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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백작06:06
좋은 지작 감사합니다.
한번 보실래요.
이것이 성마령에 정선군이 세운 詩碑입니다.
저는 평창아리랑 미 발표분 기록에 차곡차곡 준비하여 두었었습니다.
한 문화가 살자고 뻔뻔해도 그지 없습니다.
이렇게까지 자연 발생적 문화를 거짓말로 왜곡해서야..
본인은 책이 만치는 않는데 김연갑의 "정선아리랑을 찾아서" "' 정선아리랑의 시원설등"" 3만냥짜리 책 3권을 샀다.
무엇을 배우고 알고자 함에 산 책은 아니다. 남이 거짓말 하는줄 알면서 무엇을 어떻게 거짓말 하는가 알아보기위해
내용도 보잘것 없는 책을 샀다면 그건 나로서는 참 슬픈일이다.
위 시비에서 보면 정선 아리랑은 성마령(일명 비행기 재)를 넘나드는 행인들의 입에 의해 평창은 물론 전국각지로
퍼져 나갔다고 詩碑를 세우고 있다.
물론 한, 두줄의 가사는 넘어 왔겠지만 정선 아리랑이 모든 아리랑의 시원으로 정선에서 평창으로해서 서울로, 또한
태백으로해서 부산까지 퍼져나갔다는 홍 교장선생의 학습 보도자료와 같은 맥락의 이야기를 하고있다.
교육청에 근무하던 나의 친구 한 사람은 아리랑은 정선서 비롯되었다고 하던데, 일반인의 상식선에서 그 보도자료만
보고 바로 믿는 바 홍교장은 바로 이런 꼼수를 노린것은 아닐까??
정선서 자라나는 아이들은 교육청의 이 학습 보도자료를 공부하며 사회의 균형속에서 김일성식 잘못된 세뇌속에
잘못된 외골수 김일성식 주장으로 그들은 어찌 큰 그릇이 될 수 있슬까 하는 의문으로 귀결된다다.
그러기에 학문은 모름지기 정도로 가야하며 또한 이러한 부당한 정서를 함양함에 파생의 문제는 어떤것일까 하는
사색의 철학도 없는 홍 교장 선생 이하 이를 추종하는 정선 사람들은 당연히 앞으로 이 문제의 괴리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김연갑의 "정선 아리랑을 찾아서"라는 책에서 김연갑은 연규한 전 부군수에게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라는 아라리 가사를( 태백의 영서 평창, 영월, 정선 사람들은 아리랑을 아라리라고도 부른다)
이야기하며 이 보다 더 오래된 가사는 없지요 하고 묻는다.
(여기서 만수산이란 단어에 의해 고려 왕에게 안부를 묻는다는 뜻으로,,,)
연규한씨가 답이 없자 김연갑은 그럼 이 가사가 최고(最古)의 상한대 가사이겠네요 (600년 이전 이조 초기를 말함)
라고 적고있다. 그럼 김연갑은 여기서 연규한씨를 神으로 생각한 모양인가??
최소한 하나의 학문이 정의되자면 학자적 질의로 심포지엄이나 학계의 검증을 거쳐야 하는데 김연갑은 다음책
"아리랑의 시원을 찾아서"라는 책에서 이 가사를 시원으로 단정하고 책의 분량 반권을 허비하는데...
고려말의 이색은 전오륜의 외숙으로서 오대산에 칩거하며 몇 마디에 그 이야기가 전부인 시를 가지고 억지로 아리랑의
시원인듯 풀이하고 있다. 이는 즉 그 시를 둔갑해서 풀이하고있다.
이론의 정립은 학게의 검토가 필요한 사항일텐데..자기의 제안이 학계의 검증도 없이 후일 자기가 다시 인용하며 "지난번
제가 어디서 발표한 이론에서는~~" 이라고 다음 책에서 말하면.그 발표내용이 이론으로 둔갑된다.
이것이 지난 모든 아리랑의 시원설이나 이론이라고 떠드는 검증하나 없는 아리랑 제 논리들이다.
하지만, 누구든 아리랑은 민초들의 삶의 고통의 한 풀이란 점에 공감하고 있다.여기서 한(恨)풀이는 원한도
아니고 맺힌 恨도 아니며 그것은 삶의 절규가 해학적으로 승화된 단어의 웃음을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정서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恨이다.
이 恨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은 아리랑이란 것이다.
이것이 본인이 주장하는 아리랑으로 아리랑의 시원설은 수만가지를 넘어 오만가지이지만 그 모든 논리는 아리랑의
부분집합일뿐 아리랑 전체를 포괄하지 못하기에 즉 역의 치환에는 모순이 걸리는 시원설이나 이론들,,, 이들은 모두
아리랑의 하나의 시대적, 공간적인 지류의 설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리랑의 시원설에 김연갑은 염가설까지 주창하니만 그것엔 본의의 견해로는 동의하지를 못한다. 이 내용은 다음장으로
미루고 우선 본인은 이러한 시원설은 주창하지를 못한다. 그것은 아리랑이란 우리 민족 태고 이후의 발음과 음율이
발전했기에 이를 따지기엔 역사적으로 무리라는 뜻이며, 어는 설에는 아리랑이란 르완다 언어에 기원을 주는 이야기도
있지만 아뭏튼 본인은 태고 이후 우리민족의 음율적 언어라는 점이란 생각이다.
그러기에 그 시원설 모두 민족 태동이후 국지적 논리라는 점이며 이로서 시원설은 그다지 중요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또한 아리랑의 뜻과 의미의 연구들인데 이는 시원설과 동반되는 이해로 이 뜻이 무엇이든 민족 삶의 질곡한 恨이
묻어나는 감정의 결정체로 이 가락과 가사의 의미는 슬픈 곡조가 아니라 이를 순환하고 여과하고 차원을 높어 웃음의
해학속에 자아가 녹아난 긍적적인 모습으로 전환하였다는데 그 의미가 높은 것이다.
여기에 본인이 제시하는 아리랑의 규격화의 논지는 일반적인 이야기에서 아리랑은 민요이다.
민요는 민중들의 노랫가락이며 양반들이나 사대부들은 질 높은 창가나 경기체가, 판소리등이 있지만 하층부의
화전민이나 민초들은 남을 사모하고 남에게 이야기하는 형식이 아닌 스스로의 자신을 위한 가사에 자기만의 가락을
가지는 것이다.
* 여기서 민중이란 단어는 그 속말로 민초라 하지만 단어의 의미상 민중이라 규정하며 이 민중은 요즘 좌향적 단어와는
다른 정치외 소외되어있는 본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정치 형태에 따라 따라가야 하는 하층 구조를 지칭하는 것이다.
민요란 가창자가 청자(聽者)가 되는 노랫소리 즉 자기 흥에 부르며 스스로 듣는것이다. 이를 다시 이야기하면
아리랑은 일인칭 단수의 노랫말이란 점이다.
가령 이곳 평창와 영월 정선의 아라리가사가 서사적 가사였다면 그것에 가장 많은 노랫말은 단종의 애사였슬
것이란 점은 무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영서 아라리엔 그런 단종의 비애에 대한 가사는 단 한줄도 없는
정확한 룰에 기조를 지키며 자신의 이야기의 가사와 그 서정성을 담고 있다.
아리랑 전체가 그러한 의미를 담고있지만 최소한 영서의 메나리조 산의 아라리는 육자베기조 진도아리랑처럼
정형의 가사 노랫말이 제한된것이 아니기에 언제 어디서나 남을 위해 부르는게 아니라 자신의 일상에서, 영서의
산속의 노동인 김메고 나물 뜯을때 여럿이 아닌 저만큼 떨어져 혼자 일하며 혼자 부르는 즉, 일의 템포를 맞추는
기능을 가지면서도 요즘처럼 mp3도 없는 시대의 무료함을 달래려 혼자 흥얼거리며 부르는 독백조의 아리랑이란
점이다.
이러한 산의 아라리의 반대는 들의 아리랑이란 모심을때 손발을 맞추고 흥을 돋구는 기능이 노랫소리등의
정자소리조 밀양아리랑에서 엿볼 수 있다.
이제 위에서 예시한 가사인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라는 아라리 가사는
고려 임금에 대한 안녕을 기원하는 내용의 정선 아라리의 시원을 보는 해석이 아니라 본인은 견해로는 이 가사는
봄철 청옥산에 올라 나물뜯을때 해발 1,200m고원이라 검은 구름 막 모여드는데 눈이될지 비가될지 애틋한 심정을
노래한 것이다라고 아래의 링크에서 주장하고 있다.
http://blog.daum.net/kkks1/835 ["만수산"이란 가사의 아리랑(아라리)에 대한 나의 분석이해]
본인은 위 글에서 만수산~~이라는 아라리의 역사적, 시대사적, 정치적, 문화사적인 다방향의 이해를 그리고 있는데
아라리는 이렇게 민초들의 민요로서 자기한계와 자신에게 이야기 하는 철저한 룰을 지켜 이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면 여기서 만수산 아라리의 가사를 다시한번 분석해 보자.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라는 가사의 문법적 관계를 따져보면 "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라는 대목의 주체는 목적격이 아닌 주격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그것은 왜냐면 여기(정선)에서 개경에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드는지 개경에 갑작스런 폭우를 어떻게 알고 그를 염원했던가??
이렇게 이해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부적합하다.
그러기에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라는 소절에 주체는 본인 자신에게로 귀결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 옛날 전오륜등이 이곳을 거쳐 정선으로 갈때에 나물뜯어 연명했다는 아스런한 전설같은 옛 이야기에
주인공들처럼 눈이 오는 청옥산에 변화에서 나물뜯으며 변덕스런 기후에 고생을 하는데 심리적 과반사로 옛날
이곳을 지니간 선비들 전오륜등의 고생과 같지 않았슬까 생각해보는 이해이다.
물론 전오륜등 죽림칠현이라 하지만 이에 대한 본인의 이해는 회의적이다.
그들은 요즘처럼 교통수단을 이용해 몇 일만에 그들이 가장으로 둘러대는 정선 두문동으로 갔슬까??
조선 혁명시기에 반기를 들며 그들이 임금님을 노래하며 몰려다닌다면 방원은 그냥 놔두었슬까??
방원은 태종임금으로서 왕자였던 세종을 데리고 강무행사(겨울철 극기훈련)를 하기위해 평창의 진보(진부)에서
방림까지 5일간의 훈련을 두번씩 내려왔었다. 그런데 죽림칠현이라고 뭉쳐다닌다면 그 말이 방원의 귀에 들어가면
방원은 후일을 도모한다고 생각했슬 것이며 세종의 앞길을 위해 가차없이 서슬 퍼렀게 행동했으리라.
개국후 정도전이 이직과 술을 대작하고있는 현장에서 바로 참수하는,,,그에게 이유는 필요없으며 기민한 행동을
하고있는데 당시 죽림칠현들은 그러한 무서움을 느끼지 못했던 짱구들이었슬까??
두문동의 죽림칠현에 대한 역사는 정선에서만 나타나고 그 외의 사료는 없다. 이것도 웃기는 사료로 누구하나 반기를
들은 사람도 없이 정선 아라리의 제 이론은 정말 엿장수 맘대로 해서 이제ㅐ는 저 높은 봉우리에 비석 세우고 30년만
흐르면 정선아라리가 대한민국 아리랑의 총아로 떠 오르길 기대하며 나무도 아닌 돌멩이 하나가 무럭무럭 자라 큰
비석이 되길 바라는 마음인 것이다.
두문동을 어찌 보는가는 다음에 논한다.
기록이 없는 역사를 자기논리로 말해서는 않되는 것이다. 그것은 보편, 타당서의 당위성를 확보하지 못하는 논리로
이러한 기술로 사람들을 기만해서는 않 된다.
그러기에 본인은 김삿갓을 기만하는 아마도 김삿갓이 살았다면 영월에 침 밷지 않았슬까 할 정도로 논리부족한
김삿갓 여행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본인이 속고싶지않기 때문이다.
그렇듯이 본인은 예전에 평창에서 정선을 거쳐 백봉령을 넘어 바다로 간적이 서너번 있지만 정선 아리랑 관광은
헤 본적이 없다. 이 정선관광을 한다면 나는 정선에 속기때문이다.
그러기에 정선사람들도 향토성에 의해 정선아리랑을 바른 논리로 설명했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위에 예시한 "정선 아리랑"이란 책속에서 연규한씨는 다음과 같이 진솔하게 얘기한다.
과거 60년대까지는 정선 아리랑도 평창아라리처럼 후렴이 없다가 후렴이 점점 붙어 나간것으로 지금도 돌림창에서
다음 가창자가 노래 제목을 선정못하면 후렴을 대산하여 시간을 기다려 주지만 빨리 부를때는 후렴이 없이 부르기도
한다고 말하고 있다.
원래 정선 아라리도 평창아라리와 같은 시, 공간성에서 태백 영서의 메나리조 아리랑으로서 기능면으로는 굳이
알랜 로맥스의 이론을 구가하지 않더라도 산의 아라리로 집단적이지 않은 혼자의 일을 하는 일의 템포를 맞추기에
좀 빨라야 하는데 지금 산에서 도회지로 내려간듯 구한말 외부인들의 저촉이 잦아지며 몸빼바지를 버리고 도회지로
간 처녀처럼 정선 아라리는 그 기능면에서 템포가 좀더 느려지고 후렴을 달아서 힘껏 발성하려고 크게 숨을 들이쉴때
템포는 더 느려져 산의 아라리의 공간성을 버리고 이단자로 산의 공간에 남아있는 것이다.
* 알랜 로맥스는 미 하버드및 3개대학 졸업자로 미 국회에서 근무하며 남부 뉴올리안스에서 재즈를 발굴하고
우리가 잘 아는 "해뜨는 집"을 채집하여 당시 유명 가수가 아닌 광부의 딸로 하여금 그 지방의 정취와 목소리의
톤등 모든것이 베어 나오도록 했다.
이에 우리는 재즈버전의 아리랑이 세계에서 극찬을 받았다느니 유명 가수가 평창아리랑을 부른것은 고유의
아리랑이 아닌 재즈버전은 서양읭 음을 다만 아리랑의 리듬으로 햇지. 서양음알 스타일이고 유명가수는 이땅의
삶의 고통의 여운을 갖지 못하는 소리로 이;땅의 전통 아리랑의 문화는 아닌 것이다.
그는 민요를 기능면에서 들의협동의 노동과 산의 혼자의 일을 할때 기응면의 두가지로 구분하였다.
하지만 평창아라리는 지금까지도 옛 전통을 이어 메나리조 아리랑으로 불리고 잇으며 그러한 산의 아라리의 독창적이고
가창자 자신에게 부르는 즉 唱子가 聽자라는 사실에서 후렴은 도퇴되어지고 없어진 것이라 하겠다
그러기에 산의 아라리는 가사를 흥겨운 곡조에 맞추어 지난 자신의 일상의 추억들응 생각하며 자기의 일상을 비추는
또 한줄의 가사가 만들어 홀로 부르며 일의 템포도 맞추지만 일의 무료함을 달래는 생각의 연상 작용이다.
그리고 2부에서는 평창아라리의 후렴은 없다라는 꼬리는 왜 짤라치웠는가 하는 의문에 어느 아리랑 관계자들도
손을 못대는 부분을 이해해 보기로 합니다.
너브산장님에 붙인 댓글을 수정한다는게 댓글에 앞서 본인 목소리에 너무 힘을 주었군요.
그럼 2부에서 댓글로 보는 평창아라리의 꼬리는 왜 짤랐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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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홍대한의 월정사 8각9층 석탑에 이는 송나라 문물의 영향과는 관계 없다는 논문에서...그는 그러면 월정사
이외의 지방에서는 송나라의 문화가 나타나지 않는다는데..
글쎄요 본인의 느낌으로는 홍 교수가 더 클날,,, 송나라 문화영향이 없는 송나라를 조그만 나라로 보시는데,,,
지금 현재도 우리의 전통문화나 생활도구, 생활양식의 모든명에서 명, 당, 청나라 보다도 200년 문화를 꽃피운
송나라 문화영향이 제일크다.
그래서 송나라 책을 다사 한권 보니 우리나라의 책들은 대부분 송나라의 정치에 신법당이니 송나라 왕은 누군지
몰라도 신법당의 왕안석은 아는데 송나라 정치제도가 우리에게, 아니면 인류에세 모델케이스도 아니면서
송나라 경제적인 측면보다는 이러한 글들이 책값의 대부분을 차지들 한다.
그런데 어제 읽은 책은 송의 멸망이 원인은 북방이 쳐내려오자 돈을 주어 협약하있고 이것이 화근이 되어 그나라는
돈도 잘 준다는 소문에,,,요나라 다음으로 서하가 또 여진족의 아골타의 금나라가, 몽고족의 원나라가 쳐들어 오는
어쩜 지금 우리의 현실도 이러한 수순을 닮아가는건 아닌지, 가리반 함 긁어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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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너브산장님의 글에 아래의 답글만 한다는게 오늘 새벽에 너무 길어졌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써야할 글이기에...
후세백작06:06
정선 아리랑엔 김연갑이란 친구가 젋은 시절에 평택에서 찾아들어 엉터리 이론을 제조하지요,
상원사에 이색이 칩거하는데 이는 전오륜의 이모부라 ,,,이색의 詩가 아리랑의 시원으로 매겨지는...참 웃기는
소리입니다.
아리랑은 민초들의 자생적인 민요라는 점을 망각하시듯,,
일을 하면서도 콧노래나, 장작패며,, 김을 맬떼나 초성좋은 아낙이 부른다는 표현보다는 혼자 무료함을 달래려
부르는것으로 변절된 정선아리랑은 초성이 좋아야 하고 숙련을 해야 하지만 원래 산간지방의 아라리는 가창력도
가사도 기준이 없이 혼자중얼거리며 또 하나의 아리랑 가사를 만들 수 있는 것이죠.
후세백작06:17
아리랑은 전통민요로 각 지방의 정체성을 가지나 정선아리랑은 몸빼 바지 걷어차고 도시로 나간 처녀처럼
중화된 아리랑으로 산의 아라리의 젇통성은 전혀 없는 것이다
이에 비해 평창아리랑은 동일한 공간, 동일한 시간에서 지역족 보전이 완벽하여 옛 향토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것이다. 여기서 평창아리랑은 전국 유일하게 후렴의 꼬리가 없는 아리랑입니다.
사람들은 노래에서 후렴이 재미있다고 느끼지만 평창 아라리에선 그 기능성 면에서 후렴이 이탈된 것입니다
후세백작06:26
그것을 다시 설명하면 영서 산간의 혼자하는 농삿일에 혼자 부르는 아리랑은 가락이기 전에 생활의 공간으로
사람들을 대하지 못하는 일상에서 혼자 일을 하며 심심함과 무료함을 달래려, 또한 일의 템포를 맞추려 아리랑을
부르다보면 후렴의 반복성이 지겨워 필요치 않게 되며 또한 후렴을 부르자면 숨을 크게 들이쉴때 일의 템포가
흐트러지는 폐단에 후렴은 필요성의 생리에 의해 도태되어 꼬리가 잘려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메나리조 아리랑의 현상인데 정선 아라리도 원래는 꼬리가 잘려 나갔지만 도회지로 간 처녀가 몸빼바지에
밭에나가 김을 맬리가 없이 그들은 메나리조 산의 아라리의 전통적 창법을 개조하여 꼬리를 달고 있지만 지금도
간혹 후렴이 없이 부르곤 합니다.
그리하여 정선 아리랑의 민초으 노래도 벗어나고 이 지방의 전통적 창법은 걷어차고 도회지로 간 처녀가 돌아와
도시의 언어로 부를제 그 아리랑은 개산조 아리랑 아닙니까?
후세백작06:30
분명 아리랑은 지방의 토속적 정서속의 민초의 노래인데 김연갑은 이색의대 학자까지,,
이러한 부분에서 김연갑은 많이 두들겨 맞아야 정선 아라리는 몬래의 모습으로 돌아올까??
하는등,,
그들은 영서지방의 메나라조 전동 가락을 상실했고 민초, 민중 스스로가 부른것도 아니기에 짝퉁이란
점입니다.
그래서 학자도 아니고 검증도 없는 김연갑의 이론을 개 목거리를 달고 나오는 논리는 민초들의 대변자적 위치를
상실 하였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평창 아라리는 입탄, 들뜬의 농토를 가믐 민초들에 의하여 평창아라리가 불리워지며 또한 한줄의 가사가
새롭게 엮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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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0,14, 17;00
지난 저의 게시글,,,"김삿갓은 죽어서라도 평창엘 다녀갔는가??"라는 영월에서 김삿갓 이야기에 논리적 모순의
이야기들을 그려본바 그 의문의 해답을 오늘 정원대님의 천동답사에서 많은 증언속에 천동에서 도마치 초입에
김삿갓 아들, 익균의 묘와 그 위의 묘는 김병연(깁삿갓) 묘란 점의 증언을 들었다 한다.
예전 저의 블로그에 훈장이란 멘트는 아마 증언자 엣 부면장님이신듯 하다.
일전에 너브산장님의 증언들에 대한이야기에 이제 두세가지만 더 증언을 듣는다면 본안은 천동리에 김삿갓
묘를 확신하며 김익균이 평창이사 후 아버지 시신을 모셔야 했던 기록은 시간표상에서 유추 해석해 놓을 것이다.
지금 와석리의 김삿갓 묘비는 당시 72세의 박영국 영월문화원장이 김삿갓 묘를 학계에서 인정받았는데 어떤
학회인지,,, 남의 묘를 인정해 주는 학회..그보다 이 주제를 토의하던 학계,, 참으로 가소롭지요,,왜냐면 나의
글에서처럼 열개정도의 의문을 하게 되는데 학계는 이에대하여 의문은 하나도 없었다라면 그들은 이성적
판단을 하지 못한것이다.
김삿갓 면은 매매일 잔치기분이지만 정작 김삿갓은 아직도 벌초도 못한 상테에서 홀로 고독을 씹고있다.
이제라도 평창인들은 정확한 고증으로 김삿갓 묘에 잔이라도 한잔 부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여기에 너브산장님의 고증방법 모색과 고증에서 얻은 역사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기에 이에 감사를 표하며
이 부분은 다음 정확한 증언을 토대로 가상의 역사속에 있어야 할 역사까지 유추해석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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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나 갈까요 웃고 갈까요??>
영서 아라리의 최대 보고는 미탄면의 청옥산 입니다
이곳은 600마지기라 불리는 해발 1,200m의 고원으로 육백마지기란 180,000평이란
벌판에 산나물이 지천이라 이를 청옥채라 하여 청옥산이라 불립니다.
아라리 가사에 이곳 청옥산 지명의 가사가 제일 많은 곳으로 보통 한치 뒷산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선에도 한치란 지명이 있는데 그곳은 광업소도 하던 산이라 나물 한포기 나지를 못한답니다.
그러면서도 정선 아라리에 나물뜯기는,,,
왜 힐난하나구요??
너브산장님 말씀이 미탄의 한치뒷산의 한자는 차거울 한(寒)자를 쓰는데 정선 한치의 한자는
땀한(汗)자를 쓴답니다.
에이구~~ 짝퉁을 할려면 제대로나 하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