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와 정년. 두 사람은 모두 섬 출신이었다. 번성한 귀족 집안 출 신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또한 어렸을 때부터 싸움을 잘했다. 그러 나 그 용맹과 씩씩함을 비교하면 정년이 장보고보다 한 수 위였다. 그래도 정년은 장보고를 형이라 불렀다. 나이가 몇 살 위였기 때문 이다. 장보고는 나이로, 정년은 기예(技藝)로 항상 맞서 서로 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우정과 의리는 변함이 없었다. 그들은 신라에서는 출 신 성분 때문에 영달할 길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당나라로 건너갔다. 거기에서는 무예를 인정받아 둘 다 무령군소장(武寧軍小將)이란 직책을 받았다. 말을 타고 창을 쓰는 데 그들을 대적할 자가 없었다.
그러나 중국도 그들에게는 외국에 불과했다. 고국에 대한 향수는 어 쩔 수 없었다. 둘 사이의 관계도 점차 벌어졌다. 출세를 도모하려다 보니 경쟁을 해야 하고, 때로는 서로를 비방하기도 했다. 결국 승자 는 정년이었다. 무예가 장보고보다 위였기 때문이다.
장보고는 드디어 귀국을 결심했다. 중국에서의 경력을 바탕으로 조 국을 위해 조금이라도 봉사해야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신라로 돌아 온 그는 흥덕왕을 찾아뵙고 말했다.
“제가 중국에 있을 때 보니 어디에서나 우리나라 사람을 노비로 삼 고 있었습니다. 바라건대 청해(淸海)에 진(鎭)을 설치하여 해적들이 우리 사람들을 약취(掠取)하여 서쪽으로 가지 못하게 하십시오.”
지금의 완도인 청해는 해로상의 요지였다. 신라의 서울인 경주에서 중국으로 가는 배는 반드시 이 지역을 지나야 했다. 따라서 이 지역 을 통과하는 배를 조사해 중국으로 팔려가는 신라 백성을 구해주겠 다는 것이었다.
왕은 이를 흔쾌히 허락했다. 그리고 장보고에게 군사 1만을 내주었 다. 이로써 일종의 해상검문소인 청해진이 설치됐다. 장보고는 청해 진대사(淸海鎭大使)에 임명됐다. 장보고의 활약으로 해상에서 신라인 들이 노비로 팔려가는 행태는 근절됐다.
그는 중국 진출도 꾀했다. 당시 당나라의 동부 지역에는 신라인들의 집단 거주지가 있었다. 지금 산동성의 등주(登州), 강소성의 초주(楚州)·사주(泗州)·양주(揚州) 등지에 있었던 신라방(新羅坊)이 그것 이다. 이 신라인들을 위해 구당신라소(勾當新羅所)라는 특별 행정기 관이 설치되기도 했다. 여기의 책임자를 압아(押衙)라 했는데 보통 신라인이 임명됐다. 일종의 자치단체였다. 장보고는 등주에 진출하여 법화원(法花院)이란 절을 세웠다. 이곳은 신라인들의 정신적 안식처 요 집회소였다. 또 본국과의 연락기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신라 왕들은 치하를 아끼지 않았다. 일본인들도 당나라에 사신을 파 견하거나 여행할 필요가 있을 때는 장보고에게 부탁했다. 일본의 승 려 엔닌(圓仁)도 당나라에 들어갈 때 치쿠젠(筑前)의 태수로부터 장 보고에게 부탁하는 편지를 받고 떠났다. 장보고는 내·외국인이 공 인하는 해상의 패자가 됐다.
반면 중국에 남아 있던 정년은 타국에서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관직을 얻어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했다. 그러나 타국은 타국이었다. 본토인들의 시기를 받아 직업을 잃게 됐다. 추위 와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그는 사수(泗水)의 연수현(漣水縣)이란 곳에서 입에 풀칠을 하고 있었다.
견디다 못한 그는 어느날 수비하는 장수 빙원규(憑元規)에게 찾아갔 다.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이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 구료. 고국에 돌아가 장보고에게 의탁하려 합니다.” 그러자 빙원규 가 말했다. “여기에서 그대와 장보고의 사이가 어떠했는가. 그가 자 네를 받아줄 것이라 생각하는가. 어찌하여 가서 그 손에 죽으려 하 는가.” 정년이 다시 말했다. “추위와 굶주림에 죽는 것보다는 낫습 니다. 그가 만약 나를 원수로 생각한다면 차라리 싸우다가 흔쾌하게 죽겠습니다. 여기서 죽는 것보다는 고향에서 죽는 것이 훨씬 낫습니 다.” “그대의 뜻이 정 그러하다면 좋도록 하시오. 대신 후회는 마 시오.” “알겠습니다.”
그는 신라로 돌아와 장보고를 찾았다. 장보고가 반가워하며 함께 술 을 마셨다. 그런데 술자리가 끝나기도 전에 희강왕이 자살하고 민애 왕이 즉위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곳에 피난와 있던 김우징이 도 움을 요청했다. 도와주면 장보고의 딸을 태자비로 맞이하겠다는 제 의도 했다. 장보고는 이를 수락했다.
장보고가 군사 5,000명을 정년에게 주며 말했다. “그대가 아니면 이 화란(禍亂)을 평정할 수 없소.” 정년은 흔쾌히 승낙했다. 다 죽은 목숨을 받아준 그에게 무엇이라도 보답해주고 싶었다. 섶을 지고 불 속에 뛰어들라 해도 그러할 마음이 있었다. 그리하여 정년은 민애왕 을 살해하고 김우징을 새로운 왕으로 옹립했다.
신무왕은 장보고를 감의군사(感義軍使)에 봉하고 식읍 2,000호를 하 사했다. 그러나 신무왕은 왕위에 오른 지 4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뒤를 이어 즉위한 문성왕 김경응은 선왕의 약속대로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려 했다. 그러자 신하들이 강력한 반대해 혼사는 이 뤄지지 못했다.
장보고는 괘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칙간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 가 다르다고 하더니 이를 두고 한 말이구나.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 군사를 휘몰아 왕궁을 도륙 내리라.’ 장보고는 다시 군사를 훈련시 키기 시작했다.
조정에서는 난감했다. 치자니 잘못하면 패할 수도 있을 것이요, 내버 려두자니 그 죄를 용서할 수 없었다. 이때 장보고의 부하였던 장군 염장이 말했다. “제가 한 사람의 병졸도 쓰지 않고 궁복을 제거하 고 오겠습니다.”
왕은 기뻐했다. 염장은 청해진으로 다시 갔다. 염장은 “왕에게 불만 이 있다”며 장보고에게 거짓 의탁했다. 궁복은 처음엔 의심하다가 그를 받아들이고 술자리를 마련해 같이 축배를 들었다. 술이 거나하 게 취하자 염장은 궁복이 차고 있던 긴 칼을 빼어 궁복을 베어버렸 다. “궁복은 조정에 반기를 든 역적이므로 내가 베었다. 누구든 나 에게 대항하는 자가 있으면 왕명으로 처단할 것이다.” 군사들은 염 장의 우렁찬 목소리에 부들부들 떨었다. 왕은 궁복을 베고 돌아온 염장에게 큰 상과 아찬의 벼슬을 내렸다. 이로써 흥덕왕 말년부터 시작된 왕위쟁탈전이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장보고가 죽고 난 뒤의 정년의 행적은 아쉽게도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알 길이 없다. 다만 장보고가 제거될 때 운명을 함께 하지 않 았을까 추측할 뿐이다.
장보고와 정년. 두 사람은 의형제나 다름없는 사이였다. 한때의 생존 경쟁으로 불협화음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우정과 의리는 변함이 없었다. 정년이 어려움에 처하자 장보고는 기꺼이 도움을 주 었다. 예전의 감정을 잊고 포용했다. 정년도 은혜에 보답했다. 죽음 을 무릅쓰고 전투에 참가했다. 이렇게 보면 두 라이벌의 인복(人福) 은 극명하게 엇갈린다. 정년은 옛 벗 장보고의 품 안에서 마지막 행 복을 누렸지만 장보고는 부하에게 배반당해 생을 마쳤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큰 복은 뭐니뭐니해도 인복임이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