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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전17;1-15. 환상으로 본 마케도니아를 넘어서. 2025. 5. 25.
166:1.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는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바울이 아시아에서 복음을 계속 전하려고 했는데 성령이 막았습니다. 그리고 16: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케도니아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아시아로 가는 것을 막은 성령께서 이제는 환상으로 마케도니아로 건너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16:11-15. 바울 일행이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마케도니아의 첫 성 빌립보에 도착을 합니다. 빌립보에서 자색 옷감 장사이며 두아디라 사람인 루디아에게 복음을 전하였는데 그의 집안사람들과 더불어 모든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16:16절 이하에서. 귀신에게 사로잡힌 여종을 고쳐준 것 때문에 바울과 실라가 착고에 묶인 채 옥에 갇혔습니다. 하지만 16:25절 이하에. 바울과 실라가 한밤중에 기도하며 찬송을 했는데 매인 모든 것이 벗겨지고 옥문이 열렸습니다. 지키던 간수가 자살을 도모하려 할 그때에 16:31. 이르되 주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유명한 권면을 합니다. 이로 인해서 간수의 모든 집안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루디아를 다시 만나 복음으로 위로하고 오늘 본문으로 넘어갑니다. 1절.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바울 일행은 빌립보 지역에서 전도를 마치고 이제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에 도착을 했습니다.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 까지는 약 160km 정도 됩니다. 마케도니아의 첫 성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기적을 경험하지만 결국은 시련과 박해 때문에 바울 일행이 빌립보를 떠납니다. 그런데 두 도시를 그냥 지나가는데, 암비볼리가 33마일, 거기서 아볼로니아까지 30마일 그리고 데살로니가까지 37마일정도입니다. 암비볼리는 군사도시이고 아볼로니아는 로마로 연결이 되는 도로입니다. 그러니까? 데살로니가까지 몇 차선의 공식적인 도로인데 그냥 복음을 전하지 않고 지나가지만 거쳐 갑니다. 여러분, 바울 일행은 마케도니아 환상 가운데 움직였고 예수의 영과 성령이 인도했음을 16;10절에서 시인 했는데 그냥 지나가요? 두 도시는 데살로니가와 못지않은데 왜 그럴까요? 바울의 열정이나 환상을 보면 그냥 지나가면 안 되는데 무엇일까요? 영적인 행위에 관한 규칙과 법칙은 없습니다. 성령의 영적인 조명과 인도하심을 객관화시키지 마시고, 조명과 인도하시는 방식은 각 사람마다 다르고, 변하고, 고정되지 않기 때문에 성령의 음성에 민감해야 합니다. 사람이 보는 관점과 시각이 아니라,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건과 사람과 일을 통해서도 성령은 역사하시는데 은혜를 주시는 데로 지나가면 지나가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왜? 그런데 나는 왜?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시는 데로 하면 됩니다.
1. 오늘본문은 데살로니가와 뵈뢰아를 중심으로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지역은 마케도냐 지방의 수도이며, 정치, 경제의 중심지로 인구는 20만 명 정도 됩니다. 상당히 큰 도시입니다. 베뢰아는 데살로니가와 전혀 다릅니다. 지형이 다르고 유대인의 성격도 다른데, 베뢰아는 로마의 공도로 연결이 되어 있고 휴양지 같은 곳입니다. 생각을 하는 사색적인 사람들이 숨어사는 드러나지 않은 곳입니다. 철학이 있지만 힘이 실리는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의 성향과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과 변화되는 것과 깨닫는 것이 다릅니다.
1-1.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 온 이유입니다. 바울이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에 온 것은 당당하게 왔습니다. 물론 핍박과 박해 때문입니다만 그래도 전도자로서 그 자세를 흐트리지 않았습니다. 숨어서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베뢰아로 가는 길은 밤에 숨어서 슬그머니, 베뢰아로 도망을 했습니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베뢰아에 온 것이 아닙니다. 데살로니가는 선교적 목적입니다. 하지만 베뢰아는 선교적 목적이 없었던 기대하지 않은 곳입니다. 유대인의 박해를 피해서 베뢰아에 왔으나 두 곳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문제가 없었습니다. 기대한 곳과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승리를 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목적이 있어서 시작을 하든지? 아니면 강제적으로, 나의 의사와 상관이 없어도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1-2. 데살로니가에서의 선교입니다.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을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10명이 모이면 회당을 지었습니다. 안식일이면 회당에 모여 율법을 낭독하고, 기도와 서로 간에 교제를 합니다. 데살로니가에는 큰 도시답게 꽤 많은 유대인들이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데살로니가에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선교의 원칙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중국 사람은 세계 어느 곳을 가든지 사업을 합니다. 한국은 어떻습니까? 어디를 가든지 교회를 세웁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10명만 모여도 회당을 세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관례이었습니다. 1차 전도여행 때인 아시아에서는 살라미에서,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이고니온에서 그렇게 했습니다. 지금은 유럽이요, 다른 환경 다른 대상입니다. 그런데도 빌립보에서도 회당이 없음을 알고 차선책으로 기도처를 찾았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관례대로 먼저 유대인의 회당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선교 원칙입니다. 언제나 같습니다. 원래 바울이 회심한 이후에 유대인들은 바울에게 항상 적대적입니다. 모든 핍박과 박해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유대인의 회당을 반드시 찾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업을 하시는 분, 새로운 그 무엇을 하시려고 하시는 분, 꼭 알아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익숙한 곳과 아는 곳을 찾는 것입니다. 바울은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며 바리새인이고 공회원입니다. 가말리엘 문하생입니다. 그래서 회당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해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자기 백성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을 먼저 찾았습니다. 롬9;1-3, 10;1. 자기 민족인 유대인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2-3절.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바울은 예언된 메시야, 즉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예수님이 예언의 성취라고 증언을 합니다.
1-3. 바울의 중요한 표현입니다. 세 안식일 동안 뜻을 풀어. 이 말은 열어서 주장한다는 opening and alleging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강론 방법입니다. 뜻을 풀어서 설명하기 때문에 깊이가 있고 바울 신학이 나옵니다. 열어서 주장한다는 표현은 누가의 표현 방법입니다. 누가는 어떤 사람입니까? 의사입니다. 과학적 사고이기 때문에 의심이 나고, 고민이 되면 열어야 합니다.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어야 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열어서 라는 표현이 2군데 나옵니다. 오늘 본문과 누가복음24;32절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경을 풀어 주셨습니다. 열어 주셨습니다. 그 때에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열어서 라는 뜻은 분명히 하다와 해설과 설명입니다. 바울이 주장하고 독단적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순서에 따라 늘어놓았고, 진열을 했습니다. 이해하고 믿고 받아들이도록 했습니다. 여러분, 설교가 무엇입니까?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는 것입니다. 설교의 주된 재료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주 텍스트입니다. 말씀이 빠진 강론은 없습니다. 설교가 케류그마입니다만 설교의 구체적 행위는 성경의 뜻을 풀어서 청중들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막4;34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설교자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성경의 뜻을 바르게 해석하여 청중들에게 알기 쉽게 전달을 하고, 그 말씀을 구체적으로 삶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알게 하는 것입니다. 강단에서는 다른 말하거나 신변잡기와 사적인 이야기와 세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성경을 풀어 증거 해야 합니다. 말씀의 뜻만 제대로 풀어서 전달을 해도 엄청난 부흥과 각성이 일어납니다. 바벨론에서 포로 귀환한 느헤미야 시대 때에 그러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수문 앞 광장에 모인 백성들에게 느8:5, 8-9, 12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그들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하나님의 율법 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니 이는 그들이 그 읽어 들려 준 말을 밝히 앎이라. 메신저, 목사의 보람이 무엇일까요? 은혜 받을 때와 변화 받을 때와 회개와 성장과 복을 받을 때 입니다. 무엇을 풀어 주시나요?
1-4.두 가지를 내용을 풀어 주고, 두 가지를 선포합니다. 먼저는 예언된 메시야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지만 부활 한 것을 선포합니다. 유대인들이 아는 성경을 바르게 풀어 주었습니다. 이것이 첫 번 째 요지입니다. 성경에서 메시아를 어떻게 말씀을 하시는가? 유대인들이 잘 이해하지 못했고, 망각했습니다. 당시의 랍비와 서기관과 율법사들이 이 부분의 해석을 하지 못했습니다. 사53장, 종의 고난이 나오지만 사61장은 종의 승리가 나오는데, 해석이 명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했지만 예수님께 자기의 사람을 보냅니다. 요3;22-30, 눅7;18-22절.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릴까요? 무지가 아닙니다. 그 만큼 해석이 어려웠습니다. 로마정부로부터 왕권을 회복할 능력자라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기대가 되지만 보여 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감옥에서 랍비들의 해석이 옳은가? 두 명의 메시야가 있어야 하는가? 두 번째 메시야가 오는가? 그래서 오실 그이가 당신? 또 다른 메시야?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의 회당에서 메시야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다시 부활 할 것을 가르칩니다.
두 번째는 메시야를 설명한 이후에 바울은 바로 그 메시야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선포 합니다. 왜요? 모든 성경이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설교의 핵심 메시지는 예수 십자가 복음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다른 것이 아니고,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무엇입니까? 십자가에서 고난 받아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입니다. 이 복음이 영혼을 구원하고, 영혼을 살리는 것입니다. 롬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바울은 가는 곳곳마다 오직 예수 십자가의 복음만을 자랑하고 전했습니다. 고전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갈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고전1;22-24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이 내용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받습니다.
1-5. 복음의 열매입니다. 4절.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쫒으나. 여러분 헬라 사람들이 얼마나 똑똑합니까? 그리스 철학과 헬라 철학은 지금도 유명합니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과 같은 철학자들이 다 헬라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복음이 지식인과 귀족에게 빛이 되고 마음이 열립니다. 예수 십자가의 복음이 시작과 마지막입니다. 들을 때마다 늘 새롭습니다. 이 사람들은 바울의 권함을 받았고,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바울과 교제하며 공동체에 합류를 했는데 이것이 데살로나가 교회가 됩니다. 복음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고후10;4-5.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복음이 도시와 나라에 들어가면 도시와 나라가 완전히 바뀌고, 한 개인에게 들어가면 인생 전체가 바뀝니다. 첫 번째 열매입니다.
두 번째는 첫 번째의 열매와 메시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라는 선포 때문에 핍박이 일어납니다. 5-7절.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괴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서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달려들어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시기,jealously입니다. 시기하여, 질투하여, 이 표현은 열심과 열정에 이끌려 그런 표현입니다. 여러분, 열심과 열정이 필요하고 좋습니다. 롬10;2-3. 바울이 로마서에서 유대인을 가리켜서 열심이라고 합니다. 잘못된 열심과 열정입니다. 이것이 시기입니다. 초대교회에 열심당원이 있었습니다. 바울 이전의 사울도 열심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가두고 죽이는 장소에서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심, 열심과 열정이 사람들을 충동질 합니다, 게으름 피우며 빈둥거리는 사람입니다. 바울 일행이 어디에 있습니까? 저자거리, 시장입니다. 시장 사람들은 어때요? 바쁘고 분주합니다. 오고 가는데 정신이 없습니다. 떠들고, 거셉니다. 그런데 빈둥거리고 게으름 피우는 사람은 장사꾼이 아닙니다. 저자에 있지만 저자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을 충동질했습니다. 마25;20-26. 달란트의 비유에서 게으른 것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악하다고 합니다. 게으름과 빈둥거리는 사람들은 악합니다. 게으름이 왜 나왔을까요? 비교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을 유대인들이 충동을 합니다. 떼를 지어 소동케 합니다. 무슨 내용으로요? 천하를 어지럽게 한다는 것인데, 이는 가이사를 거역하는 죄입니다. 다른 임금, 곧 예수가 있다는 것을 전한다고 비난합니다. 그래서 밤에 데살로니가를 떠납니다만 떠난 뒤에 여기에 대한 평가가 나오는데, 살 전1;9-10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 와서, 사시고 참된 하나님을 섬기고, 또 강림하심을 기다리는 성도가 됩니다. 유대인들의 반대에 불구하고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에서 풍성한 복음의 열매들을 거두었습니다. 4절.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들, 그리고 야손과 그의 집과 몇몇 형제들, 또한 행20:4절.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가 있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복음을 전하면 반드시 반대에 부딪치기 마련이지만 박해와 반대 속에서도 복음의 열매는 반드시 맺히기 때문에 반대나 박해를 결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히메지,
2. 베뢰아 입니다. 10절.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귀부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따랐습니다. 이것을 시기한 유대인들이 불량배들까지 동원하여 두 사람을 잡으려합니다. 야손의 집에서 두 사람을 찾았지만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믿는 형제들이 두 사람을 숨겼습니다. 야손은 데살로니가 사람입니다. 데살로니가를 빠져 나가는데 도움을 주었고 밤에 몰래 두 사람을 빼내어 베뢰아로 보냈습니다만 성령님께서 두 사람을 잡히지 않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넘기지 아니하면 잡히지 않습니다. 왜요? 할 일이 남아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눈동자같이 지키십니다. 부르심에 따라 사명이 있는 사람은 결코 죽지 않습니다. 베뢰아는 데살로니가로부터 남쪽으로 약 80km 정도 되는 거리인데 11절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이 사람들은 성향이 다르고 표현이 더 신사적입니다.
2-1. 고상함입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신사적이란 의미가 무엇인가요? noble입니다. 고상함입니다. 무엇이 고상할까요?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세와 옳고 그름을 받아들이는 자세와 능력입니다. 진리를 발견할 때 믿으려는 자세가 있는가? 이것이 noble입니다. 빨리 믿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고민하고 그러한가? 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회의적 생각에 머물지 않고, 진리를 발견하겠다는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상한 베뢰아란 즉시 yes가 아니라, 끊임없이 말씀으로 돌아가서 그 해석이 바른지 여부를 확인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왜 베뢰아 사람일까요? 삶의 터전이 대로가 아니고, 목가적 전원입니다. 주류가 아니지만 주류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담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도시이기 때문에 지식과 물질이 몰려있어서 급하고 분주하나 베뢰아는 다릅니다. 고민하고 솔직하고 발견하면 확실한 믿는 깊이 생각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2-2. 신앙을 표현하는 단어가 다릅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권함을 받았습니다. 논증에 의하여 설득이 되었습니다. persuaded입니다. 논증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베뢰아 사람들은 믿었습니다. believed입니다. 권함은 논증에 의하여 설득되었다는 뜻이고, 믿었다는 것은 논증에 의하여 설득과 바로 영적인 이래를 가졌다는 뜻입니다. 회의와 고민과 그러한가? 한 사람들은 확인한 사람으로서 더 큰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12절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들이 있었습니다.
2-3. 여기에 몇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이런 차이점과 칭찬이 있음에도 결과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복음의 전진 기지가 되었습니다. 물론 베뢰아가 같은 모습을 갖추고 있었지만 데살로니가는 교회로 명명이 되었습니다. 무엇을 말할까요? 단순한 데살로니가가 복음의 역할자로 더 풍성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전 후서가 있습니다. 성격이 급하고 논증을 하면 바로 따라오고, 믿고 하는 사람들은 실수도 있고 흠이 있지만 역사가 나타납니다. 여러분, 성경을 더 많이 알고 ,더 깊이 아는 것 중요합니다. 그래서 실수가 없고 착오가 없습니다만 다른 사람을 세우고 헌신하는 데는 약합니다.
베뢰아 사람들로부터 얻는 교훈인데, 그것은 참된 태도입니다. 참된 태도는 열려있음입니다. 말씀에 열려있고, 꾸중과 권면에 열려 있어야 합니다. 편견과 고정이 아니고, 상황과 성령에 열려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상고 했는데, 연구 검토의 조심성입니다. 조심성이 있어야 새로운 메시지와 빛이 들어오게 되고 결국에는 은혜와 위대함이 이루어집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이 베뢰아까지 와서 핍박과 박해를 합니다. 하지만 동역자가 동행과 염려를 합니다. 14절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머물더라. 극렬 유대인들의 소동 때문에 바울만 겨우 피하여 바다까지 갔습니다. 실라와 디모데는 미처 빠져 나오지 못했습니다.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는지를 보여주지만 복음의 대적 자들을 피해 가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15절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를 아덴까지 이르러 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 떠나니라. 여러분, 혼자서는 세울 수 없습니다. 함께 일할 동역 자가 필요합니다. 여러분에게도 이와 같이 동역하시는 분들이 많이 나타나시고 그 관계의 영역이 성령에 의해서 확장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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