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이 통치이념이었던 조선 시대에는 화가라는 직업은 누구도 거들떠 보지 않았었다. 중인이라는 신분에 분류되어 있기 했지만 중인 중에서도 가장 낮은 부류로 대우받았다. 조선 초기만 하더라도 '도화원'으로 기관이 분류되었는데 조선 중기로 넘어서면서 '도화서'로 기관의 위상이 낮아지기 시작했다. 따라서 도화서에 소속된 화원들의 처우도 나빠졌다.
정기적인 녹봉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시험 평가에 의해서 받는 녹봉이 달랐다. 그래서 과외로 그림을주문받지 않고서는 먹고 살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화원들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서 지방으로 내려보내 지방관이 화원의 의식주를 책임지도록 하긴 했지만 지방별로 경제적인 수준이 달랐기때문에 모두가 대우를 받으면서 지내지는 못했다고 한다.
우리가 잘 아는 김홍도도 말년에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했을 경우에만 녹봉을 받아 근근히 먹고 살았다고 하니 그들의 지위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화원 중에서는 임금의 어진을 그리는 어진 화사가 되는 것이 가장 큰 영예로 알았다. 어진 화사가 되어 작업에 동참하게 되면 나중에 품계를 받을 수도 있다고 한다. 김홍도도 중인의 신분이었지만 정조 임금의 총애를 받고 지방 현감으로 승진하여 발령받은 적이 있었다.
임금의 그림이나 글씨는 최고의 질을 자랑하는 한지에, 천연물감으로 도색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거의 완전하게 보존되어 내려왔다고 한다. 강화도 외규장각에 보관되었던 의궤들도 임금이 직접 보는 용도로 작업되었기때문에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보관 상태가 우수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도화서의 화원들이 없었다면 궁궐에서 일어났던 행사나 건물, 인물, 작업 등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의 사진사 역할을 했던 이들이 화원들이었기 때문이다.