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상 22:41~53)
'여호사밧이 그의 아버지 아사의 모든 길로 행하여
돌이키지 아니하고 여호와 앞에서 정직히 행하였으나
산당은 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아직도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43절)
변명이 아니라 사람은 실제 허점 투성이다. 죄악되다.
그렇지 않았다면
완벽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분투'라는 말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헛점 투성이지만,
헛점 투성이라 인생을 살아가면서
순백함을 유지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역이용해서 나의 죄악된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때때로 의도치 않게 잠시 죄악된 행동을 하거나
그것을 또 반복한다고 해도
그것이 습성화 되지 않도록 한다거나,
그런 죄악 때문에 헤어나올 수 없는 낙망에 빠지는
역설적 교만에 들어가지 않고
나의 부족함을 인식하면서,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행동.
그것이 '분투'이다.
지금 실존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할 수 있는
'최상'의 선택이 '분투'가 아닐까 싶다.
본문의 말씀으로 추정컨대,
여호사밧은 그의 인생을 하나님을 향하여 분투했다.
모두가 우상을 섬기고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가운데에서
그가 하나님을 쫓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최근에 채 상병 사건은 나의 마음을 낙망하게 만든다.
내가 사랑하는 조직이
순진하고 순전한, 상식적인 사람을 고립(=왕따)시키다니.
채 상병의 대대장인
포7대대장이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그는 부대와 동료들로부터 외면 당했다.
마치 예전의 해군 김영수 선배의 사례를 그대로 보는 듯하다.
나는 해병대만은 그런 조직이 아니길 바랐다.
그것 하나만이 나의 자랑이었다.
가장 비참한 것은 평소에 서로 위안을 주던
동료들이 외면하는 현상이다.
해병대만큼은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동료들은 진실 여부와 상관 없이
생존, 생계를 선택한 것이다.
부하들에게 교육하고 강조하던 모든 것이
거짓으로 들통나는 비참한 순간이다.
이처럼 집단 의식과 관성은 무서운 것인데,
여호사밧은 다른 길, 소수의 길, 진리를 선택했으니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그런 그도 여러가지 과실로 보이는 행적을 보였다.
악한 아합과 평화롭게 지내기 위해 동맹을 결성해서
전쟁에 참여했고
아들과 아합의 딸을 결혼시켜 우상을 유입했으며
후에 다윗의 왕조를 몰살시키는 일에 일말의 책임이 있다는 점 등.
그런 일들을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그는 그 죄악을 인식하였고 괴로워했을 것이며
회개하였을 것이다. 최소한 그의 중심은 그러한 죄악을
정당화하거나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연약한 사람이기에 죄를 피해갈 수는 없지만
마음의 중심이 어디로 향하는가
범죄한 후에 그 죄를 다스리는 행위가 중요한 것 같다.
아무리 신앙의 인물로 사람들에게 인정받는다 하더라도
죄악이 후, 그것을 정당화하거나 은닉하여
해결받지 않는다면, 그것 때문에 나락에 빠질 수 있다.
아무튼 여호사밧은 현실의 과실, 죄악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 안으로 향하기 위해
'분투'한 사람이다.
나에게는 이미 많은 죄악이 있고
지금도 해결되지 않은 죄악도 있다.
가슴을 뜯고 회개해야 할 일이다. T.T
그럼에도 이 일을 정당화 하거나
반대로 이 일 때문에 극한의 절망으로 빠져들지 않기를 주의한다.
죄의 대가를 받으리라 생각하고
죄로 인해 피해받은 사람이 있다면 용서를 구하여야 한다.
그리고 다시 괘도 수정을 해서
하나님 쪽으로 방향을 맞추어야 한다.
그것이 현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이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제가 진정으로 분투의 삶을 살게 해 주십시오.
정신적인 충격을 받은 포7대대장을 보살펴 주옵소서.
양정환, 그를 주님께서 지켜 주옵소서.
어떤 상황에서도 평안을 유지시켜 주옵소서.
바라옵건대, 완전 치유의 기적을 베푸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