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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제목] [安重根 死刑 집행 상황] | ||||
[발송자] [通譯囑託 統監府 通譯生 園木末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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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노끼 “사형시말보고서” 원문)
최근의 다른 매장지를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기에 뤼순감옥 공공묘지임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자료(신문기사)를 추가로 밝히는 바이다.
다른 기록을 보면, 1910년 3월 27일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大阪毎日新聞)에 뤼순전보 26일 발을 인용한 “유해는 오후 1시 공동묘지에 매장”이란 기사가 있다. 1910년 3월 27일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大阪毎日新聞)에 의하면 “안중근의 시체는 감옥묘지에 특별히 침관에 넣어 매장”, 1910년 3월 27일 분지신보 “유골은 감옥전 공동묘지에 매장”(뤼순전보 26일 발 인용), “안중근의 시체는 감옥묘지에 특히 관에 넣는 특별 대우를 받고 매장” (대련전보 26일발), 1910년 3월 28일 도쿄일일신문(東京日日新聞) “유해는 뤼순감옥묘지에 매장”(대련 전보), 1910년 3월 29일 만주신보(滿州新報) “사체는 오후에 감옥공동묘지에 매장”. “안중근의 사체를 오후 감옥공동묘지에 묻었다” (26일 뤼순지국 발), 1910년 3월 27일 만주일일신문(満州日日新聞)에 의하면 “안중근 사체는 오후 1시 감옥공동묘지에 묻었다”라는 수많은 신문보도가 있다.
이는 더 이상 안중근의사의 유해를 공공묘지가 아닌 다른 곳에 묻었다는 주장에 대한 소모적인 논쟁을 종식시킬 충분한 증거이다. 현재 안중근의사의 유해가 어디에 묻히셨는지 입증할 수는 없지만 확실한 것은 1910년 3월 26일 오후 1시에 뤼순감옥 공공묘지에 묻히신 것은 자명하다.
그러면 뤼순감옥 공공묘지는 어디인가?
뤼순감옥에는 도대체 몇 개의 묘지가 있는가? 이것 또한 의견이 분분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뤼순감옥 뒷편에 있는 곳을 공공묘지로 지목하고 있기도 하였다. 현재 뤼순감옥에는 수감자들이 묻힌 곳으로 추정되는 곳은 세 곳이다. 이는 당시에 근무했던 당사자들이 증언과 1971년도 뤼순감옥 설립시기의 증언과 주변 뤼순구내 일반인들의 증언을 통하여 할 수 있다. 첫째 뤼순감옥에는 시기별로 보면 1907년부터 대략 1942년까지 사용한 동산퍼(东山坡), 마영후(马营后)라고 하는 뤼순 감옥 조기시기 묘지가 있다. 1936년 관동형무소(뤼순감옥)의 형무요람에 의하면, 1906년부터 1936년까지 한 30년 동안 감옥에서 사형으로 죽은 자 총 144명이고, 병에 걸려 죽은 자 총 415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 중에 대부분 중국 사람이고, 소수 조선 사람과 일본 사람도 포함되었다. 뤼순감옥에서 2003년 편찬한 <뤼순일러감옥실록>에 따르면, 1910년에 조선인 한명이 사형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안중근의사라고 일반적 받아들이고 있다. 조사에 따라 시체는 주로 마영후 감옥 묘지에 매장하게 되었는데 일부 시체는 일본여순의학전문학교 시체저장실로 옮겨가서 학생 해부시험용으로 제공되기도 하였다. 대부분 이곳 조기 묘지에 매장하였다. 이곳은 이곳은 2001년 1월에 다렌시 문물관리위원회가 “뤼순감옥구지 묘지(旅顺监狱旧址墓地)”라는 비석을 설치하고 ‘전국 중점 문물 보호기관”으로 지정하였다. 이는 뤼순감옥 민정부 공공묘지로서 뤼순감옥에서 현재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대략 면적은 2,000평방미터 정도로서 300여명 정도를 매장할 수 있는 규모에 이른다. 뤼순 감옥 공공묘지는 뤼순감옥 정문을 나와 왼쪽으로 상향가를 올라 가다보면 1.2키로 미터 지점에 위치한 상향가원 아파트 바로 뒤편이다.
둘째는, 1942년부터 1945년 8월까지 뤼순감옥 교수형장에서 교살이나 박해를 당해 죽은 사람이 700여명을 넘었다. 실제 사망 한 사람수는 기록보다 많았을 수 있다. 그리하여 조기 묘지에 가서 매장할 여력도 없었다. 죽은 사람이 급증함에 따라 시체를 매장하는 나무통도 턱없이 부족하였다. 뤼순감옥에서는 나무통을 황동 바닥으로 바꿔 시체를 묘지에 매장한 후 파내서, 다시 사용하거나, 나무통 없이 매장을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뤼순감옥의 만기시기에 묘지가 두 개가 존재한다. 하나는 현재 뤼순감옥의 바로 뒷편 북대문 오른쪽에 석물공장이 있다. 그 석물공장의 창고로 사용하고 있는 곳이다. 현재 HILL-ONE 아파트 (2008년 발굴 실패 후 지어진 아파트 명) 정문 바로 앞이다.
(2008년 발굴 실패 후 들어선 아파트)
이곳은 1942년부터 1945년까지 매장하였던 700여 구 중 일부가 묻혀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면적은 대략 700평방미터 정도이다. 이곳에 대한 증언이 있다. 1971년도 대대적인 조사를 할 당시, 일본이 투항 전 감옥 북쪽 벽에 있는 가마 근처에도 시체를 매장했다는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1932년 5월 김구의 한인애국단이었던 유상근, 최흥식이 다렌에서 관동 사령관을 암살하려다 실패하여 여순감옥에 수감되었다. 1945년 8월 일본이 투항하기 직전 뤼순감옥에서 살해되었다. 여순감옥 뒤에 거주하는 이충실은 “해방 이후 2년간 나는 감옥 북면 철망 외에 도랑의 남쪽 땅을 팠다가 해방 이전 감옥에서 죽은 죄인 시체 10구를 발견했다.”고 증언하였다.
셋째로 뤼순감옥의 만기 묘지는 또 한군데가 있다. 이는 1944년부터 1945년까지 사용한 500-700평방미터의 규모로서 현재 밭과 과수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곳을 가려면 뤼순감옥 정문으로 나와 왼쪽 담을 끼고 원보산 쪽으로 계속 가다 보면 뤼순감옥에서 동지관산 줄기로 가는 큰 길이 나있다. 그 길을 계속 올라 가다 보면 HILL ONE아파트를 지나고 한 200미터 가면 세갈래 큰 길이 나온다. 세갈래 길에는 큰 저택이 있다. 저택 앞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뤼순의 지신가 쪽 아파트로 가는 길이 나온다. 그 길을 쭉 따라 가면 왼쪽에 집 한 채가 나오고 바로 옆에 과수원과 밭이 왼편으로 보인다. 뤼순감옥에서 한 20분 정도 걸리는 거리이다.
(뤼순감옥 공공묘지 표지석)
(상향가원 주차장에서본 공공묘지)
(최근 녹음이 우거진 여순감옥 공공묘지)
전술한 세가지 뤼순감옥 공공묘지는 1906년부터 1942년까지 활용한 뤼순감옥 조기 묘지가 바로 뤼순감옥 공공묘지 인 것이다. 이곳이 바로 소노끼 “사형전말 보고서”에 따르면 안중근 의사가 묻히신 곳이다. 뤼순감옥에 오시는 많은 분들이 앞으로 공공묘지를 방문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뤼순감옥 공공묘지는 1965년과 1971년에 두 번에 걸쳐 발굴된 경험이 있다. 우선 뤼순감옥 공공묘지의 면적과 배치를 보자. 1907년 10월 20일부터 정식으로 쓰기 시작하였다. 뤼순감옥의 동쪽 약 1킬로미터에 황야 3무를 묘지로 썼다. 뤼순감옥 공공묘지는 등펑가와 상향가원과 가깝다.
그러면 그 동안 안중근의사 유해 찾기를 위한 노력에 대하여 알아보자.
1910년 안중근 의사가 순국하신 후 해방이 될 때까지 어느 누구도 안 의사의 시신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지 못하였다. 당시 안중근의사의 가족들은 대부분 상해에 살고 있었다. 마침내 일본이 항복하고 조국이 독립되자 백범 김구 선생은 안 의사의 유해를 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1948년 남북협상을 위해 북한의 김일성 주석을 만났을 때 안중근의사 유해 봉환을 제안했다. 이에 대해 김일성은 “소련의 점령지인 뤼순 출입은 소련의 허가를 받아야 하므로 실행에 옮기기에 힘들다고 하면서 통일 이후에 추진하자” 고 하였다. 하지만 김구 선생은 1945년 12월 2일 함께 귀국한 안우생을 평양에 잔류시켜 유해 조사와 발굴을 계속 추진하도록 하였다. 이후 안우생은 1970년대 중반 안중근 유해 발굴 단장으로 중국에 파견되어 조사를 벌였고, 1986년 발굴에도 참여하였다. 하지만 결국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1970년대에 들어와 안중근의사의 유언과 김구 주석의 안중근의사 유해 조사· 발굴이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하고 특히 <동아일보> 1979년 9월 5일자에 “안중근 기념관에 있는 뤼순감옥의 전경을 찍은 사진을 보고 형무소 건물과 관사 그리고 안중근이 있었던 곳을 즉석에서 알아 볼 수 있었다고 하면서 안중근은 관이 아니라 둥근 통에 넣어 운반하였다” 고 하는 뤼순감옥 전옥인 구리하라 사타키치의 딸 이마이 후사코의 증언이 보도되었다. 1986년 4월에는 북한이 단독으로 안중근의사 조카인 안우생을 비롯한 6명이 직접 뤼순을 방문하여 뤼순감옥 공공묘지 현장조사, 현지인 청취조사 등을 하였으나 구체적인 자료를 확보하지 못하고 돌아 갔다. 1986년 12월 외무부를 통하여 중국 정부에 유해 매장지 확인조사를 협조하였다. 그 후 1989년 10월 안중근 의거 80주년 학술회의 참가 시 참가자는 뤼순 감옥을 답사하였다. 1991년 1월에는 중국지역 독립운동 관련 사적지 답사 및 자료 수집 출장 시 현지 답사를 하였다. 1993년에는 7월 외무부를 통하여 일본정부에 안의사 묘소 확인 자료수집 확인요청을 하였으나 일본정부는 뤼순감옥에서 사형 집행 후 매장했다는 내용 이외의 안장 장소 등에 관한 구체적 자료가 없어 확인불가 하다는 회신을 보내 왔다. 1993년 8월에는 한중외무차관회의 시 안중근의사 유해 발굴 협조를 요청하였다. 당시 중국정부에서는 묘소를 찾기 위해서 노력을 하였으나 확인 곤란함과 안의사는 북한 출신으로 민감한 문제임을 표시하였다. 1993년11월 안중근의사 유해 발굴 실무 추진단을 구성하여 현지 묘소 실태조사를 하였으나 확인 불가하였고, 1994년 5월 안중근의사 연구가, 묘소 목격 증언자 등이 중국 현지 확인조사를 실시하였다. 특히 1995년 4월 외무부에서 한중문화협정이 발효되었으므로 중국측에 안의사 유해 발굴 조사를 협조하였으나 자료 멸실과 장기간 경과로 유해 매장지 확인 곤란 등을 확인하였다.
1998년 5월 9일 연합뉴스 기사에 의하면, 권병현 주중 한국대사와 다이빙궈 중국 대외연락부장간의 관련 자료 지원 등에 협조해 달라고 하는 후진타오 중국 부주석의 유해 발굴협조 의사 표시는 안중근의사 유해발굴사업에 당시로는 대단한 희망이었다.
2002년 11월 한국 국가보훈처 관계관 및 국제한국연구원에서 뤼순감옥, 뤼순 관동법원, 유해 매장 추정지 현장조사를 하였다. 유해봉환문제가 급 물살을 타기 시작한 것은 2004년 11월 29일 라오스에서 열린 동남아시아국가연합 정상회의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원자바오 총리에게 중국정부의 안중근의사 유해 발굴 협력을 요청한 이후의 일이다. 이와 때를 맞추어「안중근의사묘역추정위원회」를 이끌고 있는 최서면은 2005년 1월 유해위치를 북위 38도 49분3초 동경 121도 15분43초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주장을 전적으로 받아들인 정부는 6월 제15차 남북장관급회담에서 “안중근 의사의 유해발굴사업을 공동으로 추진하기로 했다” 고 발표하였다. 이때부터 남북의 유해발굴 협의는 더욱 급진전되어 본격적인 유해발굴이 시도되었다. 2005년 9월부터 2006년 3월까지 3차에 걸쳐 남북이 실무적으로 접촉하였다. 2006년 3월이 되어서 “정부는 최근 안중근 처형 및 매장에 관한 일본 정부의 미공개 자료 4714점을 확보했으며 북한에도 이 자료들의 요약본을 전달한 것으로 24일 확인됐다”고 신문에 보도되었다. 2006년 6월 제 1차 남북공동 유해 조사단을 파견하여 남북한 합의서를 작성하였다. 남북은 “유해 위치와 관련하여 뤼순감옥 뒷산 일대를 유해발굴 우선 대상지역으로 확정하였고, 발굴 장소 보존조치 등 중국 정부에 요청할 구체적인 사항을 마련하여 중국정부에 남북공동으로 협조를 구하고 순국 100주년을 맞아 남북공동으로 기념사업을 추진하자는 데 의견을 같이 하였다” 고 전하였다. 또한 이 무렵 남북은 뤼순 현지로 남북공동 조사단을 파견해 사전답사를 벌이기도 하였다.
2007년 4월 안중근의사 유해 공동 발굴사업 4차 남북 실무접촉(2007년 4월 1일 개성)에서 공동 발굴단을 파견하기로 합의하고 중국정부에 협조 요청을 하였다. 2007년 7월에 들어와 언론들은 “안중근의사 유해 남북한 공동발굴단이 정밀조사를 벌인 끝에 안중근의사묘역을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는 소식을 전하면서 안중근 손자 안웅호와 유전자 검사를 하기로 합의했다고 보도하였다. 2008년 3월 25일부터 4월 2일까지 1차 현장 조사를 하였고, 2008년 4월 10일부터 4월 29일까지 제 2차 정밀탐사 장비 투입조사를 실시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국 단독으로 최서면 국제연구원장의 주장을 근거로 유해발굴에 착수하였으나 결국 발굴에 실패하였다. 안의사의 유해가 매장되어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뤼순감옥 뒷산 일대를 발굴 조사하였으나 그곳에서는 깨진 그릇 몇 점만이 발굴되었을 뿐, 사람의 유골은 나오지 않아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결과적으로는 생활 도자기와 일부 금속물체, 당시 야채를 보관한 곳으로 추정되는 창고, 원통형 유구 등이 발견된 아주 아쉽지만 나름대로 대단위 조사 발굴로서 뤼순감옥 뒤편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시킨 조사 이기도 하였다. 또한 남북한이 공동으로 기획하고, 한중이 공동으로 노력한 아주 소중한 경험을 안겨준 조사이기도 하였다.
2008년 4월 2차 발굴 실패 이후 현재 정부는 안중근 의사 유해 행방에 관한 확실한 문건이 나오기 전까지는 더 이상 발굴을 할 수 없다는 입장으로 돌아섰고, 따라서 발굴 작업은 답보상태였다. 2010년 3월,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아 이명박 대통령은 “안중근 의사 유해를 모셔오는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천명하였다. 2013년 5월에는 국가보훈처 관계관의 뤼순감옥을 공공묘지를 방문하여 증언자의 증언을 청취하고 다시금 안중근 유해 발굴에 대한 불씨를 살려 놓았다. 또한 2013년 10월 17일 한국외교부에서 정식으로 다렌에서 안중근 연구학자들의 중국 당안관과 유해발굴에 대한 의견을 청취하여,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 안중근의사의 유해를 발굴하기 위한 현재 방안은 무엇인가?
우선, 안중근의사 유해 매장에 관련 일본측 자료를 확보하는 것이다. 외교경로를 통해 한국은 일본에 안중근의사 유해 발굴에 대한 협조를 요청한 바. 일본정부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 “현시점에서 관련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계속해서 조사를 해 나가겠다” 는 2010년 5월 16일 경주에서 한중일 외교장관 회의 시 일본 오카다 일본 외무대신의 답변이었다. 그간 한국에서는 수회에 걸쳐 일본외무성 외교사료관, 국립공문서관, 국립국회도서관, 일본 현지 고서점, 지도 전문서점 등을 방문하여 안중근의사 관련 자료를 수집하였지만 현재까지 안중근의사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발견하지 못하였다.
둘째, 중국측 자료를 확보하는 것이다. 중국은 안중근의사의 유해가 처리된 뤼순지역을 관할하고 있어 유해 발굴시 적극적인 협조가 요구되는 지역이다. “중국은 양국간 우호관계의 관점에서 그간 안중근의사 유해 발굴에 여러 차례 적극적으로 협조한 바, 현재로서는 별다른 진전이 없으나 새로운 실마리가 있다면 계속 필요한 협조를 제공할 것이다”라고 2010년 5월 15일 한중일 외교장관회의에서 양제츠외교부장이 답변하였다. 우선 다렌의 당안관 자료를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1955년 뤼다 당안관 정리시 뤼순관동도독부 지방 법원에서 인계한 1,248명의 정치범 사진과 명단이 다렌 당안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뤼순감옥 최후 감옥소장인 타고지로가 1945년 8월 16일부터 18일까지 태웠던 뤼순감옥 자료가 1971년 4월에 발견되어 불탄 재 형태로 현재 다렌 당안관에 보관되어 있다. 아울러 다렌 도서관에는 그 당시의 수많은 신문자료가 보관 되어 있다. 특히 만주일일신문은 공개되어 있지만, 당시 발간되었던 태동일보는 아직 외부인들에게 1910년 3월 시점이 공개되지 않고 있다. 확인해야 될 사항이다. 또한 관동국사령부였던 길림성의 당안관과, 그리고 만주철도 자료도 관심대상이다
셋째, 뤼순감옥 공공묘지에 대한 지속적 검토와 관찰이 요구된다. 현재 중국에서는 안중근의사의 유해 매장과 관련 정확한 자료와 남북한이 공동으로 발굴을 요청한다면 적극적으로 검토한다는 입장이다. 그렇다고 뤼순감옥 공공묘지를 파헤칠 수는 없다. 현재 문물 보호지역으로서 문화재 법에 의거 임의로 훼손할 수 는 없다. 정식적 외교채널을 이용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뤼순감옥 공공묘지를 훼손하지 않고 확인해 볼 방법이 또 하나 있음을 최근 조사활동을 통해 발견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사안이 매우 중요하고 신중한 재확인이 필요한 관계가 요구된다. 만약 뤼순감옥 공공묘지에서 안중근의사의 유해가 발굴되지 않는다면 중국에서 다시 유해 발굴을 허락해 줄지 우려가 되기 때문에 신중한 접근이 요구된다. 또한 공공묘지를 청소하고 관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 현재처럼 방치하는 것보다는 깨끗이 정돈하고 많은 한국 관광객이 찾아 올 수 있도록 안내 표지판과 소개도 뤼순감옥내 이식감옥에 설치하여야 한다.
넷째, 한중 안중근의사 유해발굴 업무 위원회를 설립해야한다. 시급히 설립해야할 사안이다. 한중의 학자들이 정부 차원에서 임명이 되어 서로 얼굴을 맞대고 그동안 제기되었던 안중근 유해발굴 증언자와 증언지점등을 하나 하나 씩 검증을 하여야 한다. 또한 지속적인 학술위원회를 개최하여 자료 발굴을 하여야 한다. 당안자료나 뤼순 주변의 탐문조사 등이다. 기회되면 규모를 확대하여 미국, 소련, 일본, 북한의 학자들도 같이 참여 하여 사료 발굴에 대하여 진정성있는 토론이 이루어 져야 한다. 한중 업무위원회는 유해발굴관련 사료가 구체적인 확증이 나올 때 까지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중국업무 처리 방식상 갑자기 일을 처리하는 것 보다는 꾸준한 시간을 가지고 인내력이 요구된다. 또한 중국측 뤼순 감옥에 근무했던 분들도 이제는 퇴직이나 70 고령을 넘어 선다. 그분들이 생존해 있을 때 증언을 녹취해야 한다. 한국 정부의 관심을 희망한다.
다섯째, 저자의 의견과는 전혀 다르지만, 안중근의사 초혼묘라도 모시고 참배를 하는 방법을 검토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1919년3.1만세 운동의 민족 횃불이신 유관순 열사가 만세운동을 하시다가 붙잡힌 후 서대문 형무소에서 일본의 모진 고문과 악행으로 인해 결국 꽃다운 나이에 순국하신 뒤 유관순열사의 시신을 온전히 수습하여 모셔야 하는 게 후손된 도리이다. 그러나, 일제의 악랄한 수작에 의해 오늘날 열사의 실제 시신을 모신 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1990년 4월 1일에 유관순 열사의 고향인 충남 천안의 병천에는 기념관 뒤 매봉산 중턱에 초혼묘((招魂墓)가 만들어져 있다. 만약에 안중근의사의 유해를 발굴하지 못한다면 뤼순감옥 공공묘지에 실제 묻히셨기에 초혼묘라도 모셔야 한다는 소수 의견도 있다. 초혼묘란 시신이 없는 고인의 혼백을 달래기 위해 고인의 유품 등을 정리하여 묘처럼 모시는 전통 장례법이다. 사람이 숨지면 맨 먼저 해야 할 일이 고인의 체취가 스민 저고리를 들고 지붕에 올라가는데 지붕 위에 서서 저고리를 세 번 휘두르며, 집을 떠나가는 고인의 영혼을 불러들인다고 한다. 이를 혼부르기 또는 초혼(招魂)이라 한다. 이렇게 불러들인 영혼을 신주(神主)에다 옮겨 좌정시킴으로써 무형의 영혼을 달래는 것이다. 한국인의 영혼은 이처럼 머리카락, 손톱, 피 같은 신체의 일부나, 체취가 스민 옷, 신발, 글씨 같은 유물에 의미를 부여하고 영면의 길을 안내한다.
그러나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시기 상조 일수도 있다. 그냥 조심스럽게 생각해 보는 것이다. 국가차원에서는 민간차원에서든 실질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모두가 모여서 난상토론, 또는 끝장토론을 해서라도 빠른 시일 내에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 국가보훈처의 입장은 1차로 안중근의사의 정확한 유해 매장지 자료를 발굴하고, 2차로 안중근의사의 유해를 발굴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안중근의사의 유해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 뤼순은 부동산 개발에 의하여 뤼순감옥 주변에 속속들이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는 현실이다.
안중근의사의 '안응칠 역사'에 따르면 의병투쟁의 필요성을 연해주에서 설파하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스스로 할 수 없다는 생각은 망하는 근본이요.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것은 만사가 흥하는 근본이다' '여러 분들에게 묻습니다.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는 것이 옳습니까? 분발하고 힘을 내는 것이 옳습니까 우리 모두 결심하고 각성하여 용감하게 싸웁시다" 라고..
말씀하시고 안중근의사는 국외의병 최초로 국내로 진격 하셨다.
현시점에서 안중근의사의 위기 돌파 방식을 다시금 새겨볼 필요가 있다.
2013년 10월 26일은 안중근의사가 하얼빈에서 의거하신 지 104주년인 날이다. 다시금 안중근의사를 기리면서 일제에 빼앗기다시피 한 안중근의사의 유해를 찾아 모시는 일은 국권을 회복한 나라로서 정체성을 각인하고, 유린되었던 우리에게 부과된 거룩한 사명이라 할 것이다.
첫댓글 난석재님 초혼묘에 대해서 견해좀 주세요?
김 박사님, 반갑습니다. 좋은 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안 의사님을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招魂墓’는 遺骸발굴과 무관하게 추진해야 한다는 소견입니다.
그곳에 초혼묘를 모시다가, 다행히 유해를 찾으면 故國으로 返葬하고
초혼묘는 그곳을 찾는 사람들이 參拜장소로 삼으면 되지 않을는지요?
주신 글 중에 ‘사진설명’은 있으나 실제사진은 없습니다.
사진도 함께 게시해 주시면, 카페회원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타국에서 건강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김정곤 不宣]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회장님도 건강하시지요. 금년 한국에서 '안중근의사 유해를 찾아라'라는 책이 단행본으로는 최초로 발간예정입니다. 대전에 가면 찾아뵙고 졸저를 올리겠습니다. 건강하세요. 안중근의사님 유해발굴에 많은 관심과 홍보 부탁드립니다. 어르신들이 움직여야 나라가 바로 섭니다. 기회되면 다렌에 오시면 김회장님 뫼시고 유해발굴시 올려야하는 각종 제사(?)나 제례 절차 등도 알고 싶습니다. 손방입니다. 많은 지도 편달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보람있는 일 하시는 것이 부럽습니다.[뵙는 날을 기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