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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28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성령강림절 후 제10주)
믿음의 사람-빵을 먹는 사람들
왕하4:42~44; 엡3:14~21; 요6:1~21
우리는 모두 믿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믿음이 좋다 나쁘다는 말이 적당한 표현일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리 모두 큰 믿음을 갖고 싶습니다. 예수님도 딸을 고쳐달라는 가나안 여인을 보면서 “믿음이 크다”고 말씀하시지요.(“여자여,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될 것이다”) 또 복음서 여러 곳에서 믿음이 “적다”는 표현도 하십니다.(“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왜 의심하였느냐?”)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큰 믿음, 적은 믿음이란 가시적이고 수량적인 표현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가 쉽게 측량할 수 없는, 삶의 태도에 대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랑이 크다 적다 라는 표현을 하지만 그것은 수치나 수량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나는 삶의 태도를 말하는 것이지요. 여기다가 눈에 뻔히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많은 부분까지 포함하는 말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큰 믿음의 조건은 무엇일까요? 반드시 큰 믿음이라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믿음의 조건 혹은 요소는 무엇일까요? 저는 믿음의 조건 혹은 믿음의 요소는 중심성, 지향성, 항구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의 중심성이란 믿는 분에 대한 신뢰를 말합니다. 그분이 우리의 주변이 아니라 중심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또 눈에 빤히 보이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를 있게 하는 바로 그 바탕, 그 원천, 그 중심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때 바탕, 원천, 중심은 눈에 뻔히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눈이 눈 자체를 볼 수 없고, 세상의 모든 것을 벨 수 있는 아무리 날카로운 칼이라도 칼 자신을 벨 수는 없는 것처럼, 우리가 바탕 혹은 원천은 우리의 시각뿐만 아니라 모든 지각, 모든 경험을 넘어서는 것.) 이런 의미에서 이 세상에서 우리가 믿음을 가질 진정한 바탕은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삶의 중심을 잡게 합니다. 삶이 요동치고 흔들려도 돌아갈 항구, 돌아갈 집, 돌아갈 지점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아버지 집을 떠나 방탕하게 지냈던 둘째 아들이 했던 일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항상 아버지와 함께 했던 첫째 아들은 돌아갈 아버지 집이 없었습니다. 그는 늘 아버지와 함께 있었지만, 돌아갈 아버지의 집은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중심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중심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노래로 부르는 데레사의 노랫말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아무것도 너를 괴롭히게 하지 말고, 아무 것도 너를 두렵게 하지 말라.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 부족함이 없느니,
아무것도 너를 괴롭히게 하지 말고, 아무 것도 너를 두렵게 하지 말라.
하느님 한 분이면 충분하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부족함이 없다, 하나님 한 분이면 충분하다, 이 말은 믿음의 중심성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의 고백입니다. (제가 늘 드리는 말씀이지만, 이 말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쓸데없다,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님을 잘 아시겠지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세상과 비교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사람입니다.) 이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인 사람의 삶은 어떻겠습니까?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대로 빙산 같은 삶을 살아가겠지요. 그의 무게중심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깊이 잠겨있습니다. “영광을 돌린다”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카벳>인데, 이는 일차적으로 “무겁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은 하나님께 무게 중심을 둔다는 말이지요. 매사 하나님께 무게중심을 두고 있는 사람이 믿음이 큰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바탕, 원천, 중심임을 기억하고 다시 아버지께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삶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둘째 조건인 “지향성”입니다. 이는 돌아가는 것이요, 또 다시 “힘을 내서/용기를 내서” 중심을 향하려는 태도입니다. 둘째 아들이 돼지우리 속에서 제 정신이 들어서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자”라고 말했던 바로 그 태도입니다. 아무리 자신의 처지가 어렵고 힘들더라도 환경이 자신을 규정하지 못하도록 하는 태도입니다. 이것을 요즘 말로 하면 “회복탄력성”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 돌아가는 태도, 지향성은 “내어맡기는” 자세에서 나옵니다. 사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내어맡기는” 태도와는 전혀 상반된 태도를 배우며 자랐습니다. 우리는 파악하고, 움켜쥐고, 소유하고, 통제하라고 배웠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렇게 힘들게 투쟁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와는 정반대, “내어맡기라”는 말은 어불성설처럼 들립니다. 예, 세상을 살면서 파악하고, 움켜쥐고, 소유하고, 통제하는 일은 필요합니다. 이것들은 우리가 독립적으로 서서 자신의 삶을 살게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우리가 파악하고 움켜쥐고 소유하고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나 다른 이들의 삶을, 생명을 움켜쥐고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움켜쥐고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의 바탕이신 하나님을 소유하고 움켜쥐고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그땐 우리의 쥔 주먹을 펴고, 우리의 벌린 손을 내려야 합니다. 이 구별이 잘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혼동하면 안됩니다. 아, 이것은 내가 열심히 일해서 바꿀 수 있는 것이구나, 아, 이것은 내가 하나님께 맡겨드려야 하는 일이구나!
이렇게,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삶에 훨씬 많은 것을 수용할 수 있게 되고 누릴 수 있게 됩니다. 한마디로 유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유연함”은 우리 삶을 훨씬 쉽게, 자유롭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유연함은 자신을 계속해서 수정해 갈 수 있게, 변화될 수 있게 합니다. 그래서 지향성이란, 딱딱하게 굳은 신념이 아니라, 딱딱하게 굳은 아집이 아니라, 언제든 다시 중심을 향해 돌아서게 하는 유연성입니다.
세 번째 믿음의 조건은 “항구성” 즉 한결같음입니다. 환경에 따라, 기분에 따라, 조건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한결같은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마음이 바로 이 한결같은 마음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어로 <헤세드>라고 합니다. “신실한 사랑”, “변함없는 사랑”을 말하는데, 여기서 핵심은 “한결같다”는 것입니다.
이 한결같다는 말은 딱딱하게 굳은 신념이나 아집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돌아감, 변화를 위한 항구성, 한결같음입니다. 한결같은 중심성이고, 한결같은 지향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정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변하려는 꾸준한 노력이며 꾸준한 수련입니다. 한결같이 하나님을 기다리고, 한결같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한결같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이후의 삶은 한결같은 삶이었습니다. 물론 그가 여러 번 유혹에 빠지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잠시 넘어지기는 했을지언정 그가 만난 혹독한 삶으로 인해 거기서 주저앉은 적은 없었습니다. 시련이 있고, 유혹이 있고,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중에, 아니 오히려 그로 인해, 그의 믿음은 그야말로 “큰 믿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 사람들은 그를 보고 “믿음의 조상”, 즉 “믿음의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사랑하는 살림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는 소위 오병이어의 기적과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오시는 이야기를 요한복음을 통해 읽었습니다.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기적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모든 복음서가 기록하고 있는 유일한 기적 이야기입니다. 그 만큼 오병이어의 기적은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었던 기적 이야기입니다.
지난 마가복음6장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큰 무리를 보시고, 그들이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아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래 그들에게 여러 가지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가르침으로 날이 저물자, “이 사람들을 헤쳐, 제각기 먹을 것을 사 먹게 근방에 있는 농가가 마을로 내려 보내는 것이 좋겠다”는 제자들의 권유에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불쌍히 여김”과 깊은 관련이 있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배고픔, 그들의 아픔, 그들의 방황에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깊은 연민을 느끼셨습니다. 마가복음에서 보면, 오병이어의 기적은 이 “불쌍히 여김”이 중요한 동기가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6장의 본문에서는 그런 자세한 말씀은 없지만, 예수님은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모여드는 것을 보시고” 대뜸 제자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빵을 사다가,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발적인, 연민의 마음으로 이 기적을 행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한 아이의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받아들고서는 빵을 들어서 “감사를 드리신” 후에(<유카리스테오> 다른 복음서는 <유로게오> “축복하다”) 이 표현은 요한복음에만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우리가 이 오병이어의 기적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것이 요즘의 과학적 잣대를 들이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 아이가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놓자 거기 있는 사람들도 모두 자기가 가지고 온 도시락을 내어놓은 것이라는 합리적인 해석도 구태여 필요도 없습니다. 거기에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그것은 기적이었고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때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들고 일어납니다.
우리가 우선, 더욱 마음에 두어야 할 일은, 우리는/우리도 이 기적에 참여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빵을 떼어주는 현장에서 그 빵을 먹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기적 이야기는 옛날 옛적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정보를 전해주려고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 아닙니다. 너희도 이 오병이어의 자리에 참여하라는 초대장입니다. 이 기적 이야기만이 아니라 모든 성경말씀이 다 그렇습니다. 모든 성경말씀이 너희도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에 참여하지 않겠느냐는 진지한 부름입니다. 오늘 오병이어의 기적 다음에 나오는 물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큰 바람과 사나운 물결에 시달리고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셔서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라는 하신 말씀도 당시 제자들만 들어야 할 말씀이 아니라 우리가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사실 그렇게 굶주리며 살고 있지 않습니다. 아니, 너무 많이 먹어서 문제라면 문제이지요. 이천년 전 당시 사람들은 실제로 굶주렸고, 특히 로마의 식민지로 있던 유다는 그야말로 도탄에 빠져 있던 시대였습니다. 로마 총독이 뺏어가는 세금에, 유다왕 헤롯에게 바쳐야 하는 세금은 너무나 무거웠습니다. 그들이 가뭄이나 자연재해를 만나면 그야말로 하루 연명하는 것이 큰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에도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일용할 양식을 위해 간구할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지금 당장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신 것은, 하루의 양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하루 양식에 굶주리지 않고, 내일 양식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비록 여러 가지 쓸 것들이 많이 있지만, 적어도 양식 때문에 굶주리지는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매일매일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무슨 말도 되지 않는 소리를 하느냐, 사람이 하루 세끼 밥만 먹으면 그게 사는거냐, 이 시대에 사람들이 얼마나 뼈 빠지게 고생해서 돈을 버는지 아느냐, 항변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예,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적어도 하루 세끼 밥은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인데 우리가 매일 필요한 만큼 일용할 양식을 먹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고, 우리가 “뼈 빠지게” 고생해서 돈을 버는 것은 오늘 우리가 말하는 일용할 양식과는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어쨌든 우리는 지금 매 끼니마다 잘 먹고 있다는 겁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것은 우리에게 당연한 일이 아니라, 놀라운 일이고 감사한 일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오병이어의 기적보다도 더 굉장한 일입니다. 이렇게 된 것이 사실 몇 십년 되지 않고, 또 세상 어딘가에는 아직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데, 그래서 우리는 우리 시대에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책임을 가져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한 끼 식사에 우리는 정말 감사한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남과 비교하지 말고 적어도 먹는 것으로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아이가 내어놓은 빵과 물고기를 받아들고는, 감사를 드리신 후에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쓰인 헬라어 <유카리스테오>는 “감사한 마음을 가진다”, “감사를 돌린다”는 뜻입니다. 이 명사형 <유카리스티아>라는 말, “감사한 마음”, “감사드림”이라는 말에서 “성만찬”(Eucharist)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성만찬의 신비로 바꾸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몇 주에 걸쳐 예수님께서 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하늘에서 오신 생명의 빵의 신비로 설명하시는 이야기를 보게 될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씀드리면, 우리는 얼마나 “우리 삶을 살리는 생명의 빵”을 먹고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식사 한 끼를 안 하면 몸이 휘청한데, 우리에게 매일 들어오는 생명의 빵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우리의 내적 인간(속사람)이 아버지 당신 힘으로 굳세어지게 하시고,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중심)에 사시게 하시며, 그리스도의 사랑에 뿌리를 내려 그 사랑을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그래서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지식을 초월하는) 이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우리 각 사람이 먹을 생명의 빵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생명의 빵을 먹을 수 있는 기본적인 방법은, 번잡한 마음을 좀 가라앉히고(고요하게 해서 흥분과 붙잡힌 감정과 생각들을 가게 놓아둡니다)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 가운데 있음을 감사하면서, 그 하나님의 사랑을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에게 하나님 대신 조용히 속삭여 줍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용기를 내어라, 나는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네 자리를 걷고 일어나 걸어가라” 아니면,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하는 말씀을 여러분이 스스로에게 속삭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말해주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은 자동적으로 저절로 들리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작고 보잘 것 없는 일 같지만, 이런 작은 행위는 여러분에게 믿음의 중심성, 지향성, 항구성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한 술 밥에 배부르려니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렇다고 한 술 밥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지금 우리의 주림은 한 술 밥을 계속 무시해 왔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더 화려한 진수성찬만이 와야 배부를 것이라고 상상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처음에는 그냥 보리떡 한 조각이면 됩니다.
여러분이 이런 생명의 양식을 계속 취한다면, 여러분의 삶은 점점 건강해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새 큰 믿음의 사람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