세종실록> 오례의에 그려진 쇄자갑을 보면, 머리 위에서부터 뒤집어쓰도록 만들어진 서양의 쇄자갑과는 달리 앞쪽이 트여 있어서 이를 매듭으로 둘러서 장식했다. 실록의 기록에 시위하는 군사의 갑옷 사슬이 탈락되어 보기 흉하니 이를 수리하라는 전교가 여러 차례 있었던 것으로 보아서, 쇄자갑 위에 별도의 방호재나 의복을 입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쇄자갑 안쪽에는 사슴가죽이나 노루가죽으로 만든 피삼을 입은 기록이 있다.
이 쇄자갑은 제작에 드는 공력이 대단했기 때문에 조선 후기로 올 수록 점차 제작량이 감소했다. <만기요람>에는 어영청에 사살갑주(沙㐊甲冑)가 소량 있다고 하는데, 이는 쇄자갑의 별칭으로 생각된다.
4. 경번갑
‘경번갑(鏡幡甲)‘은 원래 당나라 시대에 사용되던 갑옷의 명칭으로서, 가슴에 커다란 호심경(護心鏡)이 달린 갑옷을 의미한다. 하지만 조선의 경번갑은 당나라의 경번갑과는 구조가 전혀 다르며, 철찰(鐵札)과 철환(鐵環)을 교대로 엮어서 만든 갑옷이다.
태종 14년의 기록을 보면, 태종은 ‘가죽으로 갑(甲)을 꿴 것은 여러 해가 지나면 끊어져버리고 또 수산하도록 하면 그 폐단이 끝이 없을 것이다. 또 녹비를 재촉하여 바치게 하는데, 그 수도 적지 않다. 내가 생각건데, 철로써 꿴다면 썩지 않고 단단할 것이니 폐단도 따라서 없앨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같은 날에 경번갑 제작을 제대로 감독하지 않은 최해산 등을 파직했다. 이로 보건데, 조선 전기의 경번갑은 결국 종전에 사슴가죽으로 엮어서 만들던 철찰갑을 쇠고리로 엮어 만든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리피스의 <은자의 나라 한국>에는 임진왜란 당시에 양국의 보병이 모두 쇠사슬과 철판을 조합해서 만든 갑옷을 입고 있었다고 했으므로, 이 당시까지도 경번갑이 조선에서 널리 사용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5. 지찰갑
<국조오례의>에 나오는 조선 초기의 지갑은 종이를 여러 겹으로 겹쳐서 작은 조각을 만들고, 이를 사슴가죽이나 실로 엮어서 만든 것이다.
6. 지포엄심갑
찰갑 형태의 지갑과 함께 조선 전기에 널리 사용된 ‘지포엄심갑(紙布掩心甲)‘은 엄심갑(掩心甲), 지갑엄심(紙甲掩心), 지엄심(紙掩心)이라고도 불린다. 이 지포엄심갑은 종이와 천으로 조끼 모양을 만들어 가슴과 등을 방호할 수 있도록 만든 갑옷이다.
연산군 당시만 해도 지갑은 피갑과 함께 가장 보편적인 갑옷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엄심갑의 제조 방법은 잊혀졌다가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사들을 통해서 연산군 당시의 엄심갑과 거의 동일한 지포엄심갑이 다시 전래되었다.
7. 지제배갑
지제배갑은 이미 윗글에 자세히 나와있으므로 굳이 쓰지 않겠습니다.
8. 목면갑
조선 전기에는 면으로 만든 목면갑(木綿甲)에 관한 기록이 없으며, 화기가 발달한 조선 후기에야 비로소 등장한다. 이 면갑은 겹으로 겹쳐서 갑옷과 투구를 만든 것이다. 이렇게 제작한 면갑은 일종의 패딩 갑옷으로서 찰이 달려 있지 않고, 다만 면포를 여러 겹으로 겹쳐서 갑옷과 투구를 만든 것이다. 이렇게 제작한 면갑은 창검에 대한 방호력은 떨어지지만, 화살과 총알에 대해서는 상당한 방호력이 있었을 것이다. <만기요람>에는 어영청에 1006벌의 목면갑의가 있다고 했다. 고종 19년의 기록을 보면 무위영의 보병들은 대부분 피갑이나 목면갑을 착용했다. 조선 후기에 각 지방 군영에 비축되어 있던 목엄심도 목면갑의 일종이다.
한편, 대원군은 이양성이 출몰하는 가운데 서양식 라이플에 대항하기 위해 새로운 목면갑을 제작했다. 이 목면갑은 목면을 13번 겹쳐서 조끼형태로 만들었으므로 면제배갑(綿製背甲)이라고도 불렸는데, 적의 탄환은 막을 수 있었지만 한여름에는 더워서 입고 있는 병사가 거의 초주검이 되었고, 적의 화포 공격을 받으면 이내 갑옷에서 불이 붙어버렸다. 신미양요 당시 미군은 ‘40겹의 무명을 겹쳐 만들어서 칼이나 총알로도 뚫지 못하고, 다만 원추형 탄환만이 뚫을 수 있는 갑옷과 투구’에 대한 기록을 남겼으며, 당시의 사진에는 포로가 된 조선군 곁에 두께가 4cm는 되어 보이는 면갑이 놓여 있다.
9. 두두미갑
‘두두미갑(頭頭味甲)‘은 방호재가 없는 일종의 의장용 갑옷이다. <태종실록>에는 군기감에서 매월 8벌의 두두미갑을 제조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세종실록> 오례의에는 나타나지 않다가 성종대에 간행된 <국조오례의>에는 그림과 함께 다시 두두미갑이 소개되어 있다. 두두미갑은 갑옷의 아랫부분에 갑옷 아랫동이 별도로 있고 사타구니를 가려주는 골미가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초기에 중국에서 전래된 갑옷일 가능성이 높다.
<국조오례의>에 나오는 두두미갑은 두 종류가 있는데, 청단자(靑段子)로 만든 두두미갑은 갑옷의 겉을 청색 비단으로 만들고 갑옷 안쪽에는 연기를 쏘인 사슴가죽을 대며, 갑옷의 바깥쪽에 백은과 황동으로 만든 못 몇 개를 교대로 박아 장식한다. 띠는 오색으로 짠 조대를 두른다. 홍단조로 만든 두두미갑은 겉을 홍색 비단으로 싸고 붉은색으로 짠 넓은 조대를 허리에 두른다.
10. 두정갑
‘두정갑(頭釘甲)’은 쇠나 가죽으로 만든 찰을 의복의 안쪽에 쇠못으로 박아서 만든 갑옷으로서,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갑옷 양식이다. 이 두정갑은 <세종실록>에는 나타나지 않다가 성종 때에 간행된 <국조오례의> 병기도설에 처음 등장한다. 병기도설의 두정갑은 두 종류인데, 실전용인 철두정갑(鐵頭釘甲)은 청금포로 옷을 만들고 옷의 안쪽에 쇠로 만든 찰을 촘촘히 대고 겉에 쇠못을 박아 고정한 것이다. 반면에 의장용갑옷인 황동(黃銅頭釘甲)은 홍단자로 만들며, 갑옷의 안쪽에는 연기를 쏘인 사슴가죽을 대고 겉에는 황동으로 만든 못을 박았다. 또한 황동두정갑은 철두정갑과는 달리 소매를 별도로 만들어 끈으로 연결하도록 제작되었으며, 붉은색으로 짠 넓은 조대를 허리에 둘렀다.
현존하는 조선 후기의 두정갑을 보면, 대부분이 목면을 서너 겹으로 겹쳐서 옷을 만들고, 그 안쪽에는 목면, 비단, 삼베, 삼승포 등을 댄 후, 쇠나 가죽으로 만든 찰을 황동제 리벳으로 옷의 안쪽에 고정시켰다. 리벳의 안쪽 끝은 적당히 두드려 빠지지 않게 하고, 갑옷 표면에 드러난 리벳 머리는 둥글게 다듬과 광을 내어 장식적인 효과를 얻었다.
찰은 철이나 여러 겹으로 겹친 가죽으로 비교적 크게 만들며, 찰의 표면에는 옻칠을 하여 방호력을 높이고 부식을 방지했다. 찰을 가죽으로 만드는 경우에는 리벳을 박을 때 따리쇠를 찰위에 덧대고 박아서 찢어지는 일이 없도록 했다.
두정갑의 어깨부분에는 견철을 다는데, 이것은 어깨를 보호하는 한편, 갑옷의 형태를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또한 가장 강력한 방호력이 필요한 가슴 부분에는 별도의 흉철을 댄다. 두정갑 중에서도 특히 고급스러운 것들은 갑옷의 가장자리에 수달피 등을 둘러서 화려함을 더했다.
두정갑은 갑옷 안감의 색, 안감의 재질, 찰의 재질 등에 따라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그리고 두정갑은 상당히 비싼 갑옷이었다고 한다.
11. 어린갑
‘어린갑(魚鱗甲)‘은 갑옷의 표면에 작은 금속 찰을 물고기 비늘처럼 붙인 것으로서, 조선 후기에 새롭게 나타난 갑옷 양식이다. 갑옷에 사용되는 찰의 종류에 따라서 두석린갑, 도금동엽감 등이 있었다.
어린갑은 목면을 서너 겹으로 겹쳐서 두터운 의복을 만들고, 그 안에 비단이나 슴승포를 덧댄 뒤, 의복의 표면에 황동으로 만든 물고기 비늘 모양의 작은 찰을 리벳으로 촘촘히 박아서 만든다. 두석린갑은 맨 바탕의 두석 찰과 주칠, 흑칠한 찰을 번갈아가며 배치했고, 도금동엽갑 갑옷의 어깨 윗부분에는 용 모양의 견철이 달려 있고, 갑옷 테두리에는 모피 털을 둘렀다. 이 어린갑은 찰을 황동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방호력이 낮을 뿐만 아니라, 찰 하나하나의 크기가 너무 작아서 외부의 충격을 제대로 분산시키기 어려운 구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비실용적인 갑옷이 제작된 것은 순전히 그 화려한 외양 때문이었으며, 주로 고위 장수의 의장용으로 사용되었다. 구한말에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들이 두석린 갑옷의 독특한 외양을 선호했기 때문인지, 두석린 갑옷이 선물용으로 제작되어 외국인에게 선물된 사례들이 있다.
12. 철엄심갑
철엄심갑은 조끼형태의 철갑이다. 이 철엄심갑은 대원군 시절에 국방력 강화책의 일환으로 제작된 것이 아닌가로 지은이는 추정하고 있다. 제주도 등 일부 지방의 군영에 비축되었던 흑색엄심도 철엄심갑의 일종으로 지은이는 추정하고 있다.
13. 식양갑
조선 전기에도 두두미갑이나 황동두정갑처럼 방호재를 사용하지 않은 의장용 가짜 갑옷, 즉 ‘식양갑(飾樣甲)‘이 있었지만, 이는 시위하는 군사들만 착용했을 뿐이다.
14. 피박형 갑옷
‘피박(皮膊)‘이란 어깨와 가슴 부분을 보호하기 위해 어깨 위로 두르는 일종의 망토형 방호구로서, 중국의 갑옷에는 대부분 이 피박이 달려 있다. 피박형 갑옷은 중국 당나라에서 기원한 것으로, 삼국시대에는 우리나라에도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우리 민족은 고려시대부터 두루마기처럼 전체가 한 벌로 구성된 포형(袍形) 갑옷을 입었으며, 이 때문에 송나라의 서긍이 고려군의 갑옷 특징을 이야기할 때 피박이 없다는 점을 가장 먼저 꼽았다. 현존하는 유물이나 문헌기록을 살펴보더라도 고려나 조선시대에 우리 나라에서 피박형 갑옷이 사용된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왕릉의 무인석이나 무속화 속의 신장들은 거의 대부분이 피박이 달린 중국식 갑옷을 입고 있으며, 이러한 전통은 현대까지 이어져 세종로의 이순신 장군 동상에도 피박형 갑옷이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이들 피박 분리형 갑옷은 함께 묘사된 양날검과 마찬가지로 단지 상징적인 의미로서 묘사되었을 뿐이며, 실제로 조선에서 이 피박형 갑옷이 널리 사용된 적은 없었으리라 생각된다.
ps .. 일부 설명을 삭제한 것도 있습니다.
첫댓글 조선시대 갑옷에 대한 백과사전 같네요... 좋은 자료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