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분』이라는 손 선생님이 쓰신 성서신애 5월호의 권두문을 拜讀하고ᆢᆢ몇 마디 拙筆을 쓰 보고자 한다.
구직활동에 필요한 서류중에 이력서는 필수일 것이다. 내가 맨 처음 이력서를 쓰 본게 1980년 KODO光學에 들어갈 때였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크리어가 조금씩 붙게 되자 이력서의 枚數도 한 장에서 두 장, 두 장에서 석 장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한마디로 그 분야의 족적을 記述하는 것이다. 자기가 몸담아 온 직장의 경력에 관한 기재는 그렇다 치자. 그런데 언제 부터인가 프로필의 참 모습과는 거리가 상이한 모습의 프로필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글을 쓰는 작가의 프로필이다.
작가는 모름지기 등단시점부터가 그의 이력이 시작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가령 출신지 내지는 최종학교의 기재 정도는 어떨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글의 이력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지난날의 발자취도 모자라 온갖 직함 등으로 프로필에 도배를 해놓은 것을 심심찮게 보게 된다. 유독 우리나라에는 연예인 출신의 목사. 장로. 집사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또 부르심을 입었다고해서 인생을 살다가 중간에 목사의 길로 들어서는 자도 부지기수다. 살아가다 실패하면 목사가 된다. 마치 무슨 해방구라도 되는 것 마냥 그리로 다 몰려든다. 그러고 보면 시쳇말로 개나 소나 다 목사다. 목사란 직함을 너무도 쉽게 얻을 수 있는 바야흐로 목사 전국시대다. 그런데 이제는 소위 기독교 지도자라고 하는 고매한 목사들. 장로 군단들이 문학의 언저리를 넘어 들어와 어느새 한가운데 차지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주로 詩人의 자리에 앉아있다. (물리적 시간에 제한을 받지 않는 詩가 직함을 가지기엔 상대적으로 수월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프로필을 보면 참으로 가관이 아닐 수 없다. 작가라는 본연의 이력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무슨 노회장부터 시작해서 총회장. 부흥사협회 회장. 해외선교협회 회장 등등 등. 정말 작가의 품격을 이들이 다 떨어뜨리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계에 두 개의 큰 조직 단체가 있다. 이 두 조직의 회장을 맏고 있는 목사 모두가 詩人이다. 다 대형교회 목사들인데 그 프로필의 화려하기가 정말 대단하다. A4용지 하나 가득하다. 이러다 보니 이제 장로. 전도사까지 다 詩人이다. 누가 牧養을 하면서 詩든 隨筆이든 小說을 쓰지말라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정작 드러내고 싶어하는 그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작품을 통하여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고자 함이 아닌가. 프로필이 그것을 반증하고 있다. 이런 時流가 자기 홍보와 맞물리다 보니 이제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이와 같은 프로필 작성이 하나의 교본이 된 듯 하다.
일반인들의 예를 또한 들자면 한전에서의 근무. 보호관찰소에서 근무 이력 심지어는 어느 초등학교를 나왔는지. 孔子의 몇 대손. 本까지 기재하는, 프로필이라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신상명세서라고 하는게 맞을 것 같다. 드러내기 逐角戰을 펼치는 듯 하다. 정말 너저분한 이력이다. 연주자 및 마에스트로(Maestro) 또는 비루투오소(virtoso)의 프로필을 보면 정말 깔끔하다. 출생, 학력, 데뷔, 콩쿨대회 우승ᆢ 등. 전문 음악에 관련된 프로필로만 나열되어 있다. 플로필에 조금의 군더더기도 없다.
오늘날 이 시대에 문학이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는 듯 하다. 먼저 작가의 기본 素養(글을 쓰는 것 과는 상관이 없음)이 부족한 사람들의 난립이요. 또한 작가 자신의 자존감 내지는 자긍심이 결여된 듯하다. 뭐라고 할까? 선비의 기백 같은 것이 전혀없다. 이래 가지고야 어찌 인간의 정신을 살리고 감동을 줄 수 있는 뼈 있는 글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또한 탁류와 같은 시대의 흐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언어가 병들어 신조어가 난무하다 못해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시대에 지금 살아가고 있다. 이런 시대에 편성된 작가의 품격없는 프로필. 언제까지 이런 프로필을 보고 대해야만 할지 모르겠다.
나는 목사들이 쓴 詩를 읽어 본적이 없다. 굳이 읽으려 하지 않는다. 프로필에 식상했기 때문이다. 목사가 쓰는 詩가 과연 얼마나 영적인 감화를 주는지는 모르겠다. 참으로 오랜전이다. 기독교인임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쓰신 현장송 선생님의 두 권의 시집을 읽은 적이 있다. 오히려 어줍잖은 목사들이 쓴 詩보다 현장송 선생의 詩가 더 낫지 않을까?. 아니 나는 內村鑑三의 所感이나 救援論에 더 감화를 받았다. 김교신. 송두용. 노평구 선생의 신앙문집이 차라리 목사들이 쓴 詩보다 나에겐 갑절의 은혜가 더 임했음이다.
진정한 작가는 프로필을 가지고 말하지 않는다. 작가는 오직 작품만으로 말해야만 한다. 목사는 세상의 詩로 감화를 주려고 해서는 안된다. 短文長考, 片言隻句. 장고 끝에 나오는 몇 마디 안되는 짧은 문장속에 진리가 主님이 담겨있어야 할 것이다.
벼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렁주렁 열매가 맺으면 머리숙여 겸손만을 나타낸다. 우리의 신분도 그러하다. 이름도 없고 빛도 없지만 내 속에 성령님이 내주하심으로 나는 성령님에 이끌리어 당당한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이다. 굳이 드러내려고 애쓰지 않아도 이미 하나님의 자녀된 나로서 내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조금이라도 난다면 이것이야 말로 주님과 하나된 정체성 안에서 사는 자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거룩한 신분을 가진 자가 아니겠는가! 오늘도 나는 그 하나님을 신뢰하며 부족하고 보잘 것 없는 나를 이끌어가시는 그 은총에 그저 감사하고 또 감사할 뿐이다.
첫댓글 "진정한 작가는 프로필로 말하지 않는다. "
맞습니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해야죠. 좋은 글 계속 써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