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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5주일설교 주께 하듯 하라(에베소서5:22-33) 104주년 창립주일
본문: 에베소서 5:22-33
제목: 주께 하듯 하라
오늘은 율리교회 창립 104주년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22-33의 말씀을 가지고 “주께 하듯 하라”는 제목으로 창립주일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가을의 아름다운 날들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 좋은 날에 결혼 한다는 소식들을 많이 듣습니다. 그래서 사방에서 결혼한다는 청첩장이 날아오고 있습니다. 몇 주 전에 친구 목사 딸의 결혼식에 갔었습니다.
이제 친구들의 자녀들이 결혼을 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그러하듯이 아버지가 딸을 데리고 결혼식장에 들어가 신랑에게 넘겼습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가 강단에 올라가 주례자로 주례를 하였습니다. 그 목사님의 주례사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두 가지를 말했습니다. 첫 번째가 “교회를 사랑하라”였습니다. 부모님이 교회를 사랑하였듯이 교회를 사랑하라였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라”였습니다. 부모님이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하나님을 사랑하라였습니다.
그것이 주례사의 전부였습니다. 목사로서 좀 황당했습니다. 너무 고리타분하고 딱딱하였습니다. 그것도 하나 밖에 없는 딸의 주례사가 그랬습니다. 그런 주례사를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 가정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고, 사랑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이 전부였습니다.
같이 갔던 목사하고 이야기 하면서도 주례사가 좀 그렇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그 주례사가 생각이 났습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다 되는 것이 아닌가?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한가? 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렇습니다. 아내와 남편에 관해서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32절에서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사랑하였던 예수 그리스도 모습 그리고 그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모습을 우리가 따르면 다 되는 것이 아닐까요? 무엇이 더 필요할까요?
우리는 많은 것을 듣고 있습니다.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 있습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합니까? 우리가 말씀을 듣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 앞에 바로 서서 복 받기 위함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오늘 창립주일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교회에 대해서 우리가 가져야 할 모습은 무엇일까요?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교회를 위해 어떻게 행동하며 살아야 할까요?
1.교회는 어떤 곳일까요?
우리가 잘 알듯이 교회가 건물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를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바로 교회입니다. 바로 우리가 있는 곳이 교회이며 우리가 가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입니다. 머리가 무엇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머리로 무엇을 할 수 없습니다. 머리는 우리의 손이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우리의 발이 어디로 가야 할지를 정하고 그것을 하도록 하는 곳입니다.
우리가 교회이고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것은 움직이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그냥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움직이는 것도 아닙니다. 만약 그냥 움직인다면 큰 문제입니다. 스스로 움직인다면 더 큰 문제입니다.
만약 우리의 몸이 스스로 움직인다면 어떻게 될까요? 손 스스로 움직이고 발 스스로 움직이고 눈 스스로 움직이고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큰 일 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아무 일도 못할 뿐 아니라 사방팔방에 부딪혀 부상을 입거나 죽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머리에서 지시하는 대로 움직여야 정상적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신경이 문제가 되어서 머리에서 지시하는 것을 전달하지 못하면 우리의 몸은 움직일 수 없습니다. 중풍병이 그래서 무섭습니다. 신경 손상을 입으면 그래서 머리에서 전하는 것을 몸이 받지 못하면 우리의 몸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머리가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하는 것을 행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 누구도 교회에 명령을 하면 안 됩니다. 오직 그리스도만 명령할 수 있고 지시할 수 있습니다.
만일 다른 것에 움직이는 순간 그곳은 아무리 화려한 건물을 가지고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다고 하여도 그곳은 교회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모임일 뿐이며 더 나가 사탄 뜻을 따르는 모임이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를 수 있습니까? 어떻게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이 안 들린다는 분들이 있습니다. 신자라면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그렇지 않다고 하면 그는 신자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 육체적인 귀도 다른데 마음을 쓰고 있으면 옆에서 뭐라고 해도 들리지 않습니다. 잠자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무슨 소리를 해도 들리지 않습니다. 잠자는 것이 아니라도 들을 마음이 없거나 다른 데 마음을 쓰고 있으면 들리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음성도 그렇습니다. 들으려고 해야 합니다. 다른데 마음이 있는데 주님의 음성이 들릴 수 없습니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데 주님의 음성이 들릴 수 없습니다. 주님과 관계가 올바르게 되어 있어야 그 음성이 들립니다.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것은 그분의 탓이 아니라 내 탓입니다. 내가 귀를 막고 있거나 내가 들으려고 하지 않거나 내가 다른데 마음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말씀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교회를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십니까? 그것은 오늘 본문 25절에서도 말씀하듯이 자신을 다 주시기까지 교회를 사랑하셨습니다.
교회는 그분의 피 값으로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교회는 그분의 피의 희생을 통해서 아니 그분의 전부를 통해서 태어난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그분이 없다면 그분의 뜻이 없다면 교회는 아닙니다. 머리 없는 사람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것은 그 사람이 아닙니다. 아니 끔찍한 모습입니다. 혹시 우리의 모습은 그런 모습은 아닌지 살펴야 합니다. 그런 끔찍한 모습이 우리의 모습은 아닐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2.그러면 어떻게 그리스도의 뜻을 따를까요?
오늘 본문은 부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부에 대해서 말하면서 교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일발 쌍타 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발로 두 개를 맞추는 것을 말합니다. 한 말씀을 가지고 부부에 대해서와 교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닮은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와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가 닮아 있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와 그리스도는 부부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가 머리인 부부입니다.
부부관계에서 남편을 머리라고 하면 말도 안 된다고 할 것입니다. 믿을 수 없고, 책임감도 없고 지혜도 부족하고 능력도 없는 남편이 머리가 된다는 말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합니다. 그 말도 이해가 됩니다. 아내 된 여러분 여러분의 남편이 머리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가정은 평안하고 자녀들을 잘 자라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의 남편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질 정도로 책임감이 있으며 온 세상을 만드시고 주관하시는 능력이 있으며 지혜도 있으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따라야 합니다.
문제는 그것을 알고 인정하겠는데 어떻게 따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분의 음성을 들으며 어떻게 그분의 뜻을 전달받을 수 있느냐 입니다. 그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사랑하면 됩니다. 사랑하면 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는 자녀의 필요를 잘 알게 되어 있습니다. 우는 소리만 들어도 무엇이 필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들으면 무슨 필요인지 알지도 못하고 짜증만 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 교회에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 곧 우리가 해야 할 일 무엇인지 들려주십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하는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을 어떻게든 행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22절에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바꾸고 싶습니다. “성도들이여 교회를 대할 때 주께 하듯 하라.” 교회에는 목사가 있고 장로가 있고 권사가 있고 집사가 있고 성도들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예배가 있고, 교육이 있고, 봉사가 있고, 교제가 있고, 전도가 있습니다. 그런 모든 일을 할 때 주께 하듯 행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은 그렇습니다. 주께 하듯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주님을 대하듯이 하는 신앙은 무엇일까요?
문제는 주님이 앞에 계시면 그렇게 하겠는데 주님이 계시지 않는데 어떻게 주께 하듯 할 수 있느냐고 반문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염소편의 사람들의 대답이 그러했습니다. 주님이시면 배 고플 때 먹이고 헐벗었을 때 입히고 외로울 때 찾아보았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지금 우리 앞에 주님이 계시면 얼마나 잘하겠습니까? 하지만 주님은 지금 우리 곁에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 앞에는 목사가 있고 직분자들이 있고 교회라고 불리는 성도들이 있고 보이는 예배와 봉사와 교제와 교육과 전도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주께 하듯이 하라는 것입니다. 목사를 대할 때 다른 성도를 대할 때 또한 예배나 봉사나 교제를 할 때 주께 하듯이 하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하면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하라는 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때 목사는 제 일을 할 수 있으며 예배는 살아나고, 봉사는 아름다운 헌신이 되어 주님의 영광을 나타나게 되고 교제는 다른 성도를 살리는 것이 되고 전도를 통해 하나님 나라는 확장이 되게 됩니다. 그렇게 주님께 하듯 하는 태도가 바로 참된 교육의 장이 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고 내가 주가 되어서 내 뜻을 따라 행하려고 하고 내가 소리를 내어서 내가 움직이려고 하면 목사는 목사의 일을 못하며 장로도 장로의 일을 못하며 예배도 봉사도 교제도 전도도 교육도 다 사람의 일이 되어 혼란으로 가게 됩니다.
3.교회를 사랑하라!
그렇습니다. 앞에서 말한 목사님의 주례사를 통해서 말하고자 했던 두 가지 교회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은 하나의 말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길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없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지 않고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진실 일 수 없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진실이 될 수 있겠습니까?
사랑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종 교회를 둘러 보다가 거미줄이 처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구석 구석에 먼지들이 쌓여 있는 것을 봅니다. 들판에는 그렇게 꽃이 만발하여도 예배당에는 꽃 하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아직 화장실 벽에는 공사할 때 묻은 힌 가루가 그대로 묻어 있습니다.
사랑은 관심입니다. 오늘 새벽 말씀을 나누다가 깨달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 가지 경구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지금 여기를 기쁘게 살라
지금 여기에서 선을 행하라
지금 여기를 즐겨라
우리가 살고 있고 우리가 섬기고 있는 곳은 지금 2014년도 율리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를 기쁘게 여기고 살아야 합니다. 과거가 어떠했는가는 생각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있고 지나고 있는 지금 여기를 기쁘게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선을 행해야 합니다. 선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해야 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오늘 나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은 무엇일까를 찾아서 해야 합니다. 지금 선을 행해야 합니다. 지나가면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를 즐겨야 합니다. 젊음이면 젊음을 늙음이면 늙음을 부하면 부한 것을 가난하면 가난한 것을 즐겨야 합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율리교회에서 즐겨야 합니다. 이 아름다운 교회를 우리에게 주셨고 우리는 이것을 즐겨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창립주일을 맞아 예배당 옆 마루 광장에서 바비큐 파티를 하려고 합니다. 즐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완벽하지는 못해도 즐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런 것을 하면 얼마나 할 수 있겠습니까? 즐겁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 여기를 기쁘게 여기고 지금 여기에서 선을 행하고 지금 여기를 즐기면서 교회를 사랑한다면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주께 하듯 하는 행동이 되지 않을까요? 억지가 아닌 사랑에서 나온 기뻐서 행하는 즐기면서 행하는 교회사랑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 되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그런 모습이길 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하라고 해서 억지로 사랑하는 것 슬픈 일입니다.
존경하라고 해서 억지로 존경하는 것 그것 초라한 일입니다.
복종하라고 해서 억지로 복종하는 것은 굴욕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자발성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마음으로 목회자를 존경하고 교회의 어른을 존경하고 사역자를 존경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마음으로 봉사를 하고 교제를 하고 예배를 드리고 전도를 하고 말씀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천국의 그림자로서 천국을 꿈꿀 수 있는 하늘 사람으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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