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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어른 말만 하면 눈물이 나요
최말란 당호(眞誠堂, 진성당) 용담교구
경주 하구 3리 출생
1923년생 6월 4일 생 (음)
나는 대신사님 원을 다 풀어 주고 싶어요.
만약 대신사님이 살아 계셨더라면 근암공 자리를 분명하게 남겼을 거라.
아버지의 자리니까.
지금이라도 대신사님이 다시 살아오신다면 근암공 자리를 크게 남길 것이라고 나는 생각해요.
자식의 도리이니까요.
그런 생각이 항상 제 머리 속에 떠나질 않아요.
그래서 내가 이 사업을 시작한 것입니다.
‘대신사님 원을 풀어 주면 교회 원도 저절로 풀릴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천도교는, 태어나자마자 내가 용담 할배(대신사)를 믿었으니까 운명같은 거지요. 천도교 정식 입교는 60년도에 용담교구에서 했고요. 어렸을 때는 용담 할배 때문에 우리가 고통 받는 줄 알았지만 원망은 안 했어요. 마음이 불안하면 언제나 용담에 갔죠.
근암공 할아버지께는 작은집에서 양자(최제환)로 들인 큰 아들이 있고 뒤에 한 씨 부인이 낳은 대신사님이 있었어요. 나는 양자로 온 큰아들 자손이에요. 대신사님은 우리 종고조부인 거라요. 근암공 할머니가 두 분 다 돌아가시고, 한 씨 부인이 오셨는데 가정리 뒷동네 금척(現 근천)에 사는 분이에요.
내가 어른들한테 들은 대로 말할게요. 한 씨 부인은 혼자가 돼서 친정에 와 있었대요. 밤에 소변보러 나왔는데 달빛이 한 씨 부인을 확 감싸는데 비몽사몽 자신도 모르게 ‘시댁 찾아 간다’고 걸어갔대요. 재를 넘어서 한 70리 길을 가다가 우리 집 문 앞에서 쓰러졌는데, 그때 종이 “마님, 마님! 소복을 한 부인이 우리 집 살(대문) 앞에 엎어져 있는데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더” 우리 증조모(대신사님 조카 세조의 처)가 종보고 방에 모시라고 했대요. 죽은 듯 했대요. 조금 있다가 정신을 차려 질문을 하니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다며 울었대요.
그 시절 과부가 그렇게 되면 오도 가도 못 하거든. 그때 용담정에 근암공 어르신이 기거하고 계셨어요. 가도 오도 못하니 근암공 시중들라며 조모(근암공 양자며느리)님이 권해서 용담정으로 보내셨대요. 그리고 대신사님을 낳았어요.
우리 큰집은 대신사님 때문에 관에 지목돼서 힘들었지요. 다른 형제 집은 괜찮았지만 큰집만 힘든 거예요. 그러다가 대신사님이 체포됐지요. 그러자 논 열 마지기를 압수하고 집도 압수해 불을 질렀어요. 다 날아가 버렸어요.
우리 외가가 시내에 살았는데, 조부께서는 처남에게 선산을 돌봐 달라고 맡기고 동네를 떠났어요. 불국사 가는 길에 있는 내동이라는 동네가 있는데 거기서 피해 살았어요. 세월이 흘러 가정리에는 못 돌아오고 중간(현곡면 하구 2리)쯤에 살다가 해방 이후에 가정리 옆에 있는 하구 3리로 돌아왔어요. 외동이라는 동네에 살 때는 성이 최가란 말도 못하고 살았어요. 어른들이 밖에 나가서 성을 말하지 말라고 했어요. 최씨 일가라고 하면 잡아간다고요. 대사신님 때문에 우리 조부 때부터 고생이 많았죠. 우리 조부가 대신사님을 증조부라고 불러요. 내 조카(최성환)가 근암공 8대손이고 제가 직계입니다.
우리 조부는 천석군 따님과 결혼했어요. 우리 아버지는 월성리 부잣집 셋째 사위였어요. 조부의 처가가 도와서 살았죠. 조부는 처남에게 묘 관리를 맡기고 쫓겨 갔지요. 현곡면 하구2리로 돌아와 우리 당숙께 관리하게 했습니다. 당시 시천교가 들어와 있었는데 그래도 묘소관리는 당숙이 했어요.
우리 당숙께서 끝까지 용담을 관리했는데 그때 별감영감(별명)이 그 밑에 살다가 용담에서 밭을 해먹으려고 소를 몰고 도랑을 건너다 마른 날벼락을 맞았어요. 용담에 밭이나 땔감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 기어코 가다가 변을 당한 거라요. 그래서 질겁해서 도망 나왔대요. 그 후로 사람들이 그곳에 가면 죽는다 해서 아무도 접근을 못했어요.
세월이 흘러 의암성사님께서 시천교와 관련이 있어 용담을 조사하러 왔어요. 의암성사님이 별감영감에게 물으니 그때 벼락 맞은 앙심으로 가짜 묘라고 한 거라요. 의암성사님이 어리둥절한 기라. 의암성사께 진짜 묘라는 걸 알려야 하는데 안 한 거라.
정운채 교령이 취임할 때 경주에 왔는데 용담에 참배도 안하고 가짜라는 기라요. 그때 내가 보골(화)이 나서 올라갔어요. 나를 사람들이 몰라요. 최가 후손이라는 것만 알고 내가 직계라는 걸 몰랐어요. 서울교구 청년회에서도 가짜라고 난리가 났어요.
대신사님이 대구에서 참형을 당했을 때, 우리 증조부(세조, 대신사님 조카)가 시신을 수습하려고 화양에 오니 날이 새는 기라. 그래서 은신해 있다가 밤에 와서 시신을 수습하는데 목이 없으니 나무 주걱으로 받쳐서 모셔왔대요. 시신을 모시고 밤길을 가는데 한군데 불이 비치는 기라. 마치 올 줄 알았다는 듯이 사립문이 열려 있더래요.
염치 불구하고 다섯 명(대신사 조카 세조, 양사위 정울산, 해월신사 매부 임익서 등)이 들어가니까 노인이 나오더래요. “대신사님이 조금 전에 저에게 와서 ‘조금 있다가 온다’고 하셔서 내가 대문을 안 닫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라고 말을 하더라는 기라요. 그래서 그곳에 이틀을 묵었대요. 초저녁부터 재를 넘어 넘어서 숨어서 온 거라요. 영천 너머에 그 길이 있어요. 또 하룻밤을 자고 산에서 모시려고 하는데 그때 마침 동네에 장가 안 간 사람이 죽었대요. 옛날에 장가 안 간 사람은 돌로 무덤을 하는데 대신사님 묘도 누구한테 들킬까봐 그 앞에 묘를 써서 그렇게 비슷하게 돌무덤을 해서 위장 했다는 기라요.
대신사님 묘는 며느리가 지키러 다닌 기라요. 종을 며느리로 삼으셨잖아요. 그 종 며느리가 대신사님 묘를 관리했죠. 우리 친정 큰올케가 서가인데, 그 서씨 동네에 대신사 며느리(김씨 할머니)가 피해 살았는 거라요. 서씨들 담 밑에 살면서 사흘들이 묘를 지키러 다닌 기라요. 시간이 흘러 한씨 할머니도 산에 모시고, 숨기고 숨겨서 지켜 온 거라요. 그런데 가짜라고 하니 내가 열이 받친 거예요.
대신사 며느리는, 우리 삼촌이 양자로 들어갔는데 그분이 돌아가실 때까지 모셨어요. 대신사님 며느리는 대신사 묘 아래 응달에 모셨죠. 시아버지 아래 모셔야 되니 아래 응달에 모셨습니다. 우리 삼촌이 묘를 관리했는데 대신사 성역화할 때(오익제 교령 때) 너무 응달이라고 옮겨달라고 했어요. 총부에서 비석을 세울 때도 우리 사촌이랑 의논해서 허락했죠. 근데 총부에서 대신사 큰아들을 함께 모신다고 대신사님 큰아들(세정)하고 합장하도록 터를 잡어라 카는 기라. 큰아들 세정은 감옥에서 병들어 말라죽어서 아무것도 없어요. 그 감옥자리가 지금은 군청이 됐는데 그 자리 흙이라도 가져오면 된다고 해서 군수에게 말해 흙을 담아 왔어요. 교령님, 표영삼, 한태원 선생님 등 몇 분이 가셨어요. 한이라도 풀고 혼이라도 함께 모신다고 해서 그때 터를 잡아서 묘를 옮겼어요.
내가 그 흙이 든 보자기를 받아서 들고 묘를 쓰려고 하관을 하는데, 흙을 싼 하얀 천이 연잎 같은 물에 젖어있어요. 사람도 하관 할 때 보면 물이 젖거든요. 너무 놀라고 영(靈)이 있다는 것을 느꼈지요. ‘영이 무심하지는 않구나’ 눈물이 나더군요. 우리 사촌이 돈을 내서 옮기고 합장해서 비를 세웠어요. 작은 할배(대신사 작은 아들 세정)는 모친 환원 후 이듬해 소밀원에 있는 장기서 집에서 환원하셨고 유골은 우리 오촌이 찾아 와서 모셨어요. 우리 작은 할매(대신사 작은 며느리)는 어디 계신지 못 찾았어요.
나는 환갑에 며느리에게 살림을 넘기고 대신사님 일에 본격적으로 나섰어요. 어느 날 총부 시일보고 지하다방에 차 마시러 가니 대신사 50주기 제사를 해월신사 며느리가 모셨다고 하는 기라. 권태화 따님(한명빈)이 나를 알아보고 ‘대신사 후손’이라 하니, 그 중 한 나이 많은 사모님이 “대신사 후손이 어디 있냐. 해월신사 후손이 대신사 후손으로 들어갔다” 하는 기라요. 내가 무릎을 치며 말하기를 “제사 50주기를 어찌 지냈느냐, 그 전에 대신사 후손을 찾아봤냐?” 하니 “없다”라고 말해요. 그래서 “대신사님은 남구(나무)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고 삼촌도 있고 조카도 있어도 있는데 왜 안 찾아봤냐?” 하니 나한테 성을 내며 달려들어요. 우리 종조부도 후손들이 해 입을까 겁이 나서 기록을 다 없앴던 기라요.
한바탕 그러고 나서 박정희 대통령 때 유허비를 세웠어요. 길 세우고 금양 다리도 놨는데 집을 세우기도 전에 분규가 나는 바람에 최덕신 전 교령이 북으로 가버렸잖아요. 최덕신 전 교령이 준공식하고 갈라고 했는데 그만 싸움 때문에 갔어요. 그때 유허비 세우는 식을 하는데 유족대표로 해월신사 손자(검암장)가 나오는 기라요. 저분이 왜 후손이 되는 긴가? 최가라도 대신사님하고는 같은 최 씨가 아닌데 이상타 생각했어요. 교회에서 알아서 하게 간섭하지 말라고 하는데 그래도 나는 열이 받쳐요. 그래서 연원회 사무실을 찾아갔어요. 연원회 의장이 나를 후손이라고 인정 안 하고 증거를 가져오래요. 직계한테 도장 받고 주민등록 초본 해서 오라고 해요. 진짜 후손이라는 증거를 가져가니, 그때까지 대신사님 양자라고 자칭하는 사람이 그 자리를 피해 도망을 가버리는 거라요. 그때부터 내가 화가 나는 기라요.
내가 결혼하고 친정에 왔더니 해월신사 동상이 용담정으로 온다고 해요. 우리 오빠가 살아 있을 때에요. 이곳은 해월신사 성지가 아니니 우리가 못 오게 막았어요. 그래서 해월신사 동상이 황성공원으로 갔어요. 정운채 교령에게 이 문제를 따졌더니 후에 용담에 대신사님 동상이 세워졌어요.
그리고 천진교에서는 비각을 해 오는 기라요. 그때 서울 아들네 집에 있었는데 오익제 교령한테 전화가 왔어요. “진성당!”하면서 빨리 경주로 가래요. 8톤 차에 장비까지 해왔는데, 용비 용머리 좌대 앞에 놓는 개 두 마리랑 해서 소리 없이 세우려고 했는 기라. 우리 친척이 들에서 일을 하는데 보니 불도저로 산에 길을 내더래요. 수도원에 전화하니, 김근오 원장이 깜짝 놀라 총부에 전화를 한 거라. 총부에서 경주시청 산림계로 전화를 하니, 나무 잘라서 길을 민 게 불법이라 딱 걸린 거라요. 퍼뜩 밀어 올린다는 게 들킨 거죠. 우리 육촌 오빠가 이때까지 비를 못 세웠는데 우리 조상을 아무나 세워주면 좋다고 하면서 허락을 했다고 해요. 내가 오빠한테 “천진교가 세우든 누가 세우든 큰집을 무시하면 안 된다. 이 어른(대신사)은 총부에서 먼저 세우고 난 뒤에 누구든지 해도 안 막는다”고 했어요. 밤에 조카들을 동원해서 한 달 동안 지켰어요. 그랬더니 이 비석을 용담정 올라가는 입구에 묻고 간다는 거라요. 그래서 안 된다고 했어요. 위에 우리가 비 세우거든 그 밑에 세워라 하니 “그 땅이 당신 땅이냐?” 해요. “우리 조상 땅이고 내 할아버지 땅인데 내가 왜 간섭 못 하냐” 하며 총부에 못 세우면 용담교구에서라도 세울 테니 못 묻는다고 했죠. 밤 12시까지 싸웠어요. 내가 차 앞에 들어 눕고 못 하게 했어요.
그 다음에 오익제 교령이 됐는데 잘했어요. 근데 그땐 재단에 돈이 없었어요. 10억이 있는데 보증금 받은 것이고 750만 원이 있더군요. 오익제 교령이 대신사 묘역을 추진을 하더라고요. 대신사님 비석 세울 때 큰집 종손 최성환이가 답례품으로 보자기를 준비했어요. 나는 대신사님 후손들에게 조상 일을 할 땐 우선 내놓고 하자고 해요. 비석 세우는 준공식 할 때 반대파들이 비석에다가 빨간 페인트칠을 해 놨어요. 교령이 당황해서 씻고 닦고 난리를 했죠. 좀 있으니 풍물로 북을 치고 장구치고 쳐들어오는 기라요. “가짜 묘! 가짜 묘!”하면서 들어오는 기라요. 경찰이 올라와 잡아간 뒤에 식을 했어요.
그 일이 있은 후, 반대파들 하고 고소사건이 생기고 난리를 했죠. 우리 종조부가 그동안 관리해 온 거라서 가짜일 리가 없는데 그때 애묘를 파서 했다고 가짜 묘라는 기라요. 그럼 진짜 묘를 찾아 달라고 하니 못 찾으면서 그러는 기라요. 교령이 두 번 다시 이 일로 이의가 없을 것이라며 불찰이라 사과하고, 근암공 묘소하고 대신사 묘소도 새로 하는 걸 책임지고 해준다고 했어요. 그렇게 서로 사과하고 끝냈지요.
묘 성역화 할 때 주차장이 필요해서 보니 도로 옆에 500평정도 논이 있어요. 그 논 주인과 흥정을 하는데 우리 일가인데도 돈을 올리는 기라. 그때 만원하는 걸 삼만 오천 원이나 주고 샀지. 그때 백호진 씨가 내려왔는데 또 영감이 안 팔라고 하는 기라요. 영감 아들이 혼내서 겨우 샀어요.
근암공께서 용담정을 짓고 난 후 시천교에서 용담정을 다시 세웠지요. 관리는 대신사님 후손들이 했어요. 여름에는 도랑으로 다니고 겨울에는 물레로 무명을 자으면서 우리 친정 조모들이 그 집을 지켰어요. 우리 엄마는 살림을 살아야 하니까 자주 못 갔죠. 한번은 그곳에서 자는데 자갈 같은 것이 문을 치대요. 초롱불을 켜놓고 내가 무섭다고 막 우니까 할머니가 “너희들이 몰라서 그렇지 할아버지(대신사)가 너희들 도와주니, 주문을 읽으면 된다”면서 달래요. 주문을 읽으니 정말 아무 소리가 없어요. 우리는 대신사님을 용담 할배라 하고 또 용담 할배 주문이라고 했어요. 어릴 때는 ‘지기지기’라는 소리로만 들렸어요. 시천교는 4월 5일, 10월 28일 탄신일에 제를 모시고 청수물 받는 곳 옆에) 평평한 곳에 모셔요.
내 종조부는 내가 열여섯 살 묵도록 살았는데 내가 열 살 땐 근암공 책판도 했어요. 우리가 먹을 갈고 엄마는 창호지를 다듬었어요. 대신사님은 내한테는 고종조부고 근암공 둘째 아들이죠.
해월신사 큰 할매의 큰 딸인 최할머니가 왔어요. 우리 둘째오빠가 그분께 든든하게 잘해 조카도 용담 할매(최할머니)를 따라요. 우리는 용담 집을 다 맡기고 잊어버리는 기라. 우리 할매도 연세가 들어 내려오고 세월이 흘러 도단 집을 지어서 살림집으로 만들었지요. 우리가 가보면 청수물을 모실 때도 너무 정갈하게 모시는 거라. 한 번씩 떡도 하고. 나중에 양 사모님(양이제)이 오시고 권 할머니(권태화)도 오고 해서 내가 시집가기 전에 봤어요. 양 사모님이 포덕한다고 하더라고요.
하루는 누가 감나무에 올라가서 크게 다쳤는데 용담 할매가 낫게 했어요. 아픈 아이들도 낫게 해주니까 포덕을 많이 했죠. 최 할머니는 얼굴이 가름하고 조용해요. 용담 할매가 용담을 지켜주니 우리도 참 고마웠죠. 우리 조카가 용담 할매를 참 좋아해서 최 사모님 말이라면 한밤중에도 거기에 뭘 가져가는 기라요. 조카가 군대 갔다 와서 최 할머니가 병이 났는데 조카 앞에서 죽었다 카데요. 조카가 제대하고 왔는데 할매가 며칠 시름시름 앓았어요. 밤에 할매한테 자고 온다더니만, 조카 품에 안겨서 죽었다 카데요. 5일장을 했는데요. 교인들도 우리 집안도 용담 지켜주니 참 고맙지요.
내는 우리 조상 용담 할배(대신사) 원만 풀어 주면 내 원도 풀리는 기라요. 그 마음을 가지고 대신사님 일을 진행하는 기라요. 한번은 일이 잘 안 돼 여기서 열이 뻗치고 저기서 열이 뻗치고 해서 용담에서 일주일 동안 금식을 하며 수련을 해 봤어요. 청수물만 묵으면서 ‘죽으면 죽고’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어요. 독심을 가지고 했죠. 대신사님 산소 앞에 가니 넘어지더라고요. 너무 답답해서 “용담할배요. 할배도 모사를 당해 죽었는데 내가 죽고 사는 것을 판단해 주소”라고 하소연을 했어요. 일주일 수도를 하니 마음이 열리고 괜찮아지더라고요.
근암공 자리는 지금 수련하는 본당(용담정)자리입니다. 근암공이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서 지은 자리이지요. 용담정 위에 있는 사각정도 이유 없이 짓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때 종법사님들이 근암공이 이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근암공 몫으로 사각정을 지었나 봐요. 그러니까 책장을 해 놓았겠지요. 김철 교령 때 사각정을 짓자고 제안을 했어요. 내가 보탤 힘이 돼서 터 닦을 생각 안하고 이층으로 지으려고 했어요. 생각해 보자더니 그냥 넘어갔지요. 이철기 교령 때 근암공 몫으로 지으면 나는 밑에 수도장을 짓겠다고 했는데 그때도 일이 진행되지 못했어요.
박정희 대통령 시절, 성지사업으로 용담정을 다시 세울 때 근암공 전각을 더 크게 세우고 대신사님 팔각정을 세웠으면 일이 바르게 됐을 텐데 조그만 사각정을 세웠어요. 내 생각에 그때 근암공 제자들의 유족들이 없으니 나중에 유족이 나타나면 주려고 그 위에 조그맣게 세운 것 같더라고요. 그걸 다시 찾으려고 하니 총부에서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이철기 교령 때 김철 교령이랑 의논해 그 몫(근암공)으로 주려고 해서 그때 내가 천만 원을 내 놓았어요. 그렇게 했는데 이철기 교령이 나갔어요. 지금 김동환 교령이 종무원장 하던 시절입니다.
나는 대신사님 원을 다 풀어 주고 싶어요. 만약 대신사님이 살아 계셨더라면 근암공 자리를 분명하게 남겼을 거라. 아버지의 자리니까. 지금이라도 대신사님이 다시 살아오신다면 근암공 자리를 크게 남길 것이라고 나는 생각해요. 자식의 도리이니까요. 그런 생각이 항상 제 머리 속에 떠나질 않아요. 그래서 내가 이 사업(근암공 이름으로 전각을 세우는 것)을 시작한 것입니다. ‘대신사님 원을 풀어 주면 교회 원도 저절로 풀릴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내가 잘났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요. 우리 부모들이 못해 준 것을 내가 하고 싶은 기라요. 밑에 조카들도 못해요. 저만큼 알지 못하니까요. 생색을 내려는 것이 아니라요. 원래 조상 기록만 있지 세상 기록이 없어서 이렇게 애를 쓰는 기라요.
적멸굴에도 갔다 왔어요. 대신사님이 그곳에서 수련을 했잖아요. 내는 내 할배 간 곳만 밝히면 내 원은 다 풀어요. 이 어른이 수련하려 간 곳은 다 대나무가 있어요. 남원에도 갔지요. 거기도 대밭이 있어요. 내가 적멸굴에 비 하나 세우려고 아무리 사정을 해도 안 되어요. 통도사 땅이고, 국립공원인 기라요. 주자창 밑에 고랑 가에 땅을 달라고 해도 안주어요.
내가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이 어른이 이 세상에 크게 나시고도, 이 어른의 부모에 대한 원을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구나’ 불쌍한 마음이 생기는 기라요.
물론 후학들은 대신사님에 대한 한이 없겠지요. 대신사님은 한울님과 합일되신 도통하신 성인이시니까 종교적으로 보면 무슨 한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후손으로써 느끼는 저의 심정은, 부모에게 자식노릇 못하고 돌아가셨어도 아버지 전각(용담정)마저 당신이 차지하고 있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는가? 싶어요. ‘누구나 혈손이 없으면 불쌍하구나’ 하는 생각에 항상 눈물이 나요.
그래서 이 어른 부모에 대한 원을 대신 풀어 주려고 선생(근암공)의 전각을 세워 주려고 하는 기라요. 우리 교인들이 아무리 대신사님을 좋아해도 교인들 중에 누가 이 어른의 부모에 대한 마음을 알아주겠습니까? 그런 일은 후손이 도리로써 해야지요.
집안에서도 그래요. 아버지는 그 시대에 못할 형편이었고 우리 오빠는 할 수도 있는데 하려고 안 해서 서운하더라고요. 오빠에게 내가 “신양(재가녀손) 구양(적자) 고마 찾아라.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대냐. 다 우리 할배 혈손인데 후손이 못 찾으면 어짜노” 오빠는 안 나서려고 했어요. 대신사님 때문에 그때 최가가 다 죽을 판인 거라요. 안 그래도 재가녀 자식이라 인정 못 받고 태어나서 집안을 망하게 하니 최가 일가가 다 외면하는 거라요. 그래서 “그때는 그래도 지금은 세월이 흘렀으니 이 어른을 도와야 한다”고 했죠. 오빠가 못 도우면 누가 도우냐 했더니 “교회에서 알아서 하게 그냥 나 둬” 라는 거라요. 나는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양반 상놈 그만 찾아라. 직계손이 안 찾아주면 이 어른이 얼마나 불쌍하노” 하며 말했죠. 날 때부터 불쌍하게 태어나 대접받지 못하고 살았으니 자꾸 눈물이 났어요. 말만하면 자꾸 눈물이 나요. 나서서찾기 시작했어요. 그때까지 울산 여시바윗골도 몰랐어요. 그곳에서 그렇게 산 것만 알지. 어떻게 공부했는지 몰랐거든요.
그런 게 세월 흘러 밝혀져요. 그러니 우리 김성환(사위)이가 말하는 거야. “어머니, 다 때가 있나 봐요. 할머니가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되는 것은 안 되고 되는 것은 되고” 하는 기라.
남원에 대신사님 글 지은 자리를 찾을 때도 시에 가니 아무도 등록이 안 되어 있더라고요. 그때 성주현이가 같이 다녔는데, 교령님께 우리가 등록을 먼저 해야 된다고 건의하니 시에서 해주니까 걱정 말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세 번째 가니 불교가 고마 등록을 해삐는 기라.
처음에는 땅은 남원시 땅이니 문제가 없더라고. 건물은 내가 해 준다 카니까 좋다 카고. 다음에 가니 교령님하고 한번 만났으면 하기에 다음에 교령님을 모셔오겠다 하고 부시장을 만났지요. 그때 남원이 시가 된 거라. 부시장이 교령과 시장이 만났으면 하더라고요. 담당자는 이 어른이 고통 받은 곳이란 걸 알더라고요. 어른 행적이 울산에도 있고 양산이랑 남원에도 있어서 쉽다 싶었는데 세 번째 가니 고마 불교로 등록이 됐더라고요. 합의를 해서 들어오라고 해요. 등록한 사람이 서초동 절에 있는 사람이라 카는 기라요. 성주현하고 박도현이라는 건축 공부한 젊은이랑 같이 가 보았어요. 집터가 조그만 한 게 있더라고요.
그 다음에 가니, 남원 은적암 터에 대밭도 다 치우고 탑도 세우고 축대도 세우고 장석도 놓고 올라가는 길도 닦아 놓았더라고요. 결국 목수를 데리고 갔어요. 그런데 거기 물이 없더라고요. 일곱 번 다녔는데 자꾸 일이 어긋나서 그만 두었어요. 크게는 못해도 조그만 한 집을 세울라 했는데 시청에서 일이 잘 안 됐어요. 속이 상해서 병이 났어요.
울산 여시바윗골은 몇 년이 걸렸는데도 땅을 사니 되더라고요. 90년도 어느 저녁에 우연히 텔레비전을 보는데 아나운서가 갈대밭에서 취재를 하더라고. 근데 그 동네 노인이 나와 그 곳이 최복술(수운선생님 젊었을 때 별명)이가 공부한 자리라고 하는 기라. 그때까지 울산 살았다는 것만 알았지 자리는 몰랐거든. 그 노인이 작대기를 헤치니 감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여기는 그분이 살던 곳이라 하고 저기는 공부한 자리라면서 보여 주더라고요. 그 방송을 내가 우연히 본 거야. 이튿날 당장 거길 갔지요. 근데 거기가 갈대밭이라 두 번을 찾아갔어도 모르겠어. 그래서 용담 수도원장에게 여시바윗골이 어디냐고 하니 대신사님 공부한 자리라 하더라고.
그 이튿날 물어물어 동네입구에 사는 83살 먹은 할머니한테 들으니 최복술이가 산 곳은 저 안이라 카는 기라. 그때 해가 저물어 다시 집에 돌아와서 둘째아들하고 다시 갔지. 봄 되고 가을 되고 하면 어떤 교회에서 오는지 많이 오고 감나무에 줄을 쳐 놓고 제사지내고 간다고 하더라고. 가니까 줄을 허옇게 쳐 놓았어. 그래서 내가 확 떼 버렸지. 그리고 감남구(감나무)에 참배하고 나니, 뒤에 담벼락이 있고 터가 남았더라고. 집주인을 찾아야 하는데 못 찾아. 수도원장(김근오)에게 말했지.
그리고 총부에 올라와서 자초지정을 말했어요. 젊었을 때부터 우리 역사를 하는 표영삼 선생님한테 가서 말했죠. “알면서 지금까지 왜 가만있었냐?”고 하니 그 골짜기에 표지석 하나 세우면 되는데 총부에서 말을 안 들어 준다고 하는 기라.
봄에 용담교구에서 적멸굴에 간다고 갔지요. 오다가 울산 여시바윗골에 들리자고 했어요. 가기 전날에 비가 억수로 내리더니 가는 날도 비가 내려요. 수도원장이 차를 대절했기 때문에 꼭 가야 된대요. 웬걸 시내 들어가는데 집장같이 퍼붓는 거라요. 그래서 수도원장에게 울산부터 가자고 해서 갔어요.
그렇게 울산에 갔는데 날이 너무 좋아요. 현장에 가니 해가 나요. 그 집터에서 청수 모셨죠. 내려오는데 갑자기 소변을 보고 싶어서 갔다 오니 사람들이 다 가버린 거라요. 내려오니 노인이 우산 들고 딱 서 있는 기라. 그래서 내가 “보소, 이 동네 이장 집이 오데 있어요?” 이장 집이 뒤에 이층이라 카데요. “혹시 산 임제(임자)가 누구인줄 알아요?” 물으니 “예, 내가 산보는 임제입니다” 하는 기라. 산 임제는 부산 국제시장 원단장사더라고. 그래서 명함하나 달라고 해서 받았지요. 이장 집에 가니 이장은 없고 노인 세분이 최복술이 말을 하는 기라. “옛날 최복술이 참 고생 많았지요” 하며 이야기를 하는데 “산임제는 구두쇠라 손톱도 안 들어 갈 끼라” 하는 기라요.
이원벽씨 차로 부산 국제시장에 같이 갔지. 진짜 아무리 사정해도 손톱이 안 들어가는 기라. 그곳에 산소를 쓰고 난 뒤로 자손들이 그렇게 잘 된다 카는 기라. 자손도 없는데 양자가 들어가서 그 묘를 관리하나 봐요. 그래서 그 집안에 나이 많은 사람들을 찾아 댕기며 사정을 했지. 그 사람이 종손이기에 우리가 어쩔 수가 없다 카는 기라. 아무리 사정을 해도 안 되는 기라.
이장을 찾아 세밀하게 알아서 하자고 해서 찾아가니 늙은이더라고. 구 이장 집에 가면 잘 안다고 거기 가래요. 구 이장 집 할머니가 82살인데 다 알아요. 최복술이 그 할머니(박 씨 부인)가 고생 많이 하고 부도나고 갔다고 말해요. 그래서 땅 질문을 했지. 그 묘 땅이 없어도 그 근처 땅이 있으면 되니까 그 골짜기 근처 땅이 없냐니까. 있대요. 마침 그 할머니 땅도 그 묘 앞에 88평이 있다 카는 기라. 다른 사람 땅도 있고. 그 감나무는 생전 안 죽고 있는데 누가 와서 기도하고 간대요. 그 웅당 있는 곳에서 미나리 깡하면서 묵고 살더라고. 그래서 땅 파라고 했더니 아직 아버지 돌아가신지 3년도 안되고 아직 아버지 것이라서 형제들끼리 의논해야 된다면서 곤란하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거기 까지만 이야기하고 왔지.
88평이면 비하나만 세우면 되겠다 싶더라고. 표영삼 선생님도 된다 카더라고요. 총부에 전화해서 “땅이 이렇고 이러니까 표영삼 씨가 작은 비석 하나 세우면 된다고 하니 땅을 삽시다” 하니 총부는 돈이 없고 못 하니 땅 사지 말라고 하더라고. 내가 눈물이 나오더라고요. 그리고 도정(최해발) 보고 울산같이 가서 땅 물어보러 가자고 했죠. 다시 가니 할마니는 없고 아들며느리는 팔 생각이 있는데 어머니 허락을 받아야 한대요.
어머니 오시면 물어보고 판다고 하는데 내가 조갑증이 나는 기라. 다른 사람이 사 갈까봐. 할마이한테 전화하라 하니, 88평이니까 880만원 딱 달라 카는 기라. 십 원도 빼지 말고. 금값이야. 그래도 내가 가만 생각하니 꼭 사야겠더라고. 우리 어른을 생각하니 얼마나 이곳에서 고생을 했는가 싶어서 마 자꾸 눈물이 나는 기라. 그래서 산다고 했지. 총부에는 안산다고 하지. 돈은 없지. 원성을 했지. 700만 원 준다고 하는데도 안 된다고 해서 750만원 주고 계약을 하려고 하는데 울산에 교인 한 분이 오더니만 도면을 보더니 길까지 사야 된다고 하는 기라. 그라몬 합하니 돈이 천 얼마가 넘어. 그래서 도정(최해발)에게 얼마 있냐고 하니 10만원 있고, 또 이원벽이는 15만원 있고, 나는 15만원 있고, 다 합하니 40만원밖에 안돼요. 아이구야, 지금 계약금이 몇 십 만원 밖에 없는데 당장이라도 묘 임자가 돈 많이 준다면 촌사람들이 오늘밤에라도 그쪽으로 팔아버릴까 걱정인 거라요.
그래서 전화를 했어요. 작은사위 큰사위 동업으로 사업을 하거든요. 이야기를 하니 작은 사위가 “어머니가 쓴다면 보내줄게요” 하면서 30분 만에 300만 원 보내주는 기라. 그래서 계약서를 쓴 기라요. 1330만원이 든 기라. 길을 넣어야 하니 길은 6만원치고 웅덩이 들어가는 길이라 계약하고. 근데 그 집에서 밥을 먹고 오는데 가만 생각하니 ‘이게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드는 기라.
오면서 도정보고 설계사무소 가자고 했지. 가보니까 밑에 큰 땅만 해당되고 산 땅은 해당이 안 되는 기라. 해는 다 돼 가는데 땅임자에게 전화를 해서 “좀 봐 주소” 하니, 이 어른(대신사) 하는 일에는 잡소리를 못한다면서 그렇게 준다고 하더라고. 다시 계약서를 썼지. 8백만 원만 하면 되는데 천 얼마들일 필요가 없지요. 88평만 사왔지요. 그 사람도 그냥 드려도 드려야 될 땅인데 하면서 돌려주더라고요.
좋아서 총부에 계약서를 가져왔는데 또 못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잔고 치르고 돌도 최고급으로 샀어요. 허가가 안 나서 2년 있다가 했는 거라요. 비석을 세워 시에 기증한다고 하니 허가를 내어 주어요. 아마도 대신사님이 시키는 것이겠지요.
시에 담당자가 알려 주는데 이것을 문화재 신청을 하면 돈이 나오고 덜 든다고 하대요. 그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좋아서 밤에 잠이 오더라고요. 그리고 뒷날 시에서 현장 답사를 나온다고 해서 총부에 갔어요. 교령이 50평을 해주더라고요. 시에 문화재 직원이 더 크게 하래요. 골짜기 다해도 되는데 다 하래요. 천 평 정도 되더라고. 그 이듬해 2천만 원 나왔어요. 다 됐는데 신문에 도청 앞으로 고발이 나온 거라요. 그 자리가 가짜라고 하는 사람이 나타난 거예요. 총부에서 도장 받고 대학교수에게도 도장 받은 서류도 가지고 온 거예요.
그래서 오익제 전 교령을 찾아 가서 도장 준적이 있는가 물으니 “도움을 준다고 해서 도장을 준적은 있지만 대신사님 일로 도장을 준적은 없다”고 했어요. 그리고 도장을 찍어 준 대학교수를 찾아가서 물어 보니 “이 일을 할라몬 내가 현장에 직접 가서 확인을 해 승락이 있어야 된다”는 기라요.
그래서 방학 때 교수를 비행기 태우고, 차 대기해서 사또 모시듯이 모셔 갔지요. 보통일이 아니더라고요. 그 교수가 딱 가더니, “이곳이 용담 제 2궁을마을”이라 카는 기라요. 교화관장하고 교령하고 교수하고 같이 있었지요. 교화관장이 마음이 좋아가지고 일이 되더라고. 접수해서 허가가 완전히 나고 문화재청에서 돈 4천만 원 나오고 그때부터 총부에서 서둘러서 일이 된 거라요. 종무원장 박남수 씨가 있고 백호진이가 하면서 되더라고. 1천 평에서 조금 빠져요. 그 이듬해 문화재청에서 1억이 나오더라꼬. 그러니 총부에서 비각을 한다고 카는 기라. 비각 세우는 것은 내 돈 4800만원 들여서 했어요. 땅도 내가 샀어요. 총부에 이야기하니까 800만원을 주더라고요. 제막식 할 때 내 이름으로 4000만원을 발표를 하더라고요. 그러나 오고가고 경비랑 그밖에 일들을 합하면 4800만원 보다 더 많이 들었습니다. 하고 보니 기둥이 낮아서 2007년에 비각을 다시 올렸습니다. 내 돈 6000만원 들여서 다시 올렸어요.
그러나 나는 대신사 처갓집 논 육 도랑을 찾을 생각이라, 시청에 가서 말하니 논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 문화재 해제를 해 놓았다면서 집을 못 짓는다고 하는 기라. 총부에서 풀어 놓았다고 해요. 해제하면 일반 땅이 되거든요. 문화재가 연말에 12월28일 회의 때 결정되더라고요. 지금 논 육 도랑이 문내가 아니라 이것이 문제라는 거라요. 사정사정 하니 그라몬 논은 시청에서 어쩔 수 없지만, 산은 풀어주지 않도록 시청 담당직원이 노력한다고 해요. 논은 묘가 있는 땅이거든요. 최성환(대신사 8대손)이와 내가 몇날 며칠을 뛰어 다녔어요.
그때 서류하느라꼬 성주현이 고생 참 많았어요. 시청에서 전화가 왔는데 “논은 안 되고 땅을 풀지 못하도록 사적지로 묶었습니다. 이제 나를 절대로 찾아오지 마세요! 총부에서 해놓은 일이라서요” 하는 기라요. 사적지가 되면 땅임자가 자기 땅이라도 자기 맘대로 못해요. 관에서 풀어줘야 돼요. 총부에서 문화재를 풀어줬으니 내가 고함지르고 안 다니겠어요. 묘 있는 땅이 90평정도 돼요. 그래서 집터를 제대로 못 세우고 마당에 집을 세웠어요. 그러니 마당이 없지요. 총부에서 그걸 풀어 줬으니 내가 원통하지요. 내가 겨우 사적지로 만들었어요. 문화재로 하면 다 우리 땅이 되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다 됐을 거라요. 총부에 재단에 울고불고 다녔어요. 그나마 사적지가 되어서 다행이라요. 지금이라도 총부에서 문화재 신청하면 되는데 그러고 있어요.
내가 울산에서 공사할 때 참 무심치 않더라고요. 내가 한번은 인부들에게 점심을 사주고 계산을 하려고 하는데, 분명히 지갑을 주머니에 넣고 왔는데 지갑이 없어진 거라요. 순간, 아차!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어요. ‘우리 할배(대신사)가 이곳에서 부도내고 빚지고 나왔는데, 그 사람 빚 갚으려고 지갑이 없어졌구나’하는 생각이 드는 거라요. 그 말을 도정에게 하니 도정이 어떻게 그런 생각이 났냐고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더군요. 제막식 할 때 조상이 빚지고 나온 자리라 내가 마음이 아파서 동네에 술하고 떡을 보냈어요. 그때 용담교구에서 떡 2가마니를 하고 내가 술을 샀어요. 울산 일을 하면서 우리 용담교구가 수고가 많았어요. 우리 도정(최해발)하고 우리 용담지부장 남편 이원벽이 고생 많았지요. 항상 같이 다니면서 이 일을 진행했어요.
근암공 세 함자를 세워주면 대신사 원이 풀릴 것 같아서 내가 이 일을 시작했어요. 용담에 토석비 세우던 날 밤에 용담에 갔는데, 꿈인지 생시인지 대신사님 초상은 없고 용담정 문이 환히 열려 있는데 그 비 앞에 누가 넙죽 엎드려 있어요. 깜짝 놀라 보니 꿈이야. 내가 생각하기를 이 어른이 아버지 앞에 고백하러 내려 왔나 싶었어요. 묘소 비도 세워 드렸고 동상도 하고 나무도 사다 심고 길도 포장하는 정성 드렸어요.
근암공 시제를 올리는 데 눈물이 그렇게 나더라고요. 2월에 근암공이 돌아 가셨는데, 전각이 없으니 근암공 제자들이 대대로 일 년에 한번 친정 큰집에 제를 모셨어요. 그래서 내가 나서서 “이 어른(근암공)을 이곳에 모시는 게 아니다” 하니, 육촌 오빠가 “전각이 있어야 모시지” 하는 기라요. 그래서 “전각이 문내가 아니다. 용담에 올라가야 한다”고 했어요.
우리 올케가 93살에 돌아 가셨는데 우리 종조부가 말씀하시기를 “종부야, 콩나물 한 시루를 무쳐 안주로 놓더라도 이 어른은 지키고 나가거라. 이날을 잘 지켜라. 그러면 언젠가 용담으로 올라가실 거다. 그때까지 손부가 이 회원들을 꼭 참여시켜서 모시라”고 말씀하셨대요. 이 말을 들은 때가 내가 9살 때쯤이라요. 그 말이 내 마음에 남는 거라요. 우리 차자(후손)들은 그걸 몰라요. 회원도 젊은 회원으로 바뀌었지요. 자꾸 옛날 것은 없어지지요. 이 말을 하니 회원 몇 분들이 용담에 올라가는 게 당연하다고 해요. 종법사님께 여쭈니 마찬가지로 당연하다고 해요. 오익제 교령 때라요. 그때 화환을 보내 주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아직 화환 받을 때가 아닙니다. 지금 숙소실에서 지내는데 우찌 화환을 받겠습니까?”하니 돈 5만원을 보내주더라고요.
그래서 일 년에 한 번씩 숙소실에서 하는데 한이 많아요. 근암공 이름이 없고 자리가 없는 거라요. 그 밑에 근암공 한자 붙었으니 괜찮다고 하지만 우리가 볼 때 그것이 아니거든요. 대신사님 입장에서는 아버지 좋은 자리를 차지하는 게 죄책이거든요. 내가 자꾸 그런 마음이 들어서 올해는 내가 진성관, 포덕관을 짓기 시작했어요.
김동환 교령이 처음 취임할 때 많은 사람들이랑 용담에 왔어요. 교령이 “다 반대하는데 어찌 하겠는가?” 하더라고요. 그래도 “마음을 내어서 하겠다”고 했어요. 천운이 들었는지 되더라고요. 사위한테 내 생각을 애기했어요. 우리 근암공 회원들 모이는데 하나 하고, 식당하나 하고 하면 되겠다고 했죠. 전각을 세우려면 벌써 다른데 세웠어요. 그렇지만 우리 근암공 자리는 여기인 거라요. 내가 세우면 이 용담은 아버지 자리, 아들자리가 되니깐에 좋은 거라요.
우리 사위에게 말하니 뒷받침 해준다면서 어머니 생각대로 하라고 해요. 내가 김동환 교령 취임할 때 이 자리를 보여주었는데, 그때보다 재료값이 올라서 1억 정도 더 들었어요. 전에 할 때는 자리가 없어서 2층으로 하려고 했는데 우리 종손이 식당 자리에 2층으로 하면 안 된다고 해요. 어른을 그렇게 모시면 안 된대요. 교령 취임 때 생각하니 ‘여기를 닦으면 작게라도 할 수 있겠다. 그 어른 몫이라도 하면 되지’라는 생각했어요.
총부에 들어가니 대책을 내 놓으라고 해요. 그래서 가설계를 해갔지요. 허가 내려고 하니 일도 많고 재단에서 나를 보자고 해요. “성금을 하면 되지. 왜 집을 지으려고 하느냐?”고 해요. “그건 걱정 말아라 내 손으로 지어드려야 될 상황이다. 내 손으로 하고 싶다. 성금할 상황이 아니다. 내 손으로 여물게 할 테니 걱정 말라”고 했어요. 울산 일이고 여러 가지 일을 볼 때 내 돈을 들여서, 내 손으로 하고 싶었어요. 터도 잘되고 집도 잘되고 날도 잘되고, 교령도 욕보고 총부 다 욕 많이 봅니다. 이 건물(포덕관)은 근암공 전각과 마찬가지입니다. 총부에 일 년에 한 번씩 회원들 모여서 제를 지낸다고 했어요. 근암공 이름을 못 넣게 하더라고요. 내가 이것을 한 것은 대신사님 원 풀어 주려고, 아버지 자리 만들어 주려고 한 것이라요. 근암공 조상 모시는 것은 우리 큰집에서 하고 있어요. 집도 좋아요.
이 건물(포덕관, 진성관)은 단지 대신사님의 마음을 대신해서 지은 거라요. 대신사님의 원을 내가 대신해서 풀어 드린다는 생각으로 한 거라요. 영혼이 이름이 있지 집이 있겠어요. 우리 근암공 회원들이 백 년 이상 남아 있는 게 얼마나 대단해요. 근암공 밑에서 공부하시던 제자분이 그 당시 임진년에 150 여명이에요. 근암공이 돌아가시고 150여 명의 제자들이 일 년에 두 번씩 2월, 9월에 수계를 지냈어요. 지금은 음력 2월 10일에 한 번씩 연중행사로 수계를 지냅니다. 지금 회원 50명이 있어요. 근암공 전각(용담정)에서 지내는 게 원칙인데 이제 이곳 용담정 포덕관에서 지낼 수 있게 돼 내 마음이 가볍습니다.
이렇게 하게 된 것도 한울님이 받아주시니 되는 거지요. 해놓고 생각하니 꿈인가 생시인가 싶어요. 돌 하나를 해도 진심으로 했어요. 우리 사위가 돈 많이 들여서 해준 것도 너무 감사하고 대단해요. 이 어른(대신사)이 다 대 주더라고요. 대신사님은 일을 하면 도와 줘요. 울산 일도 딱딱 맞게 진행되기에 이것은 꼭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이래저래 마음고생을 많이 했어요. 비가 올라가니 눈물이 막 나오더라고요. 나는 이 어른 말만 하면 눈물만 나와요. 내가 조상을 위해서 한 게 아니라요. 대신사님을 위해서 한 거라요. 근암공은 위에서부터 역사가 있잖아요. 이 어른도 이 자식 낳고 한이 많을 거예요. 내가 용담에 가면 눈물이 나요. “할배요, 이제 할배 곁에 아버지를 모시고 계세요. 근암공 아버지 집도 내가 짓습니다. 이제 아버지에 대한 원을 푸세요. 뒤에 남은 일은 또 우리가 할 수 있습니다. 이제 교회 잘 되어서 포덕 잘되면 그 이상에 행복 없습니다”라며 울며 말합니다.
이 용담 골짜기에는 최씨 후손들의 한과 설움도 많습니다. 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포덕관에 근암공 이름 석 자를 담긴 문판 액자 하나 걸어 주는 거예요. 이 모든 것은 한울님이 나를 통해서 시킨 거지요. 그리고 자식들이 힘을 안주면 일을 못하는데 우리 애들에게 고마워요. 이 집 지을 때도 재료가 모자라지 않고 풍족했어요. 이제 모두가 다 잘 될 거예요.
(구술일: 포덕 150(2009)년 2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